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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66권 기초공사(129)_만물 안에서의 영생의 삶(4) _영생의 삶을 사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구합니다(롬8-35-39,시63편)
오후에는 뭘 하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한 3주 건너뛰면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지금 영생의 삶 중에 하나님과 연합된 코이노니아 머물 사람과의 관계에서 코에노니아, 그 다음에 만물란에서의 코에노니아, 만물란에서의 영생의 삶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율법에서 복음호에 들어온 사람은 이제 생명으로 율법과 복음 안에 아직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영생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아직도 내 힘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죠.
복음 안에서 생명 안으로 들어오는 게 핵심이고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처럼 사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에서 살고 옆에 있는 사람과 어떤 과의 관계에서 살고 만물 안에서 어떤 관계 안에서 사는지를 보여주는 게 영생의 삶입니다. 그런가요? 처음 듣는 거죠. 건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영생의 삶을 사는가 세 번째 지금 네 번째 시간입니다. 네 번째 시간.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생을 산다라는 것은 어떻게 모든 상황 속에서 그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는가에 해당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흥회 때도 한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만. 반복되기도 합니다. 모든 환경, 모든 만물 공정, 권세까지도 다 이기신 그 하나님과 연합 안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이긴 게 되는 거죠. 핵심은 그겁니다. 내가 이기려고 하면 수고한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떠나지 않는다. 이거죠.
내가 이기려고 한다라는 것은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오전에도 나눴지만 그 사건을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거죠. 그 사건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보고자 하는 노력이죠. 거기에는 종교적인 활동, 그 다음에 기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수고와 슬픔이 되고 만다라는 거죠. 여기까지 접수됐죠 죄로 분리된 저주받은 자 우리가 육체의 본능이라고 하고 옛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저주받은 자 옛사람의 본성은 모든 상황을 자기 원함대로 바꿔서 지배하고 승리하려고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게 분리된 자의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라고요. 무조건 자기가 나서서 원하는 대로 바꿔서 정복해야 직성이 풀리죠. 그런가요? 그래서 어떤 문제든지 오면은 도전과 응전 그러면서 가서 부딪쳐보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서 적어도 남자는 그래야 합니다. 그렇죠? 다음에 남자는 적어도 째째하게 여자처럼 그러면 안 되죠. 이렇게 배워 왔잖아요. 우리는 그래서 남자들이 고통을 많이 당하는 겁니다. 꼭 남자를 거기다 넣어가지고 남자는 째째하게 살면 안 돼요. 그러니까 남자답지도 않은데 남자답게 사려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죠?
어쨌든 간에 그 자아라는 옛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래요. 환경이 탁 맞닥뜨리면 무조건 자기 원하는 대로 바꿔내야 이제 성취감을 얻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실패자 내는 패배한 사람 또는 낙오자 들떨어진 자 자신은 그렇게 낙인을 찍고 스스로 자기 안으로 파묻혀서 묻히죠. 그러면서 자책하고 심히 고통스러워 하다가 우울해지고, 그 다음에 코스가 자살하는 겁니다. 대부분 그렇게 가죠 그래서 어떨 때는 헤어나지 못해서 막 강박관념이나 깊은 우울감이나 페버이스 이런 것들이 삶 전체를 장악하게 돼서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죠.
옆에 있는 아무리 사람들이 뭐라고 해줘도 안 들립니다. 그게 한 인생에 마치 붙어 다니는 꼬리표 같은 거예요. 본성이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 그걸 극복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연약함이 바로 오전의 한 그 연약함입니다. 항상 승장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여도 한번 꺾어지면 무지하게 힘들어합니다. 정말 힘들어하죠.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고통 가운데 출발한 사람들은 그런 게 좀 덜합니다. 저같이 흙수저 출신이 농부의 아들들은 왠만해서는 괜찮습니다.
비싼 데 처할 줄도 알고 싼 데 처할 줄도 알고 짜장면에 처할 줄도 알고 한 끼에 몇십만 원짜리에 처할 줄도 알고 그렇게 되는데 한 끼 몇십만 원짜리에만 처하다가 짜장면에 처하기는 안 쉬워요. 그렇죠? 답이 아무도 없나? 일종의 쉬운 예를 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짜장면에 처하게 되면 그 환경을 바꾸려고 밤새 몸부림을 칩니다. 그걸 못 받아들여요. 그게 인간의 타고난 자존심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경쟁자가 여러분도 앞서면 어떤가요? 학교 다닐 때 어떻던가요? 학교 안 왔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아파서 공부를 못한다든지 이랬으면 너무 좋겠죠.
그런 적 있었어요. 본인이 아픈 거 아니에요. 혹시 그런 적 있었어요? 있죠? 남자들은 더 여자들은 똑같아요. 공부를 안 해서 몰라요. 그냥 농담 한 소리예요. 인간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고 맨 먼저 한 개의 바벨탑을 쌓고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거였어요. 거기는 무한 경쟁이거든요. 그러니까 1등만 살아남는 그런 여우 그런 완전히 그런 판에 내던져지기 때문에 인간간의 사랑이나 협력이나 이런 게 없어요. 그래서 영생 안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걸 기대하면 무리죠.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세상에 어떠한 것들을 갖다 대어서 그렇게 사려고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본능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되지 않는 거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죠. 뭔가 자기를 이 정도까지는 해주리라 그래서 실망을 하게 되고 그러죠. 나 자신에게 제일 먼저 실망합니다. 그래서 패배의식에 빠지게 되고 그게 묻게 되고 이런 거죠. 그래서 그 저주받은 자아의 사람을 가지고 그 환경을 이제 바꾸고 극복하려고 지배하고 정복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슬픔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저주의 본질이에요. 이 환경도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바뀌어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체가 수고와 슬픔을 벗어날 수 없어요.
왜냐하면은 타고난 본성이 밝고 이겨야 되고 옆에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은 내 원하는 대로 해줘야 되고 내가 환경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당연히 환경이 돌아가야 되고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게 그렇게 안 될 때 무조건 어떻게 해서 조치를 취해서 만들어내야 하고 내 삶의 시간이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원하는 대로 돌려놔야 되고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걸 취했을 때 성공했다고 하고 이런 걸 이루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있죠. 이런 걸 받고 높이 올라가게 되고 종교와 영광을 취하게 되고 이런 거기 때문에 거기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고 이런 말 들어봤어요? 또 있네. 옆에 보니까 못 사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게 자아예요.
우리의 자아는 저주받은 자아의 본질이 그렇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만족함이 없어. 만족할 수 있는 자아가 아니에요. 그게 저주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밤새 쉬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왜요? 왜 그렇게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할까요? 번지수를 똑바로 찾으라고 돌아오라고요. 너는 내 안에서만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에베소스 1장 23절에 만물을 그 발 앞에 물 위를 꿇게 하고 다스리는 그 인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위치리가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갔을 때 그게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정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내 힘으로는 안 되도록 그렇게 그것이 만들어져 있는 거죠.
그래서 그걸 수고와 슬픔이고 가시와 은근키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제 어떤 사람입니까? 에베소스 2장 6절 안에 있는 사람이죠.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안치운 자, 바로 크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자, 영생을 가지고 사는 자죠.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똑같은 생명으로 나누어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영생을 사는 자는 이 만물 안에서의 과연 이런 그런 환경이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기는가 그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영생의 삶을 사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먼저 구한다는 거죠. 너무 쉽죠?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잖아요. 그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수 있죠.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 만물을 내원하는 대로 다스리려고 하니까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몫이거든요. 만물을 하나님이 다스리지 내가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내가 다스리기를 원하죠. 그래서 인간이 고통 가운데 헤멜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구하는 게 그런 영생을 사는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에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그게 삶의 본능이라고 세 사람의 본능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결과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는 거예요. 이 부분을 오늘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 오전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지만 다른 종교들 다른 어떠한 것들을 보면은 그걸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데 신앙에 목표를 둬요. 그러죠? 그래도 여러분도 예수잘미입니다.
복 받는다라는 그 설정 안에서 그걸 따내기 위해서 모든 신앙의 노력을 거의 다 집중하죠. 그게 근본적으로 오류와 거기에 있다라는 거죠. 우리가 따내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건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거거든요. 그걸 마카리어스 아세르 복이라고 그럽니다. 그 통관에 들어가 있어야 그게 흐르는 건데 우리는 스위롬으로 신앙생활, 종교활동을 하면서 그걸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주 아래서 허덕이게 되는 거예요. 수가 슬픔을 못 붙는 거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기독교는 그거와는 달라야죠. 진짜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만물에 속한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물을 가서 때려잡아 이기는 게 아니고 초월이에요. 초월. 초월. 기독교 신흥의 핵심은 초월해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비해탈 비우고 이런 거 있잖아요. 불교에서 말하는. 그렇죠? 해탈이라고 그래요. 그걸 아닙니다. 해탈은 108번뇌를 끊고 그걸 벗어나서 이런 거예요. 해탈이라고 그래요. 제가 하는 의도와는 좀 달라요. 이초라고는 달라요. 해탈에서 나름대로 날아가는 거 아니에요. 이 초월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이에요.
이 초월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만물에 속한 상황을 초월하는 거예요.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거예요. 우리가. 일반 사람들, 율법 아래에 있는 복을 구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만물 안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만물 안의 신앙이 목표는 만물에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의 목표는 어디 만물 소유 정보에 있죠? 그런가요? 그러면 만물 아내 신앙이지 만물을 초월한 신앙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만물 안에도 있지만 만물을 초월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자죠. 그렇죠? 초월신앙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그래서 이 초월신앙을 가진 자는 만물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정복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 다스리고 정복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그 모든 걸 유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만물을 수용합니다. 이게 바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초월해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이게 신학에 나오는 내용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만물에 갇힌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의 존재는 만물 안의 존재가 아니죠. 어디예요? 하늘나 하늘. 하늘. 하늘에 안치운 자입니다. 하늘에 안치운 자가 만물에 종속될 수가 없죠. 만물안에. 갇힐 수가 없죠. 만물을 위해서 살 수가 없죠.
초월에 있는 존재가 그렇거든요. 그게 바로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이 만물 안에 있는 신앙 이게 뭔가 옛사람이에요. 옛사람. 이게 자아죠. 옛날에나. 이 나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구하려고 살아왔던 거죠. 이게 바로 고통의 본질인데 이게 바로 썩어져가는 만물이 썩어져가는 결국은 썩어져가는 구석을 쫓는 이 사람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그 썩어져가는 구석을 쫓는 것을 죽은 행식 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망령된 현실 몸의 행실, 그다음에 육체에 속한 것 여러 가지 그렇게 표현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 여러분은 다 알고 계시죠?
그래서 이 만물에 속한 자하고 초월한 자의 삶은 전혀 다르다라는 걸 먼저 아셔야 돼요. 우리는 초월해서 존재하는 초월신앙이고 만물을 초월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아셔야 되고 만물 안에 있지만 그 만물 안에서 어떻게 영생을 사는가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잘 보시면 금방 압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서 오셨죠? 부흥의 때도 했지만, 똑같은 조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똑같은 성장을 가지고 있어요.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체류할 수 있는 걸 다 체류했어요. 두려움부터 시작해서 배고픔부터 십자가에 달릴 때 고통스럽고 두려웠어요. 여러분.
어릴 때는 주무셨고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모든 것을 똑같이 느끼신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야 되었던 거예요. 그렇죠? 그래야 우리에게 본이 될 수가 있잖아요. 신의 모습으로 오면 본받을 수가 없잖아요. 나를 따르라 할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따라가요? 인간의 신을. 그래서 그건 안 되죠.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미 주어져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시면 지상에서 영생의 삶을 완벽하게 사신 그러니까 만물 안에 영생을 이 땅에서 태어나셨지만 또한 만물 안에 속해 있지만 그리고 만물의 어떤 영향 아래 살 수밖에 없었죠. 배도 고파야 되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수도 있었고, 비가 오면 고기만 이렇게 놔두고 비가 오고 그러진 않잖아요.
예수님도 비를 맞았을 거예요. 그렇죠? 아닌가요 맞아요. 봤어요. 예 믿습니다. 지상에서 영생의 삶을 어떻게 완전하게 사셨는가 거기서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의 삶의 핵심 목표가 거기 안에 삶의 방식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걸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도 소외된 적이 없어요. 그게 핵심이에요.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육체를 잊고 있지만 옛 사람은 죽었고 제 몸도 죽었고 이제 몸만 남아있죠. 순수한 자연인의 몸. 그렇죠? 그 몸에 지금 성령이 와 계시잖아요. 예수님도 성령으로 나서 성령이 마리아로 난 그 몸을 입고 있었죠. 우리와 조건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저기에 오순절날처럼 그렇죠? 오순절날 그 제자들 보세요. 있으니까 다를 바 없었잖아요. 그렇죠? 제자들 다 십자가에 이렇게 못 박힌 것도 우리가 보면 다를 바 없었고요. 베드로도 박히기 싫어했고요. 그래서 도망가다가 또 도망갈래. 그러니까 코바디스 그래서 아닙니다. 이제 거꾸로 가서 박히겠습니다. 거꾸로 바뀌었죠. 베드로. 그랬어요. 우리도 이제 똑같아요. 조건이 똑같다고요. 성경 어디를 봐도 똑같죠. 하늘의 안치원 자고 예수님도 하늘에서 이 땅에 왔고 이 땅에 와서 성경으로 충만해졌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으로 충만했죠.
콜레세스 2장 9절 10절 똑같죠?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가 있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충만해졌어. 핑계될 게 없죠. 핑계될 게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명령했기 때문에 아면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어요. 언제든지 원한다고 여러분이 진짜 원하는지 그것부터 점검을 해보시면 되겠죠.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도 소외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소외되지 않고 연합의 삶을 사셨다라는 거예요. 우리 이걸 너무 잘 알죠? 그러죠? 요한보험에서 나왔던 그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내용. 우리와 똑같은 모습, 감정, 성정을 가지고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적을 가졌다.
그렇게 나오지만 우리와 똑같은 제한, 제한. 그다음에 불안함, 두려움 한계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 모든 환경에서 이 스님은 택한 게 하나님과 연합이었어요. 그를 오해하고 죽이려고 득달같이 많은 사람이 달라들었죠. 가족들조차도 욕하고 비난하고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많고 절대적인 외로움도 우리와 비슷하게 겪었고요.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은 모든 유한성 가운데 우리는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이런 것들이 두려워하고 이런 게 항상 우리와 같은 것들을 느꼈어요. 나와야 성경이 다 그렇잖아요.
우리와 똑같이 채혈했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불안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이었죠. 하나님으로부터 나았으니까 우리도 어디서 나와요? 코리노전서 1장 30철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애수 안에 있고 우리는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요. 핑계댈 게 없다니까요.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이 환경에 노출됐어요. 노출됐기 때문에. 그런데 다른 점은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벗어나지 않았어요. 항상 그 안에 그가 하나님 안에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유한성의 불안 속에서 존재 자체의 본질, 궁극적인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그런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모든 외부적인 것들을 여러분 자신의 힘을 통하여 이걸 확 제압하지 않았어요. 아시겠어요? 그걸 제압할 힘이 있었잖아요. 능히 그런가요? 40일 금식하고 돈이 뜨게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안 하죠. 이런 것들은 우리가 잘 생각을 안 합니다. 그냥 예수님이니까. 그러겠지. 이렇게 하지만 우리도 그거 할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려고 하는 모든 도전들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환경하고 똑같습니다. 위협도 되고 두려움, 염려, 근심 이런 것들이 막 몰려오면 우리는 금방 분리되죠. 난리잖아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쩔 줄 몰라서 그냥 쑥 들어가 버리고 울고불고 난리 난리 난리 그렇게 하잖아요.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한 것 같아요. 그렇죠? 그게 바로 실존적으로 분리를 위해 오는 도전들이 많잖아요. 그것도 전부 제 악한 세력이거든요. 악한 세력을 어떤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계속 하느니까 분리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은 에덴에서 한 방에 분리돼버렸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다시 연합됐거든요. 그런데 죄악의 세력이 뭘 하겠어요?
계속 죄를 짓게 해서 분리시키려고 온갖 작전을 다 구사하는 거죠. 계략을 두려움을 준다든지 너 그러다가 굶어 죽어 너 그러다가 일도 안 하고 어떡하려고 그래? 맨날 교회만 다녀 이렇게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남편을 확 부추겨 가지고 차비도 안 주게 만들기도 하고 이렇게 그렇죠. 아버지를 열받게 해가지고 교회 다니는 게 그따위야 이러면 교회야. 그래 안 갈 거야. 뭐 이렇게 한다든지 이게 인제 그런 작전이거든요. 그런 작전이 많이 오죠 안 그래요. 집에서 한마디만 하면 금방 분리될 걸요 금토 이렇게 하는 게 그 꼬라지야 그래 골물 하나도 못 타주고 말이야. 인간이 그러면 어때요? 야 이 화상화 니나 타먹어라 당장 그러고 분리돼버리잖아요.
아니래. 여러분은 어때요? 당장 당장 갈랐어. 이 자식아 돈만 있으면. 그렇죠? 100억 있으면 된다고 그랬던가? 10억 있으면 된다. 10억. 아 좀 크게 품어요. 100억이나 하세요. 어차피 안 될 거. 10억이면 어떻고 100억이면 어때요? 어떻게 하나님이 순식간에 100억을 줘버릴지 몰라요. 그건 안 그래요. 그 꿈이라도 원대하게 가져야지 꿈은 이루어진다. 랠리아 이런 실존적인 불리의 위협이 언제든지 있는 거예요. 그게 에덴 능산의 죄의 유혹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귀가 성령님인 우리와 함께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리를 시키지 못해요.
못하는데 육체를 계속 지배해서 장악해서 육체의 소욕들을 살게 하는 육체의 소욕이 아까 연약함들이 포함됐어요. 이런 것들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만이 거하면서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계속 그게 이제 존재의 분리 작업 중에 하나인 거죠. 제 카테고리가 여러 가지 있잖아요. 우리는 뭘 나쁜 짓 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내 원하는 대로 막 고집을 피우고 하려는 것도 그게 제 카테고리 넘버원이에요. 그게 것들은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 버리거든요. 이런 것들이 분리수단이죠. 그래서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는 그것들을 분리하려고 계속 그랬는데 예수님은 꿈쩍도 안 했어요. 40일 금식 후에도. 유혹이 순차적으로 탁탁 와도 까불지 마. 까불지 마. 그렇죠?
그런 게 이제 넉넉히 그 환경 자체를 하나님 안에서 다 받아들여 버린 거예요. 그러죠? 이해 가시나요? 그게 초월이에요. 초월. 그게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는 거죠. 제가 지금 뭔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시죠? 하나님 하늘에서 온 사람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하고 다르다 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 라는 걸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라고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한 거예요. 그렇죠? 그런 똑같은 위협을 당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육적인 자아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해가시죠? 그게 하늘에 속한 사라, 하늘에 속한 자의 어떤 삶의 방식이라는 걸 지금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연합 속에서 자신의 당면한 상황이나 환경을 제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그거죠. 여기까지 접수됐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연합 안에서 주는 능력으로 그걸 초월한 겁니다. 그게 초월의 능력이에요. 내 힘으로 절대로 안 되는 거죠. 히브리 11장의 증인들이 보여준 능력이죠. 감당치 세상이 감당치 세상은 만물이잖아요.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을 감당 크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다 우습게 여기게 되는 능력 안으로 들어간 거죠. 예수님도 그랬다라는 거죠. 사도발도 삼층천에 갔다 오고 나니까 그랬다라는 거죠.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다 그랬다라는 거죠. 우리도 충만하죠. 거기서 왜 하면은 알아? 그래야지 뭐가 되지? 지금 성경에는 우리도 충만하다고 그랬잖아요. 골로세스에 보면은 그리고 충만하지만 충만하라고 또 기도하고, 그렇죠? 그건 이제 관계를 다 아시죠? 뭔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이 있었다면 딱 한 번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때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과 분리되잖아요. 제가 부흥회 때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게 가장 크고 유일한 고통이었어요. 분리되면 이제 감당을 못하거든요. 그렇죠?
거기서 예수님이 울부짖은 거예요. 게세만의 동산에서. 그리고는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 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기도한 게 뭔가 하면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그래서 그 몸이 분리되면서 그 영혼을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구한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기대였어요. 이해가시나요? 그러니까 이걸 잘 보세요. 분리라는 것이 하나님과 분리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하려니까 분리되어서 나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게 감이 도대체 안 오는 거예요. 그냥 막 살아왔기 때문에 막 살아온 인생이잖아요.
막살이 막 살아있기 때문에 분리가 어떤 건지 몰라.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할 거예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심어줘서 삼일제한한인가 연합되어 살고 있을 때 주는 기쁨과 능력 이런 것들을 막 누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옆에서 아까 분리를 조장하는 악한 것들이 세력 역사에서 염려 근심으로 확 공격해서 확 아까처럼 콕 떨어졌어. 그거를 이게 이제 온몸으로 오는 거예요. 그게 어떡하지? 똑같은 상황에서 옛날에는 꿈쩍도 안 했는데 이제 이게 어떡해. 어떡하지? 큰일 났네. 이런 게 바로 분리의 증상이에요.
그런 거 알 수 있죠. 이제는 내가 지금 하나님과 물론 안에 있긴 하지만 많이 멀어져 있으면 육에 속한 본능이 확 오기 때문에 조금만 자극이 와도 염려근심이 안 떠나고 이런 것들이 쫙 장악하거든요. 그런 걸 당하죠. 그렇죠. 가끔 자주 매일 그 매일 분리 안에서 사는 거예요. 우리는 영생의 삶 하나님과 연합되어서 만물안에 거하는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렇게 자연스러울지는 몰라도 이 분리에는 엄청난 고통이 있다라는 거예요. 여기에 사람이 가지는 이 모든 고통을 다시 우리가 겪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걸 아셨기 때문에 분리되어서 음부로 들어갔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게. 왜냐하면, 음부로 내려가면서 음부를 정복하게 하고 다시 부활시켜 공중의 세력을 제압하고 하나님과 연합 안으로 다시 들어갔죠. 그게 최후의 분리였는데 그 분리를 통해서 완전한 연합 안으로 하늘에 속한 존재로 올라가 버렸었잖아요. 이 땅에 그 한계를 벗고 그리고 그 영채가 내려왔을 때는 당의 한계를 다 벽을 통과하고 시간을 거스르고 빌립처럼 공간을 이동하고 이런 거. 이거는 만물 안에서 만물의 제약을 받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죠. 그런 존재로 이제 가버린 거예요.
우리도 이제 이 땅을 벗고 올라가면 그런 존재가 될 거예요. 여기 막 통과할 거예요. 그래봐야 아무도 모르니까 나중에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전부 다 천국에 갔는데 한 방에서 다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온유 집사님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지? 까먹은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안 까먹고 성경구도 다 까먹고 말이야. 무소부재 무소부재 왜 우리들이 신적인 능력 안으로 들어가 있잖아요. 무소부재하기 때문에 동시에 있는 거예요. 지금 그건 시간이 없잖아요. 지금 원유 집사님하고 목사님하고 동시에 내가 독대할 수 있는 거죠. 멋지죠.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 태평양 건너 인도양을 건너가 콩고가 나오는구나. 대서양을 건너 콩고에 있는 박집 사람 대한민국에 있는 박집사 안에 둘 다 동시에 있잖아요. 예수님이 맞나요? 그러면 좀 쉬워지나요? 그런 거죠. 그러면 인도양 건너에 있는 집사의 마음을 알리면 어떡하면 되겠어요? 예수님한테 물어보면 되지. 간단한 걸 가지고 그게 오전에 한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모든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연합 안에 있으므로 그걸 다 수용했어요. 가서 밟아버린 게 아니라니까요. 그렇죠? 돌을 떡을 확 만들어버린 게 아니라니까요. 말씀 안 해서 그걸 다 초월하고 이겨냈잖아요.
승리했잖아요.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가장 유일한 고통이었다면 연합된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 고통이 가장 컸던 거라는 걸 우리도 알 수 있고 우리도 지금 영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 게 실제로 맞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있는 게 잃어버리는 게 제일 고통스럽죠. 만물 중에 일부를 잃어버리는 게 제일 고통스럽죠. 있는 돈이 가치가 자꾸 깎여 내려가는 게 제일 고통스럽죠. 인플레가 심해져 가지고 그렇죠? 땅값이 내가 100억대 부자였는데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까 반토막이 나버렸네. 그래도 괜찮아요.
50억도 어디야? 100억 가진 사람에게는 그게 뼈 깎는 것보다 아프다니까요. 안 가져봐서 모르겠죠. 저는 꿈속에서도 한번 가져봤는데 그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분리되는 순간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절규하면서 기도했던 거예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증명되는 그 순간이었어요. 그게 분리될 때 제일 고통스러운 거죠. 우리도 그것이 제일 고통스럽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점점 알게 되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죠. 새로운 존재죠.
고린도서우장 17절 이전에 만물안에서 만물을 바라던 신앙 하던 그 사람은 죽었죠. 죽고 이제 만물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연합한 세 사람이 됐죠. 그런데 땅에 있죠. 만물의 영향을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순임수는 똑같이 땅에 있죠.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제 그 분리의 위협이 있는 거예요. 물론 죽음이 가장 큰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죠? 그걸 우리는 신학적으로 실존적인 분리라고 그래요. 실존적인 분리. 그러니까 실존 본질 하나님이 실존이고 아니고 존재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잖아요.
존재 그 자체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를 본질적인 존재라고 그래요. 본질 안에 있으니까 본질적인 존재라고 그러고 그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뭔가 하면은 분리된 존재라고 그래요. 분리된 존재. 그거를 실존이라고 그래요. 신학용으로 어렵죠. 굳이 몰라도 상관없어요. 분리되어 있는가 연합되어 있는가.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왜 이걸 실존이라고 하는가? 하면은 실제로 지금 어떻게 내가 존재하고 있는가 그걸 말하는 거예요. 본질하고는 다르죠. 본질은 하나님 자체가 본질, 하나님이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는 존재의 본질이 되는 거예요. 맞나요? 너무 어리석은 말인가 존재 본질적인 존재, 존재의 본질, 본질적인 존재. 하나님과 분리되면 이제 분리된 존재인데 그걸 실제로 이 땅에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고 해서 실존이라고 그래요.
신학력으로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죠. 바로 그 악의 세력. 그걸 우리는 비존재의 세력이라고 그래요.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잖아. 안 보이잖아. 그래서 비존재의 세력이라고 말해요. 신학적인 용어예요. 나중에 다 까먹어도 상관없어요. 분리만 안 되면 되니까. 영적인 세력이죠. 악의 세력 바로 제 권세자만 악한 세력들. 로마스 6장 12절에 나오는 내용. 그렇죠? 최악의 세력이 우리 육체를 확 치면서 제 종 노릇 하는데 그게 원하는 대로 살게 하는 그게 이제 분리예요. 분리.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거잖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 때 우리는 가장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걸 분리시키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그 마귀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위협도 하고 겁도 주고 염려도 하게 하고 옆사람을 통해서 찌르게도 하고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고 별의별 걸 다 다 사용하죠. 그게 바로 분리의 위협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분리의 위협을 전부 하나님 안에서 넉넉하게 다 수용 초월함으로 수용하고 이길 수 있었는데, 우리는 우리도 제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데 아직도 옛날의 습관이 남아있잖아요. 만물 안에 의해서 만물을 바라는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관성처럼 그쪽으로 끌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속는 거예요. 그게 분리를 고착하기 위해서 계속 끌고 간다라고 제가 그랬죠. 그런 거예요. 그런 위협이 언제나 지금 존재하고 있죠.
그래서 막 잘 나가다가 동굴 속으로 커트박혀버리고 깜깜해 언제 나올지 몰라 이런 예를 들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가끔 그랬죠? 그래서 분리의 세력의 무기들은 좀 전에 말씀드린 브란트루염, 염전심부터 해서 분노의 혈기, 고통, 여러 가지를 동원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공허라는 무기가 있어요. 뭘 해도 의미가 없다. 이런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정제의식을 가지기도 하고 죄책감을 가지기도 하고 내 운명이 도대체 뭐야? 이러면서 막 이상한 데로 빠져나오고 이런 것들이 그런 기단에 빠지죠. 이런 것들을 가지고 계속 공격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잘 보셔야 돼요.
내 재세력이 나를 어떻게 지배하려고 하는가? 잘 보셔야 된다고 우리가 연합되어 있어서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가요? 머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건 그런 의미라고 그랬죠. 그걸 뺏으려고 마귀가 옛날 생각하면서 계속 뺏으려고 내 앞에서 와서 문 앞에 엎드려 있다고 그랬죠. 그게 이제 나를 그 안에서 분리시키려고 하는 죄악의 세력이에요. 그래서 영생이 없어서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은 이런 환경에서 어떤 방법을 취하는가? 하면 그 환경이 올 때 맞닥뜨려서 저항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육체에 속한 거예요.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이죠. 배워왔고 길들여주고 양육해주는 이 사람의 본능이죠.
그래서 문제를 보면 무조건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T고 F고 그거 아니에요. 무조건 가서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T 말고는 해결 안 합니까? 될 대로 돼라 합니까? 아니잖아요. 똑같아요. 그건. 그러니까 그거 그런 게 아니고 본능은 마기적인 본능이에요. 그게 육에 속한 본능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문제를 맞닥뜨려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 문제 일단 저항하고 그러니까 그 문제 본질은 비존재의 세력이 여기 있죠. 악한 세력이 계속 사역하잖아요. 사역. 그것도 사역한다니까요. 허용된 범위 안에서 그래서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그 정복을 당하려고 합니까? 저항하면서 우리가 정복하려고 그러죠. 반대로 정복하려고 하죠. 아니 쉽죠. 그 비존재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별짓을 다 하죠. 잘 들으세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6에 속한 그런 어떤 속성이 강한 사람들은 이런 환경이 딱 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환경이 딱 맞닥뜨리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똑같이 옛날의 속한 뒤로 저항하면서 그거를 대적해서 이기려고 대적기도를 해요. 아세요? 그렇게 간다니까요. 예수님은 개새끼려고 합니까? 초월해버려야죠. 그러니까 만물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된 삶이 점점 멀어져 부재하게 되면 유괴 본능이 나와서 그걸 대적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종교적인 활동을 강화합니다. 대적 기도를 하려고 하고 이상한 돌파 기도 이런 걸 배워서 그 환경을 돌파하려고 그래요.
초월하는 게 아니고 수용하는 게 아니고 돌파하고 대적하고 밟아버리고 이런 걸 그러고 와서 큰 책을 가지고 선포하고 난리를 치죠. 그렇다고 선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전제조건이 영생이 부재해서 하나님과 분리된 자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런 속성이 강할 때는 그렇게 한다라는 거죠. 이해가시죠? 그런데 이건 이런 종교성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대습기도를 한다든지 돌파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그런 걸 가지고 그 문제를 확 해결하려고 달려들죠. 대부분 그러지 않았어요. 여러분 그건 어떤 결과를 가져온가 하면 아까 이 비존재의 악한 세력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마성적인 종교성이라고 그래요. 신학적으로 막의적인 종교성이라고 종교성.
하나님만이 연합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아니고 악의적인 종교활동이라고 그게 안 되거든요. 그걸 대적해서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유괴석한 본능은 그게 안 된다고요. 그래서 마성적인 종교성을 강화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결과가 점점 그래서 돌파 돌파 대적하기도 하고 그러면 꼭 된 것 같지 않아요. 뭐가 된 거? 돌파된 것 같기도 하고 이긴 것 같기도 하는 그런 왠지 사우나 들어갔다 나오면 시원한 것처럼 시원한 건가요? 사우나에서 뜨거운 기운이 식어서 그런 거지. 그건 시원한 게 아니거든요. 밖에 나오면 원래 똑같은 온도잖아. 그거예요.
그러니까 사우나 안에 있는 거하고 똑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죠. 여기까지 접수가 되셨나요? 접수가 돼야 하는데 그러니까 종교성을 강화해서 그다음에 단계로 자기 암시로 들어가요. 자기 암시로 들어가서 상황을 통제하고 이기고 극복한 것처럼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암시를 줍니다. 그렇게 속아 넘어가요. 그래서 그런 종교활동을 많이 하고 나면 왠지 된 것 같잖아요. 된 것 같은데, 그대로죠. 그런 걸 많이 해봤죠. 대접기도 막 이런 거 돌파기도 막 이런 입담하는 거 두꺼운 거 갖다 놓고 상황별 돌파기도 막 지금도 그런 거 가르칠 때 많아요. 전제조건이 뭐라고요?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는 영생의 부재한 상태에서 하는 종교활동 그런 거예요. 그 환경을 저항하고 대적해서 상황을 제압하려고 하는 그런 본능이 발동해요. 그런데 반면에 영생 안에서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비존재 위협이 오죠. 분리위협이 오면은 예수님과 연합을 구합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그게 엔크리스토예요. 이제 이해 가시나요? 엔크리스토를 구해요. 왜? 그 안에 예수님이 만물을 다 정복하고 일이었잖아요. 예수님도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택하신 거예요. 계속 그래서 마지막에 그 분리를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거예요.
거기선 답이 없었기 때문에 분리의 고통이었죠. 여러분. 영승이 부재한 종교활동이 그래서 속임수가 되고 말아버린 거예요.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시간을 그런 활동을 했었고 그게 아무런 소용 없었던 걸 지금은 알죠. 이제 영생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적 기도한다든지 돌파 기도를 하지 않아요. 종교성을 강화하지 않아요. 많은 성경을 읽는다든지 모여서 기도만 몰아친다든지 이런 거 아니에요. 그걸 마치 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아셔야 돼요. 그래서 영생 안에 있는 영생을 사는 사람들은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연합을 구합니다. 수 그리스도 안에 그 연합을 구합니다.
이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만물이 다 그 필요한 것이 다 있게 된다. 그게 안으로 들어가는 걸 구해요. 그래서 어떤 환경에 문제가 딱 맞닥뜨리면 그걸 돌파하려고 대적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바꿔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연합을 하므로 그것을 초월해서 이기는 거예요. 왜?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의 안에 가라고. 앵크리스토. 앵크리스토 계속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게 바로 그거예요. 이해가시나요?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죽음의 잔을 받았지만 결국은 연합 안으로 들어갔죠.
그래서 그 게세만의 기도에서 그거를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해 가시죠? 그것보다는 연합 안으로 들어가기를 구했던 거예요.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그래서 이 수를 죽이려고 획책을 하고 분리를 계획했던 것들이 이긴 줄 알았겠죠. 그렇지만 거기서 보기 좋게 패배했죠. 우리는 승리한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이 만물 안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에요. 예수님처럼 해결하는 방식.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죠. 자기 힘으로.
그리고 그거를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이 천사를 동원해서 단번에 베버릴 수 있다고도 하셨죠. 그렇지만 그렇게 안 했다라는 거예요. 이해 가십니까? 그게 얼마나 엄청난 비밀인지 아시겠어요? 자기 힘을 극대화해서 제압한 게 아니에요. 대적하거나 정복하지 않았다니까요. 안 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택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이것을 다 넉넉히 수용하고 초월하고 이길 수가 있었던거죠. 어느 오직 하나님과 연합을 구함으로써 능력히 승리한 거예요. 그게 바로 비밀이에요.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비밀이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주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이 모든 환경에서 나를 부탁하나이다. 그걸 이기려고 해보세요. 여러분. 그 하나님 안에 있는 게 우리가 돌파가 됩니까? 안 됩니다. 연합함으로 우리는 이기는 거예요. 그거를 이제 넉넉히 이기는 것을 사도 바울은 바로 로마스 8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로마스 8장에 보면 로마스 8장 35절로 가보죠.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사랑 안에 거한다고 그랬죠. 이게 앵크리스도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그와 연합하게 하는 사랑이죠. 십작을 통해서 연합해서 영원히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그 영원한 사랑이잖아요.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환란이나 공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런 것들이 비존재의 위협이죠. 맞나요? 기록된 바울이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어김을 받았나이다. 한 것 같으니라 이런 환경에까지 간다 라는 거죠. 가더라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루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고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기 때문에 그 사랑하시는 이의 안으로 연합하여 들어가 예수님도 그걸 택한 거예요. 우리도 그걸 택해야 되는 걸 말씀하고 있죠. 이해가십니까? 그래서 상황적으로 볼 때 우리도 환란과 공고나 핍박이나 질고나 슬픔이나 로마사 오전에 했던 것처럼 고통과 괴로움 이런 환경들이 우리에게 몰아쳐 옵니다.
그건 피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지 몸이 예수님도 동일한 걸 당하셨잖아요. 그런데 환경이 올 때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죠. 그런가요? 그걸 말씀을 드리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그런 위협이 올지라도 그걸 대적한다든지 돌파단지 이런 종교성을 강화하는 게 악의적인 게 되는 거예요. 자기 암시가 되어서 결국은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되고 말아요. 여기에 나열되어 있는 게 바로 비존재 세력의 위협이라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몰아쳐 온다 라는 거예요. 이해 가시죠? 언제든지 오잖아요. 우리에게 그러죠. 아주 작은 것부터 수없이 옵니다. 수없이. 그렇죠? 우리 살아있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그거는 마귀가 가만히 두겠어요. 원래 자기 밥이었는데. 수없이 오죠.
그래서 도살당할 양같이 그렇게 역임을 받았던 현실로 나타나는 거예요. 비존재의 세력이 목적하는 바. 그건 단 한 가지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해석을 이렇게 한 거예요. 우리를. 그런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걸 분리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이해 가시죠? 우리 안에 있어서 언약하시기 때문에 소유로 인을 쳤기 때문에 안 돼요.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질지는 몰라도 분리된 건 아니에요. 그건 아셔야 돼요. 그런데 지금 그 환경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그 문제를 지금 말씀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거기에 보면 38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 기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이게 여기 만물 안에 그다음에 하늘에 있는 권세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전부 다를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걸 다 정복했죠. 그 발 아래, 그 이름 아래. 그렇죠? 그래서 이 어떤 것도 어떤 것도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이미 못 박아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MBS 1장의 인치고 보증하신 성령이에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심어놨기 때문에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같은 세력이 우리에게 몰려와 계속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여기 나오면 열거 있는 열거되었냐 이런 것들이 일어날 거예요.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 하는 거죠.
우리는 6에 속한 본능은 그걸 맞닥뜨려서 무조건 저항하고 이겨내고 정복하고 내 원안대로 바꾸려고 한다는 거죠. 그게 저주받은 자아가 하는 짓이에요. 그게 그렇게 하면 반드시 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분리되는 행동이잖아요. 하나님과 분리되는데 이걸 어떻게 정복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6이 0을 지배합니까? 안 돼요. 그래서 실패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육적인 활동을 강화하는 그런 대적 기도나 비존재 세력을 통해서 그거를 온몸으로 가서 덮쳐서 이기게 하라는 그런 생각들이나 그런 사상들이나 이런 것들은 속임수죠. 그래서 이해가시죠? 그래서 대습기구도가 잘못하면 자기 최면에 걸리는 거예요. 마치된 것처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위험한 거예요.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르죠. 이건 차원이 다르죠. 데스키도가 맞나요?
우리가 하여튼 위치 선점하고 말씀 안 해서 너는 아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과 대적은 전혀 차원이 다르죠.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정복당한 것을 정복하는 자리에 가는 거죠. 아래에 있는 사람이 올라가면서 정복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방향이 다른 거예요. 여러분 전혀 다른 걸 아시겠죠? 부흥이 안 가고는 그래서 우리는 그걸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계셔야 돼요. 그래서 이 같은 세력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려면 그들과 맞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 라는 내 존재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확신 믿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그게 우리가 부흥했던 그거예요. 내 위치를 선점해야 돼요. 나는 누구인가? 그것부터 알아오요.
그럼 거기에서부터 연합 안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과 권세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과 위에서 내려오면서 환경을 지배당 이미 지배된 것을 지배 안에 두려고 하는 것과는 육적으로 안에서 만물 안에 있는 내가 올라가면서 지배하려고 하는 전혀 다르죠. 그거는 마기적인 거예요. 그래서 실패하는 겁니다. 이해 가시죠? 이 차이를 몰랐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가서 대석기도 하라고 돌파기도 하라고 그러고 선풍기도 무조건 하라고 밖에서 영생 안에 들어가 있지 코이노니아가 되어 있지 않고 만물과 하나님과 모든 만유와 코인원이 밖에서 그걸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됐던 거예요. 그래서 실패한 거예요. 여러분도 오랫동안 해봤잖아요. 하다가 다 지쳤죠? 안 됐던 거예요. 그 이유를 이제 정확하게 아시겠죠?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과 맞서 대적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라는 인식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만물을 수용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다 그 발 아래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수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넉넉한 승리가 되는 거죠.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상황에서 그 비촌재의 분리에 위협하여서 굴복하지 낯서지 않았어요. 대적하지도 않았고 그냥 연합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를 구한 거예요.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그게 그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함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밀려오는 염려나 근심,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넉넉히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왜? 다 만물이 그발알이에요.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우리의 삶이에요. 우리의 삶 10편 63편 기억하세요? 한번 볼까요? 마무리를 하도록 하죠. 다윗 씨 아들이 반란할 때 지은 시 기억하죠? 그렇죠? 좀 전에 찬양도 했던 부분이에요.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줄을 탓해 무리 없이 마르고 곰핍한 땅에서 무리 없이 마르고 곰핍한 땅 도망친 거예요.
광야로 도망쳤으니까 얼마나 이 분리의 위협이 컸겠어요. 그게 거기는 염려 근심부터 해서 죽음의 위협까지 곧 아들내미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나를 치면은 곧바로 나는 이제 끝이다. 광야로 쫓겨나서 물 한 모금도 없애 죽을 거다. 이런 뱀의 위협, 전갈의 위협부터 시작해서 바람의 위협, 먼지 위협 얼마나 많겠어요? 먹을 것도 없고 어떡하면 좋죠. 그런 위협 아베 분리해. 비존재 세력의 분리 위협 앞에 그대로 직면했죠. 그랬더니,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악마하나이다. 보세요. 이게 다윗이에요. 여러분은 그 환경에서 뭘 맨 먼저 하겠어요?
같이 도망친 사람이 몇 명인지 일단 먼저 머릿수부터 세고 여기서 행동대장은 누가 하면 되겠고 지관이 누가 있는지 잘 봐서 물이 어디 파면 나오겠다. 이런 것부터 계속 이쪽으로 가면 곡식이 있을 것인가? 이런 것부터 점치고 이런 것부터 하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그 환경을 변화시켜서 지배하려고 하는 거죠. 대적하고 저항하려는 거죠. 다윗은 그게 없어요. 보세요.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악무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해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만 바라봤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주만 바라봤죠. 그와 똑같은가요?
이 극한 위험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환경을 해결해 달라고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왜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이미 이런 환경을 너무 많이 겪은 거예요. 그래서 그 모든 환경에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도 한 번 경험하고 두 번 경험하고 그러면은 이래도 안 죽는다. 그러면 죽음의 위협은 꿈쩍도 안 합니다. 그렇게 되겠죠. 돈 떨어져도 괜찮다. 암에 넉넉한 하나님이 있지 않냐. 그게 가능하겠어요? 동거하러 다니겠어요?
자신을 못하시는군요. 옛날에 유계속한 우리의 본능은 거기에 맞닥뜨려서 밤새 잠을 안 자고 계산을 해야 합니다. 본능이에요. 그게 우리의 본능이에요. 그렇지만 그게 낙심하지 마세요. 그렇게 가더라도 원래 맞다. 내 육아에 속한 본능은 그거지. 하면서 어떡하라고 그랬어요? 바로 돌이키라고 그랬죠. 그게 올 때 그거 보지 말고 1초 만에 뭐 하라고 그랬어요? 내가 누구인가 인식하고 선점하라고 그랬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어요? 다윗은 다른 말이 전혀 없습니다. 이 마무르고 곰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어떻게 물을 마시나이까?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나이까? 한마디도 안 합니다. 오직주님만 바랍니다. 왜요? 주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더라. 주님의 인자 헤세드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능력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나은 것. 헤세드예요. 주의 인자 하나님만의 그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부유함이죠. 다윗은 그걸 알기 때문에 주의 인자가 지금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그 어떠한 것보다 낫다는 거죠. 여러분 그런 확신이 있어요. 비웃는다.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목사님 아무도 그렇게 안 할 건데요. 그런 뜻인가요?
여러분 그런 확신이 없어도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고 보증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까지 끌고 가서 반드시 하나님만 바라도록 하실 겁니다. 만약에 내가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의 보증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선물이잖아요. 약속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좋든 싫든 간에 어쨌든 그건 확보되어 있는 거예요. 따놓은 당상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넘어져도 또 이렇게 해서 끌고 갑니다. 그래서 끌고 갈 때는 고통스럽거든요. 뭘 택하시겠어요? 자발적으로 먼저 구하는 게 교육이 잘 되는 것 같아요. 다윗은 자동입니다.
이 환경에서 자동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주의 인자가 이 땅이 그 어떠한 것보다 낫다. 라는 게 신앙 고백이었고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내 입술이 준율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이 상황에서 찬양이 나오냐고 옆에서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텐데 그러죠. 옥에 갇혀서 찬양이 나오냐고 찬양하니까 옥문을 열어줘버려요. 이해하시나요? 그건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이죠. 왜? 이 옥문도 하나님이 허용한 거잖아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죠. 다이슨 그랬더니, 어때요? 이름으로 내 평생의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을 들리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되겠어요? 쫓겨나서 광야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되겠어요?
망해서 내일 뭐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되겠어요? 저는 죽음을 택했어요. 이제 죽어야겠다. 더 이상 살 희망도 없고 내가 살아봐야 뭐가 유익하겠느냐 이렇게 제가 그랬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거기 끌고 가서 거기서부터 이렇게 세우셨는데 그 다음에 이걸 보게 하신 거예요. 사실은. 죽기를 구하니까 하나님은 어떻겠어요? 기분이 아이고 이런 덜 떨어진 놈 너를 위해서 내가 죽었는데 뭐하는 짓이야? 안 그러겠어요? 그런가요? 여러분? 그 환경과 하나님과의 분리와 어떤 것이 더 괴로울 것 같아요?
하나님과 분리되고 원래대로 회복돼 보세요. 그게 행복할 것 같아요. 똑같이 다시 분리된 환경에서는 거기 안에서는 평감과 기쁨은 죽어도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예수님은 그걸 하셨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윗도 경험으로 그걸 알았고 다윗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내 눈이 막 감겨서 이럴 때까지 내가 10편, 119편에 보면 말씀을 묵상한 아이다. 그러면서 말씀이 왜 이렇게 답니까? 막 그렇게 했다고 그러잖아요.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걸 알았던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막 눈이 감격적으로 들어가면 야 이 미친놈아 빨리 자고 일하러 가야지 뭐하는 짓이야?
내가 속으로 그러지 않아요? 옆 사람이 그러면 안 그래요. 남편이 그러면 너 어떻게 출근하려고 그래? 그러잖아요. 출근을 못했네 보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시겠어요? 여러분 뭘 택하시겠어요? 내가 여기다가 바늘을 꽂고 오더라도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묵상을 하고 출근할 거다 이렇게 그런데 비유하냐고 속으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하는 거니까. 아시겠어요? 어차피 안 할 건 알아요. 이 상황에서 찬양이 나오겠어요? 성질이 올라오죠. 그렇죠? 100%입니다. 저도 그랬고 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올랐어요. 그건 이제 마귀가 최후의 승리잖아. 마귀가 가장 바랬던 것. 절망해서 죽어버려라. 절망해서 죽어버려라.
예수는 분리의 위협, 아래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넉넉하게 수용했고 나는 죽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스스로 죽기를 구했고 그 차이예요. 여러분. 여러분 어디를 구할 것 같아요? 내 아끼는 모든 것이 싹 다 없어버리자. 뭘 구할 것 같아요? 죽음을 구할 것 같지 않아요? 여업이 그랬잖아요.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겪게 합니까? 안 태어났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나님 진짜 짜증나게 그러죠. 누구가 그렇게 왜 태어나게 했냐고 이 고생을 하게 하려고 나를 태어나게 하셨나요? 진짜 짜증나 죽겠네. 이 집사람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만 이러냐고 그게 유해속한 본능이에요. 우리가 배워왔던 거라고요.
이 저주받은 행동 양식이 그런 거야. 그런데 새 생명 동물 안에서 영혼을 사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성령이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택합니다. 안 택하고 있으면 갈 때까지 가서 옆처럼 그렇게 좋아요. 하나님을 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보증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가시죠? 우리 그런 일이 있을 때 뭘 택할지 잘 아시라는 거예요. 이 다윗이 얼마나 지혜로운 거예요? 아니면 이게 이미 다윗의 본능이 되었을까요? 뭔 일이 턱 생기면 1초 내가 크리스도 하기 전에 이미 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뭘 원하십니까? 이렇게 여러분도 되죠.
본능이죠. 아닌가요? 되어가고 있죠? 암이 다 댕기기 때문에 될 수밖에 없어요. 아셨죠? 이름으로 내 평생의 주를 성축한대.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들려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의 만족으로 이때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광야의 환경은 그대로예요. 그런데 어떻다고요?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을 그럼 내 영혼이 평강과 만족을 얻으면은 이제 그 다음에 환경은 하나님 안에서 재정렬됩니다. 이게 바로 이 그림이에요. 이거 이해 가시죠? 이거 코팅했어요. 이걸 아셔야 돼요.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길 구하기보다 돌격 앞으로 하죠. 대접기도 하고 돌파기도 그래서 돌격 앞으로 해서 어떻게 해요? 바꿔 뒤지는 거예요. 저처럼 제가 그래서 죽다가 왔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내 영혼이 만족하니깐 이제 내 입에서 기쁜 내 입에 기쁜 입술로 줄을 찬송하고 내가 나의 침상에서 줄을 기억하며 밤중에 줄을 묵상할 묵상할 때 하오리 주는 나의 도움이셨으며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풀리 내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보세요. 그 안에 들어가니까 주의 오른손이 나를 딱 붙들고 꿈쩍도 안 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돼요? 이제 분리의 세력들, 비존재의 분리의 세력들이 어떻게 한다고요?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라 하여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부침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니 이렇게 재정렬 다시 되는 거예요. 여러분도 이 시편 63편을 항상 기억하고 계세요.
그 환경을 맞닥뜨려서 헤딩하기 전에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이거 하라고요. 그 마르고 황폐한 땅 엽처럼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 안에서 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만 갈망합니다. 그랬더니, 그 참담했던 광야가 하나님이 임지하는 성수로 변하죠. 그게 그 안으로 들어가 연합하니까 그 성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담는 거예요. 이해 가십니까?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생명보다 낫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걸 듣고 남더라는 거예요. 그 상황은 그대로인데 그 심중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영생의 삶을 사는 자의 폭락이 바로 이거예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구해서 그 연합 안으로 들어갈 때 이 비존재의 어떠한 위협 아래에서도 그 발화를 다시 재정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환경을 넉넉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극복하게 되는 거죠. 환경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부유한 자 안으로 들어가 부유함을 누리겠다는 우리 부흥회 때 하는 했던 그 내용이 넉넉히 승리하게 되는 이게 바로 오늘 본문 로마스 8장 37절 39절 그 내용하고 똑같습니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저주받은 존재의 육적인 자아로는 지금 맞닥뜨린 환경을 돌파할 수 없어요.
죽어도 그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게 해보세요. 인생이 무지하게 고통스러워요. 제가 그렇게 맨날 이렇다. 이 시간을 얼마나 많이 협의했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무 뼈저리고 아픈 거예요. 그때 20편을 60편을 읽어도 왜 크게 안 보였을까? 묵상했죠. 왜 안 했겠어요? 그 당시에 묵상해서 여기 써놓은 것도 있어요. 너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이렇게 써져 있어요. 그런데도 그거 안으로 들어와 능력이 못 됐던 거예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만물 아내 연합한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때는 몰랐던 거예요. 종교활동만 하고 있었던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6에 속한 율법 신앙이었잖아요.
그래서 이 초월한 만물 아래 연합한 이 상태연합에서 나오는 게 나올 수 없었던 거예요. 잠깐의 위안은 될 줄 몰랐어요. 이게 맞아. 하느님을 구해야지 이랬는데 그 육적인 구함으로 됩니까? 들어가 연합하는 거예요. 이거는 그걸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연합하. 있는 존재인데도 그걸 인식조차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서 나타나는 능력, 교재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신선의 모든 축만 여기 보면은 그 오른팔이 우리를 붙들고 이런 것들을 그냥 문자적으로는 이해가 됐는데 삶의 현실화되어서 나타나지 못했던 거예요. 그게 율법신앙의 한계였어요. 지식과 지식으로 그 당시에 이렇게 써놨다니까요.
기도할 때도 막 묵상하면 쓰는데도 그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잠깐의 고통을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은 되었었어요. 되었는데 그걸 근본적으로 이길 수 없었던 거예요. 초월해서 그 모든 환경을 다스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걸 안 됐던 거예요. 그래서 계속 없다는 계속 up down이 일어났다. 그래서 마지막에 up down해서 일어날 힘조차 없을 그때 하나님이 한 줄기 빛을 비춰주셔서 이 성경을 열어보게 한 거예요. 그게 나이를 살린 거예요. 결국은. 그래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간정할 수 있는 거예요. 다윗도 아마 이걸 10편에서 놓은 것은 다 간정하면서 집회할 때 7권 찬양하고 노래했던 그런 거거든요.
우리 삶도 여러분 오늘 이 63편 그다음에 만물안에서의 영생을 사는 삶은 과연 어떤가? 이걸 아주 곰곰이 쉽게 묵상해보세요. 거기에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진짜로 다 담겨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환경이 와도 제가 절망하지 않습니다. 알 수가 없어요. 이런 말씀이 안에 버티고 있고 성경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성경을 펼 때마다 계속 감동을 하기 때문에 그거 할 수가 없어요. 잠깐의 어떤 염려가 스쳐 지나갈 수는 있겠죠. 그러시면 그건 영원하지는 않아요. 항상 그 안에 있는 걸 제가 계속 기억하라고 그랬잖아요. 그걸 기계적으로라도 해서 머리가 속을 때까지 하라고 그랬잖아요. 고속도로를 새로 닦으라고 그랬잖아요. 새로.
새로 닦아서 오면은 그쪽으로 확 바로 갈 수 있도록 하라고 그래요. 이유가 힘든 거예요. 그게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이제 진짜 내 본성 세 사람의 본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그냥 오면 고속도로처럼 바위처럼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이셔 하면서 마르고 곰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줄을 악망하나이다.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렇죠? 이 다이스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내가 내 얼굴을 여와의 얼굴을 구하라 할 때 내가 죄의 얼굴을 구하였나이다. 어디 나와요? 10편 27 278, 278.
너는 내 얼굴을 찾으라 이것도 압살놈의 반역되 지은 시예요. 27장이 얼굴을 찾아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죽게 말하되 요하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다 하였나이다. 이 보세요. 너는 내 얼굴을 칠절로 읽어보자. 여하여 네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또한 나의 나를 궁률히 여겨서 응답하소서 할 때 하나님이 응답을 했는데 무슨 응답을 한 거예요? 네. 얼굴을 찾아라. 너는 오른쪽으로 가서 귀인을 만나 무기를 확보하고 전쟁에 나가 이겨라 했나요? 아니에요. 여러분 볶음 가게에 가봐라 아니에요? 대적 기도를 하라 아니에요? 뭘 구하라 했다고요?
내 얼굴을 구하라. Seek his face. 못하는 영어 한번 해봤어요? 내 얼굴을 보아라 여러분 이 얼굴이 뭡니까? 그 존전에 있는 상태가 되라 이 말이죠. 이래 이 답을 줬다니까요. 압살로이 반역했을 때. 그래서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다. 이 말이 바로 63편에 연결되어서 마르고 메마르고 곰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찾나이다. 이거예요.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의 길로 11절의 나를 가르치고 원수로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사 이런 것들이 이제 그 안에서 주의 얼굴을 구하나이다. 그러면서 묵상하면서 기도가 탁탁 나오는 거예요. 우리도 그 안에 파르시아 해서 들어가면 이런 걸 쏟아내라는 거예요. 그때 이해하시죠? 그래서 63장하고 27편, 63편, 27편 같이 읽어보세요. 여러분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능력과 비밀이 그 안에 있는 걸 알게 될까요? 지금 내가 원치 않는 환경 도저히 극복할 수 있는 비존재 세력의 분리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 오늘 이 두 편의 시편을 통해서 만물 안에서 내가 영생의 삶을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환경 안으로 들어가 만물을 넉넉히 수용하고 이길 수 있는가? 똑바로 여러분 아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이길 수 있고 우리는 이긴 자들입니다.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이긴 자요. 그 이긴 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내 얼굴을 구하라. 그 말입니다. 이해 가십니까 하나님이
1. 영생의 삶
1-1. 영생의 삶의 정의
-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된 코에노니아에서 비롯됨
- 율법과 복음 안에 살며, 영생의 삶은 내 힘이 아닌 복음 안에서 생명으로 들어오는 것
- (중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만물 안에서의 관계에서 영생의 삶을 삶
- 영생의 삶은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는 능력임
- 어려움 속에서도 환경과 만물을 이기는 것이 핵심임
1-2. 타락한 자아의 극복
- 죄로 분리된 자, 옛사람의 본성은 모든 상황을 자기 원함대로 바꾸려 함
- 분리된 자의 본성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지배하고 승리하려 함
-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슬픔, 고통, 괴로움이 찾아옴
-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종교적 활동, 기도 등 포함함
- 죄로 인해 분리된 자는 본능적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바꾸려 함
1-3.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계획
- 환경에 맞닥뜨리면 자기 원하는 대로 바꾸려는 본능이 나타남
- 자아는 만족할 수 있는 자아가 아니라, 저주의 본질을 지님
- 밤새 쉬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에베소서 1장 23절에 위치를 정함
-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자,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생명으로 나누어 사는 자임
2. 만물 안에서의 영생의 삶
2-1.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태도
- (중요)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우선시함
-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대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함
- 만물이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면 인간은 헤어질 수 있음
- 영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이뤄짐
- 이 방식을 통해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음
2-2. 다른 종교의 오류와 기독교의 이해
- 다른 종교들은 변화를 목표로 하며, 신앙에 집중하나 오류가 있음
- 예수를 잘 아는 것은 복 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함
- 복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임
- (중요)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은 모든 신앙의 노력을 다 집중함
-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만물을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정복함
2-3. 기독교의 초월신앙과 그 결과
-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만물에 속한 모든 상황을 초월함
-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
- 기독교의 신앙은 만물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하늘에 안치됨
-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의 본질은 만물을 초월한 것임
-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늘에 안치되어 있음을 알게 됨
3.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한 초월의 인생
3-1.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한 희망
- 스님은 외로움과 절대적인 이해 불능함 속에서도 예수님과 연합함
- (중요) 예수님은 우리와 비슷한 고민과 두려움 속에서도 존재의 궁극적 근원인 하나님에게 굳게 붙들림
- 예수님의 불안 속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이었으며, 그것이 코리노전서 1장 30철의 핵심임
-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환경에 노출됐지만, 하나님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음
3-2. 유혹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한 초월
- (중요) 예수님은 악한 세력의 분리 작업에도 대처하며, 유혹과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연합함
- 예수님은 휴식 후에도 유혹이 순차적으로 올 때도 불편해하지 않음
-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환경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 예수님은 유일하게 고통이 있었던 때가 바로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순간이었음
3-3. 악한 세력의 공격과 하나님의 연합 속에서의 승리
- 예수님의 죄의 유혹과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초월함
- 예수님은 초월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내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함
- 예수님의 고민과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음
-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됨
4. 만물과 분리
4-1. 영적 본질과 분리
- 육의 본능과 영의 본질은 분리되어야 함
- 자극에 따라 마음이 분리되면 고통스러워짐
-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국에 갔다가 땅에 남겨질 때도 같은 느낌이 옴
- (중요) 예수님은 음부를 정복하고 부활시켜 하나님과 연합한 후 최후의 분리였음
- 이 분리를 통해 만물의 제약을 받는 존재에서 벗어나 하늘에 속한 존재로 올라가게 됨
4-2. 실존적 분리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신학적으로 실존적인 분리라는 말을 사용함
- 분리된 존재를 실존이라고 부름
- 본질적인 존재는 하나님 자체이고, 분리된 존재는 비존재의 세력임
- 마귀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분리의 위협을 주고, 다른 방법으로 위협을 가함
- 우리는 아직도 만물 안에 의한 만물에 대한 바라는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쪽으로 끌려가게 됨
4-3. 분리 위협과 대응
- 예수님은 분리의 위협을 하나님 안에서 넉넉하게 수용하고 이길 수 있었음
- 우리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만물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함
- 분리의 위협은 브란트루염, 염전심, 분노의 혈기, 고통 등 여러 방법으로 나타남
- 특히, 공허라는 무기가 있는데, 의미가 없으나, 우리의 마음을 돌려 보낼 수 있음
5. 영생의 삶과 제자리 찾음
5-1. 염세주의와 영생의 삶
- 염세주의에 빠지거나 정제의식을 가질 수 있음
- 죄책감이나 막 이상한 곳에 빠져들 수 있음
- 내 운명에 대한 고민으로 영생의 삶에 대한 정의를 잃을 수 있음
- 이런 기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 재세력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지 잘 보아야 함
- (중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함
5-2. 문제 해결과 비존재의 세력 대적
-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해결해야 함
- 본능적으로 비존재의 세력에 맞서 대적하거나 정복하려는 경향이 있음
- (중요) 그 문제는 허용된 범위 내에서 내게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함
- 비존재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결국 악한 세력에 빠지게 만듦
- 따라서, 본능적으로 저항하거나 정복하려는 대적 기도는 주의해야 함
5-3. 자기 암시와 영생의 삶
- 자기 암시를 통해 상황을 통제하고 이기려는 경향이 있음
- (중요) 이는 비존재의 위협이 올 때, 하나님과 연합을 통해 이기려는 대적 기도를 잃어버리게 함
-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비존재의 위협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합을 구함
-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이 가진 만물 안에 있음이 이해가 됨
- 결국, 예수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라고 하는 것임
6. 환경과의 연합
6-1. 어려움에 맞서는 믿음
-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과 연합하여 초월하고 이겨낼 수 있음
- 만물 안에서 영생을 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음
-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주님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우리가 돌파가 되게 함
- 연합함으로 우리는 이김,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함
6-2. 사랑으로 연합된 삶
- (중요) 로마서 8장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나이다라고 함
-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게 아무도 없음, 환란이나 공고나 핍박이나 슬픔 등도 비존재의 위협임
- 기록된 바울이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됨, 사랑으로 연합된 삶을 선택해야 함
- 상황적으로 볼 때,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하게 됨
- 이 위협에 대적하거나 돌파하는 것은 악의적인 행위임
6-3. 대적과 이기
- 우리의 선택이 중요함, 우리의 행동이 중요함
- 예를 들어, 6에 속한 본능은 무조건 저항하고 이겨내려 함
- (중요) 하나님의 사랑은 해석을 따름,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세력은 불가능함
-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위협을 정복하고 승리하심
- 우리의 위치를 선점하고, 내 존재를 인식해야 함
7. 삶을 통한 신앙 고백과 하나님의 인자
7-1. 다윗의 삶과 신앙 고백
- 다윗이 삶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을 함
- 마태복음 10편과 63편에 나타난 다윗의 신앙 고백을 분석함
- (중요) 다윗의 고백에서 나타난 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함
- 다윗이 겪은 환경 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태도를 설명함
- 다윗이 자신의 영혼을 주에게 맡기고, 주를 향한 찬양을 드림
7-2. 다윗의 삶과 하나님의 인자
- 다윗이 주님만을 향한 신앙이 어떻게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함
- (중요)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헌신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을 보여줌
- 다윗이 주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는 절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함
- 다윗이 주님의 인자를 향한 확신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함
- 다윗이 주님의 인자로 인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함
7-3. 다윗의 죽음을 통한 신앙 고백
- 다윗이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 이유를 분석함
- (중요)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주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줌
- 다윗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와의 연합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강조함
- 다윗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을 고백한 내용을 분석함
- 다윗이 죽음을 택하면서 하나님의 보증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설명함
8. 시편을 통한 내 영의 성장
8-1. 다윗의 시험과 하나님의 도움
- 하나님이 다윗을 택해 광야 환경에서 시험하심
- (중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받아 환경을 극복함
- 환경을 돌파하려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함
- 다윗은 광야 환경을 만족시키고 영혼의 만족을 얻음
- 다윗은 환경을 재정렬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극복함
8-2. 시편 63편의 이해
- 시편 63편은 다윗의 시험과 하나님의 도움을 주제로 함
- 다윗은 광야 환경에서 시험받았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연합을 이룸
-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생명보다 낫다 여김
- 다윗은 영생의 삶을 사는 자의 폭락이 시편에 담겨있음
- 우리는 초월한 만물과 연합한 존재임을 알아야 함
8-3. 내 영의 성장과 하나님과의 연합
- 내 얼굴을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죄의 얼굴을 구하는 것과 다름
-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진정한 영의 모습을 찾음
-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대한 시험을 극복함
-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
-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영의 성장을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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