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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올렸던 소년의 숲(6월 이달의작품) 뒷 이야기입니다.
아쉬웠던 분은 뒷 이야기도 읽어주세요.
<소년의 숲 뒷 이야기>
소년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몇 날 며칠 울던 소년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난밤 꿈속에서 봄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울지만 말고 나무를 심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주세요.”
잠에선 깬 소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록 봄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지막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산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봄이 한 줌 흙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자리에 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었다. 봄이 좋아했던 함박꽃나무였다. 소년은 두 그루의 함박꽃나무가 봄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젠 절대 나무를 베지 않겠다며 두 나무 앞에서 맹세했다.
소년은 차와 전자제품, 가구 등을 처분했다. 커다란 집도 허물었다. 봄과의 약속을 생각하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차도를 내느라 사라졌던 개울과 옹달샘을 복원했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보수했다. 그런 다음 이십 년 전처럼 날마다 나무를 심었다. 한 그루 한 그루 정성껏 심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날마다 나무를 심었음에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무를 심을 때마다 매번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으려고 애써도 참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범산에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숲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억하던 나무를 심는 소년도 사라졌다고 믿었다. 이상한 사람이 소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왜 나무를 심으면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는 거지? 참 이상한 사람이야.”
“눈물을 흘리며 나무를 심어서 그런가, 나무들도 우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나무도 산도 전혀 반짝거리지 않아.”
“찬란했던 범산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야.”
“소년이 사라졌으니 범산은 이제 끝이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며 흉을 보았으나 소년은 쉬지 않고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이십 년의 세월이 다시 흐르고 범산은 어느덧 또다시 울창한 숲을 이뤘다. 소년도 나이를 먹어 오십대 중반이었다. 소년은 숲을 많은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등산로를 만들었다. 그래야만 봄이 좋아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산 정상에 연리지 나무가 있다고 말했다. 연리지 나무는 두 그루의 함박꽃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나무의 나뭇가지가 서로 찰싹 달라붙어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였다.
처음 싹을 틔운 두 그루의 함박꽃나무는 서로를 바라보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더니 서로를 그리워하듯 서로를 향해 나뭇가지를 뻗었다. 어느 날 두 나뭇가지는 찰싹 달라붙어 서로를 껴안았다. 그러더니 절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자 나뭇가지가 서로 달라붙어 한 몸이 됐던 거다. 사람들은 참 신기하다며 범산의 연리지 나무라고 불렀다.
그렇게 찾아오던 사람들은 어느 날부턴가 산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숲을 이루었으나 나무들이 우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연리지 나무도 이상하다고 말했다. 두 그루의 함박꽃나무가 단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려 이십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다. 나무들이 우는 것 같다는 소문도, 함박꽃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소문도 금세 퍼져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누구도 범산을 찾지 않았다. 왠지 으스스 하다고 말했다.
소년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산을 찬란하게 만들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숲의 요정을 떠올렸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숲의 요정이 찾아온다면 숲이 다시 찬란하게 빛날 거야. 하지만 숲의 요정을 어디에서 찾지?’
소년은 기도했다. 숲의 요정이 제발 돌아오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느 날 범산에 이상한 사람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늙은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이십 년 만에 찾아온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오두막 마당에 들어섰을 때 털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남자가 나무를 심던 소년이라는 걸 첫눈에 알아봤다. 걸음걸이도 말투도 똑같았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물었다.
“혹시 이 오두막에 살던 나무 소년과 아가씨를 아시나요?”
소년은 할아버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하지만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잠시 주춤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떠나자 나무 소년도 어디론가 갔습니다.”
“아가씨와 나무 소년이 떠났다고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는 소년의 두 눈을 바라봤다. 눈빛이 나무 소년과 똑같았다. 할아버지는 소년의 맑은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 부르지만, 나무 소년이 분명했다. 사실 나무 소년이 아니고서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무를 심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모르시나요?”
“전혀 모릅니다. 다만, 숲이 모두 사라진 해에 나무 소년도 떠났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숲이 이렇게 슬프군요.”
“숲이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가 또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숲이 모두 사라졌나요?”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무 소년이 욕심을 부렸습니다. 나무를 팔아서 큰 집을 짓고 멋진 차를 사고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나무 소년은 전혀 욕심이 없는 청년이라고 들었는데 누가 옆에서 부추기거나 꼬시기라도 했나 보죠?”
소년은 할아버지를 또다시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공인중개사인가? 아니, 공인중개사는 덩치가 컸는데. 그럼 광산업자인가? 아니, 광산업자는 키가 작고 눈이 컸는데. 그럼 목재상인가? 비쩍 마른 게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잖아.’
소년은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리다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 나무 소년의 잘못이었습니다. 누가 부추긴다고 욕심을 냈다면 그건 처음부터 욕심이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물었다.
“혹시 말이요. 나무 소년을 부추긴 목재상에 대해 아시나요?”
소년은 다시 할아버지를 살펴봤다. 목재상이 분명한 것 같았다. 늙고 병들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나 이목구비가 비슷했다. 그러나 모른척했다.
“목재상이라고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아버지가 봄에 관해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왜 떠났나요? 나무 소년이 아가씨를 나뭇잎처럼 아름답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요.”
“나뭇잎 말입니까?”
“그래요. 나무 소년이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았었죠.”
할아버지가 봄에 관해 자세하게 말하자 소년은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봤다. 봄이 나뭇잎처럼 아름답다는 말은 목재상에게만 했던 말이었다. 결국, 할아버지가 목재상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하지만 여전히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지금 아는 척해봤자 아가씨가 돌아올 일도 아니었다. 목재상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아마도 나무가 됐을 겁니다.”
“나무라고 했소?”
“네. 숲에서 왔으니 나무가 됐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잠시 후 목재상이 산 정상에 가겠다고 하자 소년이 따라나섰다. 목재상이 너무 아파 보여서 혼자 둘 수가 없었던 거다. 얼마 후 목재상과 소년은 산 정상에 있는 연리지 나무 앞에 섰다. 목재상은 한동안 말없이 연리지 나무를 바라봤다. 소년도 목재상 곁에서 연리지 나무를 바라봤다. 그런데 목재상이 어디가 아픈지 기침을 심하게 했다. 봄처럼 금방이라고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목재상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해가 질 무렵 소년에게 물었다.
“이 죄 많은 늙은이도 죽으면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거든 산모퉁이라도 좋으니 나를 이 산에 묻어주겠소?”
목재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꼭 이 산에 묻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 산은 아무도 찾지 않는데 말입니다.”
“저 연리지 나무를 바라보며 용서를 빌고 싶어 그러오.”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까?”
“그럴 일이 있소.”
소년은 더 묻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재상은 연리지 나무에 기대어 앉더니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멈췄다. 소년은 연리지 나무가 보이는 곳에 목재상을 묻었다. 그런 다음 연리지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봄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소년의 눈물이 나무줄기에 닿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순간 함박꽃나무가 반짝 빛을 내더니 꽃망울이 맺었다. 그리고 잠시 후 봄이 환하게 웃듯 하얀 함박꽃이 활짝 피었다. 나무를 심은 지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꽃이 폈다. 그러자 놀랍게도 우는 것 같았던 다른 나무들이 일제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연리지 나무가 이 숲의 어머니 나무처럼 다른 나무의 생명을 살려냈던 거다. 범산은 한순간에 아름답고 울창한 숲으로 살아났다.
소년은 오랜만에 마음 편히 잠들었다. 이튿날 소년은 아침 일찍 숲으로 향했다. 지난밤 꿈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봄을 봤던 거다. 그 꿈처럼 숲속에서 봄을 만났다. 아가씨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틀림없이 봄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봄은 이십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이목구비가 희미했다. 소년을 보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졌다. 봄을 오두막으로 데려와 밥을 지어주자 허겁지겁 먹더니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다행히 봄은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을 했다. 그런데 소년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나이를 먹기도 했지만, 봄이 소년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또다시 기억을 잃었던 거다. 소년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봄을 다시 만나자 그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기쁠 뿐이었다. 봄은 소년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소년은 나이를 먹었지만 봄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소년이 물었다.
“정말 나무 소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나요?”
“모르겠어요. 전 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당신 이름은 지금부터 봄이에요. 봄에 찾아왔으니까요.”
“제 이름이 봄이라고요? 마음에 꼭 들어요.”
봄이 다시 오자 숲은 예전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찾아오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개울물도 세차게 흘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다. 누군가는 연리지 나무에 얽힌 나무 소년의 전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소년은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았다. 이따금 새로운 부동산 공인중개사와 광산업자와 목재상이 찾아왔으나 매번 정중히 거절했다. 이제 산에 다녀간 사람들은 저마다 웃으며 말했다. 늙은 산지기와 예쁜 딸이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고, 늙은 산지기는 오래된 나무 같고 예쁜 딸은 숲의 요정 같다고, 둘 다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범산은 정말 아름다운 숲이라며 다시 또 가야겠다고 말했다.
첫댓글 이제 더는 인간들이 욕심을 낼 수 없는 범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는데 인간 욕심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ㆍ
잘 읽었습니다.
숲이 잘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네ㆍ장성 축령산 숲이 잘 보존 되면 좋겠습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