맨 처음의 날인 오늘(元日)을 신춘(新春)이라 한다.
낯설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의 아침(元旦)이 밝았다.
항상 반가운 손님이 올 때를 맞추어 우는 까치의 설날이 어제였지만
오늘은 우리의 설날이다.
구름을 박차고 비상(飛上)하는 흑룡의 임진년(壬辰年)은 엄밀히 말하면 2012년 1월 23일부터다.
한때 '이중과세'의 명분으로 양력설을 정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민족의 정신문화인 설 명절에 담겨 있는 민중들의 삶의 양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했던 설 풍속이 조금씩 변질되고는 있지만 설날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설날이면 남녀 모두 세장(歲粧 . 설빔)을 차려 입고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歲拜)를 하면 덕담(德談)과 더불어 절값으로 '세뱃돈'을 받았다.
德談은 인성교육(人性敎育)이었고 '세뱃돈'은 金融敎育의 場인 財테크 學習의 사다리였다.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았던 단 몇 푼의 '세뱃돈'은 아스라한 설날 추억의 一部가 아니라 全部였다.
세배+값으로 '행운의 2달러'와 유로화 등 외화세트를 주기도 하고
현금 대신 사이버 머니로 주는 첨단을 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빳빳한 신권(新券)으로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시중은행의 창구는 시골 장터의 떡집처럼 붐빈다.
아름다운 풍습인 절값의 세시(勢時) 풍속도(風俗圖)는 아직도 변질(變質)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올해는 5만원권의 유통을 늘리기 위해
신권(新券) 발행을 지난해 보다 대폭 줄인 1만원권은 품귀현상을 빚고 있지만
好不況(호불황)의 영향을 받지 않는 1천원 짜리와 5천원권의 新券은 문제가 없었던 듯 싶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의 모델은
태어 난 순서로 일만원권(세종대왕), 천원권(이퇴계), 오만원권(신사임당), 오천원권(이율곡)이다.
이들은 조선시대를 빛낸 자랑스런 선조(先祖)들이다.
세종대왕(1397~1450년)이 돌아가신 後,
51년 후에 李滉(退溪1501~1570)선생이 태어났으며, 54년 後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 났다.
李栗谷(1536~1584)선생은 세종대왕(李淘)이 태어난 後 139년 만에 출생했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한 지폐의 모델이 우연하게도 139년 안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가 흘렀지만 불과 1,5세기의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54세까지 32년간 재위하면서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았고,
특히 민족의 위대한 유산인 한글을 창제하여 민중들과 소통에 힘썼다.
세자 책봉이 되기 前인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놓지 않았고 신하들과 토론과 연구에 열중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조명하였듯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존경하는 임금이고 우리의 자랑이다.
38년동안 흔들리지 않고 1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된 이유다.
退溪 李滉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를 좋아했는데, 책장이 몹시 낡아 글자의 획이 거의 깍여 나갈 지경이었다.
'마음을 바르게 지키고 기르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명종임금이 그를 존경하여 出仕를 종용하였지만 稱病하고 안동에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의관을 정제한 채로 그가 숨을 거두자 선조임금은 3일 동안 政事를 파하고 조회를 열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이토록 애통한 사례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1968년부터 지금까지 1천원권의 자리를 지킨 명분으로 손색이 없다.
申師任堂은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칭송받을 뿐만 아니라
이이(李珥)의 어머니로써 7세 때부터 스스로 사숙(私塾)한 시, 글씨, 그림이 뛰어난 예술가였다.
남편인 '李元秀'가 벼슬을 하려고 세력가들의 찾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벼슬을 구걸하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자"고 권고한 후 낙향(강릉)하였다.
무능했던 남편에게 10년 공부를 독촉하기도 하고 李栗谷 등 7남매를 키우며 늘 공부에 힘썼다.
여성 최초로 2009년 6월 5만원권의 지폐 모델이 된 바탕이다.
栗谷 李珥는 어머니(신사임당)가 죽자
3년 동안 홀로 묘지를 지킬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였고
13세부터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홍문관 부제학일 때 저술한 <성학집요>을 받아 본 선조는
"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 같은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조임금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을 구했으나 '10만양병설'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율곡은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 학문의 책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58세의 李滉선생은 스스로 찾아와 이틀간의 토론을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
23세의 李珥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경계할 인물"이라고 退溪 門人들에게 말한 바 있다.
그가 1972년 7월, 李滉선생보다 높은 5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도안(圖案)된 근거다.
역사적인 국민 영웅들도
때론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한결같이 '마음공부'를 위해 책과 씨름했다.
평생교육, 평생학습의 모범답안의 유형인 이들에게서
學而樂의 기쁨이 없었다면 국가 상징인 지폐의 모델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민족의 자긍심, 그 중심에 있는 그들의 공통점은
수불석권(手不釋卷), 즉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어렵게 이야기할 것 없이, 인간의 삶에서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없던 100세 인생은 장수의 기쁨보다는 왠지 불안하고 걱정이 앞선다.
이런 때일수록 책을 놓지 않아야 성공인생을 살 수 있다.
過歲를 하는 '세뱃돈'은 동양권 나라들의 설날 풍습이었다.
중국에서는 설날 아침에 '야슈이첸(壓歲錢)'이라는 '세뱃돈'을
붉은색 봉투 홍파오(紅包)에 넣어 주면서 붓글씨와 함께 德談을 건넨다고 한다.
설날의 '德談'은 칭찬과 격려와 희망과 기대의 福된 마음의 양식이다.
'세뱃돈'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동일한 기쁨이 있는 福된 돈이다.
문헌(文獻)에 등장하기 시작한 100년 前부터 '세뱃돈'은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가 즐겁다.
혹자(或者)에게는 '세뱃돈'이 또 다른 명절스트레스일수도 있지만 애교있는 스트레스다.
모름지기 한 해를 이런 즐거운 마음로 시작하는 뜻에서 '새뱃돈'이 유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자녀들에게 이와 유사(類似)한 德談을 들려 준다면 '세뱃돈'에 好氣를 부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풍속도는 바뀌겠지만 본래 명절에 담긴 조상의 얼과 문화를 새겨보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어느덧 '세뱃돈' 받을 곳보다
이제는 줄 곳이 많은 나이(回甲)에 이르렀지만 오늘은 기쁜 설날이다.
설날 아침에 사대부 집 부인들은 사돈집에 단장을 한 계집종을 서로 보내 새해 問安을 드렸다.
이 풍습을 문안비(問安婢)라고 하는데 筆者의 問安婢는 '세뱃돈'의 모델들이다.
모델들의 問安을 받으며 새해를 시작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세뱃돈에 나오는 모델분들(세종대왕 등)의 문안인사(?)를 받으며 진정한 새해를 지혜롭게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