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사진)은 1969년 7월 25일 대통령 취임 후 첫 방문국인 베트남으로 가는 도중 괌에 들러 일련의 대아시아정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의 세계 전략과 아시아 전략에 중요한 획을 긋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먼저 미국은 타국과 체결한 조약상의 공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또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국가 또는 미국의 생존과 안보에 중요한 관계에 있는 국가가 핵 위협을 받는다면 그들 국가에 핵우산을 제공한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침략을 받았을 경우 조약 당사국의 요구가 있을 때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다할 것이다.
다만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당사국이 국방 인력을 마련하는 주요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 등이다.이 내용에서 외교적 수사를 제하면 아시아 국가들은 그들 국가의 방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은 앞으로 직접적인 군사 개입보다 핵 억지력 사용에 더 의존할 것이다. 미국은 앞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로 집약할 수 있다.
사실 닉슨 독트린의 가장 중요한 요지는 아시아에서의 미군 철수다. 이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부담을 감소시키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60년대 후반 미 행정부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전쟁에서 손 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군사비 지출의 급증, 많은 희생자 발생, 반전운동 확산,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증가 같은 경제의 불안 등은 미 행정부가 받는 압력 요인이었다.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세적 고립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대국이 된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을 아시아 안보의 주요 행위자로 참여시키고 소련의 팽창을 공동으로 저지하는 새로운 전략 모색이 필요했다.
그리고 경제대국인 일본을 이 지역의 평화·질서 유지를 위한 주요 동반자로 등장시켜 적정한 역할을 주문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의도대로 동아시아는 양극 체제에서 미·소·중·일 4강의 다극체제가 돼 미국의 무거운 부담이 경감될 수 있었다.닉슨 독트린은 미국의 ‘한국화 계획’(the Korean Plan)으로 이어졌다.
닉슨 독트린 발표 직후인 69년 8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 한국이 경제·사회적으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룬 것에 감탄한다”고 극찬하고 새로운 동아시아 정책과 한국화 계획의 타당성을 설득하려고 했다.
박대통령이나 한국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한미 관계의 특수성과 미국의 안보 전략상 한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 그리고 한국군이 미국을 도와 베트남에 파병돼 있었기 때문에 미군 철수는 쉽게 단행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인 70년 7월 8일 미국은 5년 내에 주한미군 2만 명을 줄이겠다고 공식 통보하면서 미 제7사단 철수를 발표했을 때 우리 정부는 비로소 닉슨 독트린의 실체를 체감하게 됐다. 더욱이 6·25 직전 애치슨라인 발표로 북한을 오판케 했던 사실을 상기, 북한의 또 다른 오판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기도 했다.
그러나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감축 등 일련의 상황 변화는 우리의 자위의식을 자극, 오늘날과 같은 막강한 국방력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국제정치는 냉혹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미 연합방위체제의 변화라는 전환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 임시 처방에만 매달릴 수 없다. 항구적 치유, 그것은 바로 우리 군의 전력 증강 계획을 하루 빨리 완수하는 것이다.
<김영이 군사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