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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5장 14-30절
착하고 충성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마태복음 24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결국 그 초점이 깨어 있으라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과 44절에서 연거푸 말씀하고 있고, 또한 우리가 지난주 살핀 비유에서는 맨 마지막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피게 되는 달란트 비유의 경우도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다음 주에 살피게 될 양과 염소에 대한 내용이 심판이라고 할 때 더더욱 심판에 앞서 준비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얼마 안 있어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심으로 저들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동안이 될지 그 기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는 마치 오늘 본문의 비유와 같이 떠나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교회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올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14절과 15절을 보시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갔다는 것은 앞으로 있을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재림까지의 긴 부재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 주인이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기는데,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겼다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맡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맡겼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보통 ‘달란트’하면 은사, 재능, 기술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것을 지칭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욥의 고백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 알몸으로 나와 알몸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욥1:21). 때문에 알몸으로 나온 자에게 뭔가 있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알몸으로 올 때 알몸 자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성격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달란트 주신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 나눠 주시느냐 하면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눠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을만하니까 받았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 받을만하니까 받았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을만하니까 받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의 이해 방식으로 하자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그 은사와 재능, 기술이 다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각각 그 재능대로’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재능까지 주신 이가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신명기 8장으로 가시겠습니다. 11절을 먼저 보시면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40년 광야 생활을 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의 생활방식은 광야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부족한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로 먹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여러 번 원망했던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야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40년 동안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과 지키심이 아니라면 결코 살아갈 수 없었다는 반증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은 광야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신명기 8장 7절 이하 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한 마디로 가나안은 광야와는 정반대의 장소입니다. 광야의 경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어 사람이 살만한 장소가 못 되지만 가나안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비옥한 땅입니다. 사람 살기에는 최상의 장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해도 반드시 농사에 대한 기본적인 노동력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기 때문에 이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생활은 어떻습니까? 사실 이동하는 것 빼고는 먹기 위해서, 마시기 위해서, 잠을 자기 위해서 저들이 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때를 따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고, 물이 필요할 때 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셨습니다. 장소가 광야였을 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멈추게 됩니다. 일하지 않고는 거둘 수가 없고,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땅이 비옥하긴 하지만 전혀 사람의 손길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12절부터 14절 중반부까지를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너의 노력이 들어가고, 너의 열심이 들어가면 분명 배불리 먹고, 번성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소유가 풍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의 마음이라도 되시는 것처럼 해서 근심하는 것이 뭐냐? 네 마음이 교만할까,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두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의 경우 노력해도 추수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땅도 비옥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노력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먹을 것, 마실 것이 생겼습니다. 입을 옷도 헤이지 않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원망,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저들의 안타까운 모습이라면, 가나안은 전반적인 상황이 달라지는 곳입니다. 노력도 해야 하고, 열심도 내야하고, 힘도 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냐 하면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내가 열심을 냈기 때문에, 내가 힘을 썼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라는 사고가 열릴 수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다는 투의 말씀을 여기서 하고 계시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걱정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어떤 말씀까지 하느냐 하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17절과 18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뭔가를 한다 할지라도 그 힘의 근원이 본래 나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다 어디 있느냐 하면 자꾸 내 노력과 내 열심이 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했다. 내가 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재물 얻을 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된 모든 만물을 마지막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지만 마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숨기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명하신 분이 스스로 그런 식으로 일하시더란 겁니다. 그러나 이때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신을 숨기신다고 해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잊는다면,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입니다. 그러나 재능대로 주셨다고 할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실제로 누가 주신 것이냐? 바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때문에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다섯 달란트 받을 만하니까, 두 달란트 받을 만하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셨을 뿐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란 의미가 아니라, ‘각각 그 재능대로’이지만 여전히 그 재능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을 통해 어떤 말씀도 하시느냐? 고린도전서 4장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그러므로 이 달란트 비유는 달란트의 금액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 때문에 거기에 인간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긴 것뿐입니다. 비록 많이 맡겼느냐, 좀 작게 맡겼느냐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차이가 있지만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는 비록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엡4:7) 하나님 자신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기 때문에 “저 사람보다 작네!” 이런 반응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인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릅니다. 본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족해야 하지만, 자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없는 것에 대하여 원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교도 다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다섯 달란트 받은 자, 아니 두 달란트 받은 자라도 부럽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은 달란트의 금액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 자신을 특별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많이 받았다, 적게 받았다는 외적인 차이는 분명 있지만 그 외적인 것이 우리의 됨됨이를 판단하도록 하는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오늘 본문에 보면 ‘충성되다’는 말이 나오지만 많이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충성하느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역으로 적게 받으면 전혀 충성할 수 없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만약 외적으로 받은 것이 더 충성하도록 만들거나 덜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비교해 봤을 때 다섯 달란트가 더 충성했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동일하게 말할 뿐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 비교 자체가 없습니다. ‘두 달란트 보다 더’ 혹은 ‘다섯 달란트보다 덜’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므로 달란트 자체로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간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 정도의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인간의 공로주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주의가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다 누구로부터 왔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따라, 그리고 그분이 선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따라 주실 뿐입니다. ‘저 사람은 저 정도의 그릇이 되니까’가 아니라, 그런 그릇을 결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분명한 내용으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16절 이하 18절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의 부재 중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25:16-18)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장사하였다고 합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추어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보시면 세월이 흘러 주인이 돌아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여기 ‘결산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주실 때부터 요구하시는 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달란트를 맡기신 것은 아니란 소리입니다. 맡기셨다면 맡기신 목적이 있는 것이고, 그 목적을 따라 사용해야 함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가진 므나 비유에서는 주인이 갈 때부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눅19:13) 비록 오늘 본문에서는 달란트를 나눠 주면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맡기셨다는 자체가 이미 그것을 통해 일을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한다고 할 때 뜬금없는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인생은 분명 재림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결산한다는 말은 달리 말해 심판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내용을 보면 이 심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약간만 확인하신다면 31절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물론 오른편에 있는 양은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고(34), 왼편의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41).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은 아무렇게나 살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멀리 갔던 주인은 돌아올 것이고, 돌아오고 난 뒤에는 반드시 결산하실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예비하라, 준비하라,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되,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 잘 분별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오셔서 결산할 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역시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 합니다. 20절과 22절이 그 내용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남긴 것이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고 묻어 두었기 때문에 한 달란트 그대로 돌려드렸을 뿐입니다.
이때 주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데, 21절과 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로주의를 말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겼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 그리고 이후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착하고 충성되었다는 것이 공로로 있어서 마치 천국을 보장받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섯 달란트든, 두 달란트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은 적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의도는 맡긴 것에 대해 남겼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맡기신 일, 그것도 적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일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잘했다, 착하다는 칭찬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달란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통하여 충성하셔야 합니다.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남겼다, 남기지 않았에 있기보다는 충성하였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충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충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종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데 더 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기 때문에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다섯 달란트 남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인께 받았다면 주인의 의도와 그 뜻이 무엇이냐,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다면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혹 여러분에게 어떤 재능이나 기술을 주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기 위한 도끼가 여기 있다 칩시다. 그럼 그 도끼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무를 베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베지 않고 살인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도끼의 목적, 용도에 있어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도끼지, 실제 우리의 모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많은 자들 가운데 택하여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 한분만을 경배하기 위해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사용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재능과 기술을 주시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은사가 뭔지, 그리고 재능과 기술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달란트는 단지 은사, 재능, 기술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은사로, 재능으로, 기술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하지 않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0:31). 달리 말하면 어떤 은사, 재능과 기술이 없어도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육신만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인 겁니다. 단지 남겼다는 것도 아니며, 일을 잘 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할 때 그 열매는 성령이 주시는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과 불법이 아닌, 성실과 정직, 부지런함 등으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을 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계를 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 그리고 여러분을 데려다 놓으신 곳, 거기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 희락의 열매를 맺음으로, 화평의 열매를 맺음으로, 오래 참고, 자비하며,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주부로서도 할 수 있으며, 직장을 다니는 분들도 할 수 있으며,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서도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시간과 장소를 허락하시고, 때를 따라 각자에게 은혜로 일을 맡기신다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말씀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이 인정하시는 충성된 자들이 모든 좋은 것들로 가득한 복된 부요함에 자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것을 가지고 뭘 해볼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주인 앞에 나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것입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시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여기 보면 일단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에 대해 크게 오해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불의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이요, 주인의 참 모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한 달란트이지만 그 한 달란트를 주셨고, 또 달란트 받을만한 자로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면 은혜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없는데, 그의 물음 속에는 주인이 전혀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에 대해 감사가 없습니다. 주셨지만 그것을 가지고 뭘 해 볼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세월만 허비할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불신자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창조하신 자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지만(롬1:20)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아니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독선적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정론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택하여 부르실 자와 유기하여 버리실 자를 정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불변하다. 아무리 인간의 노력해도 그 사실을 변경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럼 우리가 로봇입니까? 장난감입니까?” 이런 식으로 따집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왜 우리를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안 믿습니다.” 이게 불신자들의 대표적인 반응입니다.
이런 것 없이도 그냥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하여는 로마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결코 부인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근심하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들 힘으로 살아가고, 저들 열심으로 살아가고, 저들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더라!” 그래서 열심을 가집니다. 노력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열심도 노력도 다 자기가 하는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위해 삽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의미에서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지만 여전히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은혜를 받고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 힘으로, 자기 능으로 이룬 줄 알 뿐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버젓이 성경에서 예정론을 가르치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리시기 위함인데, 믿는 자들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반응을 하더란 겁니다. 그리고 변명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교단은 성경이 가르치는 이 예정을 인정하지 않기까지 하는데, 왜냐하면 현실적인 이유로 전도 혹은 선교가 안 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굳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며, 언제나 옳으십니다. 우리를 만세 전부터 택하셨을 때만 선하시고, 옳으실 뿐만 아니라 만세 전부터 저들을 유기하실 때도 여전히 선하시고, 옳으십니다. 이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의 자리는 이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다를 바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불의하다고 생각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섭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섭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삶을 허락하십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도의 합당한 자리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의 노력, 여러분의 열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여러분의 합당한 자리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여러분의 힘, 여러분의 노력, 열심을 여러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함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속히 돌이키시고, 이런 말씀을 통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이 어떠한 모습인가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말에 대해 주인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26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쉽게 말해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의하다 하지만 결코 불의하지 않으며, 너희는 나를 악하다 하지만 결코 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불의하다 하는 네가 불의하며, 나를 악하다 보는 네가 악하다고 말씀하실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 이하 30절입니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결국 주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다 빼앗아 오히려 있는 자에게 주십니다. 즉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는 베푸셨던 은혜도 종국에 가서 빼앗으십니다. 그게 어디냐? 지옥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는 결코 공로주의의 내용이 아닙니다. 받은 것에 대하여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는 깨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하느냐? 주인에 대한 참된 믿음과 충성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해는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신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자세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저들 입장에서는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핑계도 전혀 유효하지 않습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결산하실 날에, 자신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믿지 않는 가운데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지 못하고 유효한 은혜를 받지 못해서 회개하고 믿을 힘이 자신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자 하는 자들의 변명을 과연 들어주실 것 같은가?” 말 자체로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저들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효한 은혜를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오해했고, 불신했고,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정죄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반면 착하고 충성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택하셨기 때문에 유효적인 은혜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은사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맺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 공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충성된 종으로 있을 뿐입니다. 지금 비유는 바로 너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생각하자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생각하자면 결코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쫓겨났던 그런 쫓김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일한 것만 착하고 충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선택 자체로 우리는 다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불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예비하라는 말씀의 연장선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데, 그리고 그 구원은 불변하다고 말하는데 그냥 대충 살자!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합당한 생각, 자세가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신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는 비교하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부러워하라고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주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아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두 달란트 받아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한 달란트 받아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까? 여러분의 남다름, 여러분의 구별됨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 가는 것(엡1:4),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갈5:22), 이것이 우리의 삶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기 때문에 더 거룩하고 흠이 없고, 두 달란트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에 있어서도 덜 맺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떠하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 기억하십니까? 거기 보면 거지인데도 천국에 갔습니다. 어떻게 들어 갔습니까?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공로로 인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삶을 여러분이 사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라는 귀한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의 재림을 예비하며 사는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