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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 두었던 노트에서 언니가 옛날에 써 둔 글을 찾아내고,
얼마전에 동생 그레이스가 만들고 있는 책에 실으려고 간절히 찾던 글이라 여기에 옮긴다.
형 따라갈 동생이 없다더니...언니의 글을 읽으면서
엄마의 젊은 시절을 가장 많이 보아온 언니의 가식없는 증언들에
동생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사건들과 추억들에...어떻게 동생이 형을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나도 언니와 세살밖에 차이 나지않아 기억은 다소 나지만
이렇게 언니처럼 소상하게 기록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놀라기도하고...감동스럽기도하고...
우리집의 파란만장한 가족사이지만...
우리 대부분이 어떤 모양으로든 겪고 살아왔던 한 부분이기도해서
감히 여기에 옭긴다.
회고 (어린 시절의 추억)
어머니에게는 그냥 읽고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들이 많아 문집이라도 만들어 길이 남기고저 그동안 쓰신 글들을 이것저것 모아 정리 하다 보니 신학문이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시고 규중에 묻혀 혼자 익히신 글들이 어찌 그리 어렵고 유식한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께 가지고 가 여쭈어 보고 풀이를 들어보면 주옥같은 문장들이 금방 이해되고 새삼스럽게 어머니의 아름다운 글 솜씨에 탄복하게 되며, 우리는 왜 그 좋은 글 솜씨를 물려받지 못했는지 유감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도 뭔가를 써서 어머니의 글 모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 봤으면 하고 생각만은 간절하나 도무지 글재주 없으니 생각은 이것저것 머릿속에 가득하나 글로서 표현하려면 깜깜하니 한심한 생각이 절로 나고 이제 와서 가슴을 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마는 그래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의 젊으셨을 때의 얘기들을 한번 써 보면 어떨까 하여 필을 드니, 철없던 시절의 이런 저런 추억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어머니는 이퇴계선생님이 태어나신 곳, 온혜 촌, 진성 이씨 노성정 종가 기차 집에서 태어나셨다.
함초롬히 곱게 피어난 한 송이 백합처럼 곱게 자라서, 겨우 16세에 외내 광산 김씨 후조당 종가의 셋째이신 우리 아버지와 혼인하시니, 박꽃같이 흰 살결 보름달처럼 환한 그 당시의 미모의 어머니를 생각해보니 정말 아버지는 그 때 복도 많으셨다 싶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시고, 좋은 가문에 장가드시고 미인을 만나셨으니 사나이 대장부 이에서 더한 복을 어찌 바라리오.
어머니는 그 어린 나이에 신행 와서 층층시하 그 많은 낯선 식구들에 섞여 시집살이 어떻게 감내하셨는지 거의 같은 무렵에 신행 오신 귀이네 이지매와 항상 동고동락 하셨다하니 지금도 두 분의 정은 남다르시고 무실 아지매와 세분이 서로 위하고 서로 흉보며 농담하며 아끼며 지나시는걸 보면 언제나 마음이 흐믓하고 든든하다.
시집살이 10년 만에 고모가 계신 상주로 신 살림나시니, 여기서 약 10년 동안은 우리 어머니의 일생 중가장 행복하고 단란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살림 난지 1년 만에 오빠를 낳았으니 결혼한지는 10년 만이라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겠으며, 자정도 남다르신 우리 아버지 그 젊으신 모습에 활짝 웃으시며 좋아 하셨을 것을 상상해보며 깊은 감회에 젖어든다.
나 그리고 인숙이, 거듭 딸 낳는 바람에 섭섭하시기도 하셨겠지만, 농잠학교 졸업하신 아버지 상주 군청에 취직되시니 안정된 직장, 매사에 열심이시니 더 무엇을 바라셨겠으며, 살림 솜씨 알뜰하신 어머니에게 부족함이 없으셨으니 우리집의 가장 걱정 없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인숙이 나던 해에는 무슨 액운이었는지 태중인 어머니 부엌에서 밥 지으시다 치마에 불이 붙어, 놀라신 아버지께서는 경황 중에 불을 끈다고 치마를 손으로 비비다가 양손에 화상으로 오래 고생하시고, 그 때 홀몸이 아니셨던 어머니는 또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나중에 인숙이 났을 때 볼에 빨간 점이 있었으니 아마 그때문인가 보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그 해에 우리 집안의 종손인 창한이오빠 결핵으로 투병 중에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그 병 수발을 어머니가 다 하셨고, 너무 고통스러워하여 눕히지도 못하고 앉은 키 대로 양쪽에 이불을 쌓아 올려 이쪽저쪽 기대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녹이니, 옆에서 동동촉촉이 오죽했겠으며, 그러다가, 그 때만해도 의술이 한심하여 요즘 같으면 병원에서 얼마간의 치료로 간단히 나을 것을 그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와 상주 고모님, 어머니 모두 방바닥을 치시면서 통곡하시던 모습이 그 때 네 살이던 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걸 보면 얼마나 큰 슬픔이었으며 충격적이었나 가히 알만하다.
그 양쪽에 쌓았던 이불을 하나도 못쓰고 다 불태웠으니 그 후에 우리가 이불 가난이 들어 까만 무명 이불 하나로 우리 오남매가 (혜자는 나기 전) 부챗살처럼 누워서 발을 따뜻한 아랫목에 모으고 잠자던 기억을 하니 흥부가족이 따로 없었고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고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께서 옥산 면장으로 가신 일이었다. 상주 군청에 계시던 아버지께 옥산 면장으로 발령을 내리니 그때 아직 어리셨던 아버지는 발령대로 면장이 되셨다. 일제 말기의 그 암울하던 시절에 면장이 되신 아버지가 하신 일은 주위의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들을 아무도 일본군의 징용에 끌려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협조하는 척 하면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빼 돌리셨다. 덕분에 우리 이웃 또는 고만고만한 사촌 오빠들 아무도 징용에 끌려가지 않았고 무사히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 면장의 부인으로서 우리 엄마는 얼마나 무섭게 허리끈을 졸라매고 살림을 하셨는지 우리는 정말 호강 한번 못해보고 항상 꽁보리밥이 아니면 감자밥 콩깨묵 밥을 진저리나게 먹었다. 오빠가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면 다들 친구들이 참말로 너희 집에서도 그런 밥을 먹느냐고 하더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일이다.
아버지가 면장이 된지 이 년이 채 못 되어 해방을 맞았다. 모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뻐하는 그 때 우리 집의 환란은 시작된 것이다. 만세를 부르며 면장 집으로 들이닥쳐 아버지는 군중들에 의해 끌려가고 일부 군중들은 우리 집을 온통 부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알뜰히 닦고 관리하던 모든 살림살이들이 아작이 나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군중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안방에 들어가 농속까지 온통 뒤지며 살림들을 꺼내 짓이기고 밟으며 그리도 난리를 치는 동안 어머니는 돌도 안 된 동생 혜자를 안고 마루에 꼿꼿이 앉아 미동도 않으셨다. 당시 내 나이 열 살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엄마가 얼어버리셨나? 정신을 잃으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나도 한 쪽 옆 기둥에 숨어 너무 무서워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나왔으면 아마 밟혀 죽었을 것이다.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미친 것 같았다. 엄마가 너무나 차갑게 똑바로 앉아계시니 그들도 엄마는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흥분한 군중들이 휩쓸어 나가고 어둑할 무렵에 엄마는 아기를 업고 나를 보고 아버지를 찾으러 가자 하셨다. 엄마의 손을 잡고 가깝게 지나던 이웃 분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어딘지 지금 정확히 모르겠고 아무튼 인적 드문 언덕아래 거적에 덥혀 있는 무엇이 있어 엄마가 들추니 아버지께서 피투성이로 거적 밑에 정신을 잃고 누워계시는 것이었다. 엄마는 통곡하며 아버지를 일으키니 아직 숨을 쉬시고 계셨다. 어떻게 집에까지 아버지를 끌고 왔는지 기적 같은 생각이다. 상주 아지매 동생의 처참한 모습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던 모습..어찌 안 그러셨겠는가. 안동 외내 군자리에 사는 사랑하는 동생을 상주로 끌어 살림나게 하고 그렇게 우애 있게 지내던 동생이 그 꼴로 다 죽게 생겼으니 그 충격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어린 우리들은 아버지는 둘째고 상주아지매의 온몸을 주무르며 울고불고 했던 기억...제일 침착한 사람은 바로 엄마이셨다. 엄마는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하시기라도 하신 듯 침착하고도 의연하게 사태를 수습하셨다.
엄마의 지극한 간호로 살아나시기는 하셨지만 그때 아버지는 고질병을 얻으신 것이고 그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된 동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무섭던 일들, 어머니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태연하게 당하시니 고매하신 인격과 교양을 한 몸에 지니셨음을 그때 어린 나에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 청산하고 고향 안동 군자리로 여덟 식구가 들어갔을 때 어린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동기 종반이 제일이라고 느껴진다.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감싸주시니 남이라면 어림이나 있었겠는가. 그때 5학년이던 오빠가 눈치도 없이 10월 9일이 생일날인데 아무것도 안 해준다고 화가 나서 마루 끝에 걸터앉아 울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걸 야단치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외내에서 온혜까지는 십리길인데 그해 가을에 어머니는 나만 빼놓고 오남매를 데리고 친정인 온혜로 가셨다. 아버지는 대구에 가시고 그 서럽던 시절, 누가 야단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 동안이 얼마인지는 지금 생각이 안 나지만 어쩌면 그리도 가족이 보고 싶었는지, 다시 만나면 혜자를 많이많이 업어줘야지 벼르기도 했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온혜에서 엄마가 새 옷을 두벌씩이나 해서 인편에 보내주셨다.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새 옷을 입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던 내 모습이 아름다운 외내의 배경과 함께 동화속의 공주인양 기억에 아련하다.
온혜에서 어머니는 예안으로 살 집을 마련하여 오남매 데리고 가셔서 나를 예안으로 부르셨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동짝할배 댁에 갔더니 그 때, 여섯 살이던 조그만 종순이가 앞장서서 우리 집에 데려다 주었다.
집은 깜짝 놀라게 크고 마루는 널찍한데 내가 오매불망 그리던 식구들이 아버지만 안계시고 다 모여 있었다.
따져보면 한 달 좀 넘는 동안 밖에 안 되는데, 어린 마음에는 십년이나 되는 듯이 그동안이 그렇게 길고 지루하게 여겨졌었다.
방에는 아버지가 조부님께 물려받은 땅에서 난 쌀가마가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쌀밥 한번 푸짐하게 먹었었다. 그때만 해도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이 허다했으니 쌀밥을 먹으면서도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었고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던 기억이다.
우리 집에서는 낙동강이 가까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는 낙동강물이 참 맑고 깨끗했다. 빨래는 언제나 강가에서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동생 인숙이와 함께 가지고 온 빨래 감들을 내려놓고 빨래하며 동생도 옆에서 작은 것들은 자기가 빤다고 홀짝 홀짝 놀다가 갑자기 “내 치마도 빨아야지..” 하며 얼마 입지도 않은 새치마를 벗어서 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흐르는 강물에 치마를 펼쳐놓고,
“언니야, 이거 봐라..치마 떠내리간다..” 떠내려가는 치마를 잡을 생각 않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야아! 참말로 떠내리가믄 우얄라카노?” 말렸지만 장난꾸러기 인숙이는 계속 치마를 잡을 생각은 않고,
“떠내리간다, 떠내리간다...” 손을 놓고 치마를 떠내려 보내고 있었다. 내가 놀라 잡으려 했지만 손에 닿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려 인숙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살에 휘말려 점점 빨리 쏜살같이 흘러가는 물건을 잡으러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일곱 살 열 살 두 자매가 어디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치마를 따라 물살을 휘젓고 내려갔다. 나중 안 일이지만 강둑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내려다보며 “누야아!”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같이 뛰었던 다섯 살 난 동생 중한이가 있었던 것은 우리 둘 다 생각도 못 했다. 결국 모든 물자가 귀하고 귀하던 그 시절에 멀쩡한 새 치마 하나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우리는 엄마에게 얼마나 혼날지 겁에 질려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치마는 워옛노?’ 물으셔서 ‘강물에 떠내리갔다.’ 했더니 엄마 하시는 말씀,
“같이 떠내리 가지 왜 안 죽고 왔노?” 인숙이와 나는 엄마에게 매 맞지 않는 것만 좋아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어제 일인 양 내 기억에 생생하고 그 아련한 낙동강의 추억이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생각할 때마다 내 얼굴에는 미소가 떠 오른다.
아버지는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러셨는지 자주 대구에 가시고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 없이 잘 지냈다. 오빠와 나 인숙이 그곳 예안 초등학교에 전학해 다니면서 학예회 때는 우리 형제들이 노래 솜씨를 발휘하여 독창들을 하니 그때 받은 박수와 칭찬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노래를 좋아하시고 아름다운 미성의 소유자 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오실 때마다 모두 둘러앉게 하시고 차례로 노래를 시키시며 아버지도 한 곡조 뽑으시고 하기 싫다는 어머니에게도 억지로 노래를 시키시며 즐거운 가족 음악회도 곧잘 열어 주셨다. 그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좋아만 했었는데 그렇게 정서적인 면까지 세심하게 배려하여 자녀교육에 힘쓰셨던 아버지가 그저 놀랍고 지금 생각하니 뼛속 깊이 감사한 마음 무딘 필력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때부터 이어져 온 모이기만 하면 노래 부르는 우리 집안의 아름다운 전통은 오빠에게서 성주대로 이어져 요즘은 성주의 딸 세화까지도 좋아라 손뼉 치며 즐기는 모습은 정말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아마 기뻐하시리라.
이토록 우리를 즐겁게 해 주신 아버지께서 대구에만 가시면 오래 계시고 안 오시니 우리들은 모두 기다리다 지쳐서 밤이면 호롱불을 켜놓고 다황점을 친다. 다황은 성냥의 사투리다. 성냥개비를 ㄷ자로 잡고 양쪽에서 맞대어 벌어지면 오실 날이 멀었고 좁아지면 곧 오신다 하였다.
“다황각시야! 다황각시야! 신해생(辛亥生)이 대구에 갔는데 언제 올지 빨리 영험을 내라, 영험을 내!”
어머니가 이렇게 호령을 하시면 오빠하고 나하고 둘이서 잡고 있으니 모두 빨리 오시길 바라는지라 성냥개비는 저절로 좁아진다.
그러면 곧 오실 거라고 기대하지만 엄마가 다황 각시에게 너무 호령을 해서 화가 났는지 기다리는 아버지는 좀처럼 오시지 않으셨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시던 젊은 엄마가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귀엽게 느껴지고 그 시절이 그립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어머니는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막내 혜자만 업고 온혜에 가셨다. 오빠가 열두 살인데 동생을 넷을 맡았으니, 밥은 옆집에서 해 주지만 유난히 엄마를 따르던 세 살 박이 삼경이는 저 나고 처음으로 엄마를 떨어 졌으니 밤 지날 일이 난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초저녁부터 울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달래도 끝없이 울어대니 나중엔 목이 다 쉬고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하여 오빠도 울고 나도 울고 오남매가 밤새도록 울었다. 하도 시끄러우니 옆집 아주머니가 뛰어와서 달래보다 안 되니까 인숙이와 나를 대리고 거기 이웃집에 외가 쪽 일가분이 계셨는데 엄마 언제 오시냐고 물어 보라고 하셨다. 휘영청 달밝은 밤길을 걸어 남의 집 대문을 한참 두드리니 누군가가 나와서, “울엄마 언제 와요?” 물어보니 “느그엄마 어데 갔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그날 밤 일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달은 휘영청 밝은 밤에 창호지문이 하두 밝아 날이 샜나? 내다보면 아직도 둥근 보름달이 마을을 밝히고 있고 날 새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 평생 그렇게 긴긴 밤을 경험한 적이 다시 또 있었는지 내 기억에는 없다. 그 괴롭던 일도 한 장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길이길이 남아있다.
대구에 자주 내왕하시던 아버지께서 고향에 논밭전지 다 팔아서 대구에도 살 집과 큰 과수원을 장만하셔서 그 이듬해 이사했다.
인숙이가 그때 아파서 어머니는 어린 삼경이 혜자 인숙이만 데리고 안동 나와 기차타고 가시고 무실아제가 우리 이사 도운다고 오셔서 아제와 오빠 나 중한이 이렇게 넷이 이삿짐 위에 탔으니 포장도 안 된 길을 예안서 대구까지 쉬지도 않고 달렸는데 봄이어서 춥지는 않았지만 그 흙먼지를 계속 뒤집어썼으니 도착했을 때는 입안에 모래알이 서걱서걱하고 서로를 쳐다보니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으로 먼지를 뒤집어써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중한이는 모자를 쓰고 떠났는데 내려 보니 모자가 없다. 중한아 모자 우쨌노? 하니까 내 모자! 하면서 머리를 만진다. 그게 하두 우스워서 그 형상을 하고서도 깔깔 웃었으니 도대체 모자가 언제 날아갔는지 아무도 모르도록 바람에 휘날렸어도 이사한다는 사실만이 철없이 기뻤고 그 지경이나마 자동차를 타는 것이 기분이 좋았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 들떠 있었다.
그 때 내린 곳이 대구대학 병원 앞이었는데 길이 어쩌면 또 그렇게 넓은지 운동장인지 길인지 분간도 못하고 촌닭 잡아 장에 내다놓은 형국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대구에 와서 자리 잡고 우린 명덕초등학교에 전학했고 아버지 어머니 깨서는 모두 과수원에 매달려 고생도 많이 하셨다. 그 척박한 청석땅에 심어 놓은 나무가 기름질 리 없고 감은 열렸다 하면 익기도 전에 다 떨어지고 끝까지 남는 것은 조금밖에 안 되니 일년 내 공들여 돌보며 가꾸어 추수라고 해 놓으면 다음해 농비가 안 남아 하는 수 없이 또 빚이 진다. 이러저러 부모님은 심신이 고달프셨지만 우리 들은 그 과수원에서 잘도 커갔다. 봄이면 능금 꽃 활작 피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일 때 그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마냥 뒹굴었고 감꽃이 노랗게 피었다 떨어지면 온 산이 노랑 물이 든다. 뛰어 다니며 감꽃을 누가 많이 줍나 내기도 하고 주렁주렁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끈을 만들어 머리에 장식하고, 사시사철 산을 오르내리며 지칠 줄 모르고 노래 부르고, 동요 에서부터 가곡 춘향아리아까지 오빠를 따라 인숙이 중한이 삼경이 누구 하나가 노래를 시작만 하면 저절로 합창이 되어 온 산에 메아리 칠 때 마음은 한없이 부풀고 하늘을 향하면 훨훨 나를 듯 그 때는 참 행복했었다. 누가 우리 보다 더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고 싶다.
오빠가 육 힉년이 되었을 때는 어렸지만 참 열심히 공부 했었다. 내가 자다가 깨보면 오빠는 언제나 책상도 아닌 밥상에 책 놓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어머니는 밤마다 찬물에 머리 감고 유일한 외출복인 까만 유똥치마에 쑥색 양단 저고리 곱게 차려 입고 나가셔서 아무리 추워도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소반에 정한 수 떠놓고 북두칠성에 빌고 조상님께 빌고 조앙에 빌고 장독신에게 빌고...다 생각이 안 나지만 아무튼 일곱 신에게 밤마다 빌었다. 꼭 일곱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을 어찌 하늘인들 감동치 않았으랴. 오빠는 거뜬히 경북중학교에 합격했고 그때 명덕초등학교에서 육학년 전체에 딱 오빠 하나만 합격했으니 오빠가 졸업하는 날 온통 상은 독차지했고 졸업생 대표로 나가서 답사 읽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너무 기쁘셔서 학부형 대표로 연단에 오르셨을 때 책상을 꽝 치시며 연설을 하셨다. 그때 재학생이던 나도 너무너무 기뻤고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가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었다. 모자에 양쪽 팔에 삼선도 선명한 교복 찾아 입고 어버지와 같이 대문에 들어설 때 엄마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와락 달려가 끌어안고 우시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인숙이도 언제나 공부는 반에서 제일 잘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없는 나에 비해서 동생이 너무 잘하니 샘도 났지만 그래도 남에게만은 자랑 거리였었다.
학교 가는 길은 비만 오면 찰떡을 이겨놓은 것 같은 오리 가량의 흙길이었다. 걸으면 신발이 찰떡같은 흙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발만 쑥 빠져나온다. 신발을 다시 떼어 신고 한 발 간신히 떼어 놓으면 저쪽 발 또 그렇고 그러다가 엎어지면 흙투성이가 되어 고생하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양이니 신발조차 신통치 않았던 그때 그 고역이 어땠으랴! 우리 육남매가 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는데 특히 중한이는 일곱 살 때 너무 어린 것을 학교에 넣어 더 많이 고생하였다. 함박눈이 내린 어느 날 오후 일학년이라 일찍 마친 중한이가 집에 간다고 우리 교실을 찾아왔다. 밖을 내다보니 눈이 많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서야 끝나는 내가 갈 때까지 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걱정은 되었지만 조심해서 가라고 단단히 일러 보냈는데 그날 중한이 혼자 눈 오는 진창길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흙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아이를 어떤 아저씨가 보고 지게에 얹어 집에 데려다 주었단다. 어머니는 놀라서 중한이를 받아 경황 중에 그 고마운 아저씨에게 어디 사는 분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홀연히 가버렸으니 그 후 어머니는 그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조차 변변히 못했다고 늘 미안해 하셨다. 중한이 뿐이 아니고 우리 여섯 중에 그 진창길에서 고생 안 한 사람 누가 있는가. 그 길이 포장되는 것 구경 못해보고 그곳을 떠났으니 아득한 옛날 일인 것은 분명한데 불현 듯 생각하니 어제 인듯하기도 하고 문명의 이기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인간의 귀소본능 때문인가.
인숙이는 예안에 살 때에도 학질로 자주 아팠는데 대구에 이사와서 과수원에 숲이 많으니까 모기 또한 많아서 늘 학질로 애를 먹었다. 제일 큰 감나무가 바로 집 앞에 있었는데 여름에는 저녁만 되면 수억 마리의 모기떼가 나무 주위를 맴돌면서 윙윙대며 시위를 하다가 밤이면 어디로 가겠는가? 살이 야들야들한 우리에게로 맹공격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기장 하나 속에 온 가족이 자니 학질 안 걸리고 견딘 사람은 아주 건강했던 모양이다. 다른 식구들은 별루 몰랐는데 인숙이만은 늘 모기에게 이기지 못했다. 학교에 갔다가 벌벌 떨면서 오면 이불을 두 개 세 개씩 덮어 주어도 그 속에서도 이불이 들썩들썩 하도록 떨다가 몸이 불덩어리가 되도록 정신없이 앓는다. 그렇게 심하게 앓아도 이튿날이면 씻은 듯이 낳아서 또 학교에 간다. 그 다음날은 또 학질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우리 집 특유의 기도방법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새끼줄 하나와 부엌칼을 들고 인숙이 데리고 대문밖에 나간다. 동생을 길 가운데 눕혀놓고 칼로 머리맡에 십자가를 그려 가운데 칼을 꽂아놓고 새끼줄로 인숙이를 묶는 시늉을 한 번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날은 괜찮게 넘어가는 수가 있다. 엄마는 바쁘시니까 이런 일은 언제나 내 차지다. 원시적인 행위이고 미신인줄 알지만 신통하게 맞아떨어질 때는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가 터졌을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할 때 노래 잘 하는 인숙이는 군가 경연대회에 뽑혀 나가기 위해서 연습차 학교에 갔다가 소개명령이 내리는 바람에 얼마나 혼비백산했는지 우리 집은 시내에서 오리쯤 떨어져 있으니 요즘처럼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식구들이 저만 빼고 다 피난 간 줄 알고 신을 벗어들고 울면서 뛰어 오는데 그 절박한 상황에서 오리길이 얼마나 멀었겠으며 아무리 뛰어도 발은 꿈속에서처럼 허공중에 노는 것 같았단다. 집에 까지 와서 식구들이 모두 있는 것을 보고 통곡을 하면서 신발을 집어던지던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때 내가 철이 들었다면 그 놀란 가슴을 감싸주고 안아주었을 것을 웃기만하고 놀려준 어린 내가 약이 올라있던 인숙이의 모습과 함께 지금 생각하니 차라리 사랑스럽다.
아버지는 보국대에 끌려 갈까봐 겁이 나고 오빠는 학도병에 끌려갈까봐 겁이 나서 아카시아 숲속 후미진 곳에 부자분을 숨겨 두고 밥은 끼니마다 내가 해서 나르고 태연한 듯이 집에 있으면 대문간에 누가 오기만 하면 가슴이 철렁하고 바들바들 떨렸으니 왜 그리도 태연하지 못했는지. 어머니는 군인 비슷한 사람들이 오기만 하면 금방 쌀을 퍼다 밥 안치고 쇠고기 국 끓이고 애호박 따다 볶고 계란 찌고 한 상 차려다 주면 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배불리 먹고 웃으면서 가곤 했다. 밤이면 공습경보로 불도 못키는 깜깜한데서 어머니는 소반에 정한 수 떠놓고 밤마다 그 예의 일곱 신에게 비셨다. 번번이 물을 갈아 대야 하기 때문에 나는 꼭 엄마 뒤를 따라 다니며 수발해야 했는데 북두칠성을 향해 앉으시면 어쩌면 그렇게 하실 말씀이 많은지 뒤에 서있는 나는 지루해서 깜빡 졸기도 했었다. 어머니의 그 지극정성이 하늘 끝까지 가 닿았는지 아버지도 오빠도 다 무사 했었고 아무 낙오 없이 우리 육남매는 모두 다 바르고 착하게 잘 자랐다.
우리 오빠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단 한 분인 나의 오빠 중후한 인품과 지극한 효성 우애 폭넓은 마음 씀 여러 동생들에게 낫낫치 정성스레 돌봐 주시고 하나도 소홀함이 없으며 친구 간에도 덕망 높으시니 가히 성인군자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내동생 인숙이 모든 방면에 능활하고 거침이 없으며 노래를 부르면 일류가수가 무색할 지경이며 결국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서로 그리며 살지만 내 동생이라기에는 너무 벅차다고 생각할 때가 늘 있다. 효우범백이며 매사를 언제나 나는 인숙이에게서 배운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중한이는 묵묵히 노력하는 남성적인 매력으로 우리나라의 첨단 과학에 공헌하더니 드디어는 대한민국 과학상 기술부문에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해 주니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이 이에서 더할 수 있겠는가.
만인이 칭송하는 우리 삼경이 그 잘생긴 모습 자꾸자꾸 듣고 싶은 그 노래솜씨 우리 가족 모두의 자랑이며 희망이며 막내인 혜자 그 밝고 아름다운 자태 명랑한 성격 어느 한 군데 못 미칠 것이 없는 성품 어머니의 자랑이고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
아버님께서 십년만 더 살았어도 그동안 온갖 고생 다 하시고 풍상을 겪으셨던 보람을 마음껏 느끼고 좋아하셨을 텐데 그렇게 억울하게 일찍 가신지도 30년이 가까우니 무심한 빠른 세월만 원망스럽고 영고성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의 끝없는 추억에 나 혼자 도취되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 될지 기약이 없다. 일단 이것으로 끝맺음으로 해서 읽는 이의 지루함을 덜어주고 싶다. 어머니의 글 모음에 먹칠이나 하지 않았는지 걱정된다.
1987년 3월 15일 맏딸 영숙 씀.
언니의 약혼식날 비원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버지, 종조부님, 올케언니, 언니, 형부,
대학에 갓 입학했던 나 인숙이, 남동생 삼경이, 그리고 혜자(그레이스).
첫댓글 언니! 내가 이 글을 찾아서 얼마나 오랫동안 헤맷는데...
이것이 미국언니에게 가 있었구나...
고마워! 언니! 인쇄 돌아가던 기계도 멈출 판인데...
아직 인쇄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오늘부터 인쇄하기로 했는데요...올 스톱! 시켰어요.
너무 길어 표지 디자이너에게도 말했어요. 책이 열페이지 가량 늘어날 것같으니
다시 작업해 달라고...언니! 다시 연락 할게요! 울언니 최고야! 이걸 찾아내다니...^^
늦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옛날에 읽었을텐데도 다시 읽으며 언니의 사려깊은 관찰력에, 기억력에, 총명함에 놀라고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서도 한마디 들어 본적도 없는 사건, 처음 듣는 증언에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감동을 금할 수가 없구나.
이런걸 소상히 기록해 놓은 우리 언니가 자랑스럽다.
홍관수 11.02.07. 15:13 난형난제입니다. 읽는동안 숨쉰 기억이 안나요. 눈 깜빡 거린 것도 기억 안나요.
음악소리가 있었던 것같은데 읽는 동안 음악도 잊어버렸어요. 다 읽고나니 음악소리가 들리네요. 어머니 글도 올려 주시면 안되나요? 감사합니다.
언니! 이 글은 이수인의 가곡사랑에 내가 이 글을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덧글을 써 줬는데...
이 덧글 언니 함 읽어보라고 복사해 왔어.
http://cafe.daum.net/sooin3588 이 주소로 들어가서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나와..
회원가입 디기 쉬워. 하라는데로 하면 돼. 아니면 내 아이디로 들어가보면 되구...^^
삼경이오빠 전화 받았어요?
옛날에 썼던 기억은 나는데 내가 이렇게 글을 잘썼나 싶기도 하고 나도 공부 좀 했으면 글 좀 쓰는 사람 될뻔 했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언니! 언니의 생생한 어린 시절의 기록... 나도 그 한 부분인...
읽고 또 읽습니다. 혼자 참을 수없이 한참씩 웃다가 슬프다가, 놀라다가...
아련한 안개속에 가린듯, 기억속에 뭍혀 몽롱하던, 해방당시 우리 가족이 겪었던 일들,...
엄마도 그일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없어요.
소상히 기록해준 언니에게 감사합니다.
언니의 진솔한 글솜씨 따라 갈 사람이 없네요.
<어린 시절의 추억> 그 후편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언니, 사랑해요!!!
또 쓸게 생각 나서 사이에 끼어든다.
옛날에 창한이 오빠 위중할때 내가 이거 너무 참혹 해서 안쓸려고 했었는데 엄마가 겪은 일이고
지금 엄마 안계시니 잊기 전에 기록 해놔야지.
오빠의 병이 한창 심할때 각혈을 하는데 놋대야 에 계속 피를 토하면 엄마가 너무 불상하여 머리를 잡고있으면
엄마는 그때 누가 돌아가셨는지 상복을 입고 계셨어.
하얀 치마에 새빨간 핏물이 튀어서 벌겋게 되었던 기억...
어린 나이에도 그 장면이 너무 끔찍하여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창한이 오빠가 어떻게 우리집에 와서있게 되었는지
집안의 궂으일 도맡으시는 우리 아버지가 자청해서 그리 된걸거라고 짐작해.
대구 대명동 과수원에 살 때 아버지는 동네 의사이셨다.
누구든지 아프면 우리 집에 와서 주사 놔 주고 그 시절엔 돈 받는 법도 없고
위생 관념은 대단 하셔서 주사기와 모든 집기는 다 끓이라고 명령하시면 한번 쓴 기구는 다시 쓰지 않고 꼭 끓여야 했다.
연탄불도 까스도 없는 시절 보리 집불로 끓이는일 너무 힘든일이였다.
그런일이 모두 맏딸인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다.
엄마가 늘 영숙이는 내열종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지 그 당시엔 몰랏지만 열 사람의 종이란 말인가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아버지께서는 농잠 학교 나오셧으니 간단한 의료 행위는 잘 하셨고 의료 사고도 한번도 없었으니 다행이지 요즏음 이라면 어림도 없지.
요즘에 그일이 있었다면 돌팔이 의사로 낙인 찍혀 꼼짝 없이 잡혀 가지 무사 하겠어 옛날 생각하면서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나이가 이렇게 많아도 부모 생각 나며는 아이들이나 다를게 없다.
인숙아 !너의 긴글 잘 봤어.내가 너의 이름을 막 부르는걸 조심했었는데.안토니 엄마 라고 늘편지에 그랬거든 그런데 인숙아! 해보니
더 정다운 느낌이야 앞으로는 여기서만 그렇게 부른다.혜자의 싹싹하고 나긋 나긋 한 성격 내가 제일 혜자덕을 보고있으면서 불평은
제일 많이하고 스승의 말도 잘 안듣고 내가 많이 반성 해야되 내가 참 못됬지 앞으로는 조심할게.
이렇게 쪽지로 의사 전달을 얼마 든지 하니 너무 쉽다.
이상하게 한줄 더 썼는데 없어 지고 또 더 써야 듼다고 나오니 좀 어렵네 이사 소통은 된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초보는 너무 힘든다.
"영숙이는 내 열종이다!" 라는 말 나도 많이 들었거든...
언니야! 그 말은 무슨 일이든지 맏딸인 언니를 시키면 입에 혀같이 마음에 들게 일을 하니...
언제나 엄마 주위엔 언니가 있어 엄마가 얼마나 믿어워하고 좋아했는데...
작은 언니는 옆에 없어 못 시키고..나는 너무 어려 못시키고...ㅋㅋ..
집안의 귀하고도 귀한 병든 종손을 데려다 놓고 간호하는 엄마와 아부지의 애간장은 얼마였겠으며...그 고생은 얼마였겠어?
언니의 증언으로 젊은 시절의 엄마의 모습을 알게 되었어. 언니! 고맙습니다.
언니가 이렇게 쓰지 않으면 끝내 모를 번 했지...
너무 재미 있는 예기가 생각났어 그때 내가 열살이었어 육촌 언니가 아침에 와서 시집 가는데 가저갈 편지를 써 달라고 왔거든 엄마는 밥을 안처놓고
나보고 불을 때라고 하고선 방에 들어가고 내가 불을때는데 밥이 풀풀 넘어야 다된거라고 풀풀 넘기를 아무리기다려도 넘지를 않고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누가 이렇게 밥을 태우냐고 나중에 보니까 우리가 먹을밥이 완전히 다타 버린거야.완전히 숫덩이였어.아무리 내가 어렸지만 그렇게 바보 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언니, 이어지는 덧글들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한참 지난뒤에야 여기 들어와서 보게 되었네요.
언니가 덧글을 쓰기 시작하신 이후 김인숙방이 얼마나 더 풍요롭고 정답고...사랑이 넘치는 아늑한 방이 되었는지..
언니와 혜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대화에 굶주렸었는지.. 마주 앉아 대화하듯 정감이 넘칩니다.
언니의 이어지는 예날 얘기들, 하나 하나 들을수록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고 아련한 추억에 잠깁니다.
언니, 사랑해요!!! 언니의 목소리, 반갑고 기쁘고, 저의 일상의 하루 하루를 색다른 기쁨에 젖게합니다. 고마워요!!
둘이서 응원 해주니 힘이 솟는다.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 했거든 이렇게 의사 소통이 되니 자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면 실력도 늘게
되겠지.내가 얼마나 덜렁거리고 차분 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우리 시어머니께서 나보고 던덜이 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겠어 던덜이는 돌아 가신 시어머님
작품이란다.
별로 기분 나쁜 별명은 아니고 또 좋은 말도 아님을 잘안다.
과수원에 있을때 물맑고 깊은 샘물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지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됬는지는 이무도 모를거야 어느 몹시 가물던해에 아랬동네 사람들 심지어
엿쟁이 동네 사람들 까지 줄을 달아서 우리집에 물을 길르러 왔었거든 그렇게 물을 퍼내는데도 그물은 계속 새로 새로 고였거든 그러든 어느날 샘가에 사람들이
죽 둘러서서 물을 푸니까 그지반이 조그씩 조금씩 약해진걸 아무도 몰랐던거지 어느날 그속에 돌로 벽을 둥글게 죽 쌓아 올려 있는 중에 하나가 풍덩하고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어 그래도 아무도 별로 걱정을 안했지 그랬는데 조금있다가 두개 세게 풍덩 풍덩 소리가 나드니 갑자기 하꺼번에 와르륵 천지가 진동하는소리
그렇게 해서 그샘물은 매꾸어지고 아버지 오빠 안계시니 뒷감당 할사람이 나밖에 없었잖아 내가 학교 갔다 오면서 동성로 길에 펌푸 있는 가게를 봐뒀거든 사람이
당하면 못당할 일이 없다는것을 그때 알게 되더라.그사람들이 와서 펌프 설치하니 두래박으로 하던것보다 훨신 좋잖아.그러고 얼마 안되서 그과수원은 남의 손으로
넘어 갔지. 우리집 역사의 한 패이지야.
언니, 놀라워요. 그런 일도 있었나요?
같이 자랐으면서도 모르는 일이 이렇게 많다니...
제가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서울로 온 뒤의 일이었나요?
그 물 맑은 우물에 두개의 두레박이 도르레로 오르내린 기억밖에 없어서..
존경스런 우리 언니... 갑자기 숙연해져요.
엄마가 말씀하시던 "영숙이는 나의 열쫑!" 하신 뜻이
선명해지는 순간입니다. 열명의 종 몫을 혼자 다 해내는 고마운 내딸!!
언니가 엄마에게 어떤 맏딸이었던가!! 새삼스럽게 고개가 숙여져요!
계속 생각나는대로 옛날얘기 올려주시기를..부탁드려요.
내가 소풍 갔다가 하루 종일 비를 쫄딱 맞고 집이 너무 멀어 그날밤을 친구 집에서 소풍 뒤풀이를 신나게 하고 집에는 연락할 길이 없었잖아 엄마가 그날밤 한잠도
못 자고 아침에 인숙이 넌 학교도 결석하고 우리 학교에 왔더라.학교 마치고 빨리 집에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니가 학교까지 결석하고 온게 너무 미안해서 할말을
잃었지 그런데 넌 나 만나서 안심이 되었는지 불평 한마디 않했어 착한 내동생 내가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했었는지 그냥 만나서 씩 웃고말았을거야.지금이라도 너무 너무
미안해.
그리고 인숙이 너 밀양 갔던 얘기 할까 말가. 집에 아무 얘기도 안하고 삼일 밤을 안들어왔어.하루도 아니고 사흘씩이나 둘쩨딸이 종무소식이니 엄마 얼굴이 수심이
가득했거든 딸이 소식이 없다는 말을 누구에게 할수도 없고 계속 근심에 쌓여 있다가 삼일만에 니가 대문쪽에 보였거든 부엌에 계시든 엄마가 후닥닥 뛰어 나갔어
막대기를 들고 쫓아 오는 엄마 걸음도 빨랐지만 그걸보고 도망가는 니가 더 빨랐지.인숙이너 설마 그일 잊진않았지.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들하고 밀양에 갔었대.
밀양에 간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넌 잘도 싸돌아 다녔거든 나는 친구들이 모여서 공부 하자고 몇명이서 밤에 같이 모이는데 나는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한번도 같이
공부 못해봤다.모일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골수에 사무치는것 같았어.아버지가 한번 안된다고 하시면 나는 꼼짝을 못했는데 인숙이는 잘도 저질렀지.
사랑하는 언니! 혼자 지금 한참 웃다가, 눈물이 날만큼...
이서방에게 놀라운 언니의 총명함을, 감동스런 언니의 기억력에... 한참 자랑하다가,
다시 캄앞에 돌아와 앉았어요.
언니에 비해서 내 기억력은 캄캄한 밤이네요.
몇살 때였는지 언니학교에 갔던 기억이 안나요.
어릴 때부터 요조숙녀였던 언니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러니까 엄마가 더 많이 걱정 하셨겠지요
밀양 갔던 이야기!!
5학년때 였어요. 우리 반 친구중에 박무숙이라고,
자기 집이 밀양인데 부모님이 그 곳에서 아주 큰 여관을 하고 계셨어요.
제일 똑똑하고 우리를 리드하던 박해옥, 그당시 반장이 주동하여
갑자기 반에서 공부 제일 잘 하던 여섯명이 밀양행 했던 일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리도 용감했었는지!!
그중 아무도 집에 연락, 허락받은 아이 없었어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때의 친구들 얼굴이, 그 이름들이,
방이 많고 멋있던 여관, 그 복도를 몰려다니며 걷던 일이,
잘 대해주시던 친구 부모님의 얼굴까지도, 여기저기 추럭을 타고
돌아 다녔던 일들이, 기억속에 선명히 남아.. 신기하기만 합니다.
언니가 기억하시는 장면, 집에 돌아와서 겪은, 엄마의 매를 피해 도망친 일까지도..
그후 엄마는 그 일에대해서 한번도 물으신 적 없어요.
잘 돌아 왔으니.. 무슨 큰 일될것 없었다고 저를 믿으셨던것 같아요.
언니, 고마워요. 옛날의 즐거웠던 추억 살려주셔서....
아마 방학하는 날, 친구 무숙이가 자기 집에 돌아기는 날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학교 선생님과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 일이 없었거든요.
언니의 회고담을 들으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라고 놀리시던
어른들 말이 생각나요.
엄마가 뭘 시키고 싶어도 눈에 보이지않아 못하셨을만큼,
많이 쏘다니고, 잘난척 하고,
조신하고 얌전했던 언니와 대조적으로
주책없이 굴었던 어린 시절,
절로 웃음이 납니다.
그때 나도 기억나는데...작은 언니가 들어오니 엄마가 집어 든 것이 큰언니는 막대기라고 썼는데
막대기가 아니고 수금포였어...벽에 기대져 있던 삽 말이야...커다란 삽을 들고 돌아보니 언니는 벌써 줄행랑...
눈에 보여야 때리지...ㅋㅋ..
큰언니가 지는 죽었다 속으로 생각하며 기다렸는데...한 대도 맞지 않고...달아나고...
밤중에 걱적이 되어 나가 봤더니 대문 옆에 숨어 있는 작은 언니를 발견...몰래 데리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왜 안하실까나요?
나중에 작은 언니를 보고 화가 다 풀려버린 엄마는 언제 그랬더냐는 듯 때리지도 않고...
속으로 한 걱정을 하다가 무사히 들어 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 내리셨겠지모.
혜자 니말이 맞기는 맞는데 니가 그때 몇살인데 그걸 기억하니가만히 따저보니 인숙이가 오학년이면 혜자 넌 여섯살이야 니말하고 그때 나이하고
좀 안맞는거 같다. 니가 그걸 다 기억 하면 천재란 말이 맞네.
언니는 네살때의 기억도 하는데...창한이 오빠 울집에 와 있었던 거...언니 네살때라며..
창한이 오빠가 왜 울집에 와 계셨나? 궁금했는데...새형님이 말 했어요..
그때 상주 아지메의 시아버진가 시할아버진가...암튼 사돈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왔다가..
과음하시고...쓸어지셔서...아버지가 가까운 울집에 모셨다는...그때부터 울집에서 요양하고 투병생활을 하고...
언니! 이야기가 끝이 없네요...ㅎㅎ..
형님이 나 모르는 일을 예기하니 마음이 이상해진다.내가 다 큰 다음에 시집온 형님이 아는일을 나에게는 말을 안해준 부모님이 어쩐지 섭섭하네.
형님에겐 우리집 사람이라고 예기 해주고 난 나갈 사람이라고 몰라도 되 이렇게 됬나봐.좌우간 부모님 생각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