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전혜린-
나의 운명이 고독이라면
그렇다, 그것도 좋다
이 거대한 도회의 기구 속에서
나는 허무를 뼛속까지 씹어보자
몇 번씩 몇 번씩
나는 죽고 죽음 속에서,
또 새로운 누에가 눈뜨듯
또 한번,
또 한번!
하면서
나는 고쳐 사는 것이다
과거는 그림자 같은 것, 창백한 것
본질은 나이고
현실은, 태양은 나인 것이다
모든 것은 나의 분신,
자아의 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 전혜린1934. 1. 1 평남 순천~1965. 1. 11 서울.
수필가·번역가.
독일 문학작품을 번역했고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내용의 수필을 썼다.
법률가인 아버지 봉덕(鳳德)의 1남7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다니다가 3학년 때 독일로 가서
1959년 뮌헨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귀국하여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있다가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31세에 자살했다.
독일 유학 때부터 번역을 시작했으며 문장이 정확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역집으로 〈생의 한가운데〉(1961)·〈데미안〉(1964) 등이 있고,
특히 재독문학가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를 번역해서 유명하다.
유고수필집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가 있으며,
1976년 대문출판사에서 일기를 간추려서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