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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한국불교 영역의 현황 문제점과 향후 방향 (4)
한강작가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본
한국불교 영어번역의 실태와 전망
글 전 옥 배
(한국불교영어번역연구원 원장, 111nirvana@hanmail.net)
1. 문제의 제기
지난 호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작품 번역 과정에서 일어난 오역(誤譯) 시비와 관련하여 학계, 문학계, 언론 등 각계에서 연이어 제기되었던 문제점을 검토함으로써 한 작품의 번역 과정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작업이란 것을 살펴보았다. 한강의 문학 작품도 그러했지만, 비문학 분야인 불교 역경과 같은 학술 분야의 논문이나 텍스트는 전문성이란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한층 문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선 번역자는 기본적으로 저자의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는 문해력(文解力 literacy; the state of being able to read and write)이 있어야 하며 부족한 부분은 원저자에 빙의(憑依)가 될 정도로 서로 피드백을 주고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온전한 번역이 나올 수가 없고 한강 작품의 비판과 논란에서 보듯이 원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번역자 개인의 창작물이란 비판까지 받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번역이란 번역자 한 사람의 개인 작업이 아니고 원저자, 원어민 교정자 proofreader와, 또 전문번역인 경우 전문 감수자, 관련 편집자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한 협업(協業 collaboration) 과정을 거친 결과란 것이 오역 비판과 검토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또 그 검토 과정에서 번역에 있어 모든 관련자의 피드백 과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바른 번역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향곡이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화음(和音)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불협화음(不協和音)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는 영국에서 영어권 작품을 대상으로 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International Booker Prize)을 수상하며 영어권에서는 훌륭한 번역이라는 극찬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렇지만, 맨부커상 수상 이후 작품 국문 원본과 병어 번역본을 검토해 본 국내 학계와 번역 계에서는 번역자 스미스의 번역본인 「The Vegetarian(채식주의자)」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부커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달리 영어로 된 작품으로만 평가하며 원작과 비교를 한다거나 원작의 내용 검토 없이 순수 영어로 번역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심사를 하는 특징이 있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세계적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문학상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작 선정은 원작뿐 아니라 수상 작가의 작품이 번역된 모든 국가의 번역서들이 함께 심사 대상이 된다. 한강 작가의 맨부커 수상의 영어 번역은 10여 국의 8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된 모든 version들이 그 심사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부커상은 노벨 문학상과는 달리 영어 번역자와 원저자가 함께 공동 수상하는 특징이 있는 문학상이다. 맨부커상은 훌륭한 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그 번역 또한 훌륭한 영문학 작품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원문에 대한 충실성보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 자체의 문학성 전달에 치중하여 번역자의 영어번역 자체에 중점을 준 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작품 원본과 영역본을 비교해 본 한국 내의 많은 학자, 번역가와 문학 평론가들은 스미스의 오역을 지적하며 그 번역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심지어 스미스의 영어 번역판은 원작의 내용과는 다른 version의 「채식주의자」 혹은 ‘번역자에 의한 제2의 창작(創作)’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2017년 1월 10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어번역이 한글 원작을 훼손한 ‘작품 창작’ 수준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부 단어의 번역이 생략되고, 원본에는 없는 영어 문장이 생기기도 했다는 지적이다. 그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원래 의도에서 변질됐다는 주장이다. 한강이 졸업한 연세대 국문과에 재직했으며 따라서 그 은사이기도 했던 문학평론가 정과리(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2017년 1월 11일 연세대에서 열렸던 유영 번역상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
정씨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채식주의자의 첫 문단 번역을 문제 삼았다. 한글 원문과 2010년 자넷 홍의 영어번역, 작가 한강에게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안긴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의 2015년 영어번역을 비교했다.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은 미처 모르고 있던 ‘우리 안의 보물(한강 작가)’을 재발견한 의미도 있지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역시 좋은 번역이 필수적이라는 활발한 논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난점은 무엇이 바람직한 번역인지, 번역 과정의 원작 왜곡을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립된 모범답안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번역에 있어 해결해야 할 영원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조재룡(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계간지 문학동네 봄 호에 발표할 글에서 한 발 더 나아 간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국어를 6개월간 독학으로부터 시작하여 학습이 일천한 스미스의 한국어 실력으로 인해 한글 원본에서 주어를 생략한 문장의 경우 이를 번역에서 잘 살려내지 못하는 등 오역으로 볼만한 대목들이 상당히 있다”라고 주장했다. “데보라 스미스의 영역은 거의 한강의 작품을 새로 고쳐 쓴(rewriting) 수준이다. 스미스의 영어 문장 자체는 뛰어나 상을 받은 것이어서, 맨부커 수상은 한글 원본 채식주의자의 승리가 아니라 영어판 Vegetarian의 승리”라고까지 했다. 원작과 다른 내용의 번역이라는 말이다.
왜곡·생략과 오역은 또 다른 문제다. 문학전문 번역가 김석희 씨는 “매끈한 번역을 위해 원본의 중요한 문장을 뺄 경우, 정도의 문제겠지만, 이는 맞냐 틀리냐의 문제라기보다 온당한 것이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가 된다. 도덕적 잣대와 미학적 잣대 중 어느 것을 적용할 것이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심각하지 않다면 작품의 원래 맛을 살리는 창작수준의 번역이 되어야 한다.”라고 평가했다.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도 “한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문화적 면역력이 강해지면 그 나라의 문학 번역은 원전을 그대로 살리는 방향으로 간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문학 번역은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조재룡 교수는 “오류 없는 번역을 위해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해외 학자들에 대한 지원 확대가 시급하다”라고 했다.
(이상 중앙일보 관련 기사 인용)
「채식주의자」 영문 번역에 대한 비판과 논란은 2016년 맨부커 수상 이후 국내에서 문학평론가, 영문학자들, 국문학자들이 오역을 지적하는 글을 언론과 각종 세미나 심포지엄을 통해 잇달아 발표하면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므로 원작자인 한강 작가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스미스의 오역 실수를 60여 개 수정 목록으로 정리해 해외 출판사들에 전달한 사실을 전하며 이런 실수가 자신의 작품 내용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혀 논란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후도 지속적으로 국내에서는 문학평론가인 조재룡 고려대 교수가 계간 문학동네 봄 호에 실은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라는 발표에서 스미스가 「The Vegetarian」에서 원문의 내용 첨가와 삭제 및 길이조정을 자유자재로 임의로 번역하여 본인의 창작수준의 영문 번역을 했다고 주장했다.
성균관대 김욱동 교수 외에도 많은 영문학자, 문학 평론가, 번역 전문가들에 의해 오역 문제가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맨부커상 수상 이후 2년간 논란이 계속된 바가 있다.
김욱동 교수는 미국 텍사스대학 번역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학술지 ‘번역 리뷰(Translation Review)’ 100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스미스의 번역이 오역(誤譯)과 졸역(拙譯)이 많은 부적절한 번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과 비판의 와중에서 2018년 19~22일 ‘2018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대회 국제인문 포럼’에 초청된 번역자 스미스는 20일 ‘언어와 문화 다양성’ 이라는 섹션에서 ‘우리가 번역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아래와 같은 요지의 개인 발표문을 공개하여 자기의 의견과 입장을 밝혔다.
지난 몇 년간 영국과 미국에서 문학 번역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맨부커 국 제상이 작가와 번역가의 공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개편된 것은 그러한 새로운 풍토를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그해에는 한국에서도 번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엔 다른 목소리들도 있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수상을 둘러싸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불안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상 수여의 문화 정치학에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번역의 본질과 위상에 관한 것입니다. 번역과 번역가를 향한 증대된 관심과 평가는 어떤 것을 매개하지 않고 원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신화, 즉 번역본 독자와 원전 독자 둘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힌 판타지를 훼손합니다. 사람들은 영역본 「전쟁과 평화」가 아닌, 원본「전쟁과 평화」를 읽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각각의 책이든 혹은 그들이 동일시하는 문화이든 간에,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대상입니다.
[중략]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번역한 영역본 「채식주의자」가 물론 한국어 원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전적으로 옳습니다. 간단하게는 문자 그대로 옮긴 번역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그 어떤 두 언어에서도 문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없으며, 단어 역시 각기 다르고, 심지어 구두점조차도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번역가들이 그들 자신을 충실한 번역가로 여기지만, 충실함의 정의는 분명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서로 다르게 기능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번역은 서로 다른 수단에 의해 유사한 효과를 거두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 변화, 해석은 비단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충실함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자 충실한 번역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중략]
번역은 분명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역동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평적 참여는 번역 문화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일환입니다. 그러나 번역 규범이 나라마다, 맥락에 따라 얼마나 많이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의 접근법을 어떻게 다르게 형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는, 그저 단순히 지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차이점을 향해 가는 일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비평가가 인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호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원작의 언어로 재번역하거나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상정된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써 그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방식에도, 번역이 자유롭거나 창조적이라고 여겨지는 만큼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 번역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번역에 관해 이야기할 것들은 늘 넘쳐나고, 특별히 번역이 그 자체로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고 새로운 독자들이 번역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목소리와 관점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작품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번역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번역이 지닌 잠재력 즉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그 차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작업하고, 고독한 천재의 신화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상 번역은 중앙일보 기자의 번역자 스미스의 영어 입장 발표문의 한글 번역으로 어색한 부분이 많아 보임)
2. 한강 작품 번역 구체적인 유형(類型)별 오역 사례 검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일간지 중앙일보는 2017년 1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강 작품의 번역가 스미스의 오역에 대한 학계의 비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기사를 싣는다. 첫 번째 기사는 스미스의 영어번역이 원작을 훼손한 작품 창작수준의 번역이라는 연세대 정과리 교수의 비판을 전하고 있다. 두 번째 기사는 계간지 문학동네 봄 호에 실린 고려대 조재룡 교수의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란 기사에서 이다.
조재룡 교수는 해당 기사에서 번역자 스미스(Smith)의 한국어 능력 부족과 그와 관련된 잘못된 번역 사례들을 세밀히 짚었다. 조 교수는 스미스에 대해 “이미지에서 제 번역의 단초를 얻어내, 이미지의 근사치를 연상해내고, 그렇게 낱말을 이 연상의 결과물과 조합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며 “전체적으로 ‘감(感)’에 의지해, 한국어 원문을 유려하고 화려한 영어로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조교수는 스미스가 한국 문화의 흔적을 과감히 지우고 자신의 주관적인 문학관을 덧씌웠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여기서 나아가 맨부커상 수상 이후 스미스를 한국문학 세계화의 기수인 양 칭송하며 문학을 국가대표 운동경기처럼 여기는 경박한 문화를 꼬집었다.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 번역은 ‘수상’으로, 아니 ‘수상’ 콤플렉스로 승리한다. 번역은 과도한 열정, 한국 사회가 번역에 대해 걸고 있는 막연한 기대치로 승리한다. 번역은 국가가 이끄는 사업의 일환으로 승리를 점친다. 번역은 무모한 기대와 콤플렉스의 역설을 먹고 승리한다.”라고 주장했다.
정과리 교수와 조재룡 교수의 경우 스미스(Smith)의 번역이 낳은 작품 내용의 변질과 왜곡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조재룡은 한국어의 특징인 생략된 주어를 잘못 파악하는 데서 나타나는 스미스의 “한국어 구사력, 이해력, 장악력 부족”으로, 그녀의 창작적 재능을 십분 살려 원문에 번역가의 주관과 감정을 덧씌우면서 “임의로 첨가하고 자의적으로 삭제하는” 그녀의 번역 방식에 대한 강한 비판의 어조를 숨기지 않는다. 번역이 창작인가, 반역(反逆)인가 하는 논의는 국내 번역가 사이에도 끝없이 논의되는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조재룡 교수의 이런 평가와 앞서 맨부커상 수상 직후 언급된 해외 및 국내 초기의 언론극찬은 너무도 상이하다. 두 주장 중 무엇이 타당한가? 물론 답은 이미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긍정적 평가는 한국어를 알지 못해 영어 번역본만 읽을 수 있었을 해외 평자의 의례적 칭찬과 원작과 제대로 비교도 하지 않은 채 흥분에 겨워 맹목적으로 토해낸 국내 언론의 추종적 찬사들로부터 왔다.
반면 조재룡 교수는 원작과 번역본을 주의 깊게 비교하고 검토한 뒤에 평가를 내렸다. 조교수는 계간 문학동네 봄 호에 실은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에서 정은진 씨의 프랑스어 번역과 비교해 번역자 스미스의 영역이 한국어에서 생략된 주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고유성도 지워버렸다고 지적했다.
대체적으로 학계에서 지적된 한강 작품 번역의 유형별 오역은 아래와 같다.
1) 기본적 한국어 이해의 부족
한국어 원본: “(나는)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 완전히 자리를 잡았구나.” 장인이 수저를 들며 한마디 했다.
스미스의 번역: ‘Now you've been forgotten all your worries.’ My father in law pronounced, taking up his spoon and chopsticks. ‘Completely seized the moment!’
(영문 번역 한국어 직역: “이제 너희는 너희 걱정을 모두 잊어버렸구나.” 나의 장인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완전히 그 순간을 붙잡았어!”)
[***한국어 원문 첫 문장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의 생략된 주어가 영어판에서는 you로 되살아났다. 과격하게 채식주의자로 돌변한 딸 영혜와 그로 인해 골치 썩는 사위를 장인(영혜의 아버지)이 도닥거리는 장면인데, 웬만한 한국어 독해력 소지자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생략 주어(=장인)’를 스미스는 엉뚱하게도 너희, 즉 영혜와 사위로 둔갑시켰다. 처형(妻兄)이라는 번역을 한자(漢字)를 그대로 번역하여 wife's brother라는 성(性)을 바꾸는 어처구니없는 번역도 있다. 한국의 가족제도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오역이다. ]
조재룡 교수는 이 오역들을 스미스(Smith)의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서투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첫 네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스미스가 전체적으로 한국어 해석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검토해 본 결과, 주어가 생략된 문장의 번역이 상당 부분 잘못됐다. 조교수는 “한국어를 번역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장의 생략된 주어 찾기에서 스미스는 번번이 실수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실수로 인해 텍스트의 특수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좀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가령 주인공 영혜는 한국적 가부장제에 짓눌린 수동적이고 몽환적인 캐릭터다. 한데 스미스의 번역에서는 능동적이고 이성적인 여성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이다. 잘못 해석했거나, 번역 과정에서 본인의 이념을 담은 것일 수 있다. 조교수는 스미스가 화자인 남편의 단언적 문장을 복문으로 옮기면서 “폭력적이고 단순한 남편”을 “우유부단하고 고민에 휩싸인 남편”으로 뒤바꿨다고도 말했다. 번역자의 주관이 개입됐을 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 자체가 원문과 다르다는 것이다.
2) 과도하게 의역(意譯)해서 원어민 화자(話者)를 혼란스럽게 함
한국어 원본: “허공을 오가는 어떤 대화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사람들의 입술에 번들거리는 탕평채의 참기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스미스의 영어번역: By now, everyone was busy making sure that their mouths were fully occupied with eating, so that it wouldn't be up to them to try and fill the awkward silences that were now peppering the conversation.
영어 번역본 한글 번역: 이제 모든 이들은 그들의 입이 모두 먹는데 집중하도록 애썼고, 따라서 그들은 대화에 뿌려지는 당혹스러운 침묵들을 채우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평론가 팀 파크스(Tim Parks)는 ‘뉴욕 서평(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독자가 읽으며 의아했던 번역을 지적하고, 번역이 얼마만큼 원문을 제대로 전달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어떻게 침묵이 “대화에 뿌려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위의 비교에서 볼 수 있듯이, 팀 파크스(Tim Parks)의 혼란은 번역자의 잘못된 번역에서 기인한다. 번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영어권 독자들이 작품을 잘못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3) 작품에 대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야기
작품세계에 대한 해외 평자들의 설왕설래도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서평은 『The Vegetarian』에 대한 평론에서 “몇몇 영국의 평론가들은 영역된 채식주의자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번역이라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비하나 ‘고문 포르노’와 같은 측면에서 작품에 대한 비난을 가하고 있다.”라고 언급한다. (Khakpour). 김대중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논란의 상당 부분은 스미스(Smith)의 의역(意譯)을 넘어선 과한 번역과 오역들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단순오역
한국어 원문: 문턱을 넘자 팔을 뒤로 뻗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스미스의 영어번역: As she entered the room, she stretch out her foot and calmly pushed the door.
[***팔과 발을 헷갈린 듯하다. 유치원생 수준의 명백한 오역이다. 번역자는 두 언어가 기본적으로 숙달된 Bi-linguist(2개 언어가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번역자 스미스의 한국어는 6개월 독학으로 시작한 한국어 실력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저자와 편집자가 영어를 최종적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
한국어: 결혼 전부터 아내는 식성이 좋았다.
스미스의 번역: she had proved herself a more than competent cook.
(그녀는 자신이 능력 있는 요리사 이상임을 증명했다.)
[***‘식성(食性)이 좋다’는 표현을 ‘요리사보다 더 좋은 요리 솜씨’로 둔갑시켰다. 한국어의 미숙함일까? 아니면 영혜를 더 독립적이고 유능한 현대 여성으로 만들고 싶은 번역자의 욕심일까?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
한국어: 말도 마세요.
스미스의 번역: She’s stopped talking.
(그녀는 말을 멈췄다.)
[***“말도 마세요.”를 “말을 멈췄다.”라는 의미가 다른 번역이다. 명백한 오역이다.
이런 번역은 요즘 유행하는 인공지능 자동 번역에서 흔히 나오는 오역 유형이다.]
5) 이유 없는 번역자 자의적 생략
한국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192-3)
[*** 반 페이지 분량을 아무 이유 없이 번역본에서 생략해 버렸다. 이해가 불충분한 문장을 번역자 임의로 생략한 것이다. 이것은 필자나 편집자가 지적하여 수정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국어: 그 가을 아침 영혜에게 줄 나물을 싸 들고.. 테이프에 담았던 것이다.
한국어: 그 아침, 붉고 노란 꽃으로 온통 물감칠이 된 알몸의 영혜 곁에... 분명한 것은 남편의 행동이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원본 167쪽 한 페이지의 거의 절반 이상이 생략되어 있다. 원작자 한강과 번역자의 공동 책임이다.]
3. 결어(結語)
서두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번역의 구조적인 문제를 검토했다. 번역은 번역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원저자와 원어민 교정자 proofreader 그리고 편집자 등 많은 관련된 사람들의 협업의 소산이란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0년 전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이후 학계, 언론, 문학계에 제기되었던 오역 시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보았다. 이에 번역자 스미스는 2017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 와서 장문의 자기 입장문에 밝힌 것처럼 본문에서 축약 소개한 내용에 대해 번역은 번역자의 창작물이라는 납득이 안 되는 해명을 발표한 바가 있다.
번역은 과연 ‘제2의 창작’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번역이 제2의 창작(創作 creation)’이란 출처가 분명치 않은 이 주장은 오래전부터 번역가 사이에 회자되던 말이다. 또 이 내용을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 주장에는 “번역은 반역(反逆)이다”(traduttore traditore)라는 말도 있다. 흔히 번역의 자율을 옹호하는 뜻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번역자는 반역자(traitor)” 즉 “역자는 다 나쁜 놈”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어느 이탈리아인이 ‘실낙원’(밀턴)의 불어 번역을 읽은 뒤 번역이 작품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모두 훼손했다며 역자(譯者)를 비난한 것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이든 영국이든 번역서가 원서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느냐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맨부커상 역시 번역서 자체를 독립된 텍스트로 놓고 그 품질을 평가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 스미스가 2년 후 다시 한강의 작품 ‘흰’으로 같은 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가 우리말을 잘 모르거나 오역 논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번역자의 영어 소설로서 전달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스미스가 큰 상을 수상한 이유는 물론 “번역을 잘했기 때문”이다.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심사위원장 보이드 톤킨은 “스미스의 영어번역이,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작품에 적절한 목소리를 부여했다”라고 평했다. 원서 중심의 우리 풍토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수상은커녕 번역가로서 자질부터 의심받았을 것이다. 오역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오역이 나올 수밖에 없는 번역계 전반의 여건에 대해 말을 보태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번역이라 일컫는 작업은 단순히 “의미 전달”을 넘어 매우 복합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모든 번역서는 작가가 아니라 번역가의 목소리를 담는다”라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현실이 어떻든, 번역가들은 최선을 다해 번역하건만 독자들은 번역은 외면하고 ‘오역’만 보려 한다. 번역이 아니라 오역만 보는 한, 번역자는 영원히 반역자(traditore)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국내 영문학 번역의 거장이자 《하얀 전쟁(영문명 The White Badge)》 《은마는 오지 않는다(영문명 The Silver Stallion Will Never Come)》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작고한 소설가 안정효 씨는 번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번역이 원문보다 낫다면 그건 번역가의 잘못”이라며 “좋은 문장은 좋은 문장으로, 나쁜 문장은 나쁜 문장으로 옮기는 게 번역가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한국 영어 번역계의 제 일인자로 자타가 인정했던 안정효 작가의 주장은 바로 한강 작가의 작품을 영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은 창작’이라는 주장을 새삼 돌이켜 보게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입니다. 이보다 더 싫은 말은 ‘번역이 원문보다 낫다’는 겁니다. 번역가는 전달자입니다. 함부로 번역을 멋있게 하려고 하거나, 멋대로 해석을 붙이면 안 됩니다.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게 번역가의 숙명입니다. 누가 번역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번역가는 원문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강대 영문과를 나와 영자신문 기자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전업 번역가로 변신하여 영문소설도 몇 권을 직접 집필하기도 했던 안정효 작가 겸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자를 정의했다.
“번역가 안정효와 소설가 안정효의 자아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 작품을 쓸 땐 창조자가 되고, 번역을 할 땐 전달자가 되죠. 철저한 전달자가 되는 건 지금도 매우 어렵습니다.” 번역자는 창조해서는 안 되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며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번역자는 철저한 원작자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번역의 창의성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이해관계를 번역자의 입장에서 대변한 말이며 실제 항상 오역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번역가들 사이에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되는 말이다.
필자 전옥배는 고려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금융계에 일하다 퇴직하고 50대 중반인
2,000년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
2005년에 한국불교영어번역연구원
(KIBET)을 설립하였다. 2014년에 한영불교대
사전을 발행하면서 한국불교 영역화 작업을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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