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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격투기라는 단어조차 희귀했던 1980년대 중반. 대구의 한 체육관에서는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특이한 무술시합이 열렸다. 복싱경기용 링 위에는 10명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각종 무술의 유단자들. 시합규칙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무조건 싸우는 것. 심판도 없었고 제한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공이 울리자 링 위에서는 순식간에 활극이 벌어졌다. 네댓 명의 선수가 대번에 나가 떨어졌다. 어디에서 누구의 주먹과 발이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선수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시합에 임해야 했다. 로마시대의 검투사들도 이런 극한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만큼 시합은 살벌했다.
상대의 공격을 매서운 반격으로 저지하는 예수현 국제프로태권도협회 총재 | |
"어찌 보면 요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종격투기 대회의 효시라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 시합은 단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우선 위험했고 또 지금처럼 경기 전에 보험 가입을 한 것도 아니어서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사회에서도 이런 과격한 시합을 용인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대체 왜 이런 무지막지한 시합을 열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보다 강인한 무술을 갈망해서다.
무도 태권도
역수도 격파 모습.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
"국제프로태권도협회는 지난 1979년 창설됐습니다. 태권도는 1970년대 들어 수련 인구의 연령이 낮아지면서 기존에 있던 무도정신이 결여돼 스포츠화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에 태권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태권도를 원래의 강한 무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프로태권도를 만들게 된거죠. "
강함을 추구한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프로태권도는 기존의 태권도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된다. 우선 호구를 입지 않는다. 시합용 글러브와 마우스피스, 낭심보호대 외에는 어떤 장비도 착용하지 않는다. 공격방법에도 제한이 없다. 정권으로 얼굴 가격이 가능하고 점프공격도 할 수 있다. 팔꿈치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된다. 공격방법에 따라 채점기준도 다르다. 정확하게 타격이 되지 않더라도 완벽한 묘기도 점수로 인정해준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세찬 공격을 멋지게 방어했을 때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기본 자세도 일반 태권도와 다르다. 마치 복싱을 하듯 가드를 높이 올리고 있다. 예 총재의 제자 몇명이 프로태권도 기본 동작을 시연했다.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어 올려치기도 보이고 훅 성향의 펀치도 구사한다. 약속대련 때는 K-1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주먹 돌려치기와 팔꿈치로 머리를 가격하는 장면도 나온다. 발차기 역시 위력적. 어느 자세에서도 타격이 가해진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피가 튄다'는 말이 어울린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이긴 하지만 공격이 너무 단조로워 재미가 떨어진다는 말이 종종 나오는 것이 사실. 프로태권도는 이와 달리 박진감 넘치는 시합이 전개된다는 것이 장점이다. 공격범위가 다양한 까닭에 대부분의 시합이 KO로 결판난다.
프로태권도에는 역수도(손날의 반대편) 타격법도 있다. 역수도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부분. 손을 이용한 타격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분야다. 그런데도 예 총재는 손날의 반대편을 이용해 두꺼운 송판 다섯 장을 한번에 부숴버린다. 만약 목 부위를 역수도로 가격당했다면 생사를 걱정해야 할 처지일 터. 대체 얼마나 수련을 해야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지 무술 문외한으로서는 감이 오지 않는다.
세계화의 첨병 프로태권도
반백년을 무술인으로 살아온 예 총재. 예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날카로움은 여전하다. 세월의 무게만큼 파괴력의 강도는 떨어졌지만 재빠른 몸놀림에서는 녹록지 않은 관록이 묻어 나온다. 봉 4단 격파, 역수도 격파, 정권과 수도 손등을 이용하는 3단 격파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다. 게다가 상대를 가격하면서 내뿜는 기합은 젊은이들조차 주눅들게 한다.
그런 예 총재에게 프로태권도의 활성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필생의 과업이다. 1979년 국제프로태권도협회를 만든 이래 삶의 대부분을 여기에 바쳤다. 가정조차 뒷전이었고 얼마되지 않던 재산마저 프로태권도에 들어갔다. 예 총재가 이처럼 프로태권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예 총재는 다른 무술이 세계화되는 것과 태권도가 세계화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본다. 태권도의 세계화는 국위선양을 통해 종주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디에나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다면 이미 세계 속에 자리잡고 있는 기존의 태권도로는 이런 게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는 등 세계 각국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린 것은 인정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태권도 수련 때는 우리나라 구령과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을 몰라주면 안되죠. 그러나 태권도는 지나치게 스포츠화됨으로써 무도 본연의 의미가 퇴색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프로태권도라고 봅니다. 프로태권도가 활성화되면 외화획득뿐 아니라 세계에 수출할 수 있는 무술상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 총재는 K-1 등과 같은 이종격투기를 예로 들었다. 이종격투기가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결국 그 과실은 주최 측인 미국이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한국을 기반으로 한 무술의 세계화는 더욱 절실하다는 논리다.
프로태권도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마추어 태권도계와의 공생이다. 상황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과거에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의견대립으로 숱하게 충돌도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태권도에도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데 양측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공존의 길을 찾고 있다. 아마추어가 없는 프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서로가 대화와 협력을 통해 태권도의 명실상부한 세계화라는 궁극의 목표에 도달해보자는 취지에서다. 현재 프로태권도는 최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에 비해 다소 정체된 상태. 그때는 대구지역의 케이블TV에서 정기적으로 중계를 해 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장 돈벌이를 하려면 선수 몇몇을 동원해 지금이라도 대회를 열 수 있죠. 하지만 프로태권도가 제대로 제 길을 가려면 아마추어 태권도와의 공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프로태권도는 관중의 호응이 대단히 높은 엄청난 무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실전에선 정확한 상황판단이 우선
예 총재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 무술계에 입문해 스무살 때 태권도 관장을 지냈다. 이후 다양한 무술을 두루 섭렵했고 현재는 세계무예총연합회와 세계무술종합학교 회장을 맡고 있다. 한창일 때는 앉은 자리에서 3m가량을 뛰어 상대방을 가격할 수 있을만큼 몸이 날랬다. 텔레비전 카메라 다섯대가 동원됐으나 몸동작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근력이 예전같지 않지만 스피드만은 아직도 자신이 있다고 장담한다.
이런 정도의 경륜이라면 주먹 하나만큼은 자신을 갖기 마련. 하지만 예 총재는 오랜 기간 수련을 한 결과 무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겨루는 대련이 아니라 형(型)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대련은 고작 10% 수준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밤중에 격투기 선수의 집에 갑자기 강도가 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잘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볼 때는 아주 낮습니다. 왜냐 하면 스파링을 통해 배운 것은 돌발상황이 터졌을 때 제대로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해 수없이 형을 연습하다 의도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 숙달을 통해 쌓았던 실력이 튀어나오는 게 참무예라는 것이죠."
일반인들은 대부분 강력한 타격으로 결정짓는 맞대결에서의 승리를 실력의 기준으로 삼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예 총재의 지론이다. 상대의 공격을 잘 막는 것도 기술이며 방어가 없는 무술은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프로태권도가 방어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면서 예 총재는 무도인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정확한 상황판단을 꼽는다. 예컨대 열 명이 주위를 둘러싼다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힘에 부치기 마련. 필요하다면 재빨리 자리를 피해야 하고 그것이 안된다면 주위의 시설들을 이용해야 한다. 벽이 있다면 거기에 기댈 경우 최소한 뒤로부터의 공격은 막을 수 있다. 기선제압도 중요하다. 상황에 따라 고함을 동반한 기선제압으로 사태가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주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있다면 필요없는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상대방을 눕힐 수 있는 타격실력은 가장 마지막에 사용하는 하책(下策)이라는 게 예 총재의 결론이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몇가지 있습니다. 먼저 프로태권도 활성화를 통해 세계무술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보고 싶고 다음으로는 생애에 반드시 무술올림픽을 열고 싶은 게 꿈입니다. 돈을 받고 단증을 발급하는 등 무술단체 난립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정비하는 것도 무술원로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