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단(Ⅲ)
열매 맺는 영적 삶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잡다한 생각을 물리쳐야 됩니다. ‘골방에서의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기도의 기초가 하나님과 나만이 대화하는 기도에 있다면, 그 기초를 만드는 일이 자신의 삶이 바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입니다.
ⓐ. 자신을 거룩함과 의롭게 하는데 절대적인 요소가 됩니다. ⓑ. 열두 진주 문을 통과하여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첩경입니다. ⓒ. 진주 문을 지나서 시온으로 올라가는 길이 빨라집니다. ⓓ. 항상 세마포가 깨끗해서 높은 수준으로 맑아집니다. ⓔ.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 새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 자신의 건물이 높아지게 합니다. ⓗ. 집안에 필요한 모든 가구장식을 훌륭하게 만들게 됩니다. ⓘ. 시온에서의 주어지는 계급이 높아집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22:14)
시온으로 들어가려면 열두 진주 문을 지나가야 된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까지 들어가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세속에 따르지 말아야 됩니다. 바울은 열두 진주 문으로 들어가려면 성령으로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살려면 ‘정’과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말 국어사전에서 정(情)은 사물에 끌려서 일어나는 마음이라 하였고, 헬라어는 ‘파데마’라 합니다. 파데마는 ‘감정, 정욕, 고난, 고생’ 등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정은 인간을 포함하여 어떤 것에나 집착하는 마음이 정입니다. 욕심은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라 합니다. 헬라어는 ‘에피두미아’라 합니다. 에피두미아는 ‘원하다, 갖기를 갈망하다, 탐하다, 욕심을 품다, 욕망하다’ 등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이 욕심이 됩니다.
두 가지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근본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성령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요3:5)
계시록 21장12절 이하에서 기록된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진주문(πυλ?ν-푸론)과 22장14절에 기록된 문은 다릅니다. 22장14절에서 말하는 문들은 지역(?라)을 나타내므로 한 문이라는 의미는 지역을 말하고, 한 지역은 태평양끝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들을 돕기 위해 성령의 열매가 갖는 뜻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1. 성령과 열매
푸네우마는 소유격 단수로서 ‘바람, 호흡, 기운, 생명, 성질, 영물, 성령, 성령의 역사’ 등으로 쓰이므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열매란 무엇입니까? ‘칼포스’는 ‘실과, 열매, 수확, 결실, 후손, 행동, 상급’ 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므로 열매가 수정되어 자방(子房-암술의 일부로서 꽃 줄 밑에 붙은 주머니 모양)이 자라게 된 결과를 말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됨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에 관계되는 말만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일합니다(롬8:5-9).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육신을 위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일을 도모할 때 성령께서 그가 행하는 일을 완성시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을 해서 의로워지는 삶의 결과가 열매입니다.
첫 번째 문: 예수 믿고 거듭나야 자신의 영이 첫 번째 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자녀로 인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가지 못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3:3,5).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도 없다고 로마서 기자는 말합니다.(롬8:9)
첫 번째 문에 도달한 영은 땅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빨리 두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땅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이 늦어지면 충만할 때까지 첫째지역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이 끝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1층 낙원에서 교정을 받아야 됩니다.
2. 사랑(???πη)
아가페는 ‘사랑, 친절, 호의’ 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것이지(요일3:18,5:3,요이6,롬13:10), 인간의 정(필레오)이거나, 사랑(필로데오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맺는데 첫 번째로 요구되는 항목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나머지 항목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문: 땅에서 사랑을 행해야 자신의 영이 둘째 문을 통과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는 각 사람이 행하는 사랑에 관한 문제를 보좌로 올려 보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심사를 통과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살이 결여된 사람이라면 그의 영은 두 번째 이역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사랑에 대하여 성경은 “사랑은 하나님께 도달한다.” 하였습니다(요일4:7a). 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십니다(요일4:8).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했습니다.(요일4:7b).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향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합니다(요일4:10). 믿음 소망 사랑 셋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땅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그의 영은 두 번째 지역에서 사랑이 실천될 때까지 기다려야하고, 그의 생이 마지막이면 그곳이 종착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3. 희락(χαρ?-차라)
차라는 ‘기쁨, 즐거움, 즐거운 잔치, 기쁨의 계기’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희락은 기쁨에서 오는 반응입니다. 기쁨은 성자 하나님이 주신 덕목입니다. 기쁨이 없는 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악함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으면 항상 마귀의 종노릇만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기쁨이 충만하면 찬사들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세 번째 문: 땅에서 희락(기쁨)의 삶을 살아야 자신의 영이 세 번째 문에 도달합니다. 하늘의 천사는 우리가 땅에서 기쁨의 의부를 하나님의 보좌로 올려 보냅니다. 희락은 즐거움과 기쁨에서 오는 희열이라 했습니다. 곧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희락에 관한 심사를 받아야 됩니다. 땅에서 희락이 넘치는 사람은 네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땅에서 희락의 삶으로 살지 못했으면 세 번째 지역에서 다음 지역에 이르는 수준의 희락이 채워질 때까지 기간이 길어집니다. 왜 입니까?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두셨기 때문입니다.(요17:13)
희락은 곧 기쁨이요 기쁨은 마음의 평화로움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웃는 사람은 기쁨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 번째 지역을 통과하려는 열망과 소망에서 일어나는 행동입니다.
4. 평화(ε?ρ?νη)
에이레네는 ‘평화, 화해, 화평, 일치, 축복’등으로 쓰이므로 평안으로써 화목케 함을 말합니다. ⓐ.화평은 화목케 하고, ⓑ.화평은 사랑하게 하고, ⓒ.화평은 하나님을 만족케 합니다. 따라서 화평은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덕목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합니다. 화평은 이웃과 화목을 이루게 합니다. 화평은 원수와 화목케 합니다.
네 번째 문: 땅에서 화평을 실천하면 자신의 영은 네 번째 문에도 달합니다. 화평은 화해와 일치를 말합니다. 나와 네가 일치하지 못하면 둘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고 화평을 이룰 수 없듯이, 하나님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겉 사람과 속사람이 일치하지 못하면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땅에서 화평함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린 사람은 자신의 영은 다섯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땅에서 화평하게 살지 못했으면 다음 지역에 도달할 수준에 이르기까지 영은 네 번째 지역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부르실 때 화평으로 부르셨습니다(고전7:15b).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이 상실됐다면 당연히 그것을 회복시켜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요14;27). 그러므로 땅에서 화평한 삶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기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화평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5. 오래 참음
마크로두미아는 ‘인내, 견딤, 오래 참음, 불변’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므로 굳은 마음으로 고비를 달 견디며 때를 기다림입니다. 견딤은 고집과는 가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주어진 환경을 헤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문: 땅에서 육신이 오래 참음은 자신의 영은 하늘나라에서 다섯 번째 지역에 들어갑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속성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나 참음이 없으면 조급해 집니다. 조급하면 자기 영혼을 해치고 육신을 해칩니다.
땅에서 육신의 참음이 없으면 마음에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골방에서의 기도는 이룰 수 없습니다. 땅에 있는 육신이 오래 참으면 자신의 영은 하늘에서 여섯 번째 문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육신이 오래참지 못하고 항상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자신의 영은 다섯 번째 지역에서 다음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영적수준이 채워지기까지 머물러 있게 됩니다.
6. 자비
츠레스토데스는 ‘유익한, 선한, 덕스러운, 은혜로운, 친절’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므로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고 고생을 없애주는 베푸심입니다. 자비는 강포의 반대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친절이나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타인을 향한 눈길을 주지 못하면 항상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에 악을 생산하게 됩니다.
여섯 번째 문: 자비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한 부분입니다. 자비는 친절과 유익을 위해 덕스러운 마음과 행위입니다. 땅에서 자비를 베풀면 영은 하늘에서 일곱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지 못하면 여섯 번째 지역에 머물면서 다음 지역에 이를 수 있는 영적수준이 채워질 때까지 여섯 번째 지역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의 생이 끝이라면 그곳이 영원한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불순종이 됩니다. 주신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땅에서 열심히 자비를 베풀었다면 일곱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지 못했거나 부족했다면 여섯 번째 지역에서 다음 지역에 들어갈 영적수준이 채워질 때까지 여섯 번째 지역에 머물게 됩니다. 또한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이라면 그곳이 그의 영원한 처소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7. 양선
아가도수네는 ‘선함, 너그러움’등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일곱 번째 문: 땅에서 양선은 자기 영은 하늘나라에서 일곱 번째 문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양선은 선함과 너그럽고 어질고 착함입니다. 착함의 반대는 과격입니다. 그러므로 착하지 못하면 사회에서나 국가에서나 가정,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폭군으로 변해서 하늘의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땅에서의 양선은 자신의 영이 일곱 번째 지역에서 심사를 받을 때 합격여부가 결정된 사람의 영은 여덟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부족하거나 온전치 못해서 합격되지 못하면 자신의 영은 일곱 번째 지역에서 다음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영적수준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생이 끝나면 그곳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8. 충성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임, 확신, 보증, 신실, 언약’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므로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입니다.
여덟 번째 문: 믿는다. 또는 확신한 등으로 말하면서 얼마나 충성합니까? 충성은 순종에 절대적인 역할입니다. 또한 충성만이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데 정대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삼상15:22~13).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히5:8~9). 따라서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순종입니다.(눅6:46)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도 천사도 도와주지 아니합니다. 이유는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아비 사탄의 사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하속에게 성령이나 천사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땅에서 죽도록 충성하면 자신의 영은 하늘나라에서 여덟 번째 심사에서 합격됩니다. 따라서 아홉 번째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땅에서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영은 여덟 번째 지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이면 그곳이 끝입니다.
9. 온유
프라우데스는 ‘온유, 친정, 얌전’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므로 온화하고 유순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온유하지 못하면 완악(頑惡-성질이 거친 행위)한 사람이 됩니다. 또 완고(頑固-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는 행위)한 사람이 됩니다.
아홉 번째 문: 땅에서 온유한 성품으로 자신이 다듬어진 사람은 아홉 번째 문에 도달합니다. 온유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바탕입니다. 온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양과 같은 심정을 주셨고 하나님만 따르도록 얌전과 친절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하지 못하면 완악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습니다(마5:5). 그러므로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시온의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따라서 그러한 심령의 소유자는 열 번째 문으로 나아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온유하지 못했거나 부족했으면 그는 아홉 번째 지역에 머물면서 다음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온유가 채워져야 되고, 또한 그의 생이 마지막이라면 그곳이 종착이 됩니다.
10. 절제
엑크라테이아는 ‘자제, 극기, 자제력, 절제’등으로 쓰이는 단어로서 알맞게 조절, 또는 욕망을 제어함을 말합니다.
열 번째 문: 절제는 인생의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절제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성품을 주실 때 절제를 주셨다고 베드로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되라” 면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등을 말합니다.(벧후1:4~7)
절제는 조절이나 욕망을 억제 또는 자제력이라고 말합니다. 생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시키면서 인생을 조절하는 사람은 보통 인내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심사의 마지막 지역에서 자신의 절제문제에 관하여 심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심사에서 합격되면 다음 지역부터는 심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온에 도달된 사람에게는 그를 막을 금지할 법이 없기 때문에 무사통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11. 금지할 법이 없다
열한 번째 문: 여기서는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였으므로 무사통과를 말합니다. 점검할 필요 없이 무사통과라는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한 번째 문에까지 올라온 사람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이 받아졌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일렀으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3:8)
얼마나 기쁨입까? 심사 없이 통과하는 문, 어떤 법으로도 앞길을 막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 천사들의 심사가 없습니다. 오직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의 세마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과하여 세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열린 문은 세상에서의 행위로서 왕권을 얻은 자들에게 먼이 열려있습니다.”(계21:24~ 26)
통과하는 문은 믿음의 성숙단계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거할 좋은 위치를 얻기 위해 통과하는 지역입니다(계22:14). 어떤 문들입니까? ?라입니다. 뿔라는 시온으로 올라가는 열두 번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을 문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곽문은 포리스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곽문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려고 지켜온 ?라와는 다릅니다.
12. 예수의 사람
예수의 것을, 영어성경과 한글성경에는 사람으로 표기되었습니다. 헬라어로 사람은 ‘안드로푸스)’입니다. 그런데 원전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관계대명사 ‘호스’의 주격복수로 ‘호이’는 ‘그, 그의, 그것에’ 접속사 ‘데’가 있으므로 그리스도[예수]의 것입니다.
열두 번째 문: 예수의 것이 된 신부들에게는 열한 번째 문부터는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시온에까지 올라온 그들에게는 오직 아버지와 함께 시온으로 내려올 새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기쁨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늘의 뭇 존재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혼인예식을 준비하는 영광만이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분향단의 원리는 지성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경배할 때에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거룩함과 의로운 삶이 요구되는 장소이기 때문 입니다. 1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들 중에서 한 사람은 골라서 그 해에 해당되는 대제사장이 백성들과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입어야 되며, 에봇과 견대와 흉패 등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성전바깥 뜰에서 경배하는 자들, 곧 물두멍과 번제 단 주위에만 맴돌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려는 자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유는 검서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불만과 시기와 질투, 그리고 원망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둡기 때문에 성전을 밝게 하지 못하고 분쟁만 일삼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세상을 밝히지도 못합니다. 다만 교회 안에서 주권싸움이나 또는 구릅을 만들어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자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기며 살아야 될 증거궤를 먼저 만들지 아니하고, 먼저 물두멍에 가서 씻기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을 삶에 우선에 두지 아니하고 자기 생활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서나 기쁨과 감사했나를 2. 믿음의 기초가 되는 증거궤를 먼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설상을 배설하려할 때 감사와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방법은 매주일 드리는 감사예물과 주일예물을 풍성하게 드리는가, 인색하게 드리는가를 보면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감사예물과 주일예물은 두 줄 진설병을 풍성하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우선으로 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기쁨과 감사가 없고 항상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의 분쟁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방법은 자기가 가정에서 보고, 항상 누가 문제를 만드는가를 보면 알게 됩니다.
3.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막을 짓지 않았습니다. 성막을 지어서 하나님과 동거할 생각은 아니하고 예수께서 이뤄놓은 의를 도적질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거처를 만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번제단 주면에 맴돌면서 희생부터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희생은 받으시지 않는 희생이 되었습니다. 번제단에서 희생되는 제물처럼 자신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바깥 뜰에서만 맴돌며 경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42달이라는 기간 동안 대 환난을 당해야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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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urchofpraise 원문보기 글쓴이: 장죠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