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29. 돈오와 양자도약
양자도약 발견후 불연속적 변화 인정
돈오 믿어야 분별지 초월 속박 벗게돼
반야심경이 설하는 것은 ‘공’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사리분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하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까지 설한 내용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꿈에 불과하다는 내용인데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체득하지 못하는 이상 한마디 한마디를 다 말로써 풀이하여 수긍하더라도 ‘공’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공간과 물질 모두가 물리적 진공에서 생겨났고 ‘아’라는 것마저 단순한 집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체가 헛것이니 무슨 밝고 어두움이 있겠으며 생노병사가 있겠는가? ‘고집멸도’도 결국 집착에 불과한 ‘아’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지혜라는 것도 허망한 것을 풀이하는 허깨비 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시고공중…’이하 ‘…이무소득’까지를 말로써 풀이하고 이해하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지의 차원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별지로 이해하고 그친다면 남은 것은 허무밖에 없다. 허무를 뛰어넘으려면 분별지를 뛰어넘어야한다. 어떻게 분별지를 뛰어 넘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말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뛰어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다.
선승들은 돈오와 점수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점수란 점차 닦아나가는 것이고 돈오란 일시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차원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뜻하는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돈오이다. 속박상태에서 점수란 없다. 물론 정신적인 현상을 물리적 현상으로부터 추론하여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정신-물질의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물리적 현상에서 돈오와 점수를 추론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기전 물리학자들이 자연의 변화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변화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일지도 그렇게 변화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지 하나의 현상이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정지해 있던 자동차가 갑작스레 가속되어 속력이 시속 0에서 100㎞로 변했다 하더라도 그 중간값인 10, 20, 50㎞ 등을 다 거친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경험에서 보는 것은 다 이렇게 점진적인 것이다. 그런데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후 물리학자들은 양자도약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물질은 92가지의 원자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를 속박상태라고 부른다.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전자와 원자핵은 모두 속박되어 있다. 이 속박상태에 있는 원자는 여러가지 상태를 갖고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하므로서 생명의 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의 변환을 나투고 있다. 그런데 이 속박상태에서 일어나는 변환은 모두 불연속적이다. 갑자기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예로 들면 1이라는 값이 중간값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100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과거의 경험 받은 교육등으로 인해 속박되어 있다. 불교적인 표현으로 집착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집착시키는 요인을 제거하더라도 사람은 시공간내에 존재하면서 시공간적 변화를 바탕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한다. 분별지란 시공간적 존재가 갖는 한정된 지혜이다. 따라서 분별지로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것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승들은 돈오를 말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물리적 진공의 묘한 작용으로부터 ‘공’을 짐작하고 양자도약으로부터 속박된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돈오뿐이라는 믿음이다. 돈오후 반야지를 갖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경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고 ‘시고공중… 이무소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 이전 믿음이 중요하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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