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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박유동 신인데뷔작
악연惡緣
밤새껏 쏟아지던 비도 멎고 먼동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빗물에 질펀한 길이 멀리 휘어들고 길가 무성한 풀 가지 사이로 작은 벽돌움막이 한눈에 내다보이자 소를 몰고 오던 소장수 노인은 소잔등에 얹힌 소여물자루에서 짤막한 참나무 몽둥이를 뽑아들었다. 그 움막은 지하수를 뽑아 올리려고 펌프가 땅 밑에 있고 위에는 한두 사람 앉아 쉬기도 하는 문짝도 없이 비를 막는 반간짜리 움막이었는데 극심한 봄 가뭄에나 며칠간 사용할 뿐 일 년 사시절 비어있었다. 언젠가 그 움막에서 불여우가 나와서 밤새도록 사람을 홀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번은 광복되던 해인지 그 움막에 소도둑놈이 숨어 있다가 사람은 지하 양수기펌프에 꽁꽁 묶어 놓고 소를 빼앗아 갔다고 신문에도 났던 곳이다.
소장수 노인은 젊은 날 한다는 씨름꾼이었으니 비록 늙은 지금도 한두 사람을 대적할 수 있는 건장한 체구를 가졌다. 몽둥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소 목덜미 너머로 그 움막을 주시하며 막 지나려는 순간 그 움막 속에 발가벗은 남녀 두 사람이 언뜻 보였다. 앗, 도적놈! 노인은 머리끝이 주뼛 서면서 소고삐를 바싹 당기며 빨리 그곳을 지나쳤다. 그런데 노인은 분명 두 남녀이긴 한데도 새까맣게 발가벗은 알몸뚱이가 이상했다. 외국 흑인이 여기 나와서 그 지랄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되지만 저런 놈이 강도일 수도 있다며 바쁜 걸음으로 소고삐를 당기고 있었다.
소장수 노인이 소달구지 촌길에서 아스팔트로 포장한 국도에 올라서자 그제야 안심하고 한숨을 돌리며 쉬엄쉬엄 걸어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경찰 지프차가 오자 소와 함께 큰길을 가로 막아서며 경찰차를 불러 세웠다.
“경찰님 큰일났습네다. 외국 강도가 붙었습네다. 저 촌길이 보이지요, h군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그길 따라 가다보면 왼쪽으로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리로 한 2리가량 가노라면 벽돌움막이 보일 걸세, 그 속에서 흑인 연놈이 붙어서 지랄발광하고 있습니다. 좋은 놈은 아닌 것 같으니 날래 가보시오”
경찰은 강도가 붙었다니 이상하고 외국인이라 수상스러워 곧바로 그리로 달려갔다. 경찰이 그 움막 앞에 이르자 그 움막 안에는 분명 두 연놈이 있었는데 여자와 남자가 꼭 껴안고 자고 있었다. 먼저 카메라로 사진부터 찍었다.
그리고는 경찰관 한 사람이 빨리 차를 타자고 했다. 발가벗은 흑인인 것이 분명한데 온몸에 털이 부시시 돋은 것 같고 눈도 코도 입도 없이 민민한 둥근 상판이 인간이 아니고 철주조물 같은 우주 외계인인 것 같았으니, 만일을 대비해서 위험할 때는 달아나야하므로 차에 오르자한 것이다. 한 경관은 차의 시동을 걸고 핸들을 꼭 잡고 다른 경관은 유리창을 열고 확성기를 입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경찰이다 빨리 기여 나오라, 나희들을 체포 한다”
그래도 죽었는지 꼼짝을 안으니 경찰이 하늘에다 대고 꽝! 꽝! 공포 총을 쐈다. 그제야 두 연놈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경찰차가 온 것을 알고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여자는 돌아앉아 나 죽는다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빨리 옷을 입고 손들고 나왓!”
경찰이 호령을 했다. 남자가 옷이 없어 못나간다고 한다. 그제야 외계인도 흑인도 아닌 자국사람 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경찰은 하는 수 없이 여자에게는 제 바지저고리 경찰정복을 벗어 주고 남자는 팬티바람 그대로 끌고 나와 수갑을 채웠다. 숯검정 재구덩이에 빠졌다 나온 꼴이 볼썽 사나왔다.
“아니 다 늙은 영감 노친네가 이것 무슨 꼴이요, 부끄러운 줄은 아나보네. 꾸물대지 말고 빨리 차에 올라타라구.”
경찰서에서는 우선 그들을 목욕부터 시키고 옷은 구치소에서 입는 죄수복을 입혀 담당형사 앞에 내 세웠다. 아까까지 늙은 영감노친넨 줄만 알았는데 신상이 멀쩡한 너무도 젊고 잘 생긴 청춘남녀였다.
“너희들 어디 살고, 이름을 대봐.”
누구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너희들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빨리 말하라구.”
“아무 일 없었습니다.”
“일이 없었다고 왜 옷은 벗어서, 여기 빨가벗고 붙어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래도 나뿐 짓은 안했습니다, 옷은 불에 타버렸습니다.”
남자가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 인간들 혼을 나봐야 알겠나, 둘이 딱 붙어 놓고 아무런 일 없었다, 네가 고자냐, 거짓말 말고 어서 실토하라구.”
경찰들은 그들이 계속 맞서는 바람에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불탄 농막과 벽돌움막을 다시 현장조사를 해야 했고 여자는 병원에 대려가 여자의 음경검사를 해오게 하였다.
여자가 수갑을 차고 경찰에 끌려 병원에 온 것을 누군가가 S시에서 일류 재벌가의 딸임을 알아보고 전화로 통지를 했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인차 몸소 자가용을 타고 경찰서장을 찾았다. 경찰서장은 재벌가의 딸이 경찰서에 수감된 줄도 몰랐으니 안절부절 했다. 재벌가의 딸의 이름은 확인된바 없고 아직 이름을 거부하고 있는 여범이 하나 있다며 반신상 사진을 꺼내 보였다. 재벌가는 사진에서 인차 알아보고 이것이 제 딸이라며 무슨 죄든 제가 책임진다며 곧 석방해 달라면서 두툼한 돈 봉투를 경찰서장 서랍에 몰래 끼워 넣어 주었다.
경찰 서장은 내부전화로 안건심사기록을 가져오게 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는 병원 검사에서 처녀막이 온전하고 이상한 흔적이 없다는 걸 봐 성 관계는 없는 것으로 확인 됐고 더구나 도주할 염려도 없으니 인차 석방하라 지시하고 제 아버지 차에 태워 지체 말고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 범인에게는 강간미수혐의가 분명하니 혼쭐을 내 주고 더 조사해 보라는 것이었다.
며칠간 가혹한 고문에 머리는 얻어맞아 깨지고 입술은 터졌지만 자기는 아무 일 없었다며 억울하다 줄곧 호소하는 것이었다. 경찰서에서도 다른 증거가 없고 또 여자 측에서도 별 문제 없다니 다시는 그 여자를 찾아갔다는 재수감할 줄 알라며 엄포를 놓고 각서까지 쓰게 하고 석방하게 되었다. 몸을 올바르게 굴신도 못하는 그를 경찰차에 싣고 시골마을 동사무소에 내려놓았다. 동사무소 마당에서는 온 마을 남녀노소들이 모여 회의하고 있었는데 동장 앞에 범인을 인계하며 사인을 받던 경찰의 하는 말을 온 마당 사람들이 다 듣게 되었다.
“이 자는 강간미수혐의자이고 강간 미수도 고자여서 성사를 못했으므로 석방하는데 앞으로 이런 성범죄자는 잘 관리하여야합니다”
동내 사람들은 모두 놀랬다. 삽시에 웅성거리고 더러는 고자라고 킥킥 웃어대고 더러는 누구 집 아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서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식을 끌고 집으로 갔다. 집에 온 어머니는 문을 닫아걸고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게 뭣꼬, 멀쩡하게 취직하러 간다는 눔이 무슨 지랄을 하고 다녔단 말이가, 아이고 우리 집은 망했다고마, 하나님도 무심하제, 두 남녀에게 악연을 맺게 하고 내 지식 장가도 못 가게 망쳐 놨냐요. 엉엉 흑흑”
사흘째 되던 저녁에도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고 돌아누워 흐느끼고 있었다. 자식이 밥상을 들고 왔지만 통 아른 채도 않았다.
“어머니, 왜 자식의 말을 그렇게도 못 믿나요, 자식은 나뿐일 한적 없습니다. 좀 믿어 보소, 내가 정말 강간미수라면 이렇게 석방했겠습니까, 왜 자식을 못 믿습니까.”
어머니는 기가 차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녀석아 내가 니를 믿고 안 믿고 가 아니다. 니가 장가가기도 다 틀렸고마, 이렇게 망신하고 어찌 동네 낮을 들고 나간단 말이가, 이젠 니 직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먼 시골에 가서 감자나 심어 묵고 숨어 살자, 아이고 하나님요 하나님요.”
어머니는 밥 한술 안 뜨고 돌아누우면서 또 이사를 가야한다는 말을 되뇌며 계속 중얼중얼 하소연을 했다. 아들도 어머니 곁에 바싹 붙어서 뒷짐지고 반듯이 천정만 바라보고 누웠는데 청천벽력 같은 그 날 하루가 계속 떠올랐다. 그날은 아들 강호가 직업소개소의 주선으로 S시 한 기업에 취직으로 면접보이는 날이었다. 어젯밤 늦도록 어머니가 빨아서 다려놓은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검은 양복을 입고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제 아들을 늘 자랑했었는데 이렇게 차려입고 나서니 헌칠하고 환한 얼굴이 새신랑처럼 금방이라도 장가가도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제 아들이 꼭 취직하고 출세한다고 기뻐하며 손수건에 삶은 달걀 다섯 개를 배고프면 먹으라고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S시에까지는 40여리나 되는데 30리를 걸어 국도에 올라서야 버스를 탈 수 있지만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서 아예 10리 더 걸어서 갈 예정으로 새벽 일찍 떠났던 것이다.
11시가 좀 넘어서 직업소개소 2층 안쪽 구석진 컴컴한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장이 한가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여느 날 같으면 깍듯이 반기고 수다를 떨 탠데 오늘은 냉랭하게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는 데도 말도 없다. 전번 날만해도 자네같이 인물 좋고 학식이 있는 양반이 어디 흔한가, 면접한대도 겁날 것 없고 내가 나서는데 꼭 취직이 될 것이라며 그렇게 자신 있다며 야단스레 호들갑을 떨더니 오늘은 입을 다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강호가 기침을 몇 번 했어도 들은 채도 않는다. 강호는 일이 심상치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하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저의 면접 보는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제야 소장은 알아들었다며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들며 하는 말이 첫마디부터 퉁명스러웠다.
“자네같이 옹졸하고 변통이 없는 사람 어디에 있나, 다 틀렸어, 요즘 세월에 공짜가 어데 있어, 벌써 남이 차고 들어갔다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기업주상사가 하는 일인데 낸들 방법이 없고만, 나도 정심 먹으려 집에 가야겠네, 나중에 새로 힘써 보겠네만 자네같이 그래가지고는 어디가도 직업 찾기는 힘들 것일세, 이만 가보게”
소장이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강호도 어차피 일어서서 나와야 했다.
소장이 돈을 받아먹고 남한테 팔은 것이 분명하여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이 물러 나와야 했다.
직업소개소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육지 같은 먹장구름이 서편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큰 비가 올 것 같아 빨리 40리길을 서둘러야했다. 버스를 탄대도 10리 구간만 타니 그것 타려고 버스 역까지 찾아가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느니 바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걸음마다 방금 있었던 분통은 사그라지지 않고 더구나 이제 취직한다고 동네방네 기뻐 자랑하며 다니든 어머니가 이 일을 알면 크게 실망할 것이 걱정 되었다. 강호가 높은 국도에서 h군으로 가는 움푹 빠진 촌길로 내려서서 이여 앞을 가리던 제방 둑을 넘어서니 넓고 평평한 들판이고 촌길이 아득히 뻗었는데 저만치 앞에 한 여인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방금 전에 국도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지나더니 거기서 내린 손님인가본데 강호가 이런저런 생각에 경황이 없어 버스에서 사람이 내리는 것도 못 봤던 것이었다.
몸매가 날씬해 보이고 걸음마다 긴 단발머리가 물결처럼 양옆으로 출렁이었다. 여인은 이 후미진 들길에서 낮선 사람이 두려운지 뒤로 힐끔힐끔 돌아보며 뒤에 오는 남자가 빨리 오면 저도 빨리 가고 남자가 천천히 오면 저도 천천히 가며 일정한 등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강호는 급히 빨리 가야해도 그 여자가 겁을 먹을까봐 따라 붙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멀찌감치 떨어져 느리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캄캄하고 바로 머리 위에서 뇌성번개가 벼락 치듯 고막을 찢고 연방 갈지자로 뻗은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땅을 치더니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강호는 앞에 가든 여인을 앞지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앞에 농막이 있으니 빨리 뛰시오!”
여인도 이 무인지경인 들판에서 농막이 어딘지 따라 뛰는 수밖에 없었다. 강호가 빗물에 물참봉이 되어 농막에 뛰어들어서니 농막은 한기가 들도록 을씨년스러웠는데 거기서도 뇌성 벼락 치는 소리는 금방 머리위에 떨어질 것만 같았고 시퍼런 번갯불이 구불구불 구렁이처럼 농막을 꿰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농막은 긴 둑 위에 세워졌는데 둑 따라 양쪽에 문이 나있었다. 강호는 뒤따라오던 그녀가 오지 않기에 밖을 내다보았다. 연방 번갯불이 번쩍번쩍 세상을 밝히고 있지만 대지는 자욱한 물바다가 되어 어디가 아딘지 갈피를 못 잡고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강호는 그녀가 이 천지개벽하는 마당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자칫 생명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자기가 그녀를 같이 끌고 못 온 것을 후회하면서 오던 길로 그녀를 찾으려 뛰쳐나갔다.
온 몸에 태질치듯 앞뒤를 가리지 않고 후려치는 빗줄기에 눈도 못 뜨고 강한 비바람을 헤쳐 나가기란 여간한 힘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돌아서려하다가도 그녀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얼마나 갔는지 그의 앞이 그녀가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는 그녀는 실신 상태였다. 강호가 그의 온몸으로 비를 막아주며 끌어안고 흔들어서야 그녀는 깨어났는데 도저히 걸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비를 피하려 달리다 촌 모랫길에 튀어나온 자갈돌에 걸채면서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나가고 발목뼈가 뻐걱하며 넘어졌었는데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와 시퍼런 번갯불이 몸을 휘감고 하늘이 문어지고 땅이 꺼지라 귀청을 째는, 벼락 치는 소리에 그만 기절했던 것이었다.
강호가 그녀의 신발을 찾아 신기고 그녀를 업고 가려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걸어간다기에 그를 부축하여 걸어야했다. 물론 급하여 여인을 들쳐 업고 가려했지만 기운이 빠져 더 업을 힘도 없었거니와 여인이 통 업히려하지 않아 그냥 부축하여 한 발작 한 발작 옮겨 디뎌야했으니 그들이 농막에 들어 왔을 때는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었다.
그들은 말할 힘도 없고 빗물에 온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갈대로 역고 바람을 막기 위하여 그 위에 볏짚을 엮어 고기비늘처럼 총총 달아 놓은 농막 벽체에 기대여 제가끔 늘어져 누워버렸다.
강호는 누워도 옆구리가 하도 배기는 바람에 만져보니 어머니가 손수건에 싸주던 달걀뭉치이었다. 강호는 그 달걀 먹는 것도 귀찮았으니 맞은편에 누워 있는 그 가련한 여인에게 던져 주며 입이 떨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자기는 먹었으니 그것으로 요기하라는 시늉을 했다.
배가 고플 대로 고픈 여인은 먹고 힘이라도 내야겠다고 그 달걀을 급히 먹으면 목이 멘다고 야금야금 오래 씹으며 다 먹어 버렸는데 확실히 배가 부르고 새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았다. 강호는 오들오들 몸이 떨리고 이러다 얼어 죽을 것만 같아 불이라도 피워야겠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다행히 라이터가 나왔다. 라이터는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이날 아침 일직 일어나서 먼 길 떠나려 밥솥에 어머니 대신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호가 농막을 씌운 천정이엉에서 볏짚을 뽑아내어 불을 달고 여기저기서 갈대며 나무꼬챙이며 말뚝을 뽑아 태우니 불길이 제법 이글거렸다.
강호는 천정 볏짚이엉에 줄줄이 매달린 새끼오리를 이쪽저쪽 끌어당겨 모닥불 위에 빨랫줄을 매고 팬티만 입고 비에 흠뻑 젖은 바지저고리와 와이셔츠를 벗어 줄에 널었다. 추위에 못 견디겠는지 여인도 별 수 없이 팬티바람으로 가슴에 젖통만 가리는 브라자만 차고 젖은 옷을 홀랑 벗어 널어 말렸다.
모닥불을 중간에 두고 빨랫줄이 경계가 되어 남녀는 마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남자는 취직하러 갔다 오는 길이었고 여자는 출장 나갔다가 버스타고 돌아오는 길에 중도 하차하고 이 지방 어느 마을 동창생 생일에 놀러 가던 길이었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얌전하고 기가 죽어 말도 못할 줄 알았는데 매번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했고 남녀가 발가벗은 것도 수용장에서 보듯 대범하게 여기고 남자보고 발가벗은 자기를 그런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보지 말라 훈령까지 하고 또 불티가 시뻘건 나무꼬챙이를 언제나 들고 있었는데 만약 남자가 경계를 침범하고 행패를 부리면 불 막대기로 지질려는 준비태세가 엿보였다. 강호는 여자의 그 눈치를 알고 있었지만 모닥불에 비친 그 여자의 몸통이 불빛에 영롱하여 참으로 천사처럼 아름다웠고 어딘가 귀 공주 같았으니 자주 눈길이 갔었다. 순간순간 경계를 타고 넘어 그녀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솟구쳤으나 자기보다 한층 높은 절대 일반 여성이 아닌 위압을 받으며 함부로 건드렸다간 큰일 날 것이 분명하였다. 강호는 애서 점잖을 피우며 허튼 수작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재삼 속다짐도하였다.
강호는 아버지가 불행하게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느라 대학을 중퇴하고 만사가 꼬이고 불행과 불행이 이어지는 기구한 운명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천벌을 내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우연히 만난 이 여인도 악연인 것이라 TV에서나 소설에서처럼 자칫 인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개똥에 미끄러져 소똥에 코를 박는 다는데 불행한 자기 앞에 호박이 넝쿨 채로 떨어질 일이 없겠고 어쩌면 이 시간에도 구미호에 홀려 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했다.
모닥불은 그들에게 온기를 주었고 그들은 누구도 잠잘 염을 안고 있었는데 이때 여인이 바라보는 농막 저쪽 문에서 눈알에 시퍼런 불을 켜고 시꺼먼 도깨비가 뛰어들다 농막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앙! 하고 돌아나가는 바람에 발톱에 패인 흙밥이 농막 안에 쫙 뿌려졌다. 그 바람에 식겁을 먹은 여자는 벌떡 일어나 어매! 하고 이쪽 문을 향하여 달려 나갔고 남자도 영문 모르고 놀라기는 일반이었으니 여자를 뒤 쫒아나갔다.
강호는 무서워 산발사발 떨고 있는 여인을 꼭 부둥켜안았다.
“방금 눈알이 시퍼런 도깨빈지 짐승인지 들어오는 걸 봤나요?”
“그랬어요, 나는 못 봤는데 아마 들개이거나 늑대일 거요”
여인은 발가벗고 있는 자신을 잊은 채 늑대라는 말에 더 겁을 먹고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공포의 순간은 몇 초뿐이었다. 유별한 두 남녀 이성간의 부딪침은 양과 음 두 자석과 같았으니 생판 아직 이름성도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짜릿한 전류가 만부하로 타고 흘렀다. 누구도 놓을세라 꼭 부둥켜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때는 방금 전만해도 밤 어둠에 볼 수 없었는데 왠지 환한 불빛에 열망과 환희에 찬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였다. 여인은 강하고 멋진 사나이 품에서 솜사탕처럼 녹아 무너지는 것 같았으니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고 남자는 녹녹한 엿가락처럼 잘 휘어지는 여자의 허리를 살짝 꺾으며 꽃다운 얼굴에 머리를 숙이고 서슴없이 입을 맞추려들었다.
그러던 찰라 등 뒤에서 뭣이 딱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농막 문에서 시뻘건 불길이 혀 바닥처럼 내밀었고 지붕마루에서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내뿜었다. 남녀가 꼭 부여잡고 화광에 어린 꽃다운 청춘을 서로 익혀 보느라 농막 속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몰랐다.
여인과 남자가 도깨비불에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오면서 옷을 널었던 새끼줄이 걸채는 바람에 옷가지가 불에 떨어지고 새끼줄이 타 올라 농막 지붕까지 불이 달렸던 것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비는 또다시 내렸고 한대중으로 따르는 비도 화약처럼 타오르는 쌘 불길을 끄지 못하고 농막 한 체가 몽땅 타버렸다. 옷까지 다 태운 그들은 알몸만 남아서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여인은 큰일 났다고 팔짝팔짝 뛰었다. 꼼짝없이 창피하고 더러운 누명을 들쓰게 되었으니 어디고 남 안보는 곳에 가서 칵 죽어버리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당장 얼어 죽기는 싫었는지 빗물에 사그라졌지만 더운 김이 서린 재를 헤집으며 몸을 녹여야했고 나중에는 뜨끈뜨끈한 재바닥에 들어 누워 더운 재로 몸을 감싸고 덮어야했었다. 빗물은 시꺼먼 잿물을 그들 몸에 그냥 마구 퉁기고 있었다.
이제 비도 멎고 날은 훤히 밝아오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낭패스러웠는데 여자는 이런 망측한 일에 무슨 낮으로 부모를 만나냐며 울기만 하였다. 강호는 뱃가죽이 등줄기에 들어붙는 것처럼 배가 고픈지 아픈지 몸에 열기가 나고 맥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어떤 방법이 없나 싶어 간신히 일어나 보니 농막이 워낙 높은 둑이어서 멀리 바라 보였는데 주위에는 인가라고는 없고 저 둔덕 밑에 벽돌 집 지붕귀퉁이가 보여 무작정 그리로 내려갔다.
뻘거벗은 두 남녀의 알몸뚱이가 반뜻한 들 한가운대 비칠대며 넘어지며 마냥 활개 치며 가고 있었는데 여인은 남자와 같이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절로 한발 떨어져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듯 잔뜩 움츠리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발밑 풀숲에서 놀란 새가 푸드덕 요란스레 날아가면 저도 놀라 풀썩 땅에 주저앉기도 했지만 다행이 누구하나 본 사람은 없었다. 찾아들어간 곳은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펌프 기계간이었다. 염치불고하고 구세주를 만나 옷이라도 얻어 입으려 큰 희망을 갖고 갔으나 텅 빈 움막에는 걸레수건 한조각도 없었다.
다소 안온하고 바람을 막는 그곳에서 남자는 더 뻗칠 힘이 없는지 한순간 맥을 못 추고 풀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길로 꼬부라진 채 꼼작 달싹도 않는다. 한결같이 믿고 따라야 했던 남자가 그만 실신 상태에서 숨도 못 쉬고 죽어가고 있으니 여자는 일각이 급해졌다.
“아, 정신 차려요, 아 아, 왜 이래요, 왜 이래요, 눈 떠봐요, 안돼요”
남자는 눈도 뜨지 않고 탈진혼미상태에서 꼼작도 않는다.
그제야 여인은 달걀을 혼자 다 먹고 강호는 하나도 못 먹고 옹근 하루를 굶은 탓인 줄 알았다. 여인이 밖에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려 쫓아 나왔는데 펌프 기계간 옆 모퉁이에 몇 고랑 안 되는 땅콩을 심은 것을 보고 뿌리 채 뽑아 보았다. 아직 콩알은 생기지도 않았고 물렁물렁 반투명한 껍질만 달린 것을 씹어보니 젖빛 같은 뽀얀 즙이 달자지근한데 그거라도 씹어서 남자의 입에 밀어 넣어 주어야 했다.
그 땅콩생즙을 수도 없이 입에 넣어준 탓인지 남자가 기운을 차리고 눈을 반쯤 떠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남녀는 얼어드는 추위에 상대방의 체온이 서로 필요해서였든지 서로 다리를 꼬고 온몸을 껴안았다. 그러다 그들은 쏟아지는 잠에 취해 자고 말았다. 이것이 그날 발생한 범죄의 사실 전부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반복되는 설명을 곧이들으려도 않았고 먼 시골 작은집 시동생에게 소식을 전해서 오게 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형수의 간곡한 말을 듣고 이 지방에 외롭게 살수는 없다며 이사 가기로 하고 이달 그믐날 손 없는 날을 택해서 차가 밤중이 와서 남몰래 이사를 갈 약정을 하고 떠나갔었다. 강호도 불상한 어머니의 영을 듣기로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을 꽁꽁 잠그고 동네 이웃이 와서 문을 뚜들겨도 열어주지 않았었는데 누군가가 낮선 사람이 재차 와서 강호를 부르기에 누구일까 하고 내다보니 마당에 외제 자가용이 보이고 낮선 한 신사가 서 있었다. 강호네 집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그 신사는 이집 저집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었었는데 강호네가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이 동네 안 살고 떠났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집안에 인적이 있는 것 같아 재차 와서 문을 뚜들겼던 것이었다. 강호가 무슨 일로 찾느냐고 물으니 가면 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도 그 내막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찰서로 가는 거요”
“아니요, 이 차는 회사 회장의 찬데 무슨 일인지 가 봐야 알겁니다”
강호는 차라리 경찰서에라도 가서 억울하게 당한 누명을 호소 할 작정이었으니 어디엔들 못 가랴 싶어 차를 타고 따라 나섰다. 강호가 간 곳은 여태 본적도 없는 으리으리한 큰 회사의 회장실로 들어갔다. 육십 좌우 되어 보이는 회장은 풍채가 좋고 말씨도 온화하셨다.
“자네 공부는 얼마나 했나, 대졸 중퇴생이라고 했나, 학식도 있고만, 그래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에 와서 내 앞에서 일 좀 해 보겠나, 아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인데 오늘부터 일을 해보게, 내 비서가 뭣을 어떻게 할지 가르쳐 줄 것일세.”
회장은 제 딸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그 청년이 보통이 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또 딸을 구해 준 고마운 분이라 그가 직업이 없다하니 취직이라도 시켜주려 사전에 조사연구계획하고 불러온 것이었다. 그리고 강호한테도 고맙기는 하지만 그날의 악몽을 말하기가 거북하거니와 더구나 조그마한 이 일가지고 딸을 구했다는 생색내는 것으로 비칠까봐 일절 말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에게 일반 취직이나 시키려 했었는데 만나보니 사람이 너무 훌륭해서 회사 임원진에 배정하여 잘 배양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결정한 것인데 그의 딸과도 상의 한적 없었다. 이어 누군가가 와서 비서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 비서가 다름 아닌 그날 그 여자였다. 강호는 경찰서에서 쟤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는 그 악연녀여서 한발 주춤하고 어리둥절 섰는데 여자는 사뭇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날, 아차 이름이 강호 씨라 했지요, 그날 정말 나를 구해 준 은인이었어요, 참으로 고마웠어요, 나 혼자 있었으면 나는 그날 꼼짝없이 죽었을 거요, 여기 와서 우리 같이 일해요 좋아요, 좋지요, 호호”
강호는 감격적이기 보다 인생이 무슨 장난인가 싶어 한참이나 말을 못하다 저 악연녀가 자기를 죄인으로 보지 않는 한 이제 경찰도 겁날 것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가슴에 가득 찼던 응어리도 한 순간 풀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뒤늦게야 같이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던 차에 비서실에 전화벨이 따릉따릉 울렸다. 비서는 전화를 받고 잠깐 나갔다오더니 계속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방금 강호 씨가 만나본 회장이 저의 아버지여요, 아버지께서 나의 말을 듣고 너무 감동되어 며칠 전 경찰서에 강호 씨가 인명을 구한 우수한 청년으로 강간미수협의란 죄목을 벗어주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섰지요. 그리고 동사무소에도 무죄를 통보하라하였고 어머님이 우리들 사건으로 그 곳을 못 살고 이사 가려는 것도 운전기사한테 방금 들었나 봐요, 그래서 우리 집에 넓은 집도 하나 마련한다며 아예 어머님을 모시고 이리로 이사를 오래요. 아버지가 강호 씨를 퍽 마음에 들었나 봐요, 호호, 잘해 보세요, 꿈같네요, 호호”
비서는 강호에게 사무실을 하나 내 주고 필요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갑자기 젊은 미남자가 회장 앞에 취직 되고 보니 직원들은 모두 회장의 사위 감이라고들 점찍었다.
이튼 날 강호가 회사의 자가용 두 대를 끌고 이사를 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모시려 집에 갔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와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때 마을 동장이 오셨다.
“마을 여러분, 강호 씨는 강간 미수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위험에 처한 한 여인을 구한 우수한 청년으로 경찰서에서 무죄 통보가 왔었습니다. 강호 씨는 우리 마을의 자랑입니다. 그 여인의 아버지는 우리 시에 일류 재벌가로 우리 마을 새마을운동에 쓰라고 거액의 찬조금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나도 방금 알았지만 강호 씨가 그 회사의 총무대리로 발령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를 터뜨리었고 동네새마을운동단체에서 주선한 농악대가 꽹과리를 울리고 북장고치며 들이닥쳤는데 어떤 할머니는 너무 좋아 덩실덩실 따라 춤을 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호와 그의 어머니를 붙잡고 강호같이 착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며 그러기에 복을 받는다고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핏 들리는 말에 재벌가의 딸이 처녀라니 아마 강호가 사위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춘향이가 암행어사 이도령을 만난 것처럼 꿈인지 생신지 너무 기뻐서 이날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갈등구조를 재미있게 서술
《신문예》64호 신인소설 응모작 박유동의 「악연」은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소설의 구조가 짜임새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모호하고 아득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소장수 노인이 처음에 ‘새까맣게 발가벗은 알몽뚱이 남자가 하얀 여자를 겁탈하고 있다’는 신고를 함으로 해서 이야기의 호기심을 일으킨다.
작자 박유동은 어쩔 수 없이 「악연」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러니 세익스피어를 비롯해서 아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비극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다!’고 단정했다. 굳이 희극으로 끝을 맺을 작정이었다면, 그 웃기는 사연 뒤에 인간사의 페이소스를 반드시 말아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행복한 미소 뒤에 슬픔이 있어야 갈등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박유동의 「악연」은 한 편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점은 소설가에게 있어서는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소설이 코미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이 소설가의 앞날을 지켜볼 뿐이다. 성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생의 종착역에서
나는 평생 시를 써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시를 잘 읽지 않거니와 시인이 수만 명이니 시인이 별로 광택이 나지 않으므로 내가 일찍 소설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 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을 벼르다 소설을 써 보려 붓을 놀렸었는데 그 한해에 단편소설이라고 몇 편을 써내려갔다. 시인이라 매번 시를 문학잡지에 200여 편을 발표하면서도 소설 발표는 뒷전이었으니 아이러니하다.
물론 단편소설 「후회」와 「돈 나무」를 인터넷에 올리며 발표하다가 줄 곧 오늘까지 소설을 쓰지 않았다.
원인은 나라는 사람이 소설 쓰기에는 너무 부족함을 알았고 더구나 이제 다 늙어 새로 소설을 개척할 필요가 있겠냐 싶었다.
작년 말에 내가 중병에 걸리고는 나도 인생의 종착점에 온 것을 새삼 느끼고 서둘러 시집부터 출간하였으나 써 놓은 소설도 정리하려하니 도합 열 몇 편이어서 소설책 분량이 좀 부족한 것 같아 몇 편 더 보충하려 쓴 것이 금년 들어 「악연」이란 단편소설이었고 이 원고를 신문예 출판사에 원고청탁으로 보냈었는데 편집부에서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좋은 소설을 쓰면서 소설로 문단 데뷔를 꼭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소설로 문단 데뷔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이렇게 소설가로 갑자기 등단하게 되니 당장 기쁨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소설을 쓰게 되겠는지 이것이 나의 시 창작에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도 없지 않다. 다만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 보겠다는 충동과 결심만은 생기는 것 같다. 오늘 나의 소설을 높이 봐 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북 고로 출생. 시인․ 소설가. 1958년 연변<아리랑>10월호에 시「사랑」으로 데뷔.
이육사문학상 수상. 시 전집『무성한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