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에서 철수해 오는 군인들이 내리는 기차역에서 선거 캠페인을 하였다. 닉슨의 국가 안보 자문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레득토와 비밀리에 정전 협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1972년 8월 키신저와 레득토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는 평화 협정 대다수의 내용을 변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1. 미국 상황 - 닉슨 재선 성공
197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맥거번을 상대로 총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승리하였다. 1973년 3월 15일 재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만일 공산주의 세력이 남베트남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미국 역시 개입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닉슨은 베트남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레이험 마틴을 남베트남 대사로 파견하였다. 한편 미국 국방부 장관 제임스 R. 슈레징거는 북베트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폭격을 재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73년 6월 4일 미국 상원은 이러한 개입을 금지하는 처치 어멘드먼트 건을 가결하였다.
2. 제럴드 포드 대통령 승계후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제럴드 포드가 미국의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이때,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금액을 1억 달러에서 7백만 달러로 삭감한다. 1974년 미국의 보궐 선거 결과 민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반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의회는 1975년 지원 예산 가운데 군사 활동 부분을 삭감하였고, 1976년 지원분에 대해서는 전액을 삭감하였다.
3.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공세
제4차 중동 전쟁 때문에 촉발된 1973년 유류 파동으로 남베트남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74년 1월 건기를 맞아 다시 공세를 시작하였다. 55명의 남베트남 병사가 사망한 두 번의 무력 충돌 이후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전쟁이 재발하였고 이어서 파리 평화 협정은 효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정전 기간 동안 남베트남 측 사상자는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4. 북베트남군, 프억빈 함락
1973년에서 1974년 사이의 건기 공세를 성공시킨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쩐반짜는 1974년 10월 하노이의 전략회의에서 다음 건기 때에는 보다 광범위한 공세를 펼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호찌민 통로는 자주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짜는 국도를 이용한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하노이를 방문하였다. 북베트남의 국방장관 보구엔지압은 쩐반짜의 계획대로 대규모 공세를 일으킬 경우 미국이 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썩히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따르기로 하였다.
보구엔지압과 쩐반짜는 호찌민 사후 베트남 공산당의 제1서기를 맡고 있던 레주언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쩐반짜는 캄보디아에서부터 프억렁(Phước Long) 성을 공격하여 호찌민 통로에 대한 봉쇄를 푸는 한편, 공격의 규모를 제한하여 미국이 다시 개입할 명분을 주지는 않으려고 하였다.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은 프억롱 성에 있는 14번 통로를 공격하였다. 1975년 1월 6일 성도(省都)인 프억빈이 함락되자 포드 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 재개를 의회에 요청하였지만 거부되었다. 프억롱이 함락된 뒤에도 미국의 지원이 없자 남베트남의 지배층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 고원 지역을 빠른 속도로 확보한 월맹군 총사령관 반띠엔중은 레주언에게 “우리가 이렇게 완벽히 군사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크나큰 전략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5. 작전 전 상황
1975년 초 당시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에 비해 3배나 많은 대포와 두배 더 많은 탱크, 그리고 1,400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병력 역시 두배 이상 많았다. 그러나 석유 가격 인상으로 상당수는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에 북베트남군은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 받은 원조를 바탕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고 사기 또한 높았다.
6. 275 작전
1975년 3월 10일 중 장군은 탱크와 대형 곡사 화기를 동원하여 중부 고원지역을 공격하는 275 작전을 시작한다. 이 작전의 목표는 닥락 성의 부온마투옷이었다. 반띠엔중 장군은 작전이 성공하면 플레이쿠를 공격하여 1976년까지 장기적으로 전역 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3월 11일 남베트남군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패배한다. 북베트남 조차도 놀란 신속한 승리였다. 중 장군은 곧바로 플레이쿠를 공격하고 연이어 꼰뚬 성의 성도까지 진군한다.
남베트남군의 장군 출신인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는 남베트남군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켜 재집결한 뒤 반격하는 작전을 세우지만 남베트남군은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에 있었다. 3월 20일 티에우는 이전의 작전을 취소하고 후에를 사수하도록 명령하지만 작전변경은 혼란만을 더 키웠다. 3월 22일 북베트남군은 후에를 포위하였고, 3월 30일 10만명의 남베트남군은 항복하였다. 후에에서 승리한 북베트남군은 곧이어 다낭으로 개선 행진을 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중부는 북베트남의 것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중부를 차지한 북베트남군은 이제 사이공을 함락해 긴 전쟁을 끝내려 했다.
7. 통일이 막바지
베트남의 과반 이상을 얻게 되자 북베트남 정치국은 반띠엔중 장군에게 사이공을 공격하라는 최종 공격 명령을 내렸다. 호찌민 작전이라고 불린 이 작전은 5월 1일 이전에 사이공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5월 이후 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남베트남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게 될 경우 작전에 어려움이 닥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북베트남군은 빠른 속도로 냐짱, 깜란, 달랏을 점령해 나갔다.
남북 베트남 군대는 4월 7일 사이공 동쪽 64Km 부근에서 쑤언록 전투를 치렀다. 남베트남군 18사단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옥쇄하기로 결정하고 북베트남군에 맞섰다.
그러나, 4월 20일 남베트남군 지휘부는 18사단에게 사이공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공포에 휩쌓인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이 남베트남을 배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티에우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에게 2년 전 자신이 파리 평화 협정에 서명하도록 종용하면서 만약의 경우 군사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냐고 전문을 보냈다. 4월 25일 티에우는 타이완에 있던 쩐반흐엉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비밀리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4월 말 메콩 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명령 체계가 무너진 채 고립된 남베트남군이 여기 저기 흩어진 채 북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이공에는 수도방위군 3만명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8. 사이공 함락과 종전
티에우가 망명하자 많은 남베트남 공직자와 시민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사이공을 떠났다. 사이공에는 계엄이 선포되었고, 미군 헬리콥터들이 미국대사관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과 남베트남 민간인, 한국인 교민들과 총영사관 직원들이 헬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하고 있었다. 당시 사이공 인근 바다에는 미 해군 7함대가 CH-47 치누크 대형 헬기를 대기시키고 있었으나, 작전 개시 시간을 베트남 현지시간이 아닌 영국 시간으로 지정해 놓고 있어서 현지 시간보다 7시간 늦은 시간에 작전을 개시하도록 되어있었다. 이를 모르는 한국 영사관 직원들과 현지 특파원들은 미국 대사관이 반드시 탈출시켜주겠다는 말을 믿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구조 헬기가 보이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미 해군 헬기가 아닌 CIA소속 헬기여서 많은 인원을 탑승 시킬수 없었다.
한편 백악관에서는 상황의 위급함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급히 시누크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대사관에서 시누크가 보이자 1만명이 넘는 군중들이 일제히 진입하려고 하자 그곳에 있었던 미국 해병대들은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치누크의 탑승인원은 40명이 였으나 실제로는 90명이 탑승했다. 그러나 치누크는 1대가 올 때마다 1시간이 걸렸다. 그이유는 탑승한 인원들을 내려주고 나서 연료까지 주입하는데에만 1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미국 대사였던 마틴은 자신의 애완견과 남베트남인 가정부를 데리고 혼자 탈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자 투입 가능한 치누크는 고작 6대였다. 6대 남은 치누크에는 한국 대사와 특파원, 영사관 직원들과 기타 사람들이 타고 모두 같이 탈출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사이공을 함락했다.
324호 탱크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들고 사이공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이틀 전 쩐반흐엉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이양받은 즈엉반민은 항복했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이 19년만에 끝난 것이다.
이보다 앞선 같은 해, 4월 17일에는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함락했고 뒤이어 같은해, 12월 01일에는 파테트 라오가 비엔티안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되므로써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염려했던 도미노 이론이 일부 맞아떨어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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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저도 돌아온월맹군님처럼 연재해봤습니다.
드디어 오늘 끝났네요^^
재밌게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연재하신 내용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어요
저보다 오히려 더 간단하게 하셨네요 ㅎㅎ 저는 쓰다보니 길어져서 26편이나 됬었는데 말이죠 ㅠ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정보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