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값, 광복 직후엔 소고기와 같아…
1950년대 명절엔 계란 선물이 인기
1967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3일간 입원한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퇴원하던 10월 18일 40대 여성이 병원장실로 계란 두 꾸러미(20개)를 들고 찾아와 대통령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성의 정확한 신원은 보도되지 않았다. 중년 여성이 대통령에게 퇴원 선물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 선물의 내용이다.
수술받은 대통령에게 몸조리 잘하라고 전한 선물이 계란 20알이라는 건 오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계란은 오늘날보다 훨씬 급이 높은 식품이었다. 1967년 계란 10개(약 600g)의 가격은 110원이나 돼 비슷한 무게의 돼지고기 한 근(600g) 값(120원)과 거의 같았다.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면 계란은 훨씬 더 '귀하신 몸'이었다. 1948년 물가표를 보면 계란 한 꾸러미 값이 쇠고기 한 근 값과 똑같은 15원이었다 ('조선은행 경제연감'). 그러니 1960년대에 달걀 선물은 결코 허접한 것이 아니었다. 1968년 6월 1일 서울 서대문의 10층 건물에 문 연 '뉴 슈퍼 마키트'의 개업 행사에서 당대 최고 인기 코미디언인 서영춘·백금녀 등이 고객들에게 나눠준 선물은 1인당 달랑 달걀 1개씩이었다 (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자).
반세기 전 계란의 위상이란 '값싼 단백질 공급원' 정도로 되어버린 오늘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양계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빚어진 일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서민 가정에서는 생일이나 잔칫날, 소풍 때가 되어야 계란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평소 가족 밥상에 달걀 프라이가 달랑 1개 올라오면 자녀들은 그게 아버지 것이란 걸 알고 침만 삼켰다. 이를 안쓰러워 한 어른이 반쯤 먹고 "너희도 먹어라"하면 남은 프라이 반쪽을 아이들이 다퉈가며 맛봤다.
1962년 이화여대 기숙사를 탐방한 '처녀들만의 보금자리'라는 신문 기사에서는 '기숙사 식당에서 매일 하나씩의 달걀 프라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중요한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천주교 수원교구장을 지낸 고(故) 김남수 주교는 "내 성직 생활 41년의 출발은 삶은 달걀이었다"고 생전에 토로했다. 만주 산골에서 보낸 소년 김남수의 어린 시절은 궁핍했지만 동네 성당의 신부님이 집을 방문하면 부모는 삶은 달걀을 대접했다. 소년은 신부님이 남기시면 먹으려고 했는데 속도 모른 신부님은 접시를 싹 비웠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달걀을 삶아 달라고 떼를 썼다가 야단만 맞자 "그러면 나도 커서 신부님 될 거다!"라고 소리쳤고, 결국 꿈을 이뤘다. 달걀은 명절 선물로도 흔히 주고받았다. 전쟁 이후 배고픔을 면하는 게 최대 과제이던 1950년대의 설 선물 목록에서 계란은 토종닭, 돼지고기, 찹쌀과 함께 4대 인기 품목으로 꼽혔다.
궁핍한 시대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명절용 계란 선물'이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등장했다는 소식이다. AI 사태로 빚어진 '계란 대란' 속에 지난 12일 대기업 계열의 한 수퍼마켓이 30개들이 한 판을 1만원에 파는 설 선물 세트를 내놓았다. 반세기 만의 계란 선물 세트는 달걀 한 개도 나눠 먹어야 했던 우리의 그때를 잠시 돌이켜 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