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그리고 멀티 페르소나
서머싯 몸. (2012). 『 달과 6펜스 』동서문화사
이강문
“내 이럴 줄 알았어.” 책을 읽는 동안 ‘달과 6펜스’가 무슨 뜻인지 눈에 불을 켜고 살폈지만 마지막 페이지가 끝날 때까지 ‘달과 6펜스’가 무엇인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럴 것 같았어.’ 대놓고 낚시질을 당한 느낌으로 작품해설까지 읽고 서야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은 작가의 전작 <인간의 굴레>에 대한 서평에서 따온 말이라는 것을. 그 서평에는 “주인공 필립은 ‘달’을 동경한 나머지 발치에 있는 ‘6펜스’ 은화는 보지 못했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이것을 읽은 서머싯 몸이 ‘달’은 이상을, ‘6펜스’는 현실을 나타내는 비유로 받아들여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에게 응용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상을 추구하고자 현실을 철저히 무시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화자 ‘나’는 사후(死後)에 작품을 인정받은 예술가 스트릭랜드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을 동경한다. 스트릭랜드는 한 가정의 가장이요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증권중개업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40대 중년의 남성이다.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일과 역할에 근면했던 그가 별안간 사라졌다. 일, 가정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철저히 무시한 채, 프랑스 파리로 떠나 버렸다. 중년 남성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그가 바람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는 생뚱맞게도 화가가 되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별안간 버림을 당한 스트릭랜드의 부인은 화자 ‘나’에게 그를 찾아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고, 부담스러운 일을 떠안은 나의 스트릭랜드 추적기는 그렇게 시작이 된다.
이상을 좇는 스트릭랜드의 발자취는 영국에서 프랑스로 그리고 다시 남태평양의 타이티 섬으로 옮겨간다. 그러는 와중에 프랑스와 타이티 섬에서 각각 아내를 두게 되지만, 그에게 아내는 단지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화가가 되겠다는 이상을 좇는 주인공은 현실적 필요를 철저히 무시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삶은 철저히 핍절했다. 결국 그는 한센병에 걸려 마지막 벽화를 완성하고 죽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처럼 그의 죽음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면서 그의 일생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발표되고 그의 작품은 추앙을 받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현실 사이를 조율하며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현실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상은 늘 동경의 대상이다. 때문에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그로 인해 떠안게 되는 고통 조차도 기쁘게 감내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발걸음 끝에서 꿈을 이루었느냐, 이루지 못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런 생각들이 그동안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멀티 페르소나’ 시대를 사는 지금도 그러한가? 이제 사람들은 일명 ‘부캐’로 불리는 제2, 제3의 정체성을 덧입고 활동의 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는 SNS와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자신의 다양한 개성을 개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상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이제 한 가지 정체성에 만족하지 않고 교집합을 이룰 수 없는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그것을 즐긴다. 그러니 굳이 이상을 선택하고자 현실을 저버릴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한쪽 길을 선택했기에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시대가 이제는 아닌 것이다. 요즘 유튜브 요리사로 맹활약을 하는 류수영의 본캐는 배우이다. 그러나 요즘 그는 요리사로 더욱 유명세를 얻고 있다. 원래 요리를 좋아해서 다양한 요리책을 섭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요리해주는 기쁨을 맛보던 그가 유튜브를 만나 날개를 단 셈이다. 본캐와 부캐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본캐인 배우로 더 활약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다양한 정체성을 넘나들려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 견고해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분명한 정체성 위에 다양한 캐릭터를 쌓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이상을 좇느라 가족도 버리고 비윤리적 행위도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그의 아내는 하루 아침에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그의 두 자녀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해야 했다. 또한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녀의 원가정은 풍지박산이 났다. 이상만 있으면 굶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극단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행히 그의 사후에 작품을 인정받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대가 지불은 탐탁치 않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어떤 길이 열릴지 모르니 당신도 시도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