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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직재무옥(金直哉誣獄) >
조선 광해군(光海君) 4년(1612)에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조작한 옥사(獄事). 김경립(金景立)에 의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무고로 투옥된 김직재(金直哉)가 고문에 못 이겨 이호민(李好閔)·윤안성(尹安性) 등과 진릉군(晉陵君)을 받들어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거짓 진술하여 소북파 1백여 명이 처벌을 받았다. |
이어 1613년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출인 박응서(朴應犀)가 1613년(광해군 5)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이첨의 꾐에 빠져 영창대군 옹립자금으로 쓰려했다고 자백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죽이고, 영창대군마저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1616년(광해군 8년) 해주목사 최기공은 이이첨 무리에 대한 남형(濫刑)죄목으로 처형받고, 사건은 확대되어 소북파가 제거된 해주옥사(海州獄事)가 일어났다. 1613년부터 시작된 폐모론(廢母論)이 다시 일어 1618년 인목대비는 서궁(西宮)에 유폐된 후 인조반정이후 복직되었다.
< 인목왕후(1584년(선조 17) ~ 1632년(인조 10)) 글씨 : 보물 1627호 >
□ 대북의 견제세력으로서 동경계원의 입지(立地)
동경계원들은 정쟁이 주도자는 아니었으나, 대체적으로 서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동인에 속하지 않고 서인에 속하거나 서인이라고 보는 이유는 동경계의서의 다음 내용에서도 증명된다. “아! 세상에 사람들의 모임이 많음에 어찌 제한이 있어 동인에 기대는 무리들은 동인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또 우리 동갑들은 일반 사람들 중에 하지 않는 것을 하는데 뜻을 이루었으니 더욱 다행이다.(噫普天之下其人之繁夥何限而同於東者爲行同于東而又與之同庚者爲尤幸其可不於衆人之中而別致之意乎)” 라는 문장이다.
동경계원의 인물고에서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 계문을 쓴 1603년 이후 광해군 시대에 동인의 대북파(大北派)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만약 동경계가 활동적이고 동인 대북파의 위협적인 대항세력이 되었다면 커다란 사옥(死獄)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화곡(禾谷)공의 경우, 안동부사 재임 시 유성룡 가문의 노역징발 문제로 고초를 겪은 바 있고,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또한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권협(權悏)공은 광해군 때에는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광해군 즉위 이틀후 예조판서에서 체직되었다.
이경함(李慶涵)공은 1594년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 때 정철(鄭澈)에 대한 삭직논의가 일어나자 모두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부당성을 과감하게 상소하였다. 1603년 성주목사를 비롯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호조참판·경상도관찰사·병조참판에 이르렀으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조희보(趙希輔)공은 당시 권력을 집중시키던 정인홍(鄭仁弘)에게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관내 정인홍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토호(土豪)를 엄벌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22년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이끄는 중앙 정국을 피하여 원주로 물러났다.
신응구(申應榘)공은 1602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우계(牛溪) 성혼(成渾)공이 삭탈관직 되고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최기(崔沂)공의 경우, 1616년 해주목사로 있을 때 앞서 1613년의 계축옥사에 관련되어 해서(海西) 산곡으로 모여든 도당을 회유하여 돌려보냈는데, 그 가운데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함**으로써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고 뒤에 또다시 대역죄로 몰려 부관참시 당하였다.
* 최기 공의 16살 된 아들 최유석(崔有石)이 있었는데 연좌되어 아무 것도 모른 채 옥사하였고, 최유석의 아내는 정승 이덕형의 손녀인데 옥사 당일 자결하였다. 인조1년(1623년)에 최기공의 관작이 회복되었고, 최유석 아내는 열의(烈義)를 기려 정표가 내려졌다.
** 왕조실록에 의하면, 최기공은 이들의 행적을 보고 받고 태형을 치고 돌려보내 사건을 마무리 지었는데,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행실이 불한당이라 하여 죽이게 되었다. 이 사건을 이이첨 일당이 역모로 조작하여 사건을 키우고 정적을 제거하는데 이용하였다.
최광필(崔光弼)공은 1607년 강원도 도사 재직 시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즉, 강원도 주민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곤궁한데도 왕실은 궁궐축조에 필요한 동량(棟樑)을 조달하고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농사를 전폐하다시피하고 선비나 노비까지도 역사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당시의 민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어 궁궐축조의 중지를 주장하였으나 왕실에 의하여 묵살되었고, 이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김효남(金孝男)공은 1613년(광해군 5년)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 : 칠서지옥 七庶之獄)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으로 압송되어 무인절도(無人絶島)로 옮겨졌다.
< 동경계원 동인, 대북파와의 갈등 >
구 분 | 계원명 | 내 용 |
<선조 조> ◾ 1594년 | 이경함 | 사헌부 장령시 정철 삭직의 부당함을 상소 |
◾ 1597년 정유재란 | 정사호 | - 안동부사 때, 군량미 운반을 위해 유성룡 집안 등 노역징발 문제로 인하여 토호들이 관찰사에게 원망으로 호소함으로써 파직 |
◾ 1602년 기축옥사 | 신응구 | - 우계 성혼의 삭탈관직에 항의 사직 |
◾ 1607년 | 정사호 | 정철 아들 종명을 안성군수로 삼은데 대해 파직 |
최광필 | 강원도 도사재직 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실정의 시정을 요구하다 파직 | |
<광해군 조> ◾ 1608년(즉위년) | 권협 | 광해군 즉위일(2월 2일) 2일후 (2.4일) 예조판서 체직 12월 전라감사 시 뇌물죄로 문제 삼아 추고 파직 |
◾ 1610년 문묘향사 | 정사호 | - 정인홍의 이언적, 이황 문묘배향 출척주장에 논박 |
◾ 1611년 | 조희보 | 성주목사 때 정인홍을 믿고 횡포를 자행한 토호를 처벌하고 탄핵받아 파직 |
◾ 1613년 계축옥사 | 정사호 | 계축옥사(김제남 역모조작 사건)에 가담할 사람이 아니라는 월사 이정구의 변호에도 불구 파직 이후 복직 |
김효남 |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압송 절도(絶島) 안치 후, 뱃사공의 기지로 익사 위장, 경남의령으로 피신하여 이름을 감추고 살다 죽음 | |
◾ 1614년 정온 방면 요구 | 이호민 정사호 | 1614년(광해군 6)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 |
◾ 1616년, 해주옥사 | 최기 |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이 올린 장계로 시작 해주목사 때 이이첨 일당이 무고죄에 대한 처벌을 남형죄(濫刑罪)로 물어 소북파 제거를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역적으로 몰려 일문이 참살됨 1666년 현종7년, 혼조(昏朝 : 광해군) 때 가장 원통하게 죽은 최기 부자(父子)를 추증(追贈)하라고 함 |
◾ 1613~17년 폐모론 | 이경함 |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사직 |
신응구 | 인목대비 폐모론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 | |
◾ 1622년 | 조희보 | 대북세력 주도 정국에 염증을 느껴 원주로 낙향 |
한편, 우리 광주정씨의 인물들도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연이은 광해군 시절의 패륜정국이 연이으면서 출사와 학문의 길에서 멀어졌다. 한편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의 길이었지만 이후 재기하지 못한 점은 가슴 아픈 일이다.
Ⅳ. 인물고(人物考)
- 출전 :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지식백과, 블로그 「화암(花岩)의 세상만사」 , 광주정씨 신사보 등
◾ 이호민(李好閔) : 1553년~1634년, 자 효언(孝彦), 호 오봉(五峯), 수와(睡窩), 시호 문희(文僖)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됐으며 1584년(선조 17)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5년(선조 18)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됐으며 응교와 전한을 역임했다. 후에 집의·응교를 겸직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이조좌랑에 있으면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 뒤에는 1595년(선조 28)에는 부제학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다. 1596년(선조 29)에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 34)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으며 대제학 및 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칭호)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됐으며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됐다.
이호민은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며 장자를 옹립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立長論 : 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1614년(광해군 6)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했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교서 등의 글보다는 한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는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 정사호(鄭賜湖) : 1553년(명종 8년) ~ 1616(광해군 8년),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본관은 광주(光州). 정순인(鄭純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경(鄭褧)이고, 아버지는 장령 정이주(鄭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다.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 권협(權悏) : 1553 ~ 1618, 자 사성(思省). 호 석당(石塘). 시호 충정(忠貞).
본관 안동. 동지중추부사 상(常)의 아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장령(掌令)으로 서울의 사수(死守)를 주장하였다.
1597년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귀국 후 호조참의에 오르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607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광해군 때에는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 이순신(李純信) : 1554년(명종 9년) ~ 1611년(광해군 3년), 자 : 입부(立夫), 시호 : 무의(武毅)
조선의 무신. 자는 입부(立夫), 시호는 무의(武毅). 종실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후손. 어려서부터 유학을 업으로 삼고 공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기사(騎射)를 배우고,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의주 판관(義州判官)을 지내다가 상관의 뜻에 거슬려 사직당하고 귀가하였는데, 북변(北邊)이 소란하자 혜산진 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특명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밑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옥포(玉浦) 등에서 전공을 세운 뒤로는 항상 선봉장으로 부산ㆍ안골포(安骨浦) 등에서 적을 무찔렀다. 선조는 특히 호서 수군 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후 좌천되었다가 1년 후 다시 유도 방호대장(留都防護大將)이 되었고, 이순신이 원균의 후임으로 다시 통제사가 되자 또 수군 절도사가 되어 중위장으로 활약했다. 1598년 이순신(李舜臣)이 노량(露梁)의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 후 순신(純信)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니 선무(宣武)공신의 호가 내리고 완천군(完川君)에 피봉되었으며 호남 절도사를 지내다가 사망.
◾ 이경함(李慶涵) : 1553년(명종 8년) ~ 1627년(인조 5년), 자는 양원(養源), 호는 만사(晚沙).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양원(養源), 호는 만사(晩沙). 한성군(韓城君) 질(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 영이고, 아버지는 참찬 증(增)이며, 어머니는 이몽원(李夢黿)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3년 정언·지평·세자시강원필선을 역임하고,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 때 정철(鄭澈)에 대한 삭직논의가 일어나자 모두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부당성을 과감하게 상소하였다.
1603년 성주목사를 비롯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호조참판·경상도관찰사·병조참판에 이르렀으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한성부우윤으로 총관(摠管)을 겸하다가 나이가 많아 사직하였다. 대단한 호주가였다. 명나라에서 스스로 주호(酒豪)라 칭하는 사신 주난우(朱蘭嵎)와 대작하게 되어 먼저 상대가 의자 밑에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 왕에게 사실을 복명하자 왕이 더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아직 삼대기(三大器)는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한다.
◾ 송기(宋圻) : 1553~미상, 자 청원(淸源), 호 풍천(楓川)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고조부는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영의정 송일(宋軼), 증조부는 장단부사 증 호조판서 여량군(礪良君) 송지한(宋之翰), 조부는 성종의 부마(駙馬)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부친은 선무랑 돈녕부봉사 호산군(壺山君) 송유의(宋惟毅)이다. 1576년(선조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583년(선조16년) 별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이다.
◾ 조희보(趙希輔) : 1553년(명종 8) ~ 1622년(광해군 14), 자 백익(伯益)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대교·봉교를 거쳤다. 1595년 이후 예조·형조·호조의 낭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97년 충청도도사가 되어서는 관찰사 유근(柳根)을 도와 임진왜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599년 예천군수, 이듬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권력을 집중시키던 정인홍(鄭仁弘)에게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하였다. 1602년 북방에 흉년이 들자 어사로 파견되어 진휼활동에 공을 세웠다.
1603년 조정에 분란이 격화되면서 대동찰방으로 나갔다가 1605년 삼척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1606년 사도시정을 거쳐 광주목사로 나가 암행어사와 관찰사에 의하여 선정이 중앙에 보고되어 상을 받고 가자(加資)되었으며, 체직된 뒤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공적을 기렸다.
1611년(광해군 3)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관내 정인홍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토호(土豪)를 엄벌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뒤 분승지·분병조 등에 차정되었으나 길게 재임하지 못하였고, 1622년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이끄는 중앙 정국을 피하여 원주로 물러났다. 죽은 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신응구(申應榘) : 1553(명종 8)∼1623(인조 1), 자 자방(子方), 호 만퇴헌(晩退軒)
좌의정(左議政)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윤의형(尹義衡)의 딸이다.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0년(선조 13)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잠시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 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기축옥사 때 우계 성혼공이 삭탈관직 되고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만퇴집(晩退集)』이 있다.
< 동두천시 상패동 가운데 : 좌 아버지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 우 아들 제용감 정 신량(申湸 >
◾ 고상안(高尙顔) : 1553년 ~ 1623년, 자 사물(思勿), 호 태촌(泰村)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인 1601년(선조 34) 이후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고종 15)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그의 작품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농경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문집의 행장에 기록되어있어,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効嬪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어 일반 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농가월령가」의 나타난 계절 감각, 영농 내용 등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에, 학계에서는 그가 「농가월령가」의 작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집으로 『태촌집』이 있다.
◾ 최기(崔沂) : 1553년(명종 8) ~ 1616년(광해군 8), 자 청원(淸源), 호 서촌(西村), 쌍백당(雙栢堂)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고 저작 겸 봉상시직장·검열·대교·지평 등을 거쳐 1604년에 정주목사로 나갔다. 그 뒤 우승지, 형조·호조의 참의, 장례원판결사 등을 거쳐 160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개성부도사, 숙천·동래·경주부윤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부 명나라 원군들이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창고의 곡식을 다른 곳으로 은닉시켜 백성들을 보호하는 등 일을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적으로 잘 처리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달천교(達川橋)의 목교(木橋)를 석교(石橋)로 대체하여 민폐를 덜어주었으며, 수로를 개통하여 논을 만들어서 벼농사를 짓게도 하였다.
1616년 해주목사로 있을 때 앞서 1613년의 계축옥사에 관련되어 해서(海西) 산곡으로 모여든 도당을 회유하여 돌려보냈는데, 그 가운데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함으로써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고 뒤에 또다시 대역죄로 몰려 부관참시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숙천·밀양·정주 등에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다.
◾ 정묵(鄭默) : 1553~?, 자 양일(養一), 호 행원(杏園)
본관은 광주(光州), 고조부는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 윤공(允公), 증조부는 문과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 자란(子蘭), 조부는 문과 전주부윤(全州府尹)이자 청백리(淸白吏)인 연(淵)인데 아들이 없어 조카 응방으로 계후(繼后)하였다.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응방(應房)인데 생부는 연(淵)의 아우인 하(河)이고 그 차남이다. 어머니는 안성이씨(安城李氏)이고 고조부 때부터 안성으로 이주하여 문과급제 당시 안성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부모의 두터운 보살핌을 잃었으나 뜻을 세워 성실히 학문에 힘써(少失怙恃篤志力學) 1579년에 진사가 되고 39세가 되던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림(翰林)을 거쳐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郎)의 요직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고산현감(高山縣監)과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지냈다. 1624년 3월 인조반정의 주역이었으나 논공행상에서 서인세력의 차별을 받아 평안병사로 재임하는 동안의 핍박으로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란할 당시 호종한 공로로 호종공신이 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승자하였다.(족보기록 재구성)
◾ 곽지선(郭止善) : 1553 ~ ? , 자 거이(居易)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553년(명종 8)에 곽율(郭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민수천(閔壽千)의 딸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인조 때에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낸 곽천성(郭天成)의 아버지이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인 허엽(許曄)과 최영경(崔永慶)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고, 1588년 식년시(式年試) 문과에서 병과(丙科) 6등으로 급제했다. 정여립의 난으로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문초를 받다가 옥사한 최영경의 문인이었으나, 1591년에는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공신들에게 주어진 평난원종공신(平難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되었다. 그 뒤 양근군수(楊根郡守) 등을 지냈으며, 1601년에는 충청도사(忠淸都事)로 임명되었다. 1606년에는 종묘령(宗廟令)을 지냈고, 품계가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는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추증되었다.
◾ 최광필(崔光弼) : 1553년(명종 8) ~ 1608년(선조 41), 자 정로(廷老)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예안현감이 되었고, 1604년 봉상시주부를 거쳐, 1606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1607년 강원도도사 재직시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즉, 강원도 주민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곤궁한데도 왕실은 궁궐축조에 필요한 동량(棟樑)을 조달하고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농사를 전폐하다시피하고 선비나 노비까지도 역사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당시의 민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어 궁궐축조의 중지를 주장하였으나 왕실에 의하여 묵살되었고, 이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사관(史官)의 인물평에 따르면 검소하고 효행이 깊었으므로 1632년 나라에서 효자 정려를 내렸다.
◾ 박효남(朴孝男) : 1553년(명종 8) ~ 1611년(광해군 3), 자 자순(子順), 호 일암(一菴)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당시 무고를 당한 재상을 구해줄 것을 상소하였다. 160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용되었다.
이때에 박효남을 아끼는 자가 사원(史院)에 있으면서 힘써 천거하였으나, 그 주장한 바가 시론(時論)에 크게 어긋난 점이 있어 천거한 자는 파직당하고 박효남은 성환찰방(成歡察訪)이라는 외직으로 나아갔다.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전보되었다. 이때 크게 선정을 베풀어 현민들이 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9월 병조좌랑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호조·형조·공조의 정랑직을 역임하였다. 1610년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으나 수로공사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태천현감 재직 시에도 선정을 베풀어 이 지역의 현민들도 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고 한다. 성격은 외화내강(外和內剛: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강함)하였다.
◾ 김효남(金孝男) : 1553년(명종 8) ~ 1613년, 자 행원(行源)
내자시윤(內資寺尹)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추증된 김해(金侅)의 후손으로 고조는 지중추부사로 영의정에 추증된 김우신(金友臣)이고 증조는 청백리로 영의정을 역임한 김전(金詮)이며, 조부는 함종현령 김안도(金安道)이고 부친은 충좌위부사정(忠佐衛副司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김호(金昊)이다. 모친은 정경부인에 추증된 순흥안씨와 안동권씨이다. 부인은 훈련원습독(訓鍊院 習讀)을 역임한 정은(鄭誾)주9)의 딸인 광주정씨(光州鄭氏)이며, 후배(後配)는 숙인 진양하씨이다.
음사(蔭仕)로 평강현령(平康縣令), 능성현령(綾城縣令)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년)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 : 칠서지옥 七庶之獄)에 연루되었다. 해남(海南)으로 압송되어 무인절도(無人絶島)로 옮겨 익수부반(溺水不返)으로 수장(水葬)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린 사공이 깊은 밤에 구출하기 위하여 노도(怒濤 : 성난 파도)에 자진익사한 것으로 위장하여 신발을 돌려놓고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의령(宜寧) 지방으로 피신하여 대천리(大川里)에 정착하여 매성명(埋姓名)하고 훈학(訓學)하며 은거하시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해남에서 자결한 것으로 조정에 보고됨에 따라 1613년 7월 26일 압송일을 집안에서는 기일로 정했다. 실유택(實幽宅 : 실제 묘소)은 대천리 점곡(店谷) 신좌(辛坐)이고, 고양(高陽)의 아버지 묘 아래에 광주정씨와 합폄(合窆)했다. 김효남의 금의장(衿衣葬 : 옷을 묻은 묘)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동 원흥동에 있다.
출전 : 블로그 「화암(花岩)의 세상만사」 발췌
<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
주9) 9세 정은(鄭誾)공의 후손은 무후(无后)되었다.
5세 청도군수 찬우(纘禹) - 6세 도사(都事) 후인(厚仁) - 7세 별좌(別坐) 질(質) - 8세 윤호(允豪) - 9세 훈련원 습독 은(誾) - 10세 민수(民秀) 민준(民俊) 시준(時俊)
◾ 정인홍(1535 ~ 162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합천(陜川) 출신. 정희(鄭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우(鄭彦佑)이고, 아버지는 정건(鄭健)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81년(선조 14)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였으나 삭탈관직 등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주저 없이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서인 성균관 재임 김육(金堉) 등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 등이 계축옥사를 일으켰을 때, 영창대군 지지세력 제거에는 찬성했으나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에는 반대하였으며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1908년 4월 30일 관작이 회복되는 등 신원되었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정인홍(鄭仁弘)을 청렴강직(淸廉剛直)한 인물로 칭찬하였으나, 정인홍이 서인 정철 등을 탄핵하려 하자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물의를 일으켰다는 서인 집권세력의 인물평이 있는가 하면, 매천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정인홍의 국난극복을 위한 우국충정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이순신·최영과 함께 정인홍을 우리나라 4대 영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내암집(來庵集)』이 있다.
◾ 이이첨(李爾瞻) : 1560 ~ 1623.3.14
요약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본관 광주(廣州)이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광릉참봉(光陵參奉)이라는 말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다. 하지만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경계를 받았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는 교사를 역임하여 신임을 쌓았으며 조식의 제자이자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가르침을 받았고 허균(許筠)과 친밀하게 지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동궁(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상궁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했다.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하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옹립했던 유영경 등은 모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이첨은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뒤 사사(賜死)하였으며, 광해군의 조카인 진릉군(晋陵君)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하였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과거(科擧)를 주관하게 된 것을 기화로 소북파(小北派)는 완전히 전멸하였으며 서인과 남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로써 대북파가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1613년(광해군 5년) 서양갑(徐羊甲)과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자백하게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안치하여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1617년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광해군이 호패법을 실시하려고 하자 정인홍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중단시켰는데, 이는 당시 이이첨과 정인홍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 임진왜란 때 소집된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힌 뒤 이튿날 참형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김제남(金悌男) : 1562년(명종 17) ~ 1613년(광해군 5), 자 공언(恭彦), 시호 의민(懿愍)
조선시대 이조좌랑, 돈녕부도정,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할아버지는 김안도(金安道)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상(權常)의 딸이다. 선조의 장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仁穆王后)로 뽑힘으로써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책비(冊妃: 왕비로 책봉됨)되자 영돈녕부사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사사되었으나,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 영창대군(永昌大君) : 1606 ~ 1614
이름은 의(㼁)이고,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이다. 선조의 14명 왕자 중 13번째 왕자이며, 유일한 정궁(正宮)의 자식이어서 선조는 이미 세자(世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이이첨 등을 등용하였다. 대북파(大北派)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도 죽인다. 이어 영창대군마저 역모 연루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614년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 인목대비(仁穆大妃) : 1584 ~ 1632, 존호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휘호(徽號) 광숙장정(光淑莊定)
본관 연안(延安). 성 김씨(金氏). 존호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휘호(徽號) 광숙장정(光淑莊定). 제남(悌南)의 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주창되었고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 주장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尹訒)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朴承宗)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친정 아버지 김제남 등이 사사(賜死)되고, 1618년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파는 폐모정청(廢母庭請)사건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로서의 지위를 위협하다가 1623년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 일파를 몰아내자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을 거처로 삼았다. 글씨를 잘 썼다. 능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의 목릉(穆陵)이다.
◾ 박응서(朴應犀) : ? ~ 1623년(인조 1)
본관은 충주(忠州). 할아버지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박우(朴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박순(朴淳)이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쟁쟁한 문사였으나 서출(庶出)이어서 출세길이 막혀 있었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문의 서자들인 김평손(金平孫)·심우영(沈友英)·서양갑(徐羊甲)·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 등과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정자(亭子)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였다. 또 이재영(李再榮)·허균(許筠) 등과도 사귀었다.
광해군 즉위 초에 이들이 연명상소(連名上疏: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실음)해 서얼허통(庶孽許通: 서얼 출신들의 관계 진출을 허용하는 제도)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화를 모면시켜 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의 유혹에 넘어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강탈했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이 때문에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은 사형, 기타 소북파(小北派)들은 숙청당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칠서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죄가 다스려졌으나 혼자만 용서되어 석방되었다. 이들의 활약이 「홍길동전」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잡혀 주살되었다.
◾ 한찬남(韓纘男) : 1560 ~ 1623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경서(景緖)이다. 158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성균관박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어 헌납·예조정랑·지평·장령 등을 역임한 후에 1613년(광해군 5) 부응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대북파에 속했으며 같은 북인계에서 분파된 소북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선조의 막내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영창대군까지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대북파의 주장이 관철되어 영창대군은 사사되었으며 이때문에 서인들이 주도하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615년 사예에 이어 응교에 제수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좌우부승지·대사간 등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해주옥사(海州獄事)를 일으켜 소북파 제거에 앞장섰다. 소북파를 제거한 후에는 이이첨의 심복인 백대형(白大珩)과 함께 폐모론를 적극 주장하였다. 1617년 도승지를 비롯하여 1620년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하였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주살되었다.
◾ 백대형(白大珩) : 1575년(선조 8) ~ 1623년(인조 1)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이 되었다가 11월에 파직되었다. 15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0년 북도평사(北道評事), 1601년 공조좌랑, 다음 해 7월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감찰·황해도도사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호조정랑, 1611년 희천군수가 되었다. 일찍이 정인홍(鄭仁弘)의 문객이 되어 이로 인하여 탁용되었다.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천거로 형조정랑에 임명되었고,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냈다. 1616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이이첨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해주목사 최기를 남형죄로 투옥하여 옥사하게 하였다. 1617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천성이 음패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1618년 형조참의에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이이첨의 심복으로 한찬남(韓纘男) 등과 폐모론의 주동이 되었고, 또 1622년 섣달 그믐날 귀신쫓는 굿을 핑계로 인목대비를 살해하려 계획하고 이위경(李偉卿)과 함께 서궁인 경운궁으로 들어가 일을 도모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이귀(李貴)에게 한찬남·이위경·정몽필(鄭夢弼) 등과 함께 붙잡혀 참수당하였다. 이이첨의 권세가 높아지자, 그의 뜻에 맞추어 허균(許筠)과 함께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 화곡집 3중간서 사진 >
< 끝 >
첫댓글 계원 중에 9세 정사호 공(성재공파)과 10세 정묵 공(청백리공파)이 광주정씨이고 김효남 공의 부인이 광주정씨(부친은 동백공종 9세 정은(鄭誾))라는 내용을 보충하였고, 좌목과 인물고에 신응구공과 김효남공의 행적을 추가하였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조선 역사를 배우는 듯 합니다.
카페지기 대부님의 말처럼, 역사를 공부하기 위하여, 'Ⅲ. 동경계원은 서인(西人) 중심의 모임이었나?' 이후 크게 수정하였습니다. 추가로 조사를 해보니 기가 막힙니다. 정쟁이 이렇게 피의 숙청이고, 역모와 옥사를 꾸며 보복하고 철천지 원수가 되는지를 ~~~
최기공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을 차례로 찾아보니 원통한 일이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것이 하루아침 악몽처럼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동경계원이 많이 생존해 있고 활동적이었으면 연루되어 큰 일 날뻔 했습니다. 몰론 과거 서인이 벌인 기축옥사와 정여립모반사건 등도 많은 부분 조작사건이라는데, 계축옥사, 해주옥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기에 목숨걸고 벼슬 길에 나가있는 것도 가시방석이었을 것입니다. 동서분당 이전의 사화라는 것들도 참담한 것이지만, 임란이후의 정쟁도 참혹합니다. 최기공의 해주옥사 건도 정리하여 게시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김효남은 김제남의 형입니다
김제남의 생질인 남정은 광주정씨 정민수공의 사위입니다
남정의 사위가 정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