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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9) - 2024. 12. 15(일) 비산성당, 복자성당 |
비산(날뫼) 성당 - 대구지역 초기 교우촌이며 성 이윤일의 첫 무덤이 있었던 곳 |
대구시 서구 북비산로 67길 31
날뫼〔飛山〕의 유래
날뫼라는 이름은 설화에서 유래한다. 옛날 이곳 달서천의 냇가에 빨래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서쪽하늘에 풍악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산모양의 커다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놀라서 “산이 날아온다”고 비명을 질렀더니 그만 그 날아가던 구름이 멈추어 산이 되었다. 그래서 ‘날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신모(神母) 설화는 전국 곳곳에 있다.
옛날 서라벌에 남녀 두 신이 찾아와 경치를 둘러보고는 “야!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이로구나!” 하고 외쳤다. 이때 빨래하던 한 처녀가 그 목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산과 같이 거대한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처녀는 “산 봐라!”라고 하며 정신을 잃었다. 이 바람에 두 신은 그 자리에 멈추어 그만 산이 되었다. 남자는 남산(南山), 여자는 건너편 망산(望山)이 되어 천년을 사모하면서 마주보며 지내게 되었다. 경주 남산과 망산 전설이다.
날뫼에 마을이 형성된 때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1608년(선조 41) 해주오씨(海州吳氏), 인동장씨(仁同 張氏), 경주최씨(慶州 崔氏) 등 세 성씨가 세거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장최동(吳張崔洞)’으로도 불렸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의 옛길인 영남대로가 통과한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경부선 철로가 이 동네를 통과하여 비산동의 발전에 장애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산동은 초기철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굴된 곳이다. 국보로 지정된 대구비산동출토동기류(大邱飛山洞出土銅器類)에 동검(銅劍), 동모(銅鉾. 투겁창), 동과(銅戈, 꺾창) 등이 있다.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 살기에 좋았다는 뜻이 된다. 이밖에 날뫼북춤, 천왕메기가 각각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초기 교우촌의 형성과 발전
대구의 서북쪽 성밖의 작은 마을 날뫼에는 아주 이른 시기인 1829년경부터 신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구에서 가장 오래 전에 천주교 신자가 살았다는 말이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이 루도비코의 일가가 1929년 경부터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루도비코는 모친 수산나와 8세 된 프란치스코, 6세의 데레사와 함께 1855년 한티로 피난하여 초근목피로 살아가다가 2년 후에 난이 평정된 줄 알고 날뫼 본가로 돌아오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치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 133위 중의 한 분인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835-1868)의 선대 때부터 교우촌 신자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술이 마티아 가정, 신극중 다미아노 가정도 있다.
최양업 신부의 열 아홉 번째 편지(죽림굴 성지 참조)에 따르면, 대구에 아주 열심한 노파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노파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하여 교우촌을 이루었고, 철저한 교리 교육과 신심으로 교우촌 신자들에 모범을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에 순교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이 교우촌은 날뫼로 교회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1850년대에 이미 비산동에 교우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87년 로베르 신부의 사목 보고서에 따르면 30여명의 신자가 날뫼에 살았다고 했다.
날뫼 지역에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1909년 대구성당(현 주교좌 계산성당) 소속 신자 송기택이 자신이 살던 대지 약 152m²(약 46평)의 초가집을 희사하고, 신자들이 모은 기부금 225냥으로 수리하여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 뒤 계산 성당의 보좌인 소세(Saucet) 신부가 약 2년간 비산 공소에서 전교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김영제 요한 신부, 이약 요셉신부, 장순도 바르바라 신부 등이 공소를 돌았다.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1923년 4월 9일 임시 경당(經堂)을 신축하였지만 성직자가 부족하고 대구 부내와 가깝다는 이유로 성당은 설립되지 못한 채 공소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11월 1일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날뫼공소를 대구성당에서 분가하여 성당으로 승격시켰다. 1928년 6월 20일 미알론(Mialon)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으나 신병으로 일찍 귀국하고, 2대 아몬(Hamon) 신부, 3대 이종필 마티아 신부를 거쳐 1944년 4대 물뢰(Leleu)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45년 4월 13일 이후 광복될 때까지 일제에 의해 연금생활을 강요당했다.
6 25 이후 본당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음에도 본당은 교육사업과 이재민 구호사업에 진력하였다. 1952년 10월 28일에는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55년에는 가톨릭 청년회를 결성하였다.1958년 1월 29일 현재의 성전을 건립했다. 1965년에는 성모상을 축성하고 1975년 7월 21일에는 수녀원 낙성식을 가졌다
경상감영의 형장이며 이윤일 성인의 첫 무덤 터
날뫼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처형장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처형장으로는 군사훈련장이 있던 관덕정 아미산, 군대 장대(將臺)가 있던 용두방천(봉덕동), 그리고 날뫼의 꼬부랑개(비산동)가 있었는데 이를 조선시대 중죄인을 처형했던 3대 처형장이라고 불렀다.
병인박해 시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성 이윤일 요한은 관덕정 형장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 26일(양력 1867년 1월 21일)에 휘광이의 칼날을 받았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1967년 3월경에 순교자의 아들 이위서 마티아 형제 및 당시 날뫼에 살고 있던 순교자의 매부 이응칠 토마스에 의해 날뫼로 이장되었다. 그후 1912년 경에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티아의 장남(이윤일 성인의 손자)이 주도하여 경기도 용인 먹뱅이(용인시 이동면 묵리)의 심방골로 옮겨 안장되었다. 먹뱅이 심방골에 있을 당시 인근의 교우들은 그의 무덤을 '거꾸로 된 무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훗날 그 무덤을 찾기 쉽도록 시신을 거꾸로 안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후 1976년 성 이윤일 묘는 다른 무명 순교자의 묘와 함께 미래내 성지 무명 순교자묘에 이장되었다. 그후 용인에서 옮겨진 무명 순교자 묘가 바로 이윤일 요한의 묘로 밝혀져 1984년 시성식이 있은 지 2년 만인 1986년 12월 22일 미리내에서 성 이윤일 요한의 유해가 발굴되어 대구대교구청 옆의 성모당에 안치되었다가 1991년 관덕정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렇게 이윤일 성인은 그의 삶의 역정에 못지 않게 사후의 유해도 복잡하게 유전되었다. 이제 제자리를 찾아 모시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홉시 반 경 네비게이션에 따라 성당 부근에 도착했는데 ‘날뫼’라는 ‘뫼’의 이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약간의 언덕(원고개 마을)을 올라야 했다. 초기 교우촌이나 성당 건립시만 하더라도 도시 외곽의 텅 빈 곳이어서 이웃을 원했었을 텐데 지금은 빽빽한 무질서한 건물과 전선 속에 애처러울 정도로 포위되어 있다. 이런 처지에서도 항상 감사하라는 성구가 성당 입구에 붙어 있다.
▲날뫼의 역사와 문화 벽보
성당 입구 오른편 외벽에는 날뫼의 역사와 문화 관련 많은 사항들이 벽보로 게시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벽화마을과 같다. 첫머리의 병풍처럼 세로로 늘여뜨려진 벽화에는 국보 비산동 동검과 첫 무덤 터가 있기에 성 이윤일 요한 성인, 지역 하천인 달서천, 그리고 지역을 통과하는 경부천 철도, 그리고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통과하는 지역이기에 서울나들이길이라는 표제의 그림 설명이 있고, 그 옆으로는 가로 그림으로 또 여러 가지 지역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세로로된 벽보의 표제는 비산동 동겸, 순교자 성 이윤일 요한, 비산성당, 달서천, 서울나들이길, 경부철도로 모두
비산동과 관련있는 인물이나 유물들이다.
가로로된 벽보의 표제 이름은 날뫼 그 비상의 이야기이다. 이표제 아래 날뫼의 전설과 민속 등을 소개하고 있다.
날뫼 북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은 비산동 원고개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는 민속이다. 원고개란 달성과 금호강 사이에 있는 고개로 원님이 부임하거나 떠날 때 넘는 고개이다. 옛날 어떤 원님이 선정을 베풀다 죽었는데 주민들이 원고개에 묘를 쓰고 해마다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추어 혼을 달랬다. 이것이 원고개 북춤이다.
옛날 달서천에 부근에 마음씨 착한 아낙네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찾아왔는데 가난하여 맛있는 반찬을 마련할 수 없어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 대접하려고 샘에 가서 물을 길었더니 두레박 속에 청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아낙네는 기뻐하며 그 고기로 손님을 대접했다. 그 이후로도 아낙네가 물을 길으러 가면 손님 수대로 청어가 들어있었다. 이것이 청어샘의 유래다. 이 샘이 동해바다와 땅 속으로 연결이 되어 용왕이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왕메기(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는 비산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지신밟기를 말한다. 지신밟기는 주로 영남지방 농촌에서 행한 민속놀이다. 음력 정월에 동네 집집을 풍물을 치고 다니며 지신(地神)을 밟아서(鎭壓) 잡귀를 쫓아, 연중 무사하고 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한다. 어릴 때 본 “잡귀 잡신은 물알로 만복을랑 이리로”하는 소리매김이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다.
정문에서 시작한 벽보는 오른쪽으로 계속되어 또 하나의 작은 문인 옆문까지 이어졌다. 옆문 안쪽에는 성모 발현상이 넷이 있고, 옆문 밖에는 또 다른 벽화가 길게 그려져 있다. 담장 위에는 경부선 선로 차단막이 높이 설치되어 있다.
옆문 안에 게시괸 발현 성모님의 첫째는 과달루페 성모님이다. 1531년 12월 9일 멕시코의 태평양 언덕 과달루페에서 원주민에게 발현했다. 둘째는 라방 성모님으로 1798년 베트남 후에 남쪽 라방의 보리수 나무 숲에서 박해 받는 신자들에게 발현하였다. 셋째는 1846년 9월19일 프랑스 라 살레트에서 11세, 15세 어린이에게 발현했으며, 넷째는 1871년 프랑스 퐁맹에서 역시 어린이에게 발현했다.
문밖 오른쪽으로도 벽화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여기 붙은 내용은 대구시 서구청에서 원고개 도시재상사업으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명소 만들기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내용은 역사를 가로질러 여러 종류의 길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무덤터
미사 시간은 10시 30분이라 아직도 시간이 남아 성당 부근에 있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무덤터 에 다녀왔다. 길섶 아름답게 꾸민 꽃밭 한쪽에 성인의 동상이 있고 역시 벽에 성인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이 게시되어 있다.
동상 하대 후면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약력이 있다. 성인은 충청도 홍주 출생으로 박해를 피해 경상도 상주 갈골을 거쳐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병인박해 시에 체포되어 상주관아를 거쳐 경상감영으로 옮겨졌고 1867년 1월 21일(음 12월 16일)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했다. 유해는 임시 처형장에서 임시 매장되었다가 2년 뒤 자손들에 의해 이곳에 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고, 이후 1912년 경기도 용인 묵리에, 다시 1976년에 미리내로, 1912년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봉안되었다는 내용이다.
동상 후벽에는 성 이윤일 요한의 생애를 시기별로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 장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미사 시간이 다가와서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큰 건물은 셋인데 성전과 교육관이 나란히 솟아 있고 그 옆에 선교관이 있다. 그리고 옆문 부근에 쉼터가 있다.
▲성전
성전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뽀족한 종탑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하느님을 지향하는 상승감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성전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통해야 한다. 계단 아래편에는 작은 성모동산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성전 입구가 나타난다. 출입문 안에는 이윤일 요한 상이 십자가를 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전 내부에 들어서면 제대까지 거리가 멀어 엄청 넓게 느껴진다. 제대 후벽에는 감실 셋이 있는데 중앙에는 십자고상이 있고 그 좌우에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스테인 글라스로 조성되어 예수님을 시립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 감실에는 성모상과 성 요셉상이 있다.
좌우 벽에는 세로로 길다란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그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배치되어 있는데 예스럽고 아담하고 장중한 모습이어서 호감이 간다. 이와 유사한 십자가의 길은 전주 전동 성당 등 몇 성당에서 본 것 같다. 같은 사람이 제작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찍 도착하였어도 이곳저곳 주변 시설 둘러보고 사진 찍느라 바빠서 한창현 주임신부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미사 중에 뵙게 되었다. 신부님은 이전 성건성당에서 사목하셨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침이다. 세례 받기 전에 할 일로 군중에게는 두 개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고, 군인에게는 갈취하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며, 세리에게는 정해진 액수만 받으라고 했다. 이는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최소한의 요건인 것이다.
미사 후 신부님과 인근 식당에서 물곰탕과 물가자미 회로 식사를 했다. 비산 성당 신자 구성도 다들 고령자가 많고 젊은이들은 극히 소수라고 한다. 우리가 보아서도 그랬다. 이 지역이 옛날에는 도시 외곽이어서 후진 지역이었고, 오늘날은 도심과 가깝지만 미개발지역이어서 발전이 침체되다 보니 노인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성건성당보다 더 연령이 높다고 한다. 미사참여자는 성건성당보다 월등히 많은 것 같으나 주보를 보니 봉헌금 액수는 비슷하다. 요즈음 장의자 교체 중이라 매우 바쁘다고 하셔서 믹스커피로 대신하고 복자성당으로 이동했다.
복자 성당 - 죽어서도 형제처럼 나란이 묻힌 순교자들 |
대구시 동구 송라로 22
본당의 설립과 발전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앞둔 1965년 주교회의는 각 교구마다 병인박해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아직 복자였던 한국 순교자들을 전국적으로 현양하기 위한 다양한 순교자 현양사업 중 가장 주된 결정 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대구대교구에서 교구 교우들의 성금으로 1970년에 설립한 성당이 복자성당이다.
1973년 감천리 교회 묘지에서 병인박해시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3위의 유해를 성당 경내에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7년 관할 구역 이름을 따라 신천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본당 설립 당시의 정신을 살려 복자 성당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복자 성당은 2002년 순교자 묘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그 해 9월 1일 축복식을 가졌다. 순교자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묘소 앞에는 넓은 잔디마당을 마련했다. 또한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 하단에 성 김대건 신부와 성 앵베르 범 주교, 성 모방 나 신부, 성 샤스탕 정 신부 등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2010년 3월 14일에는 노후화된 성당 내외부 전체를 리모델링해 3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후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이들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諡福)되었다.
세 분 순교자의 삶
고향이 다른 이들 세 분 순교자의 가족은 박해가 심해지면서 전답을 버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각지를 다니다가 최후로 만난 곳이 울주군 상북면의 죽림교우촌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마치 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져서 여기서도 안전을 보장하기가 어려워 이들 세 가족은 험한 재를 넘어 경주 산내면으로 갔다. 그들은 단석산에서 한 석굴(범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이 한 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병인년의 혹독한 박해는 이곳에까지 미쳐 끝내 이들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그들은 곧장 경주영장(營將)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협박도 하느님을 향한 이들의 굳은 신앙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의 상부 군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가가 관할하는 울산의 좌병영이었다. 그곳은 군영인 동시에 중죄인의 처형장이었다. 경주 진영에서 좌병영까지의 80리 길은 이름 그대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울산 좌병영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군 지휘소가 있던 장대벌(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묘지 이장 과정
장대벌 형장에서의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 야고보의 부인 박조이(朴召吏)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동천강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5월말 허인백의 손자 허명선과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에 의해 교구의 허가를 받아 대구 월배 감천천주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 1962년에는 대구 가톨릭청년회 주선으로 감천교회 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유골을 옮겨 안장했다가 또다시 1973년 10월, 대구시 동구 신천동에 있는 순교자 기념성당인 복자성당 구내로 이장하였다.
순교자 약력
◆ 복자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 ? ∼1868)
서울 출신으로 박해시 그는 서울을 떠나 경상도 울산의 죽림(일명 대재,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들어와서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다. 본디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죽림공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 허인백 야고보(許仁伯)와 김종륜 루카(金宗倫)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점점 심해져 이곳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자 이들 세 가족은 재를 넘어 경주 산내면 단석산 범굴로 이사를 가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병인박해 시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끌려와서 끔직한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강요 받았으나 하느님을 향한 굳은 의지를 꺽지 않았다. 결국 상부 군영인 울산 경상좌병영으로 끌려가 다시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1868년 9월 병영 장대에서 침수되었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 복자 김종륜(金宗倫) 루카(1819∼1868년)
충청도 공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으며 평소에 이웃과의 화합에 힘써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박해 시기에는 상주 멍애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에 거주하다가 다시 조부가 현감으로 있는 언양에 내려와서 간월을 거쳐 죽림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내려와서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박해가 산골에도 미쳐 세 가족은 경주 산내 단석산 소태골(범골)로 옮겨서 신앙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경주진영을 거쳐 울산 좌병영 장대벌에서 1868년 9월 14일 동료 순교자 두 사람과 함께 참수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평소 순교자의 삶을 본받으려는 뜻이 강하고 학식도 있어 동정부부 순교자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수기를 직접 필사하여 갖고 다녔다. 현재 이것이 후손에 의해 전해져 루갈다 옥중편지의 유일한 필사본으로 남게 되었다.
◆ 복자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그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언양을 거쳐 경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고 8개월간 옥살이를 하다가 조정의 박해 중단령에 의해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울산의 죽림 교우촌으로 가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카)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는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가면서도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주 순교의 원의(願意)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여 세 가족은 경주 산내 단석산 범굴로 가서 어렵게 살다가 1868년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경주진영에서 고문과 문초를 받고 다시 울산 좌병영으로 끌려가서 그해 9월 14일 참수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마지막 날 허인백은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명 천국으로 들어간다. … 너희들 저 두 사람의 목을 먼저 베고 내 목을 맨 나중에 베되, 머리를 각각 제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 다오. 훗날 부활할 육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비산성당을 떠나 복자성당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반 경이다. 정문 좌우에는 형구 모양의 기둥이 서 있어 순교성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 길옆에 복자성당 약사와 세 분 순교자 사적을 담은 기념비가 있고 순례자를 위한 주차장이 따로 안내되어 있고 작은 미니쉼터도 있다.
순교자 묘역
성당 오르기 전 순교자 묘역이 있다. 결코 변절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푸른 넋인 양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들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잔디광장이 있고, 그 뒤쪽 축대 밑에 큰 십자고상 아래 순교자 묘가 있다. 그리고 잔디광장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그런데 이 십자고상은 큰 의미가 있다. 이 고상은 대구대교구 설정(1911년 4월 8일) 25주년과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 성성 25주년을 기념하여 1936년 6월 11일 주교좌 계산 성당에 세워졌던 바로 그 고상이다. 계산 성당에 있을 당시 이 십자고상은오래된 데다 야외에 세워져 있었던 터라, 일부가 부식되어 지난 94년에 해체되었었다. 그뒤 약간의 보수를 거쳐 2000년 12월 15일 묘역성역화사업이 시작될 무렵에 복자성당에 설치되었다. 대구대교구의 역사와 숨결을 같이한 의미 있는 십자고상이 대구 복자성당의 성역을 지키며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막길이 다하면 성당 마당이 나온다. 왼쪽에 성전이 있고 오른쪽에 순교자 회관이 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관리동이 있다. 사무실과 성물방은 그 안에 있다.
복자성당 성전
성전의 외관은 매우 특이하다. 설계는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 수도원 알빈 신부가 했다. 설계자는 본당 주보인 김대건 신부를 실은 라파엘호가 돛대에 돛을 활짝 펴면서 뱃머리를 높이 들어 조선 땅을 향해 항해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성전 뒤쪽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상이 순교자 묘역을 내려다 보고 있다.
성당의 내부는 널찍하면서도 간결하다. 순교자의 삶을 닮았다. 하기야 배 안이기에 복잡할 수 어ᇝ다. 제대 후벽에는 십자고상만 걸렸을 뿐 별 장식이 없다. 그리고 벽면의 스테인드 글라스나 십자가의 길 14처 역시 최소한의 크기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제대와 감실은 보통 제대와 감실이 아니다. 여기에는 복자성당이 순교자 기념성당임을 말해주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안치된 성인은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유해이다. 순교자 묘의 세 분의 유해를 더하면 복자성당에는 모두 7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감실 밑의 성인 유해는 3군데에 안치됐는데 맨 왼쪽에는 성 앵베르 주교의 엉덩이 뼈, 성 모방 신부의 두개골, 성 샤스탕 신부의 치아 등이 안치되었으며, 가운데와 오른쪽은 김대건 신부의 발과 대퇴골 등의 유해다.
성모상을 지나 내려오는 길, 다시 순교자묘역이다. 국법으로 탄압받던 시절, 오직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는 유랑 생활을 해야만 했던 순교자들, 오늘날 우리가 요만큼의 알량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또한 이들이 흘린 땀과 피의 결실이 아닌가? 오직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생명마저 내놓았던 그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무엇일까?
“버려야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네. 명예, 권세, 재물.... 무거운 짐에 짓눌려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네.”
생명을 바쳐 당신들의 믿음을 증거하신 이들이여,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서 길이 평안하소서.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그 진실한 용기를 갖도록 전구하여 주소서.
나오는 길에 아직 잎을 못 떨구고 있는 단풍나무 밑을 지난다. 오늘 우리는 순교자 묘지에 와서 과연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버리고 가는가? (김요한)
(이렇게 하여 제주도 7 곳을 제외하고 육지 160곳 성지를 다 순례했습니다. 제주도는 내년 3월에 순례할 계획입니다. 쉬는 동안 교우 독자 여러분의 안녕과 건강을 기도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