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처럼 외 4편
이희석
다리 하나로 오랫동안 서 있을 때가 있다
목을 에스 자의 반대로 꺾고
눈은 먼 산에 맞추고
물 찬 논에 발목을 담근 그처럼
오지 않는 버스 기다리는 듯 서 있을 때가 있다
내 것 아닌 버스들이 섰다가 떠나고
사람들의 궁금증이 다가오고 눈총이 스쳐가고 담배 연기가 도넛으로 떠다니고 은행나무는 구린내 나는 은행을 떨구었다
오전 내내 오후 내내
그러니까 하루 종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르는
그런 곳에서
그런 자세로
종일 서 있다 집에 오면
살림살이도 날 닮아 다리 하나로 서 있다
밥상이 다리 하나로
옷장도 다리 하나로
구피 세 마리가 사는 작은 어항도
다리 하나로 서서
나머지 다리는 언제 내려야 하냐고 묻듯
나를 본다
문득 두루미가 생각났다
그의 숨긴 다리가 궁금하다
사랑 3
이희석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를 밤에 본 적이 있나요?
흐릿해서
하버 브리지를 다 지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잖아요
문득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는 볼륨을 조금 낮추죠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맨살에 감기는 느낌이 따뜻했어요
팔짱 낄 때 팔꿈치에 닿던 가슴은
또 얼마나 짜릿했게요
어릴 적 명절 때 고깃국이 나오면
건더기를 맨 나중에 먹었던 기억은
나만 그런가요?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져요
꼭 잠가도 어디로 나오는지
어느 틈에 물통 한 통을 다 채우네요
아시죠?
수도국은 알아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요
하늘 공원을 같이 걷기로 했어요
운동화 끈을 너무 꼭 죄지 않는 게
오래 걷기에 좋다고 하는군요
창
이희석
카페 이 층의 벽 한가운데 동그란 창이 있습니다
창으로 보는 바깥도 동그랗습니다
창 오른쪽에서 빈 유모차가 천천히 나타나더니 빨간 파카를 입은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지나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을 따라 노란 버스가 올라와 노란 가방을 메고 노란 모자를 쓴 아이들을 삼키고 돌아 오른쪽으로 나갑니다
흰 구름이 문득 왼쪽 벽에서 흘러나옵니다
길 건너 빵집 담벼락에 그려진 빵이 노릇노릇합니다
전봇대가 양팔에 하나씩 변압기를 올려놓고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의 노란 중앙선이 병원 뒤로 들어갑니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 비켜서 창을 봅니다
창은 럭비공 모양이 되고 빵집이 없어졌습니다
세 걸음 더 가서 창을 보니
창은 고양이 눈동자같이 되고 변압기를 잃어버린 전봇대가 창틀에 겨우 붙어 있습니다
다시 세 걸음 더 가서 창을 봅니다
창은 하얀 바늘처럼 가늘어지고 창밖은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또다시 세 걸음 멀어지니 창은
사다리꼴 하얀 벽면 중간의 하나의 선이 되었습니다
마룻바닥에는 환한 동그라미 하나가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만든 입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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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석
나는 마을버스 타이어
Radial Ra08 2157016
열아홉 개의 정거장을 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나는 조종 당할 뿐이지만
바닥에 흔적으로 남는 건 벗겨진 내 살갗이어서
마을 입구 해병대 컨테이너까지는 한 줄, 센트레빌 아파트부터는 두 줄 노란 중앙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IC 사거리 일 차선에는 요즘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다
가스관 공사 중
아스팔트에서 풀려난 창백한 흙들이
그 옆을 지날 때마다 내 틈에 숨거나 달라붙는다
체육센터를 지나면 왕복 육 차선 아스팔트다
나는 크고 작은 내 동류들 사이로 끼어들어
그들이 서면서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가고
빨리 달리면 나도 따라 빨리 달린다
사람들은 차가 빨리 달리면 타이어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이른 아침 미래 빌라 앞에서 타는 짧은 머리 아가씨
오후 다섯 시 아웃렛에서 내리는 뽀글 파마 아주머니
밤 열 시 커다란 가방을 메고 행복구청으로 가는 키 큰 청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무게는 유독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나는 차축에 달려있고
그저 제자리에서 돌아가는 것뿐인데
나무와 건물과 사람들은 내가 도는 속도에 맞춰 뒤로 간다 그때
도로에 그어진 선들이 화살처럼 날아온다
유치원 앞 도로에는 지난달부터 고양이가 한 마리 누워 있다
납작해지며 아스팔트와 점점 한 몸이 되어가는 그것이
나는 무섭다
놈을 넘어갈 때마다
그것들 특유의 긴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나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나를 떠받치고 있는 길바닥에 갈려 어디론가 흩어지는 중이다
매일 열두 바퀴
나는 같은 길을 돌고 또 돈다
버스와 운전기사와 아침과 저녁과 종점과 차고지와
차고지를 품고 있는 산자락과 함께
달리는 차는 왜 타이어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보이는가?
겨울 숲을 지나며
이희석
이 소나무 숲길이 지름길이다 너무 멀리 나왔다 해는 늘 내 걸음보다 빨랐다 저녁이 깊어진다 나무가 밤보다 검고 땅보다 짙은 색이 되고 있다
내가 질러가므로 버려진 길은 언젠가 갈 수 있을까?
나무는 마지막 동작에서 문득 굳은 마네킹 같다 가지를 양옆으로 비틀고 있는 것 엉덩이를 비죽 뒤로 내밀고 있는 것 짝다리를 짚은 듯 삐딱한 것 어느 하나 똑바로 선 것이 없다 나무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그런 사이에 있었던 때가 떠올랐다 말이 꼬이고 속이 다른 것의 속으로 가지를 뻗고 자기 뒤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다고 슬쩍 몸을 비켜 보여줄 듯하던 사람이
어둑한 곳에서는 발에 실린 몸의 무게를 빼고 조심조심 내디딘다 발밑이 못 미더워 가지를 잡는다 나무의 거친 껍질은 차갑지만 툭, 껍질 하나를 선물인 듯 떼어주는 놈도 있다 무언가에 발이 걸렸다 휘청, 몸이 휜다 잡히는 나무 하나 끌어안는다 얼떨결에 볼이 닿은 나무에서 사람의 살 냄새가 난다
나는 한 그루 걸어가는 나무다
앞을 더듬는 손이 가지와 엉긴다 발이 나무 밑동을 닮아 간다
지나온 길은 움직이지 않는다
캄캄한 숲에서는 나무들의 사이 사이가 길처럼 보인다
숲을 지나면 마을이 있다는 것은 내 오래된 기억이다
밤이 더 깊기 전에 불빛을 볼 수 있으려나?
숲이 깊다
바람이 코끝을 얼린다 가지에 쌓였던 눈이 흩어진다
눈앞이 흐리다
당선소감
이희석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해주신 애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낯선 곳에서 나는 잘살아갈 수 있을지......
내 역할이 있기는 한 것인지......
떨칠 수 없는 글쓰기 때문에 이곳까지 왔으니 가는 곳도, 갈 곳도, 글이 알아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싶습니다.
부족한 저를 잘 가르쳐주신, 또 앞으로도 가르쳐주실 이경림 시인께 감사를 드리며 그동안 이런저런 격려와 지도로 시 쓰기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내 조그만 능력이 애지에 깊이와 넓이를 더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희석
충남 부여군 충화면 충신로 265-32
이메일 joyston2@hanmail.net
첫댓글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