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5회 이사야서 1장-12장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를 불문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언서는 무엇일까? 아마도 예언서의 시작이며 전례 때 어느 예언서보다 자주 선포되는 이사야서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긴 책 이사야서는 통상 제1이사야(1-39장), 제2이사야(40-55장),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되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역사적 정황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다. 세 부분이 다른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한 지붕 밑의 세 가족처럼 1-66장 전체가 하나의 예언서를 구성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체의 통일성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1. 유배 전 제1이사야의 역사적 배경(이사야 1-39장)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로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러 결국 두 왕국으로 분리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약 170-180년이 지난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등장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제1이사야’라고 부르는 1-39장의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 호세아, 미카와 동시대 사람이다. 그는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예언자의 소명을 받고(6,1 참조),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임금의 치세 기간에 예언 활동을 했다.
남유다는 내부적으로 우찌야 임금 치세 때 경제가 상당히 번영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종교 생활, 사치와 향락 등으로 사회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반면 대외적으로는 아시리아가 페니키아, 시리아, 이스라엘 등 남서쪽 지역으로 세력을 떨치며 정복 전쟁을 벌여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시점이다. 이렇듯 이사야 예언자가 등장할 당시, 유다에는 사회적 · 종교적 타락과 더불어 아시리아의 위협과 국내 정치의 불안이 날로 더 커져 갔다.
따라서 1-39장은 복잡한 정치 상황 아래에서 근동의 패권국 아시리아로 인한 남유다의 총체적 위기를 다룬다. 제1이사야 예언자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남왕국에서 4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아시리아의 개입 또는 침략이 몇 차례 이루어진다. 그 개입의 첫 계기가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다.
아시리아가 정복 국가를 무자비하게 다루었기에, 정복된 군주들은 기회만 되면 저항 방법을 모색했다. 일례로 시리아(다마스쿠스)의 르친과 에프라임(이스라엘)의 페카가 동맹을 맺어 연합 세력을 형성한다. 그들은 아시리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이집트와 연계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유다를 끌어들이려 했다. 유다 임금 아하즈가 이를 거부하자 르친과 페카 임금은 동맹을 맺어 유다를 침략한다. 이사야는 아하즈 임금에게 아시리아 군대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의 도움을 믿으라고 권고하였으나, 이를 믿지 못한 아하즈는 이사야의 조언을 거부한 채 하느님 대신 아시리아에게 해방의 손길을 기대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임금의 이러한 결정을 만류한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자로 부른 아시리아가 오히려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을 내놓는다(7,18-25; 8,1-10 참조). 결국 아시리아의 개입으로 마무리된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국의 패배로 종결된다. 그러나 그 결과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시리아 제국의 봉신(封臣)이 되고 만다. 결국 유다는 이사야가 염려한 대로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고,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공물을 바쳐야 하는 봉신 국가로 전락한다.
아시리아 제국처럼 해방자를 자처하며 약소국을 점령하여 봉신 국가로 만든 예를 필리핀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필리핀은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에 의해 50년, 일본에 의해 10년간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해방자임을 자처했다. 스페인은 무지몽매함에서 필리핀을 구한다며 들어왔고, 미국은 스페인의 억압에서 필리핀을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점령했다. 일본 역시 미국에게서 필리핀을 구하는 해방자라며 식민지로 삼았고, 다시 미국이 일본에게서 필리핀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을 들이대며 재점령하였다. 아시리아도 유다에게 해방자로 나타났으나 유다는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충고한 대로 하느님을 믿기보다 인간의 힘에 의지하고 그 손을 잡아 오히려 속박을 받게 된 것이다.
2. 유배시대에 구원의 희망을 선포한 제2 이사야 예언자(이사야 40-55장)
이사야 예언서의 40-55장은 바빌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왕국이 멸망한 후 질곡의 유배생활(기원전 587-538년)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예언자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제2이사야 예언서라 부른다.
제2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활동했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인 바빌론에서 다른 민족들과 이방 종교들 아래 절망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 끌려간 낯선 유배지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고통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자 구원의 가시적 보증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조를 상실한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들의 주님으로서 당신 백성 가운데 머무르시며 돌보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정복자 바빌론 제국의 신들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는 의심과 회의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 ‘존재의 의미’, 곧 그들의 ‘정체성’을 뿌리채 뒤흔드는 위기였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제2이사야 예언자는 먼저 유배의 시련이 왜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밝힌 다음, 하느님의 위로와 다가올 구원을 선포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창조신앙, 선민사상, 계약과 같은 거룩한 전통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금 확립시키고, 그들이 선택된 백성으로서 수행해야할 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제2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게 될 메시지의 신학적 바탕은 “하느님의 유일성” 사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창조신앙을 유배지인 대제국 바빌론의 이방 민족들 가운데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야말로 유일하시고 참된 신(神)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나는 주님, 모든 것을 만든 이다. 나는 혼자서 하늘을 펼치고 나 홀로 땅을 넓혔다.”(44,24) 즉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나는 마침이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44,6)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바라보던 정복자 바빌론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우상”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이란 사람이 나무를 베어 일부는 땔감으로 몸을 덥히거나 빵을 굽는데 사용하고, 남은 토막으로 제작하여 만든 신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4,9-20) 이처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는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그분만이 세상 전체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만민이 그분의 계획안에 포함됨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에 앞서 ‘왜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유배라는 시련을 겪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손수 그들을 약탈자에게 내놓으셨다는 것이다.(42,18-24, 참조 43,22-28)
그러나 이제 예언자는 고난의 유배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에 대한 값이 치러졌음을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위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40,1-2)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이제 더 이상 도움 받을 희망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제 들어라, 나의 종 야곱아,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 모태에서부터 너를 빚으시고 너를 도우시는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44,1-2) 비록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멀어져 갔지만 그들은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던 이들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유배를 통해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다시금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을 당신의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41,8-16)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페르샤 임금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르신다. “나의 종 야곱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때문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르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 네게 칭호를 내린다.”(45,4) 여기서 칭호란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45,1)로서 구약성서에서 도유 의식은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될 사람을 성별하기 위해 행해졌다. 특히 이방인이 기름부음 받은 이로 불리운 것은 이례적인 경우로 하느님의 보편적 주권을 드러내고 있다.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유배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도는 “해뜨는 곳에서도 해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45,6)이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구원 사건을 새로운 탈출, 즉 제2의 출이집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옛날 하느님께서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선조들을 당신의 놀라우신 권능으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새로운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43,19-21)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유다의 성읍들에게 선포되어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신다’하고 말하여라.”(40,9)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양떼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40,11)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의 궁극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제2이사야 예언서의 후반부(49-55장)에는 구원의 사건을 전해주는 전반부(40-48장)와는 달리 구원된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먼저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하느님의 배필로 제시되는데, 남편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내인 예루살렘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맞아들이신다.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본래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54,7-8) 이처럼 다시금 구원을 받은 예루살렘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모습으로 묘사된다.(54,11-17) 나아가 이스라엘은 이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그분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파견되기에 이른다.(55,1-5)
3. 유배 이후의 시대 제3이사야 (이사야 56-66장)
제3이사야는 누가 썼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몇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제2이사야 예언자의 제자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사 56-66장을 쓴 제3이사야는 이사 40-55장을 쓴 제2이사야의 제자라는 것이다.
많은 유다 백성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때 옛 유다왕국의 모습은 참담했다. 50여 년간 버려져있던 성읍들과 도시들은 문자 그대로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 예루살렘 도심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된다. 민족의 정치 지도층은 물론 종교적 몰락으로 인해 유다인들은 이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유다민족은 한마디로 위기에 빠진다.
민족 지도자들이 다 바빌론으로 끌려가버려 유배가 끝난 다음에도 유다왕국을 이끌어나갈 지도층이 구조적으로 아예 없어진 것이다. 곧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중심축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에 민족이나 국가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으니 한 나라에 그보다 더 큰 위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작은 마을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유다왕국을 이끌 국가 지도자들의 부재 곧, 국가 공적 권력과 기관뿐 아니라 유다교를 이끌고 나갈 정신적, 내적, 영적 지도자까지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 참상을 전해주는 구절로 우리는 눈으로 보듯 당시 폐허가 된 유다왕국의 단면을 보게 된다. “당신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다. 시온은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은 황무지가 되었다. 저희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하던 곳, 저희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집은 불에 타 버렸고 저희에게 보배로운 것들은 모두 폐허가 되어 버렸다.”(64,9-10)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유다인들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우리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위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한밤중은 쉬지 않고 저 멀리서부터 밝아오는 새아침으로 향한다. 바빌론 유배지에는 벌써부터 주님 구원의 손길을 선포하면서 끊임없이 새 희망을 안겨주었던 제2이사야 예언자가 있었다. 그의 예고대로, 시간을 흘러 역사는 바뀌게 된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이제 새로운 패자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가 중동의 패권을 차지한다. 덕분에 유다는 해방 곧 새아침을 맞이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기원전 587년) 꼭 50년 만인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 칙령으로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귀환 장면을 담은 구절은? 다음에서 생생하게 보게 된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그것들을 꺼내 오게 한 다음, 낱낱이 세어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그 품목은 이러하다. 금 접시가 서른 개, 은 접시가 천 개, 칼이 스물아홉 자루, 금 대접이 서른 개, 이급 은 대접이 사백열 개, 그밖에 다른 기물이 천 개였다. 그리하여 금 기물과 은 기물은 모두 오천사백 개였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에즈 1,8-11)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 집의 금은 기물들을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꺼내어 바빌론 신전으로 가져갔는데, 키루스 임금님께서 그것들을 바빌론 신전에서 꺼내시고, 지방관으로 임명하신 세스바차르라는 이에게 넘겨주셨다. 그러면서 세스바차르에게, 그 기물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또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지으라고 말씀하셨다.”(에즈 5,14-15) 이어지는 구절은 그렇게 유리한 여건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성전공사가 깔끔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엿보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 세스바차르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 집의 기초를 놓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어왔지만 아직 마치지 못하였다.”(에즈 5,16)
많은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시도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66,1)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상태로 머물러 있다. “이방인들이 너의 성벽을 쌓고 그들의 임금들이 너에게 시중들리니…… .”(60,10)
따라서 제3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20년 전까지 보아야 한다. 지지부지 끌어오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 공사가 기원전 520년에 이르러 제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제3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예루살렘 부근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공사가 활발히 진행될 무렵까지 활동했다고 본다.
유배에서 귀향한 유다인들은 “온 회중의 수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의 남녀종이……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다다랐을 때,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 쓸 자원 예물을 바쳤다. 저마다 힘닿는 대로 공사 금고에 바치니, 금화가 육만 천 드라크마, 은화가 오천 미나, 사제 예복이 백 벌이나 되었다.”(에즈 2,64-69) 에즈라는 이어서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백성 일부는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다. 성가대와 문지기들과 성전 막일꾼들은 저마다 제 성읍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도 제 성읍에 자리를 잡았다.”(에즈 2,70)
바빌론 유배 후 유다인들의 삶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꼽을 이들은 바빌론으로 유배가지 않고 유다 땅에 그대로 남아있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야훼신앙을 견고히 지키며 살아온 정통 유다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형태의 잡신공경에 빠져있었다.
유다 땅에 사는 두 번째 부류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다. 그들은 유다, 시므온, 벤야민 지파 출신 유다인들로서 야훼 하느님 신앙에 열정을 지니고 귀향했지만 폐허가 된 본국의 모습 속에서 여러 내외적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본국에 그대로 남아있던 유다인들이 잡신공경 등에 빠져있는 모습, 곧 그들의 배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종교적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속적으로 그냥 쉽게 살자는 뜻이었다.
유다 땅에 사는 세 번째 부류는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일자리를 찾아서든 또 다른 이유에서든 유다 땅에 와서 자리 잡고 살게 된 외국인들이다. 거기에다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유다인들과 더불어 유다 땅으로 이주해온 외국인들도 있었다. 이러한 외국인들이 야훼 하느님을 믿으며 율법과 독특한 종교관습을 따르는 유다인들과 얼마나 동화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유다인들의 네 번째 부류는 그들은 유다 땅 밖에서 살아가는 이른바 디아스포라 유다인이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하면서도 그들은 늘 자신의 조국을 <야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으로> 바라보면서 성지를 그리며 그곳에 갈 날을 희망하였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시편 137,4-6) 그들은 언젠가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귀향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이다. “쫓겨 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미 모아들여진 이들 말고도 다시 더 모아들이리라.’”(이사 56,8)
제3이사야의 과제는 예언자가 우선적으로 할 과제는 이들 네 부류의 유다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들 네 부류가 상호간 불협화음을 최소화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일이 제일 큰 과제였다. 예언자는 유배지에서 큰 희망을 안고 돌아온 이들을 위로해야 했다. 제2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이 아직 오지 않고 있기에 더더욱 백성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하여 사방이 폐허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의에 차 있었다. 예언자는 실망과 좌절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라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예언자의 또 다른 과제는 특히 귀향자들과 본국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 나아가 그들 사이에 골이 깊어져가는 미움과 분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그들을 무슨 말과 어떤 행동으로 위로하며 어떻게 그들에게 희망을 선사할 것인가?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형태의 신앙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도 다음으로 큰 과제였다. 유다 땅으로 이주해 와서 사는 외국인들과의 갈등해소도 해결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제3이사야가 선택한 문제해결 방안은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정의와 공정을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이사 56,1)
당시 하느님 백성이 서로 주고받던 한탄의 소리를 들어본다. “그러므로 공정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정의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이사 59,9)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제3이사야가 막 예언 활동을 시작할 때의 상황을 들여다보게 된다.
제3이사야는 미래에 대한 큰 꿈과 기대 속에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향했지만 오히려 좌절과 실망 속에 허덕이는 유다사회를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분석한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59,1-2)
제3이사야의 외침은 한마디로 밖에서 구원이 찾아오기를 그저 기다리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라는 주문이다. 더 쉬운 말로 ‘회개하라,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이다. 제3이사야의 외침을 직접 들어본다. “정녕 저희 악행이 당신 앞에 많고 저희 죄가 저희를 거슬러 증언합니다. 참으로 저희 악행이 저희와 함께 있고 저희 죄를 저희가 알고 있다. 저희가 주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였다. 저희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억압과 반항을 이야기하였으며 거짓말을 품었다가 마음속에서부터 내뱉었다”(59,12-13).
제3이사야가 말하는 참행복은 곧 행복론을 다음 구절에서 엿보게 된다. “행복하여라, 이(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이를 준수하는 인간,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는 이,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이.”(56,2)
제3이사야의 눈에 거스르는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예언자는 참회예절이나 금식행사를 이끌어가면서도 속마음은 잿밥에 가있는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마지막 표현까지 퍼부어가며 나무란다. “그(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모두 눈이 먼 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모두 벙어리 개들 짖지도 못하는 것들. 드러누워 꿈이나 꾸고 졸기나 좋아하는 자들이다. 게걸스러운 개들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 목자라는 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한다. 모두 제 길만 쫓아가고 저마다 예외 없이 제 이익만 쫓아간다.”(56,10-11)
제3이사야가 지적하는 지도자들의 부패상은 한편으로는 지도자들의 직무유기를 꾸짖는다. 요즈음 표현으로 ‘공직자로서’ 백성에게 닥쳐올 재앙이나 재난을 일찌감치 내다보고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러한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지도자들이 하느님 뜻에 따라 공동선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데,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질책한다. 이렇게 ‘부패한 공직자들은’ 결국 눈먼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둑이나 낯선 이를 보고 입을 가지고도 멍멍 짖지 못하는 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제3이사야는 부패한 지도자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그려줍니다. “오너라. 내가 술을 가져올 터이니 우리 독한 것으로 마시자.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니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56,12)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아직 자리 잡지도 못한 채 수많은 이들이 한편에서 굶주리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이 가련한 백성을 살찌울 책임을 맡은 공직자들이 하고 한날 술판이나 벌이고 있음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구절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사회 정의와 공정이 펼쳐질 수가 없다.
이사 1,1 이사야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의 임금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1,1).
여기 나오는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구별할 때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꼭 그 아버지가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사아후’이다.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한다. 이사야서 전체의 내용을 생각할 때는 물론이고, 심판을 선고한 역사적 인물인 이사야 자신의 경우에도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구원은 다른 어떤 곳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선포한 심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어서, 그가 예언자로 활동한 때가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라고 말한다. 기원전 8세기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예언자로 활동한 시기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6장에서 말하듯이 그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6,1) 부르심을 받았다면 기원전 740년의 일이고, 36-3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헤립의 침공은 히즈키야 시대인 기원전 701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히즈키야 시대의 일들이 약간 더 소개된 38-39장에서 이사야에 대한 기록이 끝나는 것을 보면, 이사야는 그 무렵까지 예언자로 활동했던 것 같다.
본문은 그의 출생지나 출신 배경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사야서의 내용과 문체를 통해 추정해 본다면 교육을 상당히 받은 고위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임금이나 대신들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길을 가다가 임금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예루살렘을 중시하고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강조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예루살렘 귀족 출신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결혼했고 적어도 아들 두 명을 두었다.
좀 더 이야기해 보면,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은 때를 정확히 규정하는 데 다소 문제가 있다. 6,1은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인 기원전 740년에 그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1,1과는 달리 우찌야 임금 때 예언자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6장의 소명담 이전에 이사야가 이미 활동을 시작했어야 한다. 이런저런 추측을 해볼 뿐, 더 이상은 단정 지을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 확실하게 우찌야 시대의 것으로 알아볼 수 있는 말씀은 없다. 이사야 예언서 제1부에 주로 등장하는 임금들은 아하즈와 히즈키야이고, 이사야가 정치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개입한 때도 주로 이 시기이다.
기원전 740년부터 40년간, 이사야는 예언자로 활동했다. 이 시대의 상황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아시리아’이다. 이런 저런 전쟁과 나라와 인물들이 등장하겠지만, 이사야 예언자뿐만 아니라 기원전 8세기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에 생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시리아이다. 나날이 팽창하던 아시리아의 세력이 얼마만큼 커졌느냐에 따라 국제 정세가 변했다. 이사야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기원전 745년에 아시리아 임금이 된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강력한 군주로서, 무엇보다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아시리아의 영향을 먼저 받게 된 쪽은 이스라엘이다.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아람(시리아)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맞서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유다 임금이었던 아하즈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아시리아와 손을 잡으려 한다. 이에 아시리아는 아람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도 공격한다. 히즈키야 시대에 와서는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은 유다도 아시리아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다가 고분고분히 아시리아를 섬기려 하지 않자, 아시리아는 유다를 공격한다. 기원전 701년에 유다를 침공한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나 그 밖의 온 땅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사 1,2-2,5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
이사야서 1장에서는 예루살렘 도성(‘시온’)에 초점을 맞춘 선포를 보게 된다. ‘소송’ 또는 ‘고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브가 나오지는 않지만 이 본문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상 1장에는 이사 1-39장의 편집자들이 이사야의 신학을 요약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1,2-4),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신 하느님(1,4), 하느님이 처벌하는 심판(1,5-9), 남은 자(1,9), 도덕적 삶이 따르지 않는 종교 예식이 끼치는 해악(1,10-15),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1,16-17), 그리고 가장 악한 죄를 지은 사람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토대로 한 구원에 대한 희망(1,18-31)이 나온다. 1장은 책 전체의 입문에 해당하며 나머지 장들에서 길게 전개될 주제를 소개한다.
따라서 이사 1,1에서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라고 말하면서 1,2-2,5절에서 전체의 요약을 보여준다. ‘환시’는 현실로는 없는 바를 있는 듯 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도 바로 앞에 나오는 ‘보다’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는 마치 성가 반주를 할 때에 전주에서 노래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1,1-31에서는 주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고, 2,1-5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2,2) - 1장에서 선고한 심판이 다 이루어지고 또 그 후에 - 이루어질 구원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즉 1,1-2,5의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는 심판을 거쳐 그 후에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사 1-66장 전체의 요약이자 이스라엘 예언사 전체의 요약이다.
1,2-31은 이사야 1-12장에서 첫 번째 심판 선고에 해당한다. 이는 전반적으로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기면서 그 죄상을 고발하고 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과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들, 거짓된 경신례,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 등 여러 가지 죄를 고발하면서도 심판 다음에는 구원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아아,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 등을 돌리고 말았다”(1,4). 4절에서는 탈선, 죄, 사악함, 타락 등 비슷한 말들이 여러 번 사용되는데, 그 하나하나 의미를 구별하기보다 이러한 단어들을 겹쳐서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큰지 나타내려고 함에 주목해야 한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1,16-17). 16절에서 ‘씻어라, 깨끗이 하여라, 치워버려라’라는 세 개의 명령형 동사들이 나온다. 씻고 정화하는 것은 제사를 위한 예식 절차에 속한다. 그런데 악한 행실을 치워 버리라는 것은 외적인 절차가 아니라 내적인 쇄신을 요구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이다. 하느님 눈 앞에서 악한 행식들을 치울 때 하느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이어서 17절에 ‘선행을 배워라’라는 보다 ‘선을 행하라’ 쉬울 듯 한데 선행을 배우라고 말한다. ‘배우다’라는 말은 이사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동사이다. 사람들은 삶의 길을 하느님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가르침”(1,10)이 중요하다. “공정(미슈파트)”이라는 말에는 약자에 대한 보호가 함께 있다. “억압받는 이”, “고아”, “과부”의 권리는 율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그 권리를 지켜 주는 것은 자비라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정의에 속한다. 17절 후반에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라는 단어들 모두 법률용어로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18).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소환했던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1,2)과 마찬가지로 법정 논쟁을 시작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고발이고, 그 고발에 대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18절에서 소송을 제기하신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최악의 죄인들까지라도 이 약속에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아무리 진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시 정결하고 거룩하게 회복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확실히 말씀하신다. 이 약속은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까지도 포함한다. 우리의 삶에서 죄가 완전히 없어질 수 없다. 그러나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는다면 죄인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이사 2,1 표제어의 말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1). 2장 1절에 사용된 표현들은 이사 1,1과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의 예언 전체에 대한 제목이 될 수 있는 이러한 표제어가 왜 두 번 반복해서 나오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그것은 1장이 첨가되기 전에 따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의견은 2,2-4을 강조하기 위해 1,1절의 말씀을 삽입하여 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아는 것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사 2,2-5 영원한 평화
1장에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심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이 어떻게 드러나는 가에 대해 말한다. “2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2-3).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히브리어로는 ‘날들 후에’이고 70인역으로는 ‘마지막 날들에’ 번역하여 종말론적인 해석을 드러낸다.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미래를,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이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이루어질 일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1장에 이어지는 문맥에서 말한다면, 시온이 정화되고 정의와 공정으로 새로워진 다음의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 표현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고대 근동에서 높은 산이 바로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곳이라 여겼다. 따라서 산 위의 성전은 지상의 하늘로 간주되었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따르면, 태초의 혼돈을 제어한 신들은 그 중심에 산을 자리잡게 하여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굳게 세워지고”라는 단어는 이를 상기시킨다-세상을 통치하였다. 그 산에 성전이 자리한다. 시온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진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시온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중요한 곳임을 의미한다. 시온이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시온 산은 해발 750미터 정도로 대단히 높은 산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곳에 있는 성전은 지상에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거처로서 유일무이한 의미를 지닌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4).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따르면 성전은 세상의 중심이다. 신들이 창조 때에 혼돈을 제어하기 위해 세운 산 위에 성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 역사가 시작된 후로, 창조 때와 같은 혼돈의 세력은 민족들의 반란과 공격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2장의 전망에서 시온 산의 성전에 계시는 하느님은 혼돈을 다스리는 “재판관”, “심판관”이시면서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다른 민족들을 무력으로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침으로써 민족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무기를 농기구로 바꾼다는 것은 무장을 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염려 없이 평온하게 땅을 가꾸며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다른 민족을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외적의 침입을 당할 것에 대비하여 군사훈련을 할 필요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시리아-에프라임 전쟁과 산헤림의 침공 등 유다 왕국이 겪은 여러 차례의 전쟁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취하는 태도에서 드러나지만, 이사야는 군대를 믿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사야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평화의 길은 오직 민족들을 다스리는 심판관이신 하느님 안에 있다. 역사의 흐름은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이 아닌 그분께서 쥐고 계신다. 이런 믿음 때문에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겪었던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미래가 열리리라는 것을 선포한다.
이사 11,6-9에서는 장차 올 메시아의 나라도 평화의 나라로 묘사된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보아온 통치자들은 무력으로 그들을 정복했다면, 예언자들은 종말에 완성될 메시아의 통치는 그와는 대조적인 평화의 나라가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사 2,6-22 주님의 날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어버리시는 “주님의 날”(2,12)을 알리는 것이다. 이 장에서 심판이 선고되는 구체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있지만, 더 근본적인 죄는 인간의 교만에 있다. 주님의 날에는 홀로 드높으신 하느님의 엄위하심이 드러날 것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하느님의 엄위를 대개 ‘하느님의 거룩하심’이라고 지칭한다.
“11인간의 거만한 눈은 낮아지고 사람들의 교만은 꺾이리라. 그날 주님 홀로 들어 높여지시리라. 12정녕 만군의 주님의 날이 오리라. 오만하고 교만한 모든 것, 방자하고 거만한 모든 것 위로 그날이 닥치리라”(11-12). 창세 3장에 나온 인간의 첫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시도였다. 그 교만이 온갖 죄의 뿌리가 된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심’, 곧 초월적인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이사야에게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 ‘거만’,‘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11절에서 선포하는 심판의 의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게 하는 데에 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맞게 될 ‘주님의 날’은 그들의 헛된 기대를 무너뜨릴 것이다.
11절에서 주님께서 ‘홀로’ 들어 높여지신다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나 일신 숭배와 관련된다기보다 인간의 교만에 대비된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다”(예레 17,5).
10-11절에서 주님의 날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징벌을 선포하시는 날이라기보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날, 하느님의 발현의 날로 묘사된다. “공포, 영광, 위엄” 등은 창조 안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순간들에, 그 권능 앞에서 인간이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12절에서 “주님의 날”이라는 특징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주님의 날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는 순간인데, 기원전 8세기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날이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이후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져있다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아니라 재앙의 날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사 2,12-17에서 주님의 날은 지진 또는 산에서 바다로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너희는 더 이상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있을 뿐 무슨 가치가 있느냐”(22). 이 명령은 인간을 신뢰하기를 그치고 단념하라는 것이다.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 자신을 의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그 우상들이 인간의 정교성과 창조적인 힘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물이든 권력이든 군사력이든 우상이든 인간적인 어떤 힘이든 하느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헛되니 더 이상 거기에 신뢰를 두지 말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통치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때 인간이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은 무너질 것이 때문이다. 이는 이사야서의 가장 핵심적인 신학사상인 하느님의 거룩하심의 한 단면이다.
“코에 숨이 붙어있을 뿐”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숨결이 있는 것일 뿐, 그 숨결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덧없음에 대해서는 시편과 욥기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이사 2,22과 가까운 사상은 인간에게서 숨결이 나가고 나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뿐 제후들이라고 해도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이사 3,1-15 예루살렘과 유다의 난세
“자 보라,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너희가 의지할 모든 것을, 저장된 모든 빵과 저장된 모든 물을 없애 버리시리라”(1). 1절에서 “주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15절에서 “주 만군의 주님”으로 끝맺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고발로, 아하츠 통치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아하즈는 기원전 735년 스무 살에 임금이 되었는데 당시 유다 왕국은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 임금의 나이도 젊었으므로 유다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의 통치 초기에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일어나 아함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아하즈는 오히려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1절에서 ‘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본디 ‘지팡이’를 뜻한다. 이것은 제후와 같은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고, 목자, 장애인, 노인 등이 몸을 기대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인간에게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없애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을 마치 하느님처럼 의지하려 할 때 하느님은 그 거짓된 안전을 무너뜨리신다. 양식과 물을 비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재판관과 원로도 있어야 하지만, 인간적인 수단들이 절대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인간적 수단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짓뭉개느냐?”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15). 히브리 말로 ‘주’는 ‘아도나이’이고, ‘주님’은 ‘야훼’이다. “주 만군의 구님”은 이사 3,1에 나온 표현이다. 현재의 맥락에서, 주님이신 만군의 야훼라는 이 칭호는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인’, ‘군주’로 모실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분, 그들을 구해내는 분이신 만군의 주님이 이스라엘의 참 ‘주인’이시다.
이사 3,16-4,1 예루살렘 여인들에 대한 경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신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여인들의 호사스러움과 화려함을 대상으로 한다. 아울러 외국에서 유래하는 우상숭배와 마술적 행동들을 겨냥하기도 하는데, 여러 낱말들이 이러한 행동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나오는 여인들의 치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용어들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들로서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1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을 부리고 목을 빼고 걸어 다니면서 호리는 눈짓을 하고 살랑살랑 걸으며 발찌를 잘랑거린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이마를 벗겨 보이시리라”(3,16-17).
'시온의 딸들'이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상류층 부인들을 가리킨다. 16절에서 교만라고 할 때 남자들의 교만이 주로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나타난다면, 여자들의 교만은 주로 허영과 음란으로 나타난다. ‘목을 빼고’라는 말은 ‘목이 뻣뻣한’과는 다르다. 목이 뻣뻣한 것은 순종하지 않는 완고함을 나타낸다. 고개를 숙이며 걷는 것이 겸양의 표시로 간주되듯이, 목을 빼고 머리를 하늘 높게 쳐들고 걷는 것은 교만의 표중으로 간주된다.
‘살랑살랑 걸으며’ 이는 아이들처럼 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다'로 볼 수 있다.
“정수리를 드러낸다”라는 말에서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말한다. 교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드러낸다는 것은 딱지가 생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딱지는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하는 여성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형벌이다. 바빌론에서서 앞머리를 깍는 것이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교만스럽던 예루살렘 부인들이 예루살렘이 겪을 때에 정복자들에 의해 겪게 될 수치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사 4,2-6 예루살렘의 부흥
이사 1장의 심판 다음에 2,15에서 시온의 구원을 말하듯, 그 후에 다시 이어진 심판선고 다음에도 4,2-6에 구원 선포가 뒤따른다. 이 단락 전체가 이사야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구절들의 경우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단락 전체는 유배 이후의 고유한 특색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락은 오히려 이사야서 제3부와 연관된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예루살렘의 죄가 심판을 통해 씻긴 다음 하느님께서 ‘남은 이들’을 지켜주시고, 그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날에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영화롭고 영광스럽게 되리라. 그리고 그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에게 자랑과 영예가 되리라”(2). 2절에서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란 말은 바로 “주님의 싹”이다.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단락 전체의 해석이 좌우된다. 주님의 싹이 “그 땅의 열매”와 병행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땅에서 자라나는 새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싹이라는 것은 분명히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싹”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다윗의 왕위에 앉을 후계자를 지칭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구절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이 이루어졌다. 싹이라는 말에는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님의 싹”이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희망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6). 6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폭우와 비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이나 '시온 산'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구‘피난처’와 ‘은신처’가 되는 주님의 돌봄은 구원의 약속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었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을 잃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정화의 과정이며, 하느님은 황폐해진 시온을 다시 돌보실 것이다.
이사 5,1-7 포도밭의 노래
5장의 ‘포도밭 노래’는 매우 유명한 본문이다.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개 이사야의 활동 초기에 쓴 것으로 본다. 5장은 사랑 노래 또는 추수 때의 노래 등 세속적인 노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학유형에 있어서, ‘노래’라는 외형 안에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법정 논쟁이 들어있다. 법정 논쟁은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증인들 앞에서 상대방을 고발하며 시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 본문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고발한다. 특이한 것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고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발하는 대상이 감추어져 있다가 나중에 밝혀진다는 점이다.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1). ‘친구’라는 말은 2행에 나오는 ‘애인’과 등의어로 ‘애인, 연인’을 뜻하기도 한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주님을 자기의 ‘친구’,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의 고발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하느님을 대신하여 표현한 것이다. “포도밭”은 구약성경에서나 메소포타미아 또는 이집트에서, 사랑 노래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된다. 따라서 이 노래의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본문을 읽기 시작한다면 이것이 단순히 ‘내 친구“의 사랑 노래, 곧 그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으나 인인이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그를 배신했다는 노래로 알아들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노래를 듣는 이스라엘은 이 포도밭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노래를 듣다가 7절에 가서야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노래임을 깨닫도록 되어있다.
2절에서 “좋은 포도나무”는 붉은 포도 품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름진 땅, 땅을 고르는 작업, 그리고 좋은 포도나무는 모두 좋은 추수를 약속하는 요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감시할 탑을 만들고, 또 포도를 거두고 나서 술을 짜기 위한 확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다. ‘확’은 대개 돌을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다. 좋은 포도나무에서 좋은 포도를 기대 하였지만 들포도를 맺었다고 한다. 들포도는 버려지는 포도를 말한다. 이는 비극적 결말에 대한 예감을 말한다.
“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7). 이제 포도밭의 의미가 밝혀진다. 시비를 가리고 심판을 해야 했던 이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고발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는 표현은 앞에서 심판 선고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피흘림”이란 불의, 불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 말에서 공정은 ‘미슈파트’인데 피 흘림은 ‘미스파흐’이고, 정의는 ‘처다카’인데 울부짖음은 ‘처아카’이다. 이처럼 히브리어에서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사용한 언어의 유희를 보여준다. 정의와 공정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요구하시는 요소들로서 이사야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다.
7절에서 이스라엘에 내려지는 재앙의 선고, 그리고 실제로 그 백성이 겪게 될 재앙을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이해할 때 이스라엘은 그 하느님의 깊은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할 수 있다. 7절에 나오는 대답없는 질문들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면서도 치지 않으실 수 없는 주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호세아서에 하느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선포하면서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고 말씀하신다(호세 11,8). 마찬가지로 이 노래가 예언자가 “내 친구를 위하여”(이사 5,1) 부른 노래라는 것, 곧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애절함을 이사야가 대신 노래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사 5,8-25 불의한 사람 고발
5장 7절에 이어 5,8-24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 재앙으로 선포한다. 이 신탁에는 유다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사야가 교차 대구라는 수사학 기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잘 보여주는 견본 같은 구절이다. 분실된 연(A´)까지 포함하면 탄탄하게 잘 구성된 시의 형식이다. A´는 현재의 이사 10,1-4에 해당한다. 이 본문에는 ‘불행하여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설교 일곱 개가 교차 대구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A 불행하여라, 가난한 이를 내쫓고 부를 축적가는 사람들(5,8-10)
B 불행하여라, 술로 달아오르고 눈이 멀어 야훼의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들(5,11-16)
C 불행하여라, 자만하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죄인들(5,18-19)
D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사람들(5,20)
C´ 불행하여라, 자만하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5,21)
B´ 불행하여라, 술로 눈멀고 정의를 왜곡하는 사람들(5,22-23)
[A´ 불행하여라,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는 사람들(10,1-4)]
가장 밖에 있는 연(A-A´)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는 죄를 단죄한다. 다음 단계의 교차 대구에 해당하는 연(B-B´)은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부자들의 생활양식을 소개한다. 서로 상응하는 본문에서 우린 ‘야훼의 업적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12절) 것과 “죄 없는 이들의 권리를 빼앗는 자들”(23절)이 대응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음 단계(C-C´)에서는 억압하는 부자들의 자만하는 자세를 비난한다. 교차 대구 구조 중앙에(D) 핵심이 되는 죄가 소개되는데 이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다.
이사 5,25 주님의 분노
“그러므로 주님의 분노가 당신 백성 위에 타올라 당신 손을 뻗치시어 그들을 치시니 산들이 뒤흔들리고 그들의 주검들이 오물처럼 거리 한가운데에 널려 있다. 이 모든 것에도 그분의 분노는 풀리지 않아 그분의 손은 여전히 뻗쳐 있다”(25). 주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으로 심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도, 특정한 장소와 상황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치시는 당신의 “분노”는 현대의 많은 이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하늘 위 멀리 앉아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분이 아니시라면 그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죄악을 수수방관하실 수 없다. 하느님께서 분노하실 때에도 그 백성은 “당신 백성”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 하느님의 분노와 처벌은 당신 백성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사 5,26-30 아시리아인들의 침입
5,26-30은 아시리아인들의 침입을 묘사한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간 중 아시리아는 티글랏 팔에세르 3세 때, 살만에세르 때와 산헤립 때 등 여러 차례 침공했는데, 이 단락이 그 가운데 어느 침입을 나타내는지는 모른다. 본문 자체는 침입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저자는 아마도 지금까지 묘사한 것과 같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이방 민족을 당신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위치에 아시리아인들의 침입을 말했을 것이다. “그날 그들은 노호하는 바다처럼 이 백성에게 으르렁거리리라. 땅을 바라보면 암흑과 고난뿐 빛마저 구름으로 어두워지리라”(30). 이 단락은 아사리아 군대가 유다 백성을 향해 있고 아무런 희망이 없이 끝난다.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해도, 그 구원이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둠의 순간을 하느님의 계획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인간의 판단을 초월하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한 신앙의 태도이다.
이사 6,1-13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는 히브리어로 ‘여사야후’인데,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또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사야’라는 호칭에 하느님의 업적 또는 예언자의 소명이 담겨 있다. 이사야가 하느님께 예언자로 부름받는 장면을 보겠다. 이사야서에 담긴 방대한 내용에 비해 이사야 예언자를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두었다고 소개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유다에 대한 심판과 희망에 대한 예언을 함의하는데, 두 이름에서 암시하듯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심판과 희망을 동시에 전하는 예언을 만나게 됩니다.
1-5장은 이스라엘의 죄악상에 대한 경고를 기술합니다. 특별히 5,1-7에 기록된 ‘포도밭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하느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이어 6장에서 예언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소명을 밝힙니다. 이 소명 사화는 이사야에 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그 광대한 이야기에 쓰인 동사 ‘보다(응시하다), 듣다, 말하다’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이사야서를 시작하는 구절에서는 이사야의 소명을 “환시”(2,1도 참조)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사야서 대부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다룬다.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과 열거된 유다 임금들의 이름을 통해 독자는 이사야가 활동한 장소와 시간을 알 수 있다.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가 임마누엘 예언 선집(7-12장) 앞에 소개된다.
“1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3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1-3).
이사야의 부르심은 이미 기원전 739년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있었다. 따라서 소명 이야기는 아시리아 군대가 침략하기 전 유다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을 때 이사야가 처음으로 한 예언자 체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6장은 이사야의 하느님 환시,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사야 신학을 종합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 있는 ‘성소’에서 환시를 본다. (1아마는 약 46센티미터 정도였으므로 성전은 길이가 31미터, 너비가 10미터, 높이가 15미터가 된다.) 야훼게서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는 천상적 존재인 ‘사랍들’(직역하면 ‘타오르는 자들’을 뜻한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면서도 돌로는 얼굴을 가리고 하느님을 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면 죽기 때문이다. 두 날개로 발을 가린다는 것은 “발”은 일종의 완곡어법으로 성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랍들은 여섯 날개 가운데 두 날개로 날아 다니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외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이사야서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과 무한히 구별되는 하느님의 절대성, 초월성을 나타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거룩함은 죄와 공존할 수 없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신비”이기에 이사야는 그 앞에서 자신이 부당함을 느낀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인간에게도 거룩함을, 곧 이 세상의 속됨에서 분리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 번에 걸쳐 “거룩하시다”를 반복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하다는 의미다.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유배 이후 늦은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은 점을 보아 본래 주변 민족들이 섬기던 여러 신들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사야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말한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5). 사람은 하느님을 뵙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온다. 5절에서 ‘더럽다’라는 말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부정함,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적합함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타는 숯으로 입술이 정화된 후에야 사명을 자원하는데, 스스로 나서서 소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사야 전후에 활동한 같은 예언자들과 다르다(6,8). 불 자체도 정화를 상징하거니와 제단의 불은 죄를 씻고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입에 타는 숯을 내는 것은 입술만이 아니라 한 사람 전체를 정화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그렇게 때문에 시랍은 그에게 입술만 정화된 것이 아니라 “너희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8). 이사야의 응답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한편으로, 그는 주저 없이 응답한다. 부르심에 머뭇거렸던 모세나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보내시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이 응답해야 하는 사명이 무엇이진도 모르면 “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대한 인간적인 계산은 없는 것이다. 이사야는 자발적으로 응답하면서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파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기에 “제가 가겠다”라고 아니라 하느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이어서 죄가 신비스럽게도 하느님 계획(6,9-10)의 일부로, 죄를 지은 백성은 재앙으로 이끄시는 계획의 일부로 묘사된다. 여기서 죄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다(이사 1,2-3). 하느님은 이미 심판을 선포했으므로 이사야의 사명은 예언을 선포하여 심판의 실현을 돕는 것이다. 이 예언 선포의 목적은 듣는 이의 눈을 밝혀주고 마음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흐리게 하고 귀를 닫게 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이다. 예언자의 선포 자체가 바로 심판을 가져온다.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10).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는 주제는 성경에 가끔 나타나는데(탈출 7,3), 분명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어떻게 백성의 마음이 굳어지게 하신다는 말인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예언자들, 주로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느님 편에서는 계속 당신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지만, 멸망을 피하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사야가 마주하게 될 반응이고 예언 활동의 결과로 멸망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철저한 멸망을 통해서라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멸망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이 무디어진 것 역시 결국에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중재(아모 7,2.5)와 유사한 기도를 올리며 하느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이사 6,11)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유일한 메시지일 수는 없다. 하느님의 답변은 다가올 재난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만 남을 것이다(6,11-13). 그러나 재난의 긍정적이 요소가 신비롭게도 13절 끝에 나오는 모호한 말에 담겨 있다.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도 그루터기는 여전히 생명을 유지한다. 그 안에 감추어진 씨앗은 새로운 생명력을 약속한다. 하느님의 분노와 파괴 배후에는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이라는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이사 7-12장 : 이하즈 치세의 이사야 예언
이사 7-12장에는 이사야서 본문 중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이 들어 있다. 7,14에 계약된 아기에게 주어진 이름을 따서 통칭 임마누엘 예언이라 부르는 본문이다. 이 아이는 구원하는 다윗 가문의 통치자로서 9,5-6과 11,1-9에 다시 등장한다.
이사 7,1-9 전쟁 위협과 믿음을 지니라는 호소
“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1). 기원전 734년에 일어난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다마스쿠스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르말야의 아들 페카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에 가담하기를 주저하는 아하즈를 압박할 뿐 아니라 아하즈를 폐위하고 예루살렘에 새로운 임금을 앉히겠다고 위협한다(7,6). 사태가 악화되자 아하즈는 어린 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바치며 가나안 예식에 의지한다(2열왕 16,3). 이제 아하즈 임금에게 후계자마저 끊긴 상태가 되자 나라와 다윗 왕조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
이사야가 조언했음에도 아하즈가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이 아시리아 임금은 기꺼이 응하고 신속하게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뒤 임금 르친을 처형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많은 백성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면서, 호세아를 이스라엘 임금으로 사마리아에 남겨놓는다.
티클랏 필에세르가 유다에 개입한 결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국가와 왕조는 겨우 살아 남았지만 이하즈는 아시리아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2열왕 16,8-9) 예루살렘 성전 안에 아시리아의 제의 의식을 도입해야 했다(2열왕 16,10-18).
2열왕 16,2-4에 나오는 아하즈의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묘사로 알 수 있듯이 아하즈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임마누앨 예언(이사 7-12장)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아사야는 직접 국가의 정치에 개입한다. 그는 아하즈가 티글랏 필에세르와 동맹 맺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이사야는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실로아 수로가 시작되는 기혼 샘 옆으로 임금을 만나러 간다.(전쟁 기간에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하는 실로아 수로는 대단히 중요했다) 여기서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7,2) 임금을 사로잡은 두려움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7,4)라는 말에 묘사된 이사야의 확고한 신앙이 대조된다.
이 신탁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7,9)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구절을 현대어로 옮기면 의미가 많이 축소된다. ‘믿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는 ‘굳건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히필형, 곧 사역형이다.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굳건하신 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그의 안전이 티글랏 필에세르와 맺는 동맹이 아니라 바위처럼 든든한 하느님께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두려움으로 행동하는 것과 반대된다. 아하즈는 르친과 페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맞서려면 아하즈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한다.
이사 7,10-16 임마누엘 표징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이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13-14).
아하즈는 확신에 필요한 표징을 하느님께 청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앞 본문과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행한 두 번째 신탁에서 임마누엘의 표징, 곧 현재 임신 중이며 아들을 낳아 그를 ‘임마누엘’로 부를 젊은 여인이라는 표징을 제공한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묘사다. ‘임마누’는 히브리어로 ‘우리’라는 접미사에 전치사 ‘함께’가 결합된 단어다. ‘엘’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 표징은 먼저 임금에게 주어진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므로 임금은 하느님의 보호에 의지하고 안심하라는 것이다.(시편 46,8.12 참조)
아하즈 시대에 이사야는 임신한 젊은 여인이란 표징과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아들의 탄생이라는 표징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하즈가 전에 아들을 죽여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내용을 2열왕 16,3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이 시작될 때 다윗 왕조에는 뒤를 이를 후계자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기원전 732년경에 히즈키야가 탄생했으므로 기원전 733년에 ‘젊은 여인’이 임신했다고 볼 수 있다. 히즈키야가 통치한 기간은 “스물 아홉 해”(2열왕 18,2)로 기원전 715년부터 686년까지다. 이 연대에 따르면 히즈키야의 아버지 아하즈 임금의 통치 기간은 대략 기원전 731년부터 715년까지 16년이며, 산헤립의 침략은 히즈키야 제십사년인 기원전 701년에 일어났다.(2열왕 18,13) 2열와 18,1에서는 북왕국 임금 호세아의 통치 제삼년인 기원전 728년에 히즈키야가 왕위에 올랐다고 나온다. 이것이 히즈키야가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타당한 진술이다. 또한 이것은 2열왕 18,9-10에서 히즈키야 임금 “제사년”또는 “제육년”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게 해주는 틀이다. 이런 연대 설정이 성립되려면 우리는 아하즈 임금이 아들이 네다섯 살이었을 때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아하즈가 가문 계승에 깊이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며, 결국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이 이루어진 데 대해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동안에(734-732년) 아하즈의 아내 아비의 임신은 확실히 중요한 희망의 표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이사 9,5-6에서 위대한 “평화의 군왕”으로 나오는 아들이나 11,1-9에서 정의롭게 통치하며 백성을 구원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움튼 새싹’으로 나오는 아들과 같은 인물일 것이다. 이 후대의 본문들은 히즈키야가 탄생했을 때나 그가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을 때 이사야가 지은 찬미가일 것이다. 다른 어떤 아들과 탄생을 이사야가 알고 있더라도 이 위기의 시대에 그 아들이 아하즈 임금에게 확신을 주는 표징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미카 예언자도 다윗 집안 통치자의 탄생을 전하는데 이 통치자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해산하는 여인”이라고만 짧게 표현하며 아기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고 예언한다(미카 5,1-4).
다윗 가문이 소멸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사람들은 이사야와 미카의 예언을 미래의 다윗 임금을 가리킨 것으로 다시 읽게 될 것이다. 메시아 임금에 대한 기대는 원래의 맥락에서 지녔던 의미를 넘어 미래를 향해 투사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이 임마누엘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사야서의 이 본문을 사용하면서 임마누엘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를 뜻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구약성경 본분에는 아기의 어머니를 ‘동정녀’라고 부르기 때문에 마태오는 이 칭호를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예수를 임신한 복음서 이야기와 연결한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아기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마’는 ‘동정녀’가 아니라 단지 ‘젊은 여인’을 뜻한다.
이사 7,17-25 불길한 표징
아하즈가 거부한 표징은 불길한 표징이 된다. 17-25절에는 파멸 신탁이 들어 있는데 아하즈가 구원자로 여기며 찾고 의지하는 아시리아 임금(이사 7,20)이 유다에 재앙을 가져오리라고 선포한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강 건너편에서 빌려 온 칼로 아시리아의 임금을 시켜 머리털과 다리털을 밀고 수염까지도 깎아 버리게 하시리라”(20). 여기서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다. 머리카락과 다리털(음부의 털을 지칭한다), 수염을 깍이는 것은 모욕이다. 여기에서는 전쟁 포로들의 털을 깍는 것을 뜻한다. 한편 ‘털을 깍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갈라흐’로서 ‘유배를 가다’를 뜻하는 ‘갈라’와 매우 유사하다.
이사 8,1-10 이사야의 아들의 탄생과 그의 상징적 이름
앞서 이사 7장에서 아기의 탄생이 표징이 되었듯이, 이 단락에서도 태어난 아기와 그 아기에게 주어진 이름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번의 경우에는 그 아기가 이사야의 둘째 아들임이 분명히 표시된다.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신탁 말씀을 하신다. 다마스쿠스와 사마리아의 파멸이 다시 상조되는데 이번에는 이사야의 둘째 아들,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의 탄생과 연결된다(8,1-4).
“ 그런 다음 나는 여예언자를 가까이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그의 이름을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라고 하여라.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마스쿠스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전리품이 아시리아의 임금 앞으로 운반될 것이기 때문이다”(3-4).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는 약탈물은 재빨리, 노략물은 날새게‘라는 뜻이다. 4절에서 예과는 바와 같이 아시리아가 아람과 이스라엘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의 탄생은 다마스쿠스와 사마리아의 파멸 예고가 된다. 유프라테스에서 아시리아라는 강물이 거세게 흘러들어오면 유다 역시 목까지 차게 될 것이다(8,6-8). “그리하여 강물은 유다로 밀려들어 와 목까지 차게 되리라. 그 날개를 활짝 펴서 너의 땅을 온통 뒤덮으리라. 아, 임마누엘”(8,8). 이 예언이 아시리아의 공격을 뜻한다. 8절의 맨 뒤에 ‘아, 임마누엘’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재앙의 선포였던 것이 이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의미가 변경된 것으로, 재앙이 생겼다고 해도 임마누엘에 대한 희망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 8,16-18 봉인된 증언 문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나 남왕국 유다가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아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아람과 동맹을 맺었다가 결국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는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아람과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중에는 아시리아에 종속되는 유다나, 결정적인 문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외적에게 침입을 받는가가 아니라 위협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16 나는 이 증언 문서를 묶고 나의 제자들 앞에서 이 가르침을 봉인하리라. 17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리라. 야곱 집안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신 분 나는 그분을 고대하리라. 18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과 나야말로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표징과 예표이다”(16-18).
이사야는 임금이 자신의 말을 거부하자 자기의 가르침을 봉인하고 미래에 그것이 진실로 드러날 때까지 보관하기를 바란다. “제자들”(8,16)은 이사야의 기록과 발전을 책임진 집단을 가리킨다. 이사야 자신은 이제 ‘기다리고’ ‘신뢰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8,17). 언젠가 이사야의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고 그때에 그의 말이 옳았으며 그가 선포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이 확인될 것이다.
저술 예언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사야도 살아 있을 때 설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죽은 후에 책으로 더욱 많은 결실을 맺었다. 그의 기록은 보존되었고 사람들은 이사야가 한 말을 반복해서 읽고 의미를 성찰했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더욱더 ‘메시아’의 의미를 띠게 되었고, 기름부음 받을 임금이 될 미래의 약속된 구원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사 8,23-9,6 장차 태어날 임금
23절 후반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대비되면서(“옛날에는.., 앞으로는”) 9,6까지 어어지는 미래의 약속이 시작된다. “그러나 곤궁에 처해 있는 그 땅에 더 이상 어둠이 없으리라.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23). 그 과거와 미래는 각각 언제일까? “옛날”은 아마도 기원전 733년경에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주민들을 유배시킨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어서 이사야는 그 땅에 빛이 비치고 백성들이 해방될 영화로운 날을 그려 보이는데, 그날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유배 간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될 날, 하느님께서 정복자들의 억압과 군사력을 꺾으실 날에 대한 8,23-9,6의 묘사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 왕좌에 앉을 ‘한 아기’의 탄생이다. 이 아기에 대한 예언은 7,14의 임마누엘 예언에 이어지는 것으로, 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분명 다윗 왕식의 어떤 구체적인 아들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되지만, 갈릴래아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하게 실현된다(마태 4,13-16에서 이 단락을 인용하고 있다).
“5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6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켜 가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이다”(5-6).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면서 본문은 한 아이, 곧 다윗 가문의 ‘평화의 왕자’의 탄생을 포함하여 엄청나게 기쁜 사건을 묘사한다. 아기는 히즈키아나 요시야를 가르킨다고 생각되짐나, 다른 한펴능로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에 적용된다. 5절에서의 본문의 변화는 4절에서의 파멸 예언에 이어 반전처럼 구원 예언을 나란히 배치하기 위해 예언서 편집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학 기법이다. 이런 방식은 하느님의 궁극적 의도인 구원에 대한 이사야의 강렬한 희망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바치는 구원 찬미가에서는 상황의 급진적인 역전(9,1)을 알리며 바로 이어서 기쁨을 묘사한다(9,2).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왜냐하면’ 다음에 이렇게 기뻐하는 세 가지 이유를 밝힌다. 억압이 끝나고(9,3) 전쟁이 끝나며(9,4) 다윗 집안에 임금이 될 왕자가 탄생하기 때문이다(9,5-6). 왕자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당신 궁중에서 흔히 사용하던 과장법에 해당하는 용어일 것이다. 이 왕자는 여느 통치자와 다르게 다스릴 것이다. 그는 무력(9,4)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9,6)로 통치할 것이다. 5절에서 “평화의 군왕”이라는 호칭은 “주님은 평화”라는 표현과 같다.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라는 말에서 정의와 평화를 임금의 이상적인 통치로 내세운다. 이 예언이 충만하게 성취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9,1-6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전달하는 신탁이 아니라 예언자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로 보이는 사건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 또는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예언하는 미래에 일어날 큰 결과에 관심이 쏠리게 되지만 이 찬미가의 주제는 현재다. 다윗 가문의 임금이 될 왕자의 탄생에 왕실에서는 큰 축하 의식을 벌였을 것이다. 이사야는 오늘날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독하는 시인’처럼 공적으로 시를 짓는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마태오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이 갑작스런 역전이, 티글랏 필에세르가 황헤하게 만든 땅인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했던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성취된다고 보았다(마태 4,15-16). 이사야가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사후 수백 년이 되도록 그의 크나큰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예언은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태오는 예수님 안에서 이사야가 계약한 ‘임마누엘’과 다윗 가문의 ‘평화의 왕자’를 보았다.
이사 11,1-9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
8,23-9,6과 같은 노선에서, 유다에 내린 심판이 끝난 다음의 새로운 시작을 그려본다.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1-2).
이 단락은 다윗의 후손인 군왕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 ‘새싹’이나 이사이의 ‘뿌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윗 가문의 새 통치자의 탄생을 찬양한 앞 내용(9,1-65)과 달리 이 단락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가 아니다. 여기서 동사들은 미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은 위대한 구원 행위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미가라기보다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예고로 보인다. 그러나 이 본문에 나오는 ‘싹’과 9,5에 언급된 ‘아기’의 일반적인 병행은 두 구원자 인물을 7,14의 ‘임마누엘’과 같은 인물로 보게 해준다.
다윗의 아버지 ‘아사이’에 대한 언급도 미카가 유사한 예언에서 베들레헴을 언급하는 것과 병행한다.(미키 5,1) 이 본문에 나오는 수목(‘그루터기)’의 이미지는 오래된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생명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래된 그루터기가 반드시 재난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2절에서 “주님의 영”은 이사 42장과 61자에서도 주니의 영이 내림을 언급한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영(루아흐, 숨결, 입김)은 창세 1,2에서부터 나타내며 모든 것에 생명으 ㄹ주고 판관들과 사울을 비롯한 임금들에게 내리며 예언자들을 감도한다. 요엘 3,1-2에서는 메시아 시대에 그 영이 모든 사람 위에 내리리라고 예언하며, 지금 본문에서는 예언자들에게 내렸던 그 영이 메시아 위에 내리리라고 예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의 여섯가지 속성은 잠언 8,12-14에서 의인화된 지혜의 속성들에 상응한다. 이들으 임금의 왕위 특히 정의로운 통치의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 여섯 가지 속성에 칠십인역과 대중 라틴말 성경은 2절 마지막에 효경을 넣었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 신학에서 말하는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 목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칠은 지혜, 슬기, 경륜(깨달음), 굳셈(용맹), 지식, 경외(두려워함), 섬김(효경)이다.
한 아기를 가리키는 ‘햇순’이나 ‘새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다윗 가문의 새 통치자에 대한 묘사는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춘다.
· 첫째, 직무 방식 : 새 통치자는 하느님의 영, 솔로몬 같은 지혜와 이해하는 마음, 다윗 같은 조언과 힘, 아브라함 같은 야훼에 대한 예지와 야훼에 대한 두려움을 갖출 것이다(11,2).
· 둘째, 직무 행사 : 이 통치자는 선한 삶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립하며 악한 사람을 처벌할 것이다. 그의 직무는 ‘중재자’ 역할에 중점을 두는데 특히 약한 사람을 위해 일할 것이다(11,3-5).
· 셋째, 통치의 결과 : 낙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평화가 지상에 구현될 것이다(11,6-8).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6-9). 6-9절에서는 메시아가 이룩할 새로운 시대가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생물에게까지 미치리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동물들을 열거하며 맹수와 가축을 서로 짝지어 놓았다. 그 절정은 가축 대신 “젖먹이” “젖 떨어진 아이”가 독사와 어울리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망은 창세 1-11장에 나타난 땅과 인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세 3장에서부터 땅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다(창세 3,17-19).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게 재앙과 전쟁을 예고했지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이사 11,9 참조) 메시아 시대에는 인간과 땅 사이에도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 결과로 땅의 풍요로움과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이다.
사자가 여물을 먹는다는 것은,인간에게 육식이 허락되기 이전인 창세 1,29-30을 연상시킨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양식으로 주신 것은 풀과 과일이었다. 인간이 동물들을 양식으로 삼게 된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이고(창세 9,3 참조), 그것은 이미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낙원의 상태를 벗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이 단락에서 는 인간,동물,땅의 관계가 원죄 이전과 같은 낙원의 상태로 그려진다.
“젓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며”라는 말은 창세 1-11장과의 연관을 생각할 때,뱀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다르기는 하지만,뱀은 인간을 죄로 끌어들인 동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수 있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세상의 완성이 실현되는 장소는 시온 산이다. 심판이 유다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예루살렘에 선포되었듯이,하느님께서 머무시며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장소도 예루살렘,시온 산,성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6-9절을 해석하면서,동물들에 대한 언급은 모두 비유적인 표현이고 이 단락에서 본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9ㄱ절(“나의 거룩한 산이 어에서도”)에 들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반에서 인간의 행위는 자연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특히 창세기와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이 단락은 인간에게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미치는 메시아 시대의 평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결과는 온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 차는 것인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11,9).
이사 11,10 이사이의 뿌리
10절은 후대 제자가 덧붙인 구절인데 ‘이사이의 뿌리’라는 이미지가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어야 하는 축복의 원천으로 바뀐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10). 10절의 마지막 구절이 70인역에는 ‘그의 안식처는 영광이 되리라’, 대중 라틴말 성경에ㅐ는 ‘그의 무덤은 영광스럽게 되리라’로 되어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것이 구세주의 무덤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이사 12,1-6 구원된 이들의 감사 노래
“1그날에 너는 이렇게 말하리라. ‘주님, 당신을 찬송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진노하셨으나 분노를 거두시고 저를 위로해 주셨다. 2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 3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날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리라.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을 받들어 불러라. 그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그 이름 높으심을 선포하여라’”(1-3).
12장의 감사 노래는 1-12장을 끝맺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2장은 탈출 15장이 이집트에서의 탈출 이야기에 어어지는 것과 같이, 유배에서의 귀향 예고에 뒤따르는 감사 노래이다. 1-4 장에 걸쳐 심판과 구원이 두 번 반복되는 두 개의 서문이 나온 후에 5장에서 시작된 심판 선고가 8,23-9,6의 구원 선포로 끝나고,다시 9,7에서 시작된 심판 선고를 (부분적으로 심판과 구원이 교차되는 단락들도 있지만) 11장에서 다시 구원 선포로 끝맺은 다음,이 부분 전체를 끝맺는 감사 노래가 나온다(12,1-6). 13장부터는 내용이 전혀 달라짐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단락의 작성 연대를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편으로 1-11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다른 한편으로 40-66장과도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 작성되어 이 자리에 들어왔든,이 감사 노래는 1-11장과 이사야서 전제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구조에서 큰 한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귀향을 알린 다음(11,10-16) 뒤따라 나오는 이 감사 노래는,탈출 14장에서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넌 다음 15장에서 부른 노래가 이집트 탈출의 과정을 끝맺는 것과 비교된다.
1절에서 “위로”는 이사야서 제1부에서 나타나지 않는 주제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위로하여라,위로하여라"(40,1)로 시작되는 이사야서 제2부의 중요한 주제다. 2-3절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이사야’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 ‘야훼는 구원하신다, 야훼는 구원이시다’를 뜻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이 구절들을 특별히 이사야라는 인물에 연결하기도 한다. 이사 12장을 쓴 편집자가 이사야라는 이름에서 출발하여 1-11장의 의미를 해석하며 감사 노래를 썼으리라는 것이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온 세상을 위한 것이지만, 그 안에서 시온은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그거은 시온 자신이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 이전에 심판이 있어야 했다. 이사야서 전체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 속에서도 자신을 치시는 하느님을 신뢰한 시온은 민족들의 빛이 되고 마침내 고통이 지니는 긍정적 의미를 증언할 수 있게 된다. 12장은 이러한 이사야서 전체의 결말을 미리 예고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13장-23장은 다른 민족들에 대해 주로 심판을 선고하지만, 독자는 그들에게도 결국은 구원이 선포되리라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