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는 산외면과 용활동, 서로는 부북면과 내이동, 남으로는 내이동과 용활동, 북으로는 상동면을 접하고 있으며, 추화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동의 총면적은 4.6㎢ (답 0.93, 전 0.69, 임야 2.05, 대지 0.21, 기타 0.75)이다.
* 연혁
밀양지(密州誌)에 교동리, 춘복, 모례가 나오고, 경상남도지(慶尙道邑誌 : 1832년 규장각본)에 교동리, 춘복리가 나오며 ,밀주징신록에 교동, 춘복,모례를 합해서 교동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1988년 6월 22일부로 군조례 제1047호(1988.6.22 공포)로 교동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9년 1월 1일부 법률 제4050호(1988.12.31 공포)로 밀양읍이 市로 승격됨과 동시에 校洞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1991년말 현재 교동은 3개통 21개반으로 행정 구역이 구성되어 있다.
■ 교동(校洞)
향교(鄕校)가 있는 곳이라 하여 교동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향교 마을 또는 생교 마을이라고도 하였는데 사동(1통), 춘복(2통), 모례(3통)를 합쳐 교동이라 칭한다.
향교란 원래 시골에 있는 문묘와 거기에 부속된 교궁으로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유교의 창시자이며, 최고의 성인인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성현들을 제사 지내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 나라의 향교의 시초는 1127년(고려 인종 5년)3월 고려 정부에서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중앙에는 '국자감(國子監)'과 '동서학당(東西學堂)'을 두고, 지방에는 학교를 세워 널리 경사(經史)를 가르치라는 조서(詔書)가 있었으므로 정부의 학제에 의해서 여러 주에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밀양 향교의 설립도 이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밀양 향교의 본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후 선조 35년 임인(1602)에 밀양 부사 최기(崔沂)가 중건하였다. 그 중 대성전(大聖殿)은 순조 21년 신사(1821)에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1618년(光海10)에 부사 이홍사(李弘嗣)가 중창하였는데 각각 단층 맛배지붕 목조와가 정면 5간, 측면 1간이다.
밀양 향교에는 학생 50-70명이 다녔으며 교수(敎授) 1人, 훈도(訓導), 역학훈도(譯學訓導)와 도유사(都有司) 1人이었다. 명륜당강의 홀기(明倫堂講義 笏記)와 학령(學令)은 아직도 전해 오고 있다. 밀양 향교는 교동 1통에 위치하고 있으며,1975년 2월 5일부로 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사동(社洞)
향교가 있는 마을을 일명 사동리라고도 한다. 현재 교동 1통을 말한다.
■ 구딧골
교동 1통의 동쪽인 현재 화장터 골짜기를 말하는데, 옛날에 이 마을에서 9대로 진사가 배출되었다고 해서 구딧골이라 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9대가 어원이 구딧으로 변한 것이다.
■ 대목골
교동 1통의 동쪽인 공동묘지 밑 골짜기인데, 옛날에 유명한 대목(목수)이 있어 대목골이라 하고 못(池)을 '대목골못'이라 하며, 교동 1통에서 모례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목골 고개'라고 한다.대목골 동쪽에 있는 산을 '용지산'이라 하고, 교동 1통에서 용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용지고개'라고 한다.
■ 안골
교동 1통 북쪽, 향교 옆 골짜기가 교동 안에 있다고 하여 안골이라 하고, 안골에 있는 못을 안골 못이라 하며, 안골 남쪽에 있는 들을 내동들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들이 거의 없어지고 주택들이 산재해 있다.
■ 서산(西山)
교동 1통의 서쪽에 있는 산을 서산이라 하고, 서산에 있는 등성이를 서산 말랭이라 한다.
■ 수리티 들
교동 1통의 북쪽편인 공동묘지 입구에서 우회도로 동편 들을 수리티들이라 하고, 수리티에 있는 내(川)를 수리티 개울이라 한다.
■ 앞들
교동 1통의 앞에 있는 들을 앞들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들이 대지로 변경되어 주택이 들어서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산을 앞동산이라고 한다.
■ 모개나무지
구딧골(구디골)옆에 모과(모개)나무가 있어서 모개나무지(골)라고 하였는데, 현재는 모과나무가 없다.
■ 춘복(春福)
범북이라고도 한다. 왜 춘복인지는 알 길이 없다. 춘복을 범북이라고도 한 것은 春자의 뜻을 풀이한 봄이 범으로, 福은 변해서 북이 되어 범북이라 한 것이다<손병준씨 말>. 또 춘복 뒷산 모양이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하여 범복이 변해서 범북으로 된 것이라고도 한다<윤상선씨 말>. 원래 이 마을에 범이 자주 내려와서 인가에 피해를 주므로 마을 사람들이 범을 잡아서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매일 밤에 북을 치니 범이 하산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범북이라 한다<안강태씨 말>.
범북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랫범북, 위쪽에 있는 마을을 윗범북이라 하며, 범북 안 쪽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고, 범북 철도 밑 강변 들을 '차현들'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서울 가는 길이 있어 수레가 많이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채안들이라고도 한다. 춘복은 현재 교동 2통에 해당된다.
■ 모례(慕禮)
조선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정랑(正郞)을 거쳐 예안, 김제, 울산 군수 등을 지낸 추천 손영제(鄒川 孫英濟 : 1521-1588)의 별서가 오연정(鼇淵亭)이다. 창건 연대는 대개 추천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1580년대로 추정되며,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렸다. 그뒤 다시 재건하였으나, 1717년(숙종 43)에 또 화재로 소실되고, 1771년(영조 47)에 8대손인 손갑동(孫甲東)이 일족과 함께 의논하여 중건하였다.
순조 연간(1800-1834)에 이 지방 사림들의 공론에 따라 추천이 만년을 장수하던 별서 경내에 모례사(慕禮祠)를 세워 추천을 봉안하고 사향하였는데, 1868년(고종5)에 방금으로 사당이 철폐되고, 1935년(乙亥)에 화재로 정사와 함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1936년(丙子)에 후손들의 합모로 확장 중건하였으나, 사당은 복원되지 않고 터만 남아 있는데 정당(正堂)을 모례서당(慕禮書堂)이라 편액하고 정명(亭名)을 오연(鼇淵)이라 하였다.
추천은 이퇴계(李退溪) 선생의 제자로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항상 퇴계 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 서당이름을 '모례서당'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주위 마을을 모례마을이라 한다<손관식씨 말>.
일설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인가가 있는 줄 모르고 지나갔다는 뜻으로 '모리'라고 한다<경상남도 땅이름>. 현재 모리 마을은 교동 3통에 해당된다. 또 이곳에는 밀양시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주위를 은행나무껄이라 한다.
■ 추화산(推火山)
옛날 통신 방법의 하나로 인편에 의한 방법 이외에 높은 산에 올라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즉 봉화를 올려서 신호를 하였다고 해서 추화산이라고 한다. 일명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해발 243m이다. 추화산 정상을 중심으로 '추화산성'이 있고 추화산 정상 북서편에 추화산 봉수대가 있다.
■ 제사고개
교동 공동묘지에서 범북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 밤, 자정이 좀 지나 무거운 소금짐을 지고 고개를 넘던 소금 장수는 고갯마루에서 잠간 쉬기 위해 등에 진 소금 짐을 내려 놓았다. 등골에 땀이 날 만큼 무거운 짐이었다.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다음 날 소금을 팔 욕심으로 밤길을 걸은 탓에 피곤하여 잠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금장수는 밤중이라도 더 걸어가야 다음날 청도시장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곧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금 장수는 너무 피곤하여 소금짐에 기댄 체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그 장수는 곧 일어나야 한다고 마음을 다져 먹고 있을 때 맞은 편 고개 아래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헐레벌떡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고개 마루를 향해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노인을 소금장수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금 장수 앞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닭 우는 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고갯마루에서 밀양 쪽을 내려다 보며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소금장수는 '노인장, 왜 그러십니까? 갈 길이 아주 바쁘신 모양인데요.'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노인은 한숨만 내쉴 뿐 대답이 없었다. 큰 걱정이라도 있는 듯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는지요? '이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올해도 또 틀렸군. 오늘이 내 제삿날인데, 만주서 여기까지 밤 새워 왔지만 금년에도 이 고개까지 오니 닭이 우는구려. 어쩔 수 없이 또 돌아가야 되겠구려.' 하고는 또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아니, 제삿날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요. 생전에 먹고 살기 위해 처자를 데리고 만주땅에 갔었는데 거기서 나는 몇 년 되지도 않아 병이 들어 죽고 말았소. 처자식들은 만리 이역에 나를 묻어 놓고 도로 밀양 땅으로 내려가 버렸지요. 나 혼자 타향 땅에 묻혀 있는데 제사 때마다 이렇게 달려오지만 이 고개에만 오면 닭이 울어버려 돌아가곤 했지요. 그래서 저승 처사에게 하루 먼저 보내 달라고 졸랐지만 저승의 법으로는 제사 당일 출발해야 한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소이다. 고개 마루에서 제사를 지내도 내가 음복은 할 수 있을텐데.....'노인은 씁스레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만 다시었다.
'그럼 노인장의 성은 무엇이며 처자식들은 어디에 계신지요? '소금장수의 물음에 노인은 대충 이야기 하고는 왔던 길을 도로 가버렸다. 찬바람이 휙 몰아치자 소금장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 노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잠든 사이에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러나 꿈이라 해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금장수는 날이 밝자마자 꿈속에서 일러준 대로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주인을 만난 소금장수는 지난밤 꿈 얘기를 모두 들려 주었다.아니나 다를까, 그 집에서는 간밤에 만주서 돌아가신 부친의 제삿날이라는 것이었다.그때부터 그 자식들은 부친의 제삿날이 되면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지 않고 제수를 차려 이 고갯마루에서 제사를 모시고 돌아가곤 했다. 그후 사람들이 이 고개를 제사고개라 불렀다고 한다.<내일동 손정목씨 진술>
■ 추화산성(推火山城)
추화산 정상을 중심으로 돌로 쌓은 둘레 2.360 척의 가야 시대의 산성인데, 우물 2개, 못 1개소, 성황사와 봉수대가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성황사는 추화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그 성황신으로 박욱(朴郁)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고려 태조의 건국사업에 공이 많아 삼한벽공(三韓壁控) 도대장군(都大將軍)이 되었고 손긍훈(孫兢訓)도 고려 태조를 도와서 공이 있으므로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使徒)를 추증하고, 광리군(廣理君)을 봉하였는데 이 두 분이 곧 사신(祠神)이라 한다.'고 전하며, 밀양읍지에는 '읍의 사람들이 그분들의 공덕을 사모하여 추화산정에다 사당을 세웠다.'고 전한다. 성은 반 이상 허물어졌으나 석축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 있고, 정상 서북편에 봉수대 유지가 있으며 남쪽에 창훈문(彰勳門)이라는 산문 안에 붉은 벽돌로 쌓은 돔 형식의 폐사당(廢祠堂)이 있다. 또 밀성재내(密城齋內) 익성사(翊城祠)에는 박욱(朴郁)과 그 부인 두 분의 소상(塑像)을 봉안하고 춘복재(春福齋)에는 손경훈(孫競訓)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여 각 그 후손이 제사를 지낸다.
■ 긴늪나루
옛날에 춘복과 산외면 기회리 긴늪을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밀산교의 시공과 함께 없어졌다.옛날에 밀산교의 부근에 북천교가 있었다고 한다.
■ 밀산교(密山橋)
교동 2통(춘복)에서 산외면과 상동면을 통하는 다리인데, 옛날 다리는 사라호 태풍으로 유실되고, 다시 다리를 준공하였으나 낡아서 1983년에 다시 준공하였는데, 총연장 180m , 폭원 10.5m, 견간 6m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철도 육교
교동 2통(춘복)에 있는 철도 육교로서 총연장 11.3m , 폭원 7m , 높이 6m , 견간 1m 로서 준공 연도는 1956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춘복천
교동 2통에 있는 하천으로서 총연장 2.0km , 유로 연장 2.2m, 유역면적 2,4m이다.
■ 감복샘
교동 1통에 있는 샘으로서 상수도 설치 전에는 마을 전체가 이 우물을 이용하였는데 현재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