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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 제2장 「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209- (P.975)
* 민족의 자의식은 외세에 의해 침략을 당할 때 생긴다고 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회체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불평등, 야만, 비참이 널리 퍼질 때, 자의식이 발동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의식의 발동의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인민의 자각(깨어나는 민중)이며, 다른 하나는 서로 소통하는 방식에서 자기 언어(langue)이다. 대종교는 인민을 의식했고, 그리고 국문[한글]을 써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회를 읽어 보자. (52PMH)
제1부 자유와 현실 39
1장│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2장│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181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181-197.
2. 연금술적 위생학(衛生學) 197-209
3.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209-221.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6. 하나의 무[一無]와 위대한 영혼(한얼)
7. 본연의 성(性)과 씨알 인성론
8. 고요한 무와 움직이는 유[靜無動有]
9. 아(我)와 대동(大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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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209-221.
한국 독립ㆍ저항운동의 시조이자 대종교의 ‘대종사(大宗師)’.인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본명 인영(寅永))이 1916년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하자 독립운동은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때 그는 여러 가지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순명삼조(殉命三條)」는 그의 세계관이 갖는 긴장과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209)
이 홍익정신은 민족 자주정신과 결합하여 평등과 공익을 강조하는 정치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홍익정신은 대종교인들의 일부가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이유로도 작용했다. 무관학교 출신으로 시인이자 한국혼(韓國魂)의 저자이기도 한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일민(一民), 청구(靑丘), 한인(恨人)]은 급진주의자가 되어 상해임정과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대종교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영향으로 조선어학 연구가였던 김두봉(金枓奉, 1889-1960), 웅변적 계몽가인 박일병(朴一秉, 1893-1937) 및 박순병(朴純秉, 1901-1926), 안기성(安基成 1897-?) 등은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등은 무정부주의로 발전해갔다.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에는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復辟)주의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김동환(金東煥 1957-)의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상해 임정 수립 후에 점차 민주공화제의 영향 아래 급진주의 사조로 발전해간 인물들이 나오게 되었다. 신규식의 [유고] 시집 소년의 눈물(兒目淚, 아목루)에 있는 나철 추모시 「유(維)」는 안으로는 한얼대도를 명상하고 밖으로는 공동체의 운명을 ‘공리’(公理, 한국혼(韓國魂))에 따라 변혁하려는 이들의 사상적 특징을 잘 대변한다. ..(210)
신규식에 의하면 한얼님의 진실이자 백성의 진실인 단예(端倪, 단서)는 내적 수양의 단서이자 정치적 행동의 단서이다. (211)
나철의 생애 전반기가 을사오적 암살과 외교적 독립운동이 주를 이루었다면, 후반기에서 드러나는 공리(公理)에 대한 인식과 행동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고려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철은 백두산의 도사 백봉신사(白峯神師)가 보낸 파유원(派遊員)인 백전(伯佺, 호 두암頭巖)이 1906년 1월 24일 서대문역에서 준 삼일신고(三一神誥), 신사기(神事記)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점차 종교 구국의 길로 나가게 된다. (211)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새로운 교육을 그리고 아테네인의 혼을 새로이하려 했다. 고소장에는 청년을 타락시키고 아테네가 믿는 신앙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다. (52PME)
그는 백봉신사가 보낸 두일백(杜一伯, 호 미도彌島)을 일본 개평관(蓋平館)에서 만나 영계(靈戒)를 받게 되면서(1908년 12월 31일) 결정적으로 단군교에 개입하게 된다. (211)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자신의 진종대도(眞倧大道, 대종교)의 연원을 백전(伯佺)과의 만남에 두고 있다.
두암(頭巖) 노인의 맑은 자태 세속에 물들지 않았네
아이 같은 얼굴 희 머리는 하늘 사람(神仙) 같구나.
을년(乙年)에 받은 두 책 어두운 꿈을 깨웠으니
우리 동의 연원은 이날 밤에 드러났도다.
頭叟淸儀不染塵, 童顔鶴髮似天人 두수청의불염진, 동안학발사천인
乙年二冊警昏夢, 吾道淵源此夜眞 을년이책경혼몽, 오도연원차야진
나철의 종교적 철학은 한국 역사의 개천(開天) 초창기부터 전승되어 왔다는 신비서 삼일신고(三一神誥)(삼과 일의 통일성이라는 신의 교훈)에 대한 해석에 기초한다. 그의 저작인 신리대전(神理大全)은 바로 이 삼일신고에 의거한 것이다. (212)
삼위일체를 연상시키는 대종교의 삼신일체(三神一體)에 대해 함석헌은 기독교 영향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삼신일체는 단순신앙의 핵심요소였다. (212) [인간 지성이 현상의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플라톤 식으로 보면 네 가지 일 것인데, 그 중 한가지가 이해되지 않아서 버리고 나면 셋이다. 지성(오성)은 그 셋이 하나로 이해될 때 논리가 성립한다. 이상하게도 주역과 논리학은 삼항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역은 사물에 대해 논리학은 언어에 대해 적용하려 했다. 스토아는 사물과 사건에 적용하려하지 않았던가? (52PMG)]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굴원(屈原, 전340?∼278)의 초사(楚史),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 등에 의거해서 “삼일의 신(삼일신(三一神)은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이며, 삼일 중에 태일이 가장 존귀하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삼일의 신을 다시 우리 고어로 번역하면, 천일은 ‘말한’이니 상제(上帝)를 의미한 것이요, 지일은 ‘불한’이니 천사(天使)를 의미한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란 말이다.” “‘말한, 불한, 신한’은 이두문자(吏讀文字)로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이라 쓴다.” (213)
삼신(三神), 삼성(三聖), 삼황(三皇)은 예부터 한국적 신앙으로 전승되었던 말들이다. 나철이 자결한 곳도 단군을 기리는 삼성전(三聖殿)이었다. 나철의 사상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중심으로 2대 종사(宗師)인 김교헌(金敎獻, 1868-1923)과 3대 종사인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의 주석 및 그 밖의 편지나 호소문 등에 의거해서 구성될 수 있다. (213)
명문세족이자 왕립 역사 편찬의 책임자이기도 했던 김교헌은 모든 노예제(奴隸制)를 반대하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새역사를 편찬(신단민사(神壇民史), 신단실기(神壇實記))함으로써 대종교의 역사관을 확립한다. 그는 신채호, 박은식의 배달민족사관의 선구자였으며, 3.1운동 한달 전(1919년 2월 1일)에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을 일궈냈다. (213)
종사의 자격을 사양하고 광복군 총재로서 무력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은 대종교의 이론적 체계를 세우게 된다. 초기 대종교인들의 사상은 그들의 정신적 융화가 강도 높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개별적 윤곽을 분명하게 나누기 어려워 보인다. (213)
대종교인들은 ...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배달민족사관’을 사대주의 사관이나 식민 사관에 대립시키는 신념을 공유한다. 이 때문에 그들의 세계상에는 단군신화가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 관류하게 되었다. (214)
‘한민족의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초월론적 존재에 매몰되지 않고, “생명감 넘치는 천지-세계 우주에서부터 조사(照射)된 우주적 정신(cosmic mind)에서 비롯하였다.” 여기에서 “능산적(能産的) 우주가 능산적 인간에로 관계 맺는 새로운 인간 세계”가 열린다. 대종교적 역동적 저항정신은 대전적 세계를 통해 세계상실을 극복하려는 생의 충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14)
나철의 경우, ... 그의 생애는 1908년 두일백을 만나 영계(靈戒)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1863-1908)는 외교적 독립운동과 매국 을사오적 암살기도를 주요 행적으로 하며, 후기(1908-1916)는 1909년 1월 15일 대종교 중광(重光, 재건이라는 뜻의 대종교 용어)과 종교철학에 의거한 조직화 운동을 거쳐 황해도 구월산 삼성전(三聖殿)에서 자결(52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부용산자락)에서 자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빈한한 양반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214-215)
당시 시인이자 학자로 유명했던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1816-1868)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국학사상과 왕양명(王陽明, 1472년-1528)의 철학에 조예가 있었다. 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과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를 제자로 두었다. 나철은 10세에 왕석보의 서당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왕석보가 그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 문하생들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 20세기 초 대표적 우국지사들이었던 그의 제자들은 아마도 왕양명의 광자(狂者, 뜻이 높아 관습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기상에서 나온 ‘대동(大同)’ 관념과 ‘지행합일’의 실천정신을 배워 망국의 상황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215)
대종교인이었던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구체적 실천주의를 ‘실학(實學)’으로 이해하고 대동의 이상사회를 말하게 된 것은 당시 중국의 강유위와 양계초의 영향과 함께 초기 우국지사들의 분위기가 전승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215)
그후 나철은 21세경에 서울에 가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개화파 관료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모임[시회(詩會)]에 참여하여 「신연(新燕)」이라는 시를 읊은 것을 계기로 그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1891년(29세)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 기거주(起居注, 왕실 史官)에 등용되었다. 1893년 병조 사정(司正),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승진하였으나 사관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895년까지 지리산 등지에서 생쌀을 주식으로 하면서 도교적 방식의 입산수도(入山修道)를 했다. 그 사이에 청일전쟁과 동학혁명(1894)이 일어난다.
이로 보아 30세 무렵 이미 나철은 정계에서 자신을 찾는 삶의 방식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주적 개혁정신을 가졌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을파소(乙巴素, ? -203년)가 전했다고 하고, 한 민족의 탈무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대종교 윤리 교훈집 참전계경(參佺戒經)에 의하면, ... (216)
[해학 이기: 여기서부터 .]
젊은 시절 그[나철]에게 고대사와 단군사상의 의의를 알려주었고 학술 정보의 제공자이기도 했던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의 구학망국론인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호남학보(湖南學報), 1908)을 보면 당시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217)
그의 진취적 사상이 담긴 글은 유서(遺書)와 유고(遺稿)가 남아있지만 아직 전집의 형탤 간행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면 당시 애국 지식인의 전형적인 개혁적 심정을 알 수가 있다. (217)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과 “회복국권(恢復國權)” 회복:되돌리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그들 다음과 같이 평한다. “한 자나 한 치 자리 무기도 없이 고달프건만 스스로 몸을 치닫고, 벅찰 정도로 가슴에 쌓인 것을 견디지 못하여, 풍파를 무릅쓰고 가시덤불을 밟아갔고, 한낱 포의(布衣, 평민)로 나라의 성패를 위하여 엎드러지고 거꾸러져도 힘을 다하는 것을 현자는 우활하다 답답히 여겼고, 못난 자들은 미쳤다고 비웃었으나, 얼마 안 있어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하자, 앎이 있는 선비들이 그 일을 뒤 미쳐 따짐에, 비로소 그를 위해 한 숨 지으며, 그런 분을 보고 싶어하여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부수는 (포의)다. 가
그는 나철처럼 구국일념하에 “인민의 사상이 자각하여 스스로 함[人民思想自覺而自爲인민사상자각이자위]”으로써 교육의 종지가 만들어져 자주적 교육이 형성되기를 희망했다.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에 의하면 쪼개야 할 것은 ‘신법(新法)’ ‘신학문’이 아니라 ‘구법(구제도)’, ‘구학문’이다. 그는 영국의 교육종지인 ‘자치독립(自治獨立)’, 일본의 ‘존왕상무(尊王尙武)’ 보다는 독일의 교육 종지인 ‘발휘조국(發揮祖國)’이 당시 한국의 상황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회복국권(恢復國權)’을 종지로 하는 교육방책을 구상했다. .. (218) [인민교육을 생각했는 것 같은데 ...]
구학문의 폐단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구학문은 붕당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事大以小]는 맹자의 사대주의 원칙에 의거해왔기에 국민을 ‘단합[團體]’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사대주의의 폐단[事大主義之弊 사대주의지폐]’이다. ... (218)
2) 구학문은 외국어인 한문만 읽고 ‘국문(國文)’을 무시했다. .. “한문습관의 폐단[漢文習慣之弊(한문습관지폐)]” (218-219) [한글 전용으로 갈 길을 열었다. 대종교에서 주시경이 나올 수 있은 길이다.]
3) 구학문은 문벌과 신분을 구별하여 서로 원수같이 여기고 결혼도 안하고 친구로 사귀지도 않는다. ‘반상, 문무적서, 노소남북’의 분열은 단합을 해치고 “민족과 계급”만 있는 문명국에 비해 더 심한 것이다. 그것은 “문호구별지폐(門戶區別之弊)”다. (219)
또한 그는 .. 세 가지 학문 폐단에 대해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1) 사대주의에 대해서는 ‘독립(獨立)’의 의지가 대안이다. (219) [자주, 자주의 주체는 내재적 실재성으로서 인민이다.]
2) 한문 습관의 폐단에 대해서는 ‘국문(國文)’을 사용해야 한다. (220)
3) 문호 차별에 대해서은 ‘평등(平等)’이 대안이다. (220) [공화정에 대한 관심일 진데 프랑스 혁명의 공화국에 대해 알 수 없었던 시기인가?]
이 평등관은 동학 이후 당시의 자강운동, 교육운동에 깊이 연관되어 유포되었던 관념이었다. 이 관념은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의 핵심원리 가운데 하나이며, 해방 후 박치우(朴致祐 1909-1949)에 의해 ‘부르주아 시민’의 ‘일대일 형식논리’로 이해되고, ‘근로인민’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으로 발전된다. (220) [ “노동인민”이 아닐까?]
해학 이기는 세 가지 대안(독립, 국문, 평등)을 ‘단합’의 원리와 함께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초등은 사립학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교육기관은 신체와 정신, 과학지식을 아우르는 체육(體育), 덕육(德育), 지육(智育)을 내용으로 하는 신학문을 가르친다. (220-221) [프랑스에서 보통 평등, 무상 탈종교를 원칙으로 하는 교육은 쥘 페리 법안(1881)에서 부터이다. - Jules Ferry(1832-1893)의 초등교육enseignement primaire(6 à 13 ans)법안, 무상, 탈종교, 의무(gratuit, laïque et obligatoire, 16 juin 1881)였다.]
[체 덕 지] 삼원소(三元素)의 통일을 지향하는 정신은 그 후 대종교의 ‘삼일철학(三一哲學)’의 기본원리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으며, ... 그러나 그의 국가관은 강한 민족적 유대를 배경으로 갖고 있다. 공화(共和) 정신을 지향하는 그의 신학문은 나철의 경우처럼 고종이 생존했던 대종교 중광의 전후 시기에는 민주공화제와 결부될 수 없었지만, 일부 대종교인의 독립 저항의 사상들은 신채호의 경우처럼 점차 급진 민주주의의 성격을 띠게 된다. (221)
(7:36, 52P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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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을파소(乙巴素, ? ~ 203년)는 고구려의 재상으로 고국천왕, 산상왕을 섬겼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가난한 농부였다. 봄~가을의 기간 동안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176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 ? 백봉신사(白峯神師)의 도통전수(道統傳授)에 관한 연구. : 백전(伯佺, 호 두암(頭巖)이 1906년 1월 24일 서대문역에서 준 삼일신고(三一神誥), 신사기(神事記) / 두일백(杜一伯, 호 미도(彌島)
1816 왕석보(王錫輔, 1816-1868), 호 천사(川社). 다산 정약용 국학사상과 왕양명의 철학 전문가. 제자로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과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가 있다.
1835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 경기도 광주부, 한학 수학(1874년 증광시 병과 급제) 조선후기 황실제도국총재, 강구회 회장, 흥사단 단장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다.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1848 이기(李沂, 1848-1909) 조선 말의 실학 사상가, 계몽운동가. 전북 김제 출생. 본관은 고성,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이다. 1906년 대한자강회, 자신회를 조직하였고, 1909년에는 나철, 정훈모, 오기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단군교(檀君敎)를 세워 대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1855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양력 1856)-1910) 대한제국 조선 왕조 말기의 선비로 시인, 문장가, 역사가, 우국지사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855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조선 말, 문신이자 한의사, 한글 학자. 자는 공윤(公胤), 아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이다. 1879년 10월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 간 우두법을 배워 그해 겨울 우두를 시술했다[1880]. 《우두신설》(1885) 저술.]
1859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일제 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 자(字)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 한국통사(韓國痛史)(1915),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1863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철종 14)-1916). 대종교(大倧敎)의 초대 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금성(錦城). 본명은 인영(寅永),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1907 매국 대신 암살 기도, 1909년(46살) 중광절에 단군교 창시. 스승, 왕석보(王錫輔), 김윤식(金允植), 백봉신사(白峰神師),
1864 장지연(張志淵, 1864-1921) 대한제국의 애국 계몽 운동가 겸 언론인. 본명은 장지윤(張志尹)이며 아호는 위암(韋庵)이다.
1867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1868 김교헌(金敎獻, 개명(改名) 김헌(金獻), 1868-1923) 경기도 수원, 1885년에는 문과에 급제,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백유(伯猷), 호(號)는 무원(茂園)이다.
1876 주시경(周時經, 1876-1914) 황해도 봉산. 현대 개화기의 국어학자.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1880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 충북 청원, 아호로는 예관(睨觀)·여서(余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등이 있다. 중국식 이름으로는 신정(申檉)이라 한다.
대한제국의 군인, 독립운동가.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과 교민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단체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다. 유고 시집《아목루(兒目淚)》.
1880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총론은 1924년에 완성, 1931년 연재, 1948 출간)
1881 서일(徐一, 1881-1921) 백포(白圃)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이다. 본관은 이천.
1881 윤세복(尹世復, 1881-1960). 경남 밀양,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 본명은 세린(世麟),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상원(庠元)이다. 1924년 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 1971)
1889 김두봉(金枓奉, 1889-1960) 주시경제자 한글학자.
1893 박일병(朴一秉, 1893-1937), 함북 온성, 일제강점기 조선노농총맹 발기인, 화요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1893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역사학자·작가.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1897 안기성(安基成 1897-?), 경북 안동, 당시나이, 36세(1933):대전형무소에서 조선공산당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와 적기가를 불렀다.
1901 박순병(朴純秉, 1901-1926) 함북 온성,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901 씨알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동경사범 출신, 박정희 유신에 저항한 재야 학자.
1909 박치우(朴致祐 1909-1949)(40살)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숭실전문 교수. 1949년 12월 4일 동아일보 “약 일주일 전 태백산[지리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고 보도했다.
1924 이기백(李基白, 1924-2004), 평북 정주, 국사학자. 서울대 사학과 졸업, 이화여대, 서강대, 한림대에서 교수. 주로 고려시대 병제를 연구했으며, 신라의 정치적 발전과정을 파헤치고자 했다. 저서, <국사신론>, <고려병제사연구>, <신라정치사회연구>
1929 정양완(鄭良婉, 1929-), 여성, 서울대 박사(1983),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문학 교수, 매천 황현 전공
1931 박성수(朴成壽·85, 1931-2016) 원로 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지난달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별세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한 고인은 서양사학자. 정년 후 대종교 연구하였다.
1938 이남영(李楠永, 1938-) 서울대 교수, 중국철학 전공. “단군신화와 한국인의 사상”
1956 박종혁(朴鍾赫, 1956-) 성균관대학 박사(1991), 국민대학 교수, 해학이기, 주역, 장자 등 논문.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 문화, 1995, 105쪽.
1957 김동환(金東煥 1957-) 사단법인 국학연구소, 「일제하 항일운동 배경으로서의 단군의 위상」, 선도문화, 10권, 2011
1958 박광수(朴光洙, 1958-) 원광대학교수 <The Won Buddhism (Wonbulgyo) of Sot`aesan: A Twentieth-Century Religious Movement in Korea, 1996, University of Wisconsin – Madison, Minoru Kiyota .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단군신앙운동 연구」(종교연구 53권, 2008)
1958 박환(朴桓, 1958-) 수원대교수. <서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연구, 1990, 서강대, 이광린> 「羅喆의 人物과 活動-大倧敎 創始 이전을 중심으로-」(동아연구, 1988)
1962 민영현(閔泳炫, 1962-) 부산대강사, <한국 선사상의 존재양상과 그 전개에 관한 연구, 1993, 부산대, 김승동>
1963 조남호(趙南浩, 1963-) 서울대, 한국철학,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대학별) “나흠순의 철학과 조선학자들의 논변”(1999, 이남영)
1970 조준희(趙埈熙, 1970-), 대종교 연구자, 白峯神師의 道統傳授에 관한 연구 선도문화
1970 윤대석(尹大石, 1970-)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 <1940년대 '국민문학' 연구, 2006, 서울대, 조남현>, 「아카데미즘과 현실 사이의 긴장- 박치우의 삶과 사상 -」(2006, 우리말글)
1977 윤미란(尹美爛, 1977) 인하대. <장혁주(張赫宙) 문학 연구 - ‘조선’을 소재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 2012, 인하대,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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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340 굴원(屈原, 전340?∼278), 중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정치가, 시인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 벼슬은 좌도(左徒)·삼려대부(三閭大夫)에 이름. 작품으로 `이소(離騷)', `천문(天問)', `구장(九章)' 등이 있음.
왕수인(王守仁, 1472년-1528) 호(號) 양명(陽明), 중국 명나라의 정치인·교육자·사상가이다. 양명학의 창시자, 심학(心學)의 대성자로 꼽힌다.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강유위/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1927) 중국 사상가이자 정치가.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일본변정고》, 《아대피득변정기(俄大彼得變政記)》
양계초/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 사학가, 언론인, 교육가이다. 당시 뛰어난 대학자였던 캉유웨이의 제자.
(11:01, 52P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