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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오주철목사/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히 11:1-3)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사십시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어쩌다가라도 거룩한 믿음의 행진을 멈추지는 마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아직 이 땅 위에 증거 되지 않은 것을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모든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그것이 환경이든 사람이든 재물이든 모든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그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일으키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봐도 미운 이 성질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사람인 나는 이 성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 성질로부터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땅에서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못할 일도 없고, 못 이룰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언제나 기사와 이적과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믿지 못하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믿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사와 이적을 베풀기 전에,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기 전에, 어떤 사람의 장래를 인도하기 전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런 확인작업을 하십니다. 너 정말 그것을 믿느냐? 이 확인작업에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에 앉았다가 그냥 가지 마시고, 불같은 믿음이 여러분에게서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내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 신념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건진다'는 말입니다. 죄에서 건지고, 문제에서 건지고, 환난에서 건지고, 고난에서 건지고, 어리석음에서 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길에는 절망의 언덕에 오를 때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언덕에 오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희망의 언덕을 오를 때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희망의 언덕에 오르는 사람들의 줄에 설 때입니다. 세상적인 절망의 언덕을 따라가면 계속 울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희망의 언덕을 걸어가면 웃을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희망의 언덕을 걸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믿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저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들으면서, 어떤 절망과 나락에서부터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힘은 절망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힘은 낙심의 힘보다 강하고, 믿음의 힘은 어떤 대항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우리보다 앞서 인생을 살아간 선배들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입니다. 봉독한 본문은 우리의 선배들이 붙잡고 살아간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배들이 보여준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용된 실상이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휘포스타시스(tulipostasis)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huipo=under라는 말과 stasis=stand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실상이라는 말은 "아래에서 받쳐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들을 받쳐주는 희망의 기초요, 희망의 근거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절망의 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혹은 건널 수 없는 절망의 강 앞에 우리가 부딪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절망의 벽을 뛰어넘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라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본래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절망의 땅과 동의어입니다. 희망이 없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을 등지고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을 행해서 떠나가기로 결단을 합니다. 그것은 모험적인 결단이었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모험적인 결단을 내리고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나갈 수 있었던 것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그는 나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 희망의 땅이 정말로 있다고 믿었고 그 땅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도 크고 작은 삶의 시련들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직면한 가장 크다란 시련은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문제가 아니지만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일종의 절망의 극이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다렸지만 도저히 더 이상 자식을 가질 수 있는 연령의 한계를 이제는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순간에 처했을 때 아브라함의 모습을 성경은 로마서 4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랐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선진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른 말로는 선배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진정한 선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희망의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는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청년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온 몸이 석회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우리 몸 안에서 칼슘이 과잉 생성되어서 뭉쳐 가지고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 버리는 병입니다. 정말로 지독한 병입니다. 여덟 살 때 이 사람이 이 병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살 때 갑자기 다리가 아프고 절기 시작합니다. 발부터 서서히 굳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발, 다리, 허리, 가슴, 계속해서 위로 올라옵니다. 나중에는 심장과 폐까지도 돌처럼 굳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쓰러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로부터 22년간이나 그는 죽어 가는 자신 육신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도록 쓰러져 버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절망 앞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자기를 사랑했던 어머니를 위해서, 또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서 그는 이 절망을 거부하고 절망 속에 희망을 붙잡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지독한 고통과 절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작가가 되겠다는 작가의 꿈을 키워갑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는 온 몸을 움직일 수 없이 누워버린 그대로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누워있는 몸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한문을 공부하고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볼펜을 잡고 쓰는 연습을 합니다. 또 한 손으로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무려 30개월 이상을 원고 800장의 자신의 고통 이야기를 탈고합니다.
SBS 휴먼 드라마에도 소개된 그의 이야기의 책제목은 뜻밖에도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였습니다.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박진식 씨의 인생은 그대로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이 책을 읽어보면 이것은 단순한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신앙의 드라마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믿음의 드라마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독한 고통과 대결하면서 서서히 마침내 그는 욥의 믿음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고통 앞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대결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것을 붙잡았기 때문에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할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이 곧 비전이라는 말입니다. 비전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를 창조하는 비전이라고 오늘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눈으로 그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비전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보는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증거라는 말의 희랍어는 내적인 강렬한 확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에 대한 강렬한 내적 확신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한 선배였던 노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예고합니다. 그 홍수 심판은 보이지 않는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홍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노아는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노아의 행동을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눈에 비가 올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결코 절망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묵묵히 자기 식구들과 함께 방주를 짓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눈에는 온 세상이 홍수에 잠겨버리는 심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십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첫 번째로 그들이 돌파해야 할 성은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것은 무너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무너질 수 없는 성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그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돕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을 때 얼마나 어리석은 행진입니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진을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확신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묵묵히 계속해서 그 성을 돌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무너진 여리고 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월트 디즈니가 그의 꿈이었던 어린이 놀이 동산 디즈니 랜드를 LA근교에 건설한 후에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LA에서 겪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살려 좀 더 넓은 곳에서 좀 더 과학적이고 좀더 자연 친화적인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 프로젝트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드디어 월드 디즈니가 오픈되기 얼마 전에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나가게 됩니다. 디즈니 월드 개막식에서 유명한 인사 한 분이 축사를 하며 "안타까운 것은 그가 월드 디즈니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 먼저 간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내려간 다음에 이어서 등단한 그의 미망인이 이런 유명한 답사를 했다고 합니다. "제 남편에 대한 축하를 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먼저 축사하신 분 가운데서 한 부분은 제가 꼭 수정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제 남편이 오늘 이 디즈니가 오픈되는 것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 남편은 보았습니다. 제 남편은 오늘 이것이 오픈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면서 일을 했습니다. 제 남편이 이 디즈니 월드가 오픈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전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비전의 산실인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내일에 이루어질 위대한 비전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바보들의 꿈이라고 비웃겠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볼 수 없는 비전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비전을 바라보고 그 비전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한 걸음 더 나가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믿음은 단순히 희망 사항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선배들이 이로써",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법적인 효력이 있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확실한 증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증이 아니라 물증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은 증거라는 말을 good report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좋은 성적. 믿음은 좋은 성적을 낸다, 믿음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확실하고도 좋은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확실하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기록인 것입니다.
요셉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죽을 때 유언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것을 믿음으로 유언을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 땅에 와서 국무총리까지 지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고센 땅이라고 하는 좋은 땅에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떠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던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바로 시온의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알았기에 그는 마지막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자기의 백성들에게 불가능한 사실을 유언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을 떠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시온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계속해서 읽어보면 모세의 부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았을 때에는 아들을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 여인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지체없이 나일 강가에 버려야 하는 바로의 명령이 법이 되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바로의 명령을 거스리고 그 아들을 키우기로 작정합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들을 통한 어떤 특별한 경륜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 자식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영웅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 또한 믿음으로 훈련되지 않은 남녀 노소들을 이끌고 바로의 군대와 대결하면서 험악한 광야를 거치면서 드디어 그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오늘 히브리서 11장은 말하기를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마침내 거의 불가능한 사명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적인 믿음과 신념이 어떻게 다른가? 라는 것을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신념을 포함하지만 출발에 있어서 근거가 다르고 결과에 있어서 신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출발 근거가 다릅니다. 신념의 출발 근거는 자신이지만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념을 넘어서는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의 저자인 박진식 씨도 처음에는 자기 의지로 이 싸움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그는 견고하게 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히브리서 기자는 좀더 설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것,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거대한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의 말씀으로 생겨났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희랍어에서 사용하는 로고스라는 단어가 아니라 레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역동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은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바로 살아서 역동하는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 수가 있다면, 이 살아있는 말씀을 붙들고 살 수가 있다면 우리 선배들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받았던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나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붙들고 그들이 믿음의 삶을 살았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선배들은 역할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후배인 저와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순서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세대는 지나간 세대 못지 않게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고통, 더 많은 스트레스, 그리고 더 많은 축적된 문제들을 끌어안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에 눌리지 아니하고 문제들을 넘어서서 비전을 실현하는 인생은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 가능합니다. 믿으시면 됩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오십시오. 참으로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오십시오. 이 위대한 세상을 창조하셨던 동일한 능력있는 말씀 앞에 오셔서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사람들의 소리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세상의 잡다한 소리만 듣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은 지쳐있습니다. 피곤해 있습니다.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나를 빚어 만드시고 세상을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분이 주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주여!' 라고 고백하는 내 주인의 음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바로 우리들의 죄와 절망을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비전을 주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 말씀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이제는 행동을 시작하십시오. 그렇다면 오래지 않아 여러분 앞에 버티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홍해의 바다가 갈라 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송년을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계절에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심으로 우리 안에 감사와 비전이 회복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낯선 지역에 간다거나, 외국 여행을 가면 기념품을 사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그 기념품을 놓고서 오래오래 보면서 그곳에 갔던 추억들을 간직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와서 무슨 기념품을 가지고 가야 할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이 내게 맡긴 기념품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훗날 여러분의 자자손손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남겨주고, 훗날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묻거든 "아버지, 저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런 믿음의 기념비들을 한아름씩 안고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념비를 가지고 가십시오. 내 후손들에게 물려줄 믿음의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믿음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사상도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견해도 아닙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보람입니다. 믿음은 생기입니다. 믿음은 감격입니다. 믿음은 힘입니다. 그것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언양 영신교회라는 이 재단을 붙잡고 그렇게 달려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것이 없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생기였고, 능력이었습니다.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 꿈꾸는 것들을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믿음을 선배들에게서 본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의 저자 박진식 형제가 그 고통의 긴 터널을 거쳐오면서 배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은 비전과 감사였다고 그의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발 제 이야기를 읽으시고 부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 지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라고. 그리고 이 책의 끝머리 부분인 '마침내 맞이한 내 안의 신앙'이란 장에 보면 그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나서 깨닫게 된 가장 소중한 교훈은 감사의 교훈이었다고 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내가 아픔으로 깨달은 건 감사였다. 밥을 삼키기 힘겨워 졌을 때 단지 음식물을 삼킬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숨쉬기가 힘겨워 졌을 때 단지 고른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중증 장애인이 되었을 때 단지 한 손가락, 한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온몸이 중증의 돌인간이 되어갈 때 단지 머리와 몸통만 움직일 수 있어도 감사하다는 것을 나는 뼈에 새겼다. 하나 덧붙이자면, 평형기관 마저 손상되었을 때 나는 어느 생명체에게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이 책의 마지막 줄은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고 있습니다. "… 끝으로 제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