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묵주기도 >
고즈넉한 새벽, 경주 남산 자락의 화실 창에도 봄기운이 내립니다.
일흔의 나이에도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제가 8남매 중 막내여서일까요?
그리움의 자락을 잡고 제 삶에서 사랑의 근원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 얘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30년 동안 걸어 다닐 수 없으셨기에
삶 자체가 온통 기도였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남편과 한 첫 번째 약속이 엄마랑 함께 사는 것이었죠.
일찍 부모님을 여윈 남편도
아이들에게 할머니 사랑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열망이 컸던 터라
어머니는 저희 집의 구심점이 되셨습니다.
성모상 앞에 촛불을 밝히고 미소를 지으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방은
작은 성소였지요.
제가 어리던 시절 23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건사하시며,
그 작은 체구로 모든 식구에게 사랑의 밀알이 되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끼니마다 두레상이 6개나 되니 매일매일이 잔칫집이었지요.
그 작으신 체구로 김장하실 때는 500포기 배추로 산을 이루시곤 하여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왜 그리 걸인들이 많았는지요.
깡통을 든 걸인들을 한 번도 그냥 보내지 않으셨던 어머니께서는
과로로 여러 번 쓰러지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는 목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되찾으셨다니,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던 분이셨던 어머니를
아마도 성모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것 같아요.
가난한 신혼 시절,
어머니는 큰 규모의 미술 대전 공모를 준비하는 남편 등 뒤에서
“불쌍한 우리 사위, 세계에서 제일 가는 화가 되게 해 달라.”고
어린애처럼 기도하셨습니다.
한국 최고도 아니고 세계 최고 화가라니 너무 심하다고 말씀드리면,
“아니다, 될 만한 그릇이기에 하는 거다.”고 괜스레 역정을 내곤 하셨지요.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안 뮤지엄에
남편이 그린 500호의 금강전도가 걸렸을 때,
저는 기어코 생전에 엄마가 바치신 기도의 응답을 보았습니다.
한평생 기도로 밑거름이 되어 주셨던 어머니의 죽음은
제가 성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출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묵주기도 책에 메모하신
삐뚤빼뚤한 구어체의 어머니 글씨를 본 순간,
그 작은 책자가 새로운 묵주기도 책을 만들라는 소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도 긴 세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우리 그림으로 된 묵주기도 책은 왜 없을까?’ 하고 늘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 위에 딸의 기도가, 딸의 기도 위에 손녀의 기도가
차곡차곡 포개지는, 대를 이어 사용할 수 있는 가죽 장정의 묵주기도 책!
아, 정말 근사할 것 같았습니다.
평생 자손들을 위해 성모님께 간구하신 어머니의 묵주기도가
이제는 이 딸의 손을 통해 성모님께 봉헌되는 오묘한 섭리에 찬미를 드리며
오늘도 어머니의 기도에 제 기도를 포갭니다.
정미연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성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