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특무상사 박성수(朴聖洙)
일등병 / 하사 / 이등중사 / 일등중사 / 이등상사 / 일등상사 / 특무상사
지난 10월 17일 간성(杆城)에 사시는 넷째 누님의 89세 생신이라 나도 신통치 않은 몸을 이끌고 다녀왔다.
평소에 건강이 좋으셨는데 요즘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하여 큰 맘 먹고 찾아뵈었는데 생각보다 더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와서 지금도 가슴 한 켠이 쓰리다.
생신축하차 모인 조카들 내외와 함께 근처에 있는 매형님 산소를 다녀왔는데 옛 추억이 되살아나서 매형님에 관한 추억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누님보다 두 살 많으셨던 매형님은 1931년생으로, 평창(平昌)이 고향이신데 한국전쟁(6.25)이 발발하기 전인 1948년 18세 되던 해에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셨다고 한다. 매형님 키는 170cm 정도로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다부진 몸매에 왕방울 같은 부리부리한 눈에 두툼한 입술하며, 우락부락한 생김새까지 사뭇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셨다.
거기에 3년 동안 6.25 전쟁 통을 고스란히 겪으신 때문인지 성격이 불같아서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거친 말은 물론이려니와 즉시 손찌검이 날아오는.....
훗날, 우리 누님도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우리 누님 또한 성질을 참지 못하니... ㅎㅎ
매형님은 한국전쟁(6.25)의 시작부터 끝나고 휴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3년 남짓 군대생활을 하셨으니 온갖 역경(逆境)은 오롯이 다 겪으셨던 분이다.
위에 붙여놓은 사진의 계급장을 일등병부터 모두 달아보고 마지막으로 일등상사 계급장 위에 조그만 별이 있는 특무상사로 제대를 하셨는데 특무상사는 요즘으로 보면 준위(准尉) 쯤으로 사병들이 달 수 있는 최고의 계급장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계급장을 깡통으로 만들었던지 힘주어 누르면 우그러들어서 그랬는지 ‘깡통계급장’이라고 하던 생각도 난다.
소대장(小隊長)은 당연히 장교(將校)인데 6.25 때에는 전투 때마다 소대장이 죽으니 매형님이 주로 소대장을 맡았었다고 한다. 매형님이 하시던 말... ‘새로 소대장이 오면 그날이 제삿날이여...’
더 가슴 아픈 이야기는 당시 학생들을 강제 소집하여 간단한 기초훈련만 받고 곧바로 부대에 배치되는 학도병(學徒兵)이 많았는데 이 학도병이 소대에 보충되면 이들 또한 그날이 제삿날이었다고 한다.
소대원을 데리고 나가 한참동안 서로 총알을 퍼붓다 보면 신입 학도병이 총을 들어 보이며
‘소대장님, 제 총이 입을 벌리고 닫아 지지가 않아요...’ 했다고 한다. 장전했던 총알을 다 쏘면 새로운 탄창을 갈아 끼워야 하는데 학도병들은 새 탄창을 갈아 끼우는 것도 몰랐다고 하니....
한 번 전투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소대원 1/3은 죽으니 다시 보충 받고, 다음날 다시 보충 받고....
그런 전쟁 통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부상 한 번 당하지 않으셨던 매형님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6.25 초반에는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은 유엔군이 참여하여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격에 나서는데,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師團) 백골(白骨)부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하며 반격의 선봉에 서게 된다.
우리 매형님은 육군 11사단 화랑부대(일명 젓가락 부대)에 근무하셨다고 하는데 수없이 많은 전투에 참가하며 수많은 부대원이 전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살아 남으셨으니 놀라울 뿐이다.
어느 전투에서였는지 부대장의 지시로 고지탈환 작전에 매형님 소대가 선봉이 되었는데 산꼭대기 적 참호에서는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수류탄도 터지는데 고지를 향하여 돌격명령을 내렸다.
소대원들은 앞에서 기어오르고 소대장인 매형이 뒤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그러다가 너무 심하게 총알이 쏟아지고 옆에서 억~ 소리가 나며 전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몇 명이 뒤를 돌아 기어 내려왔던 모양이다. 뒤에 있던 매형이 권총을 이마에 들이대며 ‘뒤로 돌아! 돌격~!!’ 하자 다시 뒤로 돌아 기어 올라가다가 또다시 뒤돌아 내려온다. 매형은 맨 앞에 기어 도망쳐오는 녀석의 이마에 대고 땅~ 방아쇠를 당기자....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어마뜨거라 뒤돌아 다시 고지를 향하여.... 기어코 고지를 탈환했다고 한다.
평양을 지나 어디까지 진격했는지 한참 승승장구 진격을 거듭하는데 갑자기 후퇴명령이 내렸다고 한다.
바로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꺼린 미국(유엔)이 전군(全軍)의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다. 갑자기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군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한겨울이 되어 눈도 많이 내렸는데 총도 한 번 쏘지 못하게 하여 후퇴를 거듭했는데 어느 날 밤에 취침을 하려 누웠더니 중공군 진지에서 징과 북소리가 났다고 한다. 열이 난 매형님은 소대원을 깨워 부대의 명령을 어기고 중공군 진지를 기습을 했다고 한다. ‘나 원, 기가 막혀서... 나이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녀석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손을 들고....’
부아가 났지만 죽이지는 않고 귀쌈을 한 대 후려갈겼더니 대가리가 휙 돌아가며 바닥에 꼬라박혔다고 한다.
‘아니, 이따구 중공군 놈들한테 밀려서 후퇴를 하라니...’ 그리고는 그냥 돌아서서 오고 말았다고 한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흥남부두에 모인 군인들과 피란민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는데 이른바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이다. 매형님도 그 틈에 끼어 부산항에 내렸는데 군인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군복은 물론이려니와 씻지 못해 지저분한 것은 물론, 추위로 동상이 걸려 이리저리 동여 싸매고... 손에 총만 들었을 뿐이지 군모(軍帽)도, 계급장도 없는 사람도 많았을 터이다.
부두에 내리자 군인들을 한 줄로 세워 건물 안에서 심사를 했다고 한다.
‘자, 줄을 맞춰! 관등성명을 말하고 다음 소속부대를 대고~~’
각이 선 모자에 네지끼를 세운 깨끗한 군복을 입은 장교들이 거드름 부리는 꼴을 보던 매형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매형님 차례가 오자 ‘관등성명~~’ 하는 순간 의자에 앉아있는 심사관 발밑에다가 따다다 총 갈겨버렸다고 한다.
‘뭐 이런 씨발놈들을 봤나... 전투는 해보지도 못한 놈들이 모가지에 힘을 주고 지랄하고 있네~~!!’
다들 납작 엎드리고, 책상에 앉았던 놈들은 기어서 도망가고....
그래도 매형님은 문책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니 전시(戰時)의 상황이 참작되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현역일 때 누님을 소개받고 맞선을 보러 왔으니 1952년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누님과의 인연은 둘째 누님이 봉평(蓬坪)으로 시집을 가셨는데 누님이 동생(넷째)을 소개하여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것이었다. 휴가를 받았는지 특무상사 계급장을 단 군복에, 시중을 드는 사병 뽀이(Boy)를 데리고 오셨던 기억이 생생한데 당시 6살이었던 나(8남매 중 막내)를 얼마나 귀여워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누나들한테 노래를 배워서 곧잘 불렀던 모양으로 ‘실같은 내 허리를~~’ 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뭐라고 쫑알거리면 바로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빤히 드려다 보다가 하시던 말씀... ‘나 뛰다 죽갔네~~’ ㅎㅎ
나를 너무나 예뻐해 주시던 매형님 얼굴이 떠올라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박성수(朴聖洙) 매형님이시다.
도 한번은 휴가를 나와서 돈이 든 가방을 들고 영등포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가방을 휙~ 채어가더란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당시 영등포역에 흔하던 창녀(娼女)가 가방을 들고 빙글거리며 ‘군인아저씨 들어와 잠깐 놀다가세요~’
매형은 가방을 도로 낚아채며 ‘이 년, 여기 뭐가 들었는지 알어?’ 하면서 귀쌈을 한 대 후려갈겼더니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더라고.. 흐흐..
결혼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처갓집에 와서 누님과 칠성암(현 법왕사)으로 구경을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보고 따라가라고 하신다. 셋이서 절 아래 보어구 골짜기로 접어드는데 저만치 젊은 남녀 한 쌍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여자는 머리를 땋아 등 뒤로 늘어뜨린 걸로 봐서 결혼을 안 한 처녀인 모양인데 임신을 한 모양으로 배가 제법 많이 불렀다. 그런 꼴을 못 보는 매형님이 권총을 꺼내들며 ‘저런 년은 애를 떨어뜨려야 된다.’며 공중에 대고 꽝~~.
기겁을 한 젊은 커플은 우리를 힐긋 쳐다보더니 어마뜨거라 도망을 가버렸다... ㅎㅎ
언제였던가, 매형님이 권총을 집에 놓고 가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위험하다고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 놓았는데 속초에 살던 사촌이 와서 그 이야기를 듣더니 총알이 들어 있으면 위험하니 빼놓아야 된다고 한다. 사촌도 18살 쯤 밖에 안 되었는데 총에 대해서 잘 아니 문제가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권총을 꺼내주자 아버지도 위험하다며 저쪽 구석에 가서 빼든지 하라고... 방구석 장농 앞에서 사촌이 철커덕철커덕하자 총알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렇게 하여 조금 있다가 총알이 나오지 않자 이제 다 나왔나 확인해 본다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자 저쪽에다 대고 쏘라고 하고... 나는 신기해서 코앞에서 드려다 보고 있었는데 방아쇠를 당기자 꽝~~!
장롱 귀퉁이에 구멍이 났는데 코앞에서 들여다보던 나는 어안이 벙벙, 귓구멍이 앵앵...
매형님은 제대 후 고성군 거진(巨津)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숱한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매형님은 성격이 불같지만 평상시에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술이 한 잔이라도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분이셨던 것 같다. 누님도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이따금 부딪치고는 했던 모양이다.
언제였던가, 갑자기 매형님이 강릉의 우리집으로 오셨는데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거진에서 강릉까지 얼마나 먼데....
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첫마디가 ‘우리 집사람 여기 안 왔습니까?’ 아마 둘이 다투고 누님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ㅎㅎ
누님은 2남 6녀를 낳으셔서 우리어머니와 똑 같이 8남매를 두셨는데 평소에도 매형님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온 집안이 경계태세에 돌입....
한 사람이 동네 어귀를 살피며 언제오시나... 히끗 모습이 모이면 집으로 총알같이 달려와서
‘아버지 오셔, 아버지 오셔...’ 하면 모두 뛰어나와 집 뒤 보리밭에 숨었다고 한다.
매형은 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이년, 이누머 새끼들 다 나와~~!’하고 소리치다 아무 소리도 없으면 방문을 화들짝 열어 제치며 ‘다나오라니!!!!’ 얼마 있다가 조용해지면 한사람이 살금살금 집에 와서 문틈으로 들여다 보고나서
‘쉿, 이제 잠드셨어. 조용조용~~’ 하면서 집에 들어왔다고도 한다.
8남매 중 막내가 남자애였는데 어릴 적에 병사하고 매형도 고생만 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셔서 누님 혼자 7남매를 키우시느라고 숱한 고생을 하셨는데 그래도 자식들이 머리도 좋고 마음씨들도 착해서 매형님이 계실 때보다도 오히려 살림도 나아졌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잘 사셨다.
특히 딸 중 막내는 간성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졸업 즈음하여 오빠와 엄마가 떡을 해서 리어카에 싣고 학교로 와서 선생님들과 급우들이 모여서 파티를 열었다고 어머니와 오빠가 너무 고마웠다고 지금도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 막내딸이 간호학 박사학위를 따고, 현재 횡성 송호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