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34〉자신 이익 위해 상대 인격 해치지 말아야
■ 군자와 소인배
대혜와 정각, 상호 첨예하게 대립
묵조.간화 대논쟁 속 서로 사모해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이 수행하는 간화선은 송대 대혜종고(1089~1163)에 의해 정립된 선이다. 대혜는 당시에 참선하는 수행법을 비판하였는데, 비판대상의 선사는 조동종의 굉지정각(1091∼1157)이다. 대혜와 정각이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이를 묵조.간화의 대논쟁이라고 한다.
논쟁의 원인은 당시 대혜가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도 배제할 수는 없다. 대혜는 나라가 어려울 때, 조동종 계열 스님들이 침묵하고 있던 점에 반감을 가지게 되면서 형식적인 선정과 의식에 집중하는 조동선풍을 다만 앉아 있는 고목무심(枯木無心)의 묵조사선(照邪禪)이라고 비판하였다. 본 성품, 즉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안일함에 안주해 있는 승려들에 대한 비판이다.
한편 정각은 “결코 대혜의 간화선이 제일의선(第一義禪)은 아니다”라고 응수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혜와 정각, 두 스님의 인연은 표면적인 것과는 다르게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대혜가 15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칠 무렵, 정각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아육왕산 광리사 주지로 대혜를 추천하였다. 대혜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그해 명주 광요선사에서 공식적인 개당설법을 할 때, 증명법사로 정각이 참석하였다.
또한 정각은 대혜가 유배지에서 사찰로 돌아오면 수많은 대중이 함께 상주할 것을 예상하고, 소임자에게 ‘한 해 예산을 서둘러 준비하고, 창고의 물품이나 쌀을 비축해 두라’고 분부하였다. 1년이 지나 대혜가 주석하고 있던 도량에서 쌀이 부족하다고 하자, 정각은 비축해 두었던 식량을 대혜에게 보내었다. 대혜는 정각을 찾아가 감사를 하며 말했다.
“고불(古佛)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역량이 있겠습니까?”
훗날 대혜가 정각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우리 모두 늙었소. 그대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부르면 그대가 대답하다가 누군가 먼저 죽는다면 남아 있는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도록 합시다.”
몇 년 후 정각이 천동산에서 열반에 들기 전날, 대혜에게 유서를 보냈는데 대혜가 그날 밤 천동산에 도착하여 정각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이 이야기는 <인천보감>에 전하는 내용이다.
상대를 끌어안는다는 것,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구축한 그 신념을 접어두고 상대편 사람을 존중해 주는 일이 어찌 말만큼 쉽겠는가?
대혜종고 시대 바로 이전에 황룡파 선사들을 의지해 참선한 재가자가 많았는데, 왕안석(1021∼1086)도 그중 한 사람이다. 왕안석은 북송(北宋) 신종 때 재상으로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신법(新法)을 실시했으나 급진적인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이때 왕안석의 정책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구법당(舊法黨)의 사마광(1019∼1086)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상대가 어려울 때 상대방을 모함하거나, 상대방이 곤란에 처했을 때 이를 빌미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정당당하게 군자로서 대결하였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의 인격을 해치지 않았다. 왕안석이 먼저 죽었는데, 사마광은 병이 위중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베풀었다고 한다.
대혜와 정각이 수행면에 있어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의 법력을 인정해 주었고, 왕안석과 사마광이 정치적 신념으로 대립은 하였지만 군자다운 도량으로 서로를 사모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이 하룻밤 이슬과 같거늘 서로 반목(反目)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 글을 읽는 그대는 군자인가? 소인배인가?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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