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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武伯問孝. 子曰 :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이 효도하는 길을 물었다. 동선생님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부모로 하여금 오직 자식이 아픈 것만을 걱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其자를 부모 자신으로 해석하면, "부모님이 건강을 잃을지 늘 염려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맹무백은 당시 노나라의 三桓인 계손씨,숙손씨,맹손씨등 세 나라 가문의 하나인 맹손씨 사람이다. 이들 세가문은 노나라 환공(桓公,기원전 711~694년)에 정치적 뿌리가 있다. 환공에게는 同,慶父,叔牙,季友등 네 아들이 있었다. 동은 환공에 이어 장공(莊公,기원전693~662)이 되었다. 나머지 세 동생들이 각각 맹손,숙손,계손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의 신분은 대부였지만 현실에서 제후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그중 계손씨가 가장 득세했다. 노나라는 삼환에 의한 寡頭(과두)정치체제였다 볼 수 있다. 이들은 노나라 정치 현실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논어 전편에 나타나는 사유에 영향을 끼치는 백그라운드가 되었다. 당시 노나라 젊은이들은 성장기에 한번쯤은 공실의 지위를 회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실의 권력인 삼가의 실체를 인정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신정근 선생의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32쪽 인용)
맹무백은 맹의자의 아들이다. 武는 시호다. 시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는 용맹한 사람이었다. 노나라와 제나라가 전쟁을 할 때 공자의 제자인 염무와 더불어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한 사령관이었을 정도다. 맹무백의 아들인 맹경자(?)가 공자의 제자인 증자(효를 가장 중시한 제자. 효경의 저자다.)의 학생이었다. 그만큼 맹부백은 효에 대해 중시여겼고 맹씨집안 자체가 효를 위했다 한다. 그가 살아 생전 공자에게 효를 물은 것이다.
이번 수다의 게스트는 한의학박사이자 강남동일한의원 원장으로 있는 곽노규원장이다. 이 분은 의료윤리,의료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강원도 제천에 있는 세명대한의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한다. 이 분을 초빙한 이유는 이렇다. 고대사회에서의 질병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의 시각과는 다르게 해석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양의학을 배운 분 보다는 동양철학의 정서를 보다 더 많이 담고 있는 한의학 전공자를 모셨다 한다.
효에 대한 이 문장은 其자를 자식으로 볼 것이냐,부모 자신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두가지 가지로 해석이 달라진다고 한다. 자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부모가 자식의 일에 항시 걱정하는 바가 있으니 이에 대해 심려치 않도록 자신의 일에 잘 처신할 일이다. 다만, 병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걸리면 걸리게 되는 것이 그 것이라, 부모가 오로지 자식의 건강만을 걱정하게 하면 그것이 효라는 거다. 其자를 부모로 보면, 자식이 원낙 일을 잘 처리하고 근심걱정이 없게 하니 부모인 자신은 자신의 건강만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거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효라는 것일게다. 아니면, 자식이 항상 부모가 건강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이 효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가을 날씨와 노인 근력은 아침 저녁으로 다르다고 했다지 않나. 나이 드신 부모가 조석으로 편안한지 안부를 여쭙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는 것일 게다. 어찌됐든 효라는 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다가가는 윤리개념이니 근본적으로 사유의 주체는 자식이라 봐야 겠다. 자식이 바라보건데 부모가 자신의 건강만을 걱정하게 하든지, 자식의 건강만을 생각하게 하든지 간에 공부 잘 하고 출세하고 장가 잘 가고 알들 딸 잘 낳고 주변 사람들에게 엄친아소리 들어가며 잘 살아라는 것일거다. 곽노규선생님은 이 부문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수다스럽지만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를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돈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 것이 효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아프지 않는 것이 효다. 아프지 마라. 부모님 걱정한다는 것이다. 맞다. 88만원 세대,삼포세대를 자식으로 둔 산업화,민주화세대인 부모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또 부모가 아프면 자식은 심란해진다. 신경쓸 수 밖에 없다. 바쁜 일상의 일을 처리하기 바쁜 자식은 부모의 수발을 들게 된다. 부모는 그런 자식이 자신을 위해 애쓰는 것이 불편하다. 불편을 끼치는 바가 바로 불효라면 부모가 아파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의 병을 늘 걱정하는 것일게다. 실제 곽노규선생님은 진료 현장의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83세 어머니가 무릎관절염으로 고생하고 병원에 큰아들의 도움을 받아 오신단다. 그 분이 항상 하는 말이 자식이 같이 다녀 귀찮아 죽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큰아드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결국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당신 때문에 자식의 시간을 뺏고 바쁜 사업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그러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든 자식의 병을 걱정하든 결국 자식이 부모의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도록 잘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이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지만 걸리는 것이 감기이니 말이다. 더우기 옛날에는 옹이손이 걸려도 재수없으면 폐혈증으로 쉽게 죽을 수 도 있었다. 서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그나마 의료 혜택을 보았다 할 수 있는 권문세가의 상층부들도 질병은 무서운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자식들의 역할보다 고대의 역할은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문만 잘 타고 나면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 말 잘 따라 맡은 바 가족의 일을 잘 해 내면 그만이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형제끼리 있는 재산 가지고 부모 밑에서 치고 박고 하는 꼴을 벌이지 않는 것일 거다. 그러한 일상의 삶들만 잘 갈무리하고 살면 남는 것은 결국 건강 문제 밖에 없지 않겠는가 싶다.
또한 당시 맹무백이 공자에게 효를 물었을 때, 어떤 구체적 정황을 염두에 두고 그러했는지 상상을 해 보면 여러 해석의 변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변주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삶의 처지를 고려하여 이 문장을 해석해 보는 바도 좋을 것 같다. 효는 쌍방향을 갖지만 기본적으로 자식에게서 부모에게로 향하는 실천윤리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부모에게 받은 것은 다시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내려간다. 나의 지금에 있기까지 노심초사하고 정신적,경제적 후원을 마다하지 않은 부모는 자식이 부모의 위치에 이르면 더 높은 곳의 상단에 위치지여 공경할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 만으로도 다행인 존재가 된다. 이 것은 자식이 부모가 되면서 결정되어진 부모의 운명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자신이 부모가 되면서 부터라고 하지 않나. 제대로된 사람이라면 이 때부터 부모의 마음과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 것이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목이 맨 자식에게 이건 맘 뿐이다. 추석 명절 때 번다 한들 겉모습은 툴툴거림일 뿐이다. 아니면 그저 데면데면일 뿐이다. 그렇게 일상을 살다가 부모가 아프면 비상이다. 부모의 여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 확진된 순간 자식의 맘은 온갖 회한에 휘둘린다.한바탕 감정적 격변이 휘몰아 치고 난 후 새로운 관계가 진일보한다. 변주야 많겠지만 자식은 애쓴다. 이것 저것 해 본다. 부모의 선택은 자식의 행동 거지 안에서 결정된다. 그렇게 살다 그렇게 고생하다 부모는 죽는다. 자식은 부모의 운명을 되밟는다. 이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동물의 법칙이다.
孝와 疾이 연결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병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물리적인 관계는 사라진다. 정신과 영혼이 관계한다지만 결국 자기만족일 경우가 크다. 현대 사회에서는 병과 죽음의 거리는 꽤 있다.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에는 10년의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이 좁을 수록 선진국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아마 이 간극이 대단히 좁았을 것이다. 평소 건강하게 지냈던 사람이 어느날 보이지 않는다.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전염병이 돌라치면 다 같이 황천길인 시절이 그 시절이다. 그러니 부모가 병에 걸리는지 자식이 병에 걸리는지 노심초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병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자식이 출세하고 잘 나가더라도 병에 걸리면 끝나는 것이다. 옆에 집안 자식이 그 꼴을 당하는 것을 많이 봤다. 그러니 부모는 생각한다. 못 나고 처진 아이라도 그저 건강만 해 다오. 그게 효다 인마. 라고 하소연이자 한탄을 하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도 본질적으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잘나도 아프면 끝이다. 그러니 건강한 것이 제일이다. 그게 효다. 안 그류~?~!
병이야기가 나왔으니 疾,病,患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을 하자. 곽노규선생님의 글과 강신익교수님의 글을 읽고 또한 나 자신의 경험을 모아 생각해 본 것이다....(이 이야기는 다음에..바쁜 아침이 되어서리...)
疾의 성형문자적 의미는 화살에 맞고 침대에 누워 앓는 병자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란다. 이르바 병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 치료는 당연히 그 원인을 제거 하는 것. 제거하면 다시 원래의 구조와 기능으로 회복된다. 외과적 손상이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과 전염성 질환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급성기 질환을 의미한다.
病은 사람이 침대에 누워 앓고 있는 것 같은데 병의 원인이 안에 있다. 사람이 뭔가 테두리 안에 갖혀 있다. 이 경우 병의 원인을 쉽게 제거할 수 없다. 유전과 체질에 기인한 것이기에 나름 노력해도 안 된다. 물론 조절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완치할 수 는 없다. 병은 만성질환을 의미한다. 가끔 스님들이 고지혈증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수치가 높다. 당혹스런 표정을 짓긴 하지만 그건 스님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적 소인으로 고지혈증이 있는 경우가 2/3은 되니까. 생활습관 개선으로 지혈수치를 떨어 뜨린다 해도 20-30%밖에 효과가 없다. 약을 먹는 수 밖에 없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병들이 고혈압,당뇨,고지혈증으로 대표되는 혈관질환과 암등이 그 예이다. 암도 100%완치가능한 것도 있지만 친구처럼 입이 대짜로 나온 투정 많은 막내 동생 다루듯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왠수처럼 대하다간 자칫 제 풀에 넘어갈 수 있다. 없애지 못 하면 즐기라. 이 것이 이 영역의 처세다.
患은 병의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지금 현재 고통과 근심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를 표현 한 것이다. 같은 질병을 앓고 있어도 각 자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고통과 근심의 질과 양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단지 병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 환자의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거기에다 영적인 능력까지 고려하여 치료되어야 한다. 이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세계 보건기구의 건강의 정의다.
疾과 患은 앓고 있는 사람이 대상이 된다. 치료자의 시선으로 질환을 본다는 측면에서 같다. 또한 완벽한 건강의 모습을 추정한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여기에서 개입한다. 나이로는 활기발랄한 20대 인간의 모습을 이상으로 본다고 할까? 물론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상이 있으면 현실의 추정치가 있기 마련이니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따져 묻고 대비해 본다. 이 것이 이 이론의 특징이다. 그러나 사람은 완벽한 때가 있던가? 우리는 항상 어딘가 아프고 어딘가 변화되며 살아가는 존재다. 건강함의 완벽함을 구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곽노규원장은 건강이 아니라 未病이라는 개념을 쓴다. 아직 아프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현실에선 그게 그거 아닌가 싶지만 어떻든 개념상 분명 다르다. 뉘앙스가 다르다고나 할까? 시선이 분명 다르다. 플라톤에서 연암으로 시선이 옮겨 간다. 한 길에서 여러 길로 분산되는 듯 하고 숨통이 좀 터지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病은 환자의 몸과 정신을 한데로 묶는 개념이 된다. 그리고 본인의 시선으로 병을 앓는다. 의료인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도울 뿐이다. 의료인은 병을 재단하고 각가의 지침을 내리지만 환자는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죽는 그날 까지.
질,병,환은 고립적이고 분별되고 그래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각각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집중될 뿐이다. 급성 질환은 疾로 보고 빨리 치료할 영역이다. 患은 사회복지 측면에서 강조될 문제다. 가난과 우울,소외,경제적 능력의 문제가 관여하므로 가족과 지역 사회,크게는 국가가 관여할 영역도 있다. 병은 환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냅둬~ 먹다 죽을래~해 버리면 치료는 난망하다. 아~하! 이 병은 결국 나를 살리는 효자병이구나. 이 나이에 병이 없는 게 이상하지~라고 긍정하거나 내 삶을 되돌아 보라는 신호지~뭐. 하는 것도 좋은 병에 대한 태도다. 그러나 병의 과정 과정에는 질의 관점과 환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순간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환자를 도와 주고 끝까지 돌봐 주는 것이 주변과 의료인의 태도일 거다. 물론 여전히 병을 앓고 있는 본인이 주체가 됨은 확실히 할 것~!
결론적으로 부모가 건강하게 사는 것은 자식들에게 고마운 일이다. 또한 자식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부모에게 잘 하는 일이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효의 근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서로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기가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답은 각 자에게 있다. 답이 있다면 그건 문제 자체가 틀린 거다. 다만 이번 강의를 통해 한가지는 확실히 얻을 수 있다. 효과 병은 긴밀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거. 그 함수는 각 자가 풀 문제라는 것. 끝~!
첫댓글 참 대단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듣고 또 듣고 했을 원샘이 걱정입니다.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주치의이신 원샘은 무엇 때문에 '정리의 달인'으로 사는가?
즐김인가, 의무감인가, 배려인가? 어느 것이든 난 좋다. 그러면서도 이 어려운 작업에 끙끙댈 모습을 생각하니, 그러합니다.
저도 두 번 들었는데, 샘의 글을 읽으니 좀 더 가까이 옵니다. 그 놈의 학자들의 시끄러운 수다가ᆢ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