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월이었던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엄마’라고 말을 하고, 생일을 지나며 ‘첫’이란 글자가 얼마나 벅차고 가슴 아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1년이 지나니 ‘첫’과 ‘끝’이란 글자가 가슴 뛰는 출발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네 살 아이를 키우는 스물여섯 살의 한부모 가족이 되었다.
새로운 출발의 설렘을 안고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이 그리 즐겁지 만은 않았다. 우린에겐 없는 다른 가족구성원에 대한 당연한 물음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 또한 한부모 자녀였던 때가 있었다. 녹색 어머니날과 급식당번에 눈물 닦던 날들이, 엄마의 빈자리는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일들이 있었다. 남들과 다른 가족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문화, 한 부모, 다양성 가족과 성 역할 고정관념을 이야기하는 우리 아이 시대는 달라진 줄 알았다. 요즘 이혼이 흠이냐는 이야기들이 정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17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우리 가족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임을 나는 일상에서 만난다. 아이의 가정통신문에는 가족이 ‘가족’이라고 표현되지 않았다. 1학기는 ‘엄마와 함께하는 활동’으로 양육자와 애착형성이 잘 된 양육자는 대부분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 먼저 활동이 이뤄지고, 2학기는 ‘아빠와 함께하는 활동’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각자의 주말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물음을 듣는다. 아빠가 기다린다거나, 아빠한테 사달라고 하라거나, 아빠 말은 잘 들어야 한다거나, 아빠는 어디 있냐고 하거나, 당연히 아빠가 어딘가에 함께 있을 거라는 전제가 있다. 돌아온 월요일, 모두가 나누는 일상 이야기에도 주말동안 어린이집에서 진행되었던 ‘아빠의 날’에도 우리 아이와 나는 없다. 우리 아이와 나는 그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혹시 아이가 대부분의 친구들은 갖고 있는 가족의 그림을 부러워할까 싶기도 했고, 내가 도리어 그림을 부러워하고 있는 내 딸이 된 것처럼 마음이 미어지면서 갑자기 왕따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종종 아이와 나에 대한 감정은 머리와 하나가 되어 이성을 덮어버린다. 계속 부딪쳐 나갈 아이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걱정되고, 계속 당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가까운 어린이집에서부터 말해보기로 결심했다.
먼저, 가정통신문에 가족의 개념을 배우는 활동을 하겠다며 한 주는 엄마, 한 주는 아빠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내용을 보고 다양성 가족의 이야기도 함께 해 줄 것을 이야기했다. 아직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일일이 교육할 수준이 아니어서 만 3세에 아이들에게는 가족의 개념만을 교육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으로 ‘엄마, 아빠의 날’ 두 양육자로만 함께하는 활동을 ‘가족의 날’로 변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어린이집은 운영위원회와 논의해보겠다며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가족의 개념에서도, 함께 하는 활동에서도, 애착형성이 잘 된 양육자도, 오직 ‘엄마. 아빠’ 뿐이었다. 어떤 가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달라는 것 이 아니다. 가족의 구성원이 ‘엄마. 아빠’말고 ‘할머니. 할아버지’ 도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각의 환경이 만들어져 서로의 다른 가족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