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저자
독일 최대의 문호.
174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실 고문관인 아버지와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조부모에게 신년시를 써보낼 정도로 문학적 천재성이 엿보였다.
열여덟 살 때 첫 희곡 '여인의 변덕'을 썼고,
1772년(23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소재로 삼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였으며,
이 작품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1773년(24세) '파우스트'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1775년(26세)에 희곡 '스텔라'를,
1778(29세)에 '에그몬트'를 집필하였고,
1779년(30세)에 '이피게니에'를 완성하였다.
1782년(39세)에 실러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후에 정식 부인이 된 평민 출신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났다.
1808년(59세)에 '파우스트' 1부가 출간되었고, 나폴레옹과 두 차례 회견하였다.
1821년(72세)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출간했으며,
1829년(80세) '이탈리아 기행'전편을 완결하였다.
1831년(82세)에 '파우스트'2부를 완성하였으며, 이듬해인
1832년 여든셋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실러와 함께 독일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괴테의 작품은 모두 자기 경험의 고백과 참회이며,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의하여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
2 줄거리
『파우스트』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73번째 책으로,
괴테가 창조해 낸 가장 위대한 세기의 드라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라도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했던 파우스트의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의 여정이
천상에서 지상을 거쳐 지옥까지 이어진다.
3 목차
헌사
무대에서의 서막
천상의 서곡
비극 제1부
비극 제2부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연보
4 이 책을 읽은 쓴 독자들이 느낌
파우스트-60년의 관록으로 완성된 서구 문화의 보고
괴테가 60년이라는 평생의 역작 파우스트는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합을 보여주며
주인공 파우스트가 처한 선과악에 대한 문제,
악인으로 묘사된 메피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인간의 모습 등
단순한 희곡을 넘어서서
다양한 관점으로 인간 세상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 작품이다.
고매한 학자로서 책상에서만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는데 제약을 보인 파우스트는 그 고결함을 유지하다
천상에서 내려온 메피스토텔레스의 인도대로 세상만사를 접하며 시선을 넓히는 동시에
자신이 경멸하고 천시했던
인간 감정에 대한 새로운 시선 싹 틔우기와 거기서 발생하는 삶의 괴리로 괴로워한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그런 파우스트에게
본능대로 살고 자연스레 살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런 메피스토텔레스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60년의 세월이 묻어 있듯
방대한 양의 희곡을 단 한 번의 정독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적인 작품의 양도 그렇지만
작품에 인용되는 기독교 성경 인용구절을 비롯해
그리스 철학과 신화의 등장 등
세부적으로 알아야 하고 탐구해야 할 게 무수히 많다.
작품 자체가 희곡이라
이를 무대에서 연기할 배우를 상상하면서 읽어도 꽤나 좋을 듯한 작품이다.
어줍지 않게 고전이라는 범주에서 ‘필독’이라는 당위성을 강요하기보다
거듭되는 정독으로 서구 사회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요체를 살펴보며 음미하는 덕목이 필요해 보인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그
동안 미루고 미루다 읽었다.
성경의 욥과 비슷한 경우라고 해서 펼쳤더니 첫부분만 비슷하지
전개되는 모습은 차이가 너무나 비교대상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법학, 의학, 신학까지 깊게 파고 들었지만
조금도 지혜로워 지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결국 그는 학문을 알아갈수록 모르는 영역이 점점 커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욕망은 영혼까지도 악마에 팔 정도까지 다다른다.
그런점에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는
관능에 깊이 취해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마음을 달래 보자고 유혹한다.
고통과 쾌감, 성공과 불만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곳으로
사내 대장부는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마의 유혹은 인간을 바쁘게 만들면서 그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18~19세기나 지금 현재나 바쁜것은 여전하다.
18~19세기는 전기가 없어 낮의 길이가 짧았지만, 현대는 24시간 잠들지 않는 사회다.
어디 그뿐이랴 스마트폰 없는 현대인은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악마가 점점 활동하기 편안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24시간 편의점이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곳이며, 시급은 최저생활도 하기 곤란한 수준이다.
사람은 가끔 고독할 필요가 있다.
기도이든 명상이든 사색의 시간을 통해 자기안의 자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속도전인 현대에서 방향을 탐색하는 건 혼자만의 사색을 통해 자신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좇는다
(성경의 욥과는 너무 달라 비교하지 않겠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간접 살인하고, 주술에 빠지는 등 욕망을 따라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마지막에 선한 본성을 발견하는 순간 악마와의 계약을 이행해야 할 위기에 처하지만, 천사에 의해 구원받는다.
다소 뜬금없는 결말이다.
충실히 인간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최종적으로 선한 본성을 회복한다는 건 통속적이면서도 기득권층에 면죄부를 부여한 듯한 찜찜한 기분이다.
인간은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뒤쫓다가 결국은 선한 본성으로 돌아오며 파우스튼 결말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행복은 욕망을 따라 바쁘게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다.
정작 현실에선 인간의 방황은 선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결말이 많이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일하며 사는 것일까?
파우스트의 방황이 그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이라고 대입해보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추한 결말을 볼 수 있다.
파우스트 처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이냐,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신이든 자신의 내면이든 조용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사회에서 바쁘게만 살다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말고,
때론 홀로 신이든 자신의 내면이든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일 배송, 즉각적인 응답 서비스는 우리 이웃이 그만큼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 이웃이 처지만 바뀌면 내가 될수도 있다.
갑이면서도 누군가의 을이 되는 우리가 빠름빠름 경쟁보단 한 발 물러서는 방법도 필요할 듯 하다.
독일의 고전 명작 늙은 학자와 악마의 이야기.
독일의 고전 파우스트를,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다시 집대성한 고전 명작입니다.
이야기의 전개나 이어짐은 어설프거나 갑자기 상황이 바뀌는 듯 이야기의 흐름은 끊어지는 느낌이지만,
시적이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ˈ앞에서 연극과 단막극을 연속해서 보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하
느님과 사탄이 한 인간을 타락 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내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충실하고 정직한 인간이니 사탄인 네가 아무리 꼬드겨도 그를 타락 시킬 순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탄이 말하기를,
'그럼 제가 그 하나느의 충직한 종복인 인간을 한 번 꼬여 타락시켜 보나이까?' 하고 허락을 구하고
하느님 께서는 네가 그리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허락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사탄인 메피스토펠레스는
나이든 학자 파우스트를 찾아가 타락으로 유도하고,
인생을 오로지 학문과 정신의 성숙을 추구하며 늙어버린 파우스트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소원을 빌게 됩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마녀의 비약을 먹여 젊어지게 하고, 젊
어진 파우스트는 젊은 처녀 그레트헨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비극에 고뇌하고 방황하는 것으로 1부의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그리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죠.
1부에서 그 비극을 겪고 좌절하지만
2부에서 파우스트는 괴로워하면서도 또 다시 새로운 열정에 빠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이번에는 황실에서 황제와 만나면서 또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황제의 무리한 요구에
과거에 미인 헬레나를 지옥에서 지상으로 데리고 온 파우스트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얻기 위해서 사탄인 메피스토텔레스에게 끊임 없이 요구하고
그녀를 얻고 사랑의 결실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 사랑의 결실인 아들의 죽음으로 또 다시 헬레나를 잃고서 좌절합니다.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지로 인해 나라를 혼란과 내전으로 몰아 넣은 황제는
내전에서 중요한 전쟁을 눈 앞에 둡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언으로 그 내전의 마지막에 끼어든 파우스트는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함으로서 영주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스스로 인생의 마지막에 인간으로서 세상에 기여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만,
지금 시대로 본다면 재개발 주민을 억지로 쫏아내게 되는 비극을 만들게 되고,
마지막에 자신이 이상이라 생각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끝을 맞이합니다.
사탄인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레트헨에게 인도 됩니다.
고전명작으로 칭송 받으며,
문학가들의 온갖 미사여구로 찬양하며 온갖 고상한 의미를 붙이는 '요한 볼프강 괴테의 파우스트'.
분명 재미는 있고, 문장이 시적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뜬금 없는 부분도 많고, 요즘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파우스트 자체가 고뇌하고 고민하며 노력한다지만,
희곡으로 표현해서인지 파우스트가 고뇌하는 모습은 이해가 됐지만,
고민하거나 노력하는 모습은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단지 편리한 '도라에몽'같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만 할 뿐이었죠.
그리고 살아생전 사탄에게 수 많은 요구와 혜택을 받으면서도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그리고 사탄의 입장에선 살아 생전 온 갖 소원을 다 들어주고 계약에 따라 지옥으로 끌고 갈 일만 남았는데,
천사들에게 빼앗긴 건 강탈당했다는 느낌에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극의 대본으로는 재미있지만,
보수적(요즘은 정치때문에 그 의미가 상당히 변질 되긴 했지만...)인 입장에서의 요즘의 도덕관념이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신과 악마, 고대 그리스의 신과 전설등을 엿 보면서 재미있는 상상에 빠질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파우스트 다시 읽기(1)
밀리터리 군사분야에서 자주 나오고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의 원조인 독일의 판저 파우스트는
전차를 부수는 ‘주먹’이라는 의미로, 괴테의 이 작품 <파우스트>는 독일어로 ‘주먹’이라고 합니다.
본디 파우스트라는 캐릭터는
독일 태생의 연금술사, 마술사, 왜소한 체격과 기묘한 안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1480년에서 1540년까지 종교 개혁가들로부터 그가 언급된 기록이 있는데,
스스로를 흑마술을 사용할 줄 아는 이로 마술사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단 허풍쟁이, 사기꾼으로도 더 유명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지옥에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그는 희곡 등 여러 문헌에 단골처럼 출연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에 대해 기록한 문서들의 거의 대부분의 결말은 악마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로 묘사되어 있어서
'악마에게 넘어가면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다.
따라하지마!'라는 식의 뉘앙스로 끝나면서 사라들에게 교훈아닌 교훈을 안겨주는 인물로 묘사되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
파우스트를 다룬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작품
괴테의 희대의 작품이자 희곡인 파우스트입니다.
파우스트는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 중 하나로써,
독일 교양 자산의 핵심이자 어떤 경우에도 쓰일 수 있는 인용의 보고라고 하죠.
패러디의 대상이기도 하고, 연극으로 연출되며, 음악으로 작곡되고,
희극으로 각색되는 등 항상 양파와 같이 까면 깔수록 새롭게 다가오고 와 닿아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항상 연구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어느 정도로 확장이 되어서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게 되냐하면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려는 구상을 했지만 끝내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고,
구스타프 말러는 그의 8번 교향곡에서 파우스트의 제2부를 가사로 채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술계에선 램브란트, 들라크루와 등이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그린 회화도 있다고 할 정도로
사회 문학 예술 등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봐도 무관할 정도이죠.
또한 일본의 만화의 거장인 데즈카 오사무는 파우스트에 매료되어서 3번이나 만화로 그릴 정도였고,
여러번 애니화를 추진하려다가 번번히 무산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사후에 80화 분량의 파우스트 애니화 시나리오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그중 19, 20세기에 파우스트는
독일과 동일시되는 인물로 여겨져서
가장 독일인다운 독일인이라고 불려져서 그는
'행동하는 인간, 특히 남성'으로서 투쟁과 도전에 대한 부분에서
이 작품은 나치의 히틀러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악용되었으며,
이렇게 악용된 파우스트의 행동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불행을 가져왔죠.
이 부분이 어쩌면 파우스트 작품의 치명적인 흑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우스트는 언뜻 보면 무척 흥미로운 소재와 배경의 작품입니다.
누구나가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선택의 결과와
그로인해 생겨난 파장과 그의 책임과 결과에 대한 원초적 욕구에 대해서 풀어놓고 있는 작품으로
인간과 악마의 계약,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쾌락에 의한 타락의 과정을 직설적으로, 또는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죠.
주제는 인간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악마인 메피스토는 생고생을 해가면서도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려 하고
파우스트는 이의 갖가지 혜택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에 갈증과 부족함에 욕구에 대한 갈망에 목말라 하죠.
이 부분이 인간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하죠,
가지면 가질수록 끊임없이 더욱더 갈망하게 되는 부분.
그가 고뇌하는 주제는
오늘날에도 연구가 되는 부분이자 궁금증을 자아내고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것이고,
작품 내내 끝없이 고뇌하던 그는 마지막 순간 명확한 지향점을 찾으면서
그 순간에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를 외칩니다.
작품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초인적인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이른바 '파우스트적 인간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끊임없는 지식욕에 이끌려 자신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부족한 부분인 장애에 대하여 초인적인 의지로 맞서나가는 유형의 인간으로 보여지고 비춰지고 있죠.
그는 인간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한계를 거슬러서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굴복과 시간과 공간 등 인간을 둘러싼 모든 굴레와 벽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인간을 가두고 있는 지식과 능력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이는 신이 인간에게 준 능력중 하나이자 엄청난 능력이라고 하죠. 바로 한계에 대한 도전을 통한 성장과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즉, 그는 인간세계의 한계 그 자체에 맞서는 인물이고,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구원되는 것이죠.
메피스토의 악한 계획에 저항하지 않고 계속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그의 모습은 노
력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주장도 있지만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운명임을 알면서도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신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을 미루어 볼때
수동적이라는 견해보다는 그가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너무도 어렵고 난해하고 읽어나가기 힘들었던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작품입니다.
신화와 희곡적 진행으로 인한 가독성은 물론
지지부진하게 해서 읽어나가면서 진이 빠지게 하지만 핵심은
괴테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지식을 구하려는 것은
곧 신의 뜻으로써 끊임없는 노력은 곧 신에게 귀의한다는 메시지를 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에서 신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도운다고 했듯이
바라고 갈망하고 원하고 그리고 그 원하는 바를 위해서 노력하는 이에게 신
은 가상하게 여겨서 쥐어준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파우스트는 헬레네의 옷에 이끌려 천상으로 올라가죠.
헬레네의 혼에 의해서 구원을 얻은 것으로 결론이 지어지는데,
사랑의 화신인 여성의 힘을 느껴진 대목입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궁금증과 그 궁금증으로 인한 의문,
그리고 그로인한 노력등은 괴테가 신문학에 눈을 뜬 시기부터 82세의 고령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작품에 매달리게 한 원동력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지식에 대한 열망과 갈망과 갈증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으로 읽고나서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너무도 힘들었던 작품으로 한동안은 펼치기가 힘들거 같습니다. 아무튼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파우스트 다시 읽기 (2)
파우스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이라는 독일 작가가 괴테와의 만남을 통해 기록한 '괴테와의 대화'가 그것이다.
우리에게 에커만이라는 인물은 참으로 생소하고,
그의 작품이랄 만한 것이 번역된 바도 없기에
오직 괴테를 만나게 해 준 다리가 되는 인물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의 몇몇 작품들이 독일에서는 의미있게 읽히고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대문호 괴테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 고스란히 그에게 있으니 말이다.
파우스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소위 '내 인생을 바꾼 책'정도로 정의할 법도 하다.
물론, 책 한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점에 대해서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대학에 들어, 좀처럼 전공에 정을 붙이지 못하던 터에,
이런 저런 문학작품에 관심을 품던 어느 날. 괴테의 파우스트가 손에 잡히게 되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교양과목에서 언급된 것도 아니었고, 과제로 읽어가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았으니.
심지어, 학교 서점에서 내가 파우스트를 구입하자,
며칠 뒤에 파우스트가 서점의 한 귀퉁이에 높이 쌓여 있던 걸 발견하고는 왠만해서는 읽지 않는 책을 샀더니,
교양과목 숙제라도 낸 줄 알고 서점에서 급히 쌓아놓았구나 싶었던 일도 있었으니.
아무튼 괴테로 하여, 나는 어쩌면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던 것 같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파우스트를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치 심오한 탐구와 실험의 세계로 빠져든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젖기도 했고,
착실히 다니던 교회도 드문드문 예배를 빼먹는 일을 서슴지 않기도 했으니.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접하고 나서는 그 심각한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파우스트를 통해 느꼈던 심오함이 상당부분 익살로 대치되기도 했다.
인간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가장 높은 지성을 지닌 인간 파우스트와 영혼매매계약을 맺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의 영혼을 영치하는 악마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는 익살스런 존재로 인식되었다.
괴테가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해서 갖는 애정이 나로 하여금 생각을 되돌리게 한 점이 있기도 하거니와,
괴테의 생각을 읽고 난 후에 다시 펼쳐 본 파우스트는 좀 더 여유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파우스트박사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한생 하나가 찾아온다.
그를 맞이한 것은 여행 준비에 여념이 없던 파우스트 박사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 무엇을 배워야 할지,
그리고 자신이 배우는 것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지를 묻는 학생을 위해,
처음 이 귀여운 악마는 그저 그런 조언을 던진다.
당시 헤겔의 철학이 누리던 교과서적인 지위를 농하듯이,
논리학을 배우고, 헤겔의 변증론(직접적으로 헤겔과 변증론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는 형이상학을 배워 학문의 바탕을 탄탄히 하라는 조언을 준다.
하지만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고 대답하는 학생.
악마성을 드러낸 그는 자신의 악마적 본성을 깨닫고는 의학공부를 해서, 여자들을 꼬시라는 조언을 준다.
금새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간 학생..그는 다시한번 파우스트를 찾아온다.
수년의 세월이 지나, 몇 번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정도 열정이 빠진 파우스트와
재미가 시들해진 메피스토펠레스를 향해 의기양양한 학자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역시 그를 맞이한 것은 파우스트를 대신에 늙어버린 듯한 메피스토펠레스다. 악
마가 인간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은 괴테의 창조적 유희인 셈이다.
자신을 농락하고 속였다는 말로 악마를 몰아부치는 학자.
과거의 학문과 성현들의 가르침이 무의미하며,
신학문이 진정한 진리임을 거세게 주장하는 그에게 악마도 밀리는 듯 하다.
괴테는 다시한번 이 학자에게 뉴튼주의자들의 모습을 부여하고 있다.
젊은 학자들이 헤겔을 뛰어넘어 바로 정립된 학문을 되찾아주기를 기대했건만,
기껏 헤겔철학을 극복했나 싶더니,
고전을 무시하고 신학문의 오류에 빠져 버린 이들을
메피스토펠레스의 기력이 쇠한 듯한 허망한 목소리를 빌어 탄식하고 있다.
처음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만해도,
이 대화들을 자못 오해했었다.
이 학자가 떨쳐내는 말들이 파우스트의 삶의 진수를 모르고
막연히 고전과 옛 학문에 빠져 자신이 인류최고의 지성이라 믿는 오류를 깨뜨리던 말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젊은 학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신세기를 여는 찬연한 지성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악마를 통해 신학문의 철없음을 비트는 괴테의 뼈있는 표현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튼, 이 두 번의 대화를 통해, 파우스트의 에피소드를 하나 창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파우스트로 오인한 악마의 말을 듣고 고뇌하며 삶을 살아가던 한 청년의 방황과 모순된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가 과연 다시금 깨닫고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
이 학자의 삶을 언젠가 따라가 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괴테와의 대화에서, 괴테는 파우스트를 고전과 낭만의 화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전의 원시적인 힘이 18~19세기의 독일 문학에서는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허약함을 담은 낭만주의가 만연해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고전의 힘으로 낭만주의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어떻게 표현하든 고전이 낭만주의의 허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감성이 얼마나 나약해졌는지를 생각하면,
비록 2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괴테가 마치 오늘의 젊은이들이 가진 나약함을 예언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식의 젊음을 위로하겠다는 시도는 몹시 낭만적이다.
낭만주의가 그들을 위로하리라는 생각에는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파우스트 박사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지성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을지라도, 그에겐 삶이 없었다.
막연한 권력과 사랑에의 동경이 있었을 뿐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뭔가 문제가 있고 허술한 시트콤을 파우스트에게 연출해 주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파우스트의 환상을 낱낱이 파헤쳐주는 긍정적인 효용이 있었다고 본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격정은 결국 죽음과 임신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해버리는 자신을 보게 해 주었고,
고대의 여신과 같은 헬레나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의 손에는 죽음과 허상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 사라져버리는 헬레나의 모습은
우리가 갖는 지식들에 얼마나 많은 허상이 많이 담겨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삶은 망상이 아니요, 실상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철저히 경험하고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인간적인 노력이고 구원의 길임을 괴테가 말하고 있다.
에커만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괴테의 외아들은 죽음으로 집에 돌아오게 된다.
세상을 경험하겠노라고 떠난 그가 오히려 죽음이라는 탕자가 되어 돌아온다.
괴테는 의연했지만, 어느 순간 피를 쏟으며 잠시나마 절명하게 된다.
그리고 파우스트를 완성한다.
곧이어 다가온 괴테의 죽음은 이 작품의 2부가 얼마나 현실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지를 대변해 준다.
젊의의 때에 시작한 막연히 아름답던 1부와는 달리,
꿈꾸던 삶이 퇴색하고 현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년에 가서야 극명하게 경험한 천재 문학가를 통해, 그려진다.
파우스트를 통해, 다시한번 막연한 꿈을 꾸며 다가선 삶을 새삼스럽게 느껴보게 되었다.
마치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파우스트가
파우스트의 책 속에 등장한 어린 학생의 눈에 비친 메피스토펠레스의 현혹이었다면,
비록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지만,
이제서 다시 읽은 파우스트는 삶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내가 좀 더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괴테의 깊은 충고로 다가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