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미국과 안보 조약 맺은 나라들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나토 회원 32國 함께 대응해요
입력 : 2024.04.03 03:30 조선일보
미국과 안보 조약 맺은 나라들
▲ 1960년 6월 18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람들이 미·일 군사동맹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모습. /마이니치신문
미국과 일본이 '미·일 안보 조약'을 대폭 강화할 거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어요. 10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하는데요, 이때 주일 미군 사령부 권한과 양국 군사훈련 강화 등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해요.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감 고조를 고려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은 일본 외에도 다양한 국가와 안보 조약을 맺어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각국 정부가 직면한 안보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국제사회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죠. 미국과 다른 나라가 맺은 안보 조약들을 살펴볼게요.
외국과 맺은 최초, 유일 군사동맹
한국과 미국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어요. 우리나라가 방위를 위해 외국과 맺은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동맹이랍니다. 이 방위 조약은 외부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해요. 또 미국이 한국 정부와 협의해 한국에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요. 사실 우리가 미국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시점은 이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수교와 무역에 대한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죠. 여기에는 '조선이 제3국에서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이 개입해 해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협약)'을 체결하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이 밀약은 1905년 일본의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 장관이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상호 지배권을 인정한 구두 합의예요.
한국은 광복 이후인 1949년 미국과 다시 수교했어요. 1950년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을 통해 양국 동맹의 중요성을 재확인했죠. 6·25 전쟁은 유엔군 참전과 중공군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되며 교착 상태에 빠졌어요. 그러다 소련의 제안으로 1951년 7월부터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것을 논의하는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휴전에 반대했죠. 휴전 후 유엔군 등이 한국에서 나가버리면, 안전이 보장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휴전 이후 북한의 재침에 대비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동맹을 미국에 요구했어요. 그 결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같은 해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지게 됐답니다.
이 조약의 목적은 양국이 군사적·정치적 협력을 통해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는 현재도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나토, 공산주의 세력 막기 위해 만들어져
7월 미국 워싱턴DC에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가 열려요. 나토는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12국이 조약을 맺어 만든 서방국가들의 군사동맹이에요. 냉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생겼죠. 나토는 "회원국 중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회원국 전체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해 집단으로 대응한다"는 집단방위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현재는 32개 나라가 나토 회원국으로 있답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의 재건을 위해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대규모 경제원조(마셜 계획)를 실시해요. 서유럽 부흥을 통해 서유럽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죠. 물론 미국 내에서 경제원조 실시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어요.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탈리아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마셜 계획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습니다. 이를 통해 약 130억달러가 투자됐고, 서유럽 국가들의 국내총생산은 15~25% 정도 증가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소련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베를린 봉쇄 사건이 그 계기가 됐죠. 소련은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독일 베를린을 봉쇄해,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의 점령지인 서베를린을 흡수하려 했어요. 미국은 당시 서베를린에 생활필수품을 공수했고, 소련은 결국 봉쇄를 해제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소련을 압박할 군사동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49년 나토를 만들어, 아이젠하워 장군을 최고사령관에 임명했어요.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후 미국의 34대 대통령이 되기도 했죠.
일본에선 군사동맹 반대 움직임 나타나기도
이번에 대폭 강화되는 '미·일 안보 조약'은 1951년에 체결됐어요. 이 조약은 일본이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군의 참전과 주둔을 허용하고 있죠. 처음에는 일본의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해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났을 때도 미군이 자율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조약에 포함돼 있었어요. 그러다 1960년에 조약이 개정되면서 '내란 및 소요에 대한 미군 출동' 조항이 삭제됐어요. 미군 출동 시 일본과 사전 협의를 해야 하는 등 불평등한 부분들이 개선됐습니다.
일본에선 미·일 군사동맹의 철폐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개정해 군사동맹을 이어가는 것에 반대한 많은 이가 대규모 시위를 벌였어요. 1960년 6월 15일 시위대가 국회에 진입하면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 과정에서 도쿄대 여학생이 숨지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도 안보 조약(ANZUS)을 맺어 1951년부터 군사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세 나라가 군사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이 조약의 목적이랍니다.
▲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회원국들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나토
▲ 한미상호방위조약문이 실린 한미상호방위조약집.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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