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11/9) 저번 주 요산문학 축전에 이어 이번엔 '밀다원 시대 문학제'에 참석하였습니다.
벌써 10년이 되었고, 이 행사는 부산소설가협회가 주관하였습니다.
'밀다원'이란 피란시대 부산 중구에 위치한 허름한 카페를 말합니다.
그 시기에 김동리 소설가께서 '밀다원 시대'란 소설을 발표하여 피란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당시 이곳이 부산의 문학 중심지였던 겁니다.
이틀 간의 행사 끝에 폐막식 때 참석하여 저는 통기타로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무뚝뚝' 등 2곡을 불렀습니다.
장소는 그 유명한 '신창 돼지국밥집' - 예전 윤석열 대통령과 삼성 이재용 회장이 이곳을 찾았습니다(부산시 서구 부평동)
하지만 갈 길이 먼 저는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제2의 고향 산청으로 돌아왔습니다.
몹시 피곤한 하루였지만, 긴 여운이 남는 하루였습니다.
자료집에 저의 작품 (하늘정원)도 있습니다.
이곳과 머지 않은 초장동이 저의 고향이었고, 저의 고향에 대한 당시 이야기입니다.
24년 밀다원 문학제 원고(초단편소설)
하늘 정원
이인규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그날 옆집 형이 이끄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장기간 방치되어 있던 폐공간을 정비하여 지역 주민들과 천마산로를 이용하는 방문객들의 편의 장소가 된 그곳은, 부산시 서구 초장동에 자리 잡은 ‘하늘 전망대’였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역의 핫한 명소가 된 그곳은 어릴 때 그 형과 올라가는 천마산 길엔 당연히 없었다. 그건 산복도로가 제일 먼저 생기고 한참 후에, 해당 지자체 관계자와 뜻있는 지역 주민,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시설이었다.
최근 부산 도심 곳곳이 빈집으로 멍들고 있다는 소식은 언론을 통해 들었다. 빈집은 감염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고령화와 인구 유출 등 도심의 허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그중 어릴 때부터 청년기까지 내가 살던 초장동의 빈집 확산세는 코로나19 감염 속도처럼 무서웠다. 단란했던 마을 공동체는 사라졌고, 좁은 골목길은 인사 대신 불안한 눈빛의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공·폐가를 알리는 경찰의 스티커가 집·집마다 늘어날수록 동네와 주민의 마음은 어두워졌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근 34년 만에 고향 집을 찾았다. 그건 어릴 때 옆집에 살던 민태 형의 갑작스러운 연락 때문이었다. 형은 늘그막에 아내와 이혼하고 어릴 때 살던 집에 홀로 눌어붙어 살고 있었고, 수소문 끝에 내 연락처를 근근이 알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자산 공사와 동사무소에서 너의 집과 이웃집에 최후 통첩했다. 한번 내려와야겠어. 불하문제를 해결해야 해. 안 그러면 국유재산처분법에 따라 강제로 집을 철거해야 한다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사실이었다. 결혼 후 직장 때문에 지방을 떠돌아다니다 몇 년 전 지리산 인근으로 귀촌하였기에, 자산 공사나 그 형이 내 연락처를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내를 뒤로하고 홀로 차를 몰았다. 집 근처에 어차피 주차 공간이 없으므로 그 옛날 초장동 일대에서 가장 부유하다던 박 사장이라는 저택의 계단 밑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갔다. 계단 끝엔 어릴 때 다니던 교회가 덩그러니 있었고, 그 위론 가끔 머리를 자르던 미용실이 빛바랜 간판을 달고 위태하게 서 있었다. 동네는 늦여름이었지만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이윽고 동네 한 가운데에 있는 우물가 자리에 도착하였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그곳에서 허구한 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쓸개와 함께 막소주를 마시던 아버지와 상이군인, 실직자, 가정폭력 아저씨들의 행태가 뚜렷이 떠올랐다. 모두 한국전쟁 후에 이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지리멸렬한 삶을 이어갔던 우리 윗세대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이제 왔구나. 얼른 집에 들어가자.”
민태 형이 우물가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이제 칠십이 훌쩍 넘은 그는 머리가 군데군데 빠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자식이 넷이었건, 상이군인이라는 핑계로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돈도 벌지 못하며 사고 치던 자가 형의 아버지였다. 집안의 장남이던 형은 어느 날, 술에 만취해 어머니를 때리던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격분하여, 개 패듯이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교도소에도 갔다 왔다. 하긴 당시에 이런 가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나눈 형은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철거에 찬성, 혹은 그동안 무단 점용한 국유 재산비와 이자를 내는 간단한 서류였다. 나는 이미 결정한 바가 있어, 철거 쪽에 찬성하는 서명란에 인감도장을 찍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 역시 이제 이곳을 다시 올 필요가 없을 테니.”
형은 소주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소금을 안주로 내어왔다. 그 옛날,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윗세대들이 늘 하던 음주 행태였다.
“추억으로 생각하고 먹자. 그래도 네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나 6.25로 엄청나게 고생했다. 맨몸으로 들어와서 판잣집을 지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식구들을 건사하는 건 정말 고마워해야지. 안 그래?”
형은 정말로 아버지에 당한 고통스러운 옛 기억을 다 잊은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는 내내 세상을 초월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타부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밤마다 술에 취한 아버지에 쫓겨 옆집으로 도망가던 기억부터, 밤새도록 웃통 벗고 싸우던 동네 아저씨들의 추태까지 이 동네에 그리 좋은 기억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내 입에선 솔직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야죠. 당신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쟁통에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그 말에 형은 씩,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요양원에 계시다가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전쟁통에 미군 부대 노무자로 끌려갔을 때, 네 형이 고작 세 살의 나이로 열병으로 죽었다. 첫째를 너무도 아낀 아버지였다. 그러니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하늘 정원 벤치에 앉아 우리는 산 아래 동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경치 하나는 끝내줬다. 멀리 자갈치와 영도가 보이자, 형이 한마디 했다.
“이 하늘 정원 자리가 원래 뭐하던 곳인지 기억나냐?”
기억이 났다. 이곳은 6.26 피난민들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고달픈 삶을 이어갔던 중심 근거지였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형에게 반문했다.
“뭐하던 곳이었죠?”
“모르겠어? 여기가 우리 어릴 때 천마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이자, 산복도로 위 애들과 신나게 전쟁놀이하던 장소잖아. 하하.”
형의 웃음에 그동안 억눌렸던 나쁜 기억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오롯이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이 하늘 정원 옆에서 아련히 떠오르고 있었다.
이인규/소설가
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 장편소설 ‘53일의 여정’ 등 다수
주소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차로455번길 1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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