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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6:9-13)
시작하는 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말씀하셨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크고도 은밀한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사도직을 수행했다. 기도 없이는 절대 사도직을 수행 할 수 없었다. 신앙생활 할 수도 없다.
마르틴 루터는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식물이 숨을 쉬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생명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기도생활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다(basic). 스포츠에서 기본기(basic skills)는 하루아침에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공들여도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는 것이 기본기이다. 프로선수들이 침체(slump)에 빠지는 것도 자기도 모르게 기본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본기를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기본기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는 프로 선수들은 2부리그로, 아니면 실업팀으로 밀려나다가 결국은 조용히 은퇴하고 그라운드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기도의 모범(role model)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의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the hypocrites)의 쇼에 불과했다. 그들은 전혀 기도의 기본이 안돼 있었다.
문제는 현실교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흉내 내는 외식(show)하는 기도 자들(the hypocrites)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 들으시라고 기도하는 건지, 사람들어라 광고하거나 설교하는 건지 구분이 안되는중언부언(허튼소리, meaningless words, babble on and on)하는 기도가 너무 많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고 가르쳐 주셨다. 메시지 성경에는 “그저 단순하게 기도하면 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명은 “여호와(yehowah)”이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AM-WHO-I-AM”(출3:14)고 자신의 본 이름을 밝히셨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감히 부르지 못하고 “나의 주(adonai)”(창18:3)라고 불렀다.
신약에 와서는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꾸어 주셨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백성관계에서 가족관계로 바꾸어 주셨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Abba, Father)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고 확인해 주었다. 감히 범접 못할 여호와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계신 아바 아버지(aba pater)께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구약의 초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으셨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했다. 행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더럽힐가봐 염려해서 이었다.
구약의 말기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백성들 중에 만연했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고 한탄하셨다.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렵혔다(말1:12).
우리 주님은“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공동번역에서는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공동번역). 메시지 성경에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소서, Reveal who you are”라고 번역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불신자들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더럽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에덴동산에 잠시 임하셨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의 불의한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여호와의 동산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잠시 철거되었다. 이미 추방된 에덴동산의 낙원에는 인간이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버리신게 아니시었다.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예비하셨다.
본문에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 주님은 부연하여(amplification)“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당부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세상 나라는 의와 불의가 공존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는 그분의 의(뜻)만 존재할 뿐이다.
만사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기도에도 우선순위(the order of priority)가 있다. 기도에 먼저(above all else) 구할 것이 있고, 나중에 구해도 늦지 않은 것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God's kingdom is already among you)는 의미였다. 그들 가운데(among)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의(義)로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심령, 가정, 교회, 직장, 사회, 나라, 세계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사명은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전도와 선교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thelema)은 인류의 구원이다. 하늘에선 이미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다. 이루어진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은 더 중요하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요19:30)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지 성경에는 “든든한 세끼 식사로 우리가 살아가게 하소서”라고 번역했다.
제자들이 선교활동을 하자면 나그네 생활은 필연적(inevitablity)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자면 기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성지순례를 하다보면 ❶터키의 갑바도기아 지하동굴, ❷이태리의 카타콤 공동묘지, ❸이집트의 기독교인 빈민촌 ❹이슬람국가의 기독교인촌 같은 곧들을 방문하게 된다. 나그네된 기독교인들이 모여 살든 곳이었다. 그러한 나그네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오늘 하루의 일용할 양식”이다. 나그네에겐 내일에 대한 약속이 없다. 하루살이 인생들이다.
우리 주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고 말씀하신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소위 아담이 지은 원죄(original sin, The sin)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함을 얻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지은 자범죄(actual sin)때문이다. 원죄가 해결됐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한평생 죄에 코 꿰어 끌려 다닌다. 성경에는 죄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란 말씀에서 사용된 죄(opheilema)란 말은 “적대 행위, 대항하고 대적하는 행동(against), 도리에서 어긋난 잘못된 행동과 행위(the wrongs that others have done to us), 많고 적게 지고 있는 빚(debts)같은 것들을 말한다.
이런 일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기에 죄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것까지라도 죄로 여기셨다. 내가 남에게 그런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받아야 한다. 남이 나에게 그런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제자들)에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마18:22). 용서는 무한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한 두 번은 용서하지만 그다음은 글쎄~~~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한 후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용서의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앙금이 마음한 구석에 남아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❶하나님 아버지는 더 큰 복과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 경우가 있다. ❷반면에 사탄은 우리가 받은 은혜와 복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 유혹하는 시험(temptation)을 시도 때도 없이 시도해온다.
우리 주님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십자가의 고난의 시험을 앞에 놓고 기도하러 가셨다. 거기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 ❶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일반제자들). 주님이 계신 곳에 앉아만 있어도, 하나님 앞에 앉아만 있어도 역사가 일어난다. ❷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❸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❹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❺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26:31-45)고 말씀하셨다.
“여기앉아 있으라, 깨어 있으라,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제는 자고 쉬라.”~~~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고 말했다. 시험은 천태만상으로 다가온다. 구름떼와 같이, 벌떼와 같이 몰려온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악마(사탄)와 그의 악독에 빠지고 말았다. 인류는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미련한 인간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잠13:19)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공생을 시작하시기전 광야에서 악마(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지만 이겨내셨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는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할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다.
끝맺는 말
주님 가르친 기도의 끝맺음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나라(the kingdom)와 권세와 영광은 사람의 것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것임을 선언하고 인정함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것이 능력있는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