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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이루어 내야할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임재 하여 머무실 수 있는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 민족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셨습니다. 도중에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머무셨습니다.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시장하셨습니다.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그루가 보였습니다. 당장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했을 뿐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보통 우람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밑 둥의 둘레는 약 1m, 높이는 약 5-6m, 가지는 약 8-10m 정도로 뻗어있었습니다.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또 무화과나무는 잎과 꽃이 무성할 때쯤이면 열매도 함께 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태양력으로 6월과 9월 또는 6월과 8월과 12월 등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열매를 딸 수 있었습니다. 6월이 본격적인 무화과 철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3월경이 되면 맛있게 익은 것은 아니지만 먹을 수는 있는 작고 푸른 열매들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4월이 되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습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일찍 열리는 열매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양식이라고 불렸습니다.
유대 율법은 길가의 무화과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누구든지 따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르고 있었던 일행들과 함께 무화과나무를 찾았을 때는 4월 중순경이었습니다. 잎과 꽃과 열매가 거의 동시에 나타나는 무화과나무의 특성상 아직 맛있게 익지는 않았겠지만 가난한 소작농들에게는 요긴한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던 작고 푸른 열매가 최소한 몇 개 정도는 달려 있어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매를 기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무화과나무에는 단 하나의 열매도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맺기는 했었는데, 그것을 먼저 발견한 누군가가 이미 다 따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잎이 무성한 상태에서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해에는 열매를 아예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 영원히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막11:14a)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온화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 평행본문은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마21:19b)라고 증거 합니다.
“곧παραχρῆμα”은 “함께παρα”와 “돈χρῆμα”의 합성어입니다. 물건을 살 때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고른 물건을 상인으로부터 건네받음과 동시에 가장 합당한 값을 정확하게 지불한다는 의미입니다. 즉각적인 현금 지불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가 선포되었을 때, 무화과나무는 외적으로 볼 때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의 시간 연장일 뿐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이미 말라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이 있고,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이 이른 아침에 지나가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어제 예수께서 저주하신 것이 생각났다. 예수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라고 말했다.”(막11:20-21)라는 증거에 따르면, 다음날 아침 일찍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는 실제로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맛있게 익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에게는 관심거리조차 될 수 없었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요긴한 먹을거리가 되어 주었던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최종적 결정권은 물론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온갖 종류의 이권과 기득권을 한 손에 움켜 쥔 상태에서 목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먹은 것을 끄집어낸 다음 다시 먹을 정도로 그야말로 화려하고 풍요로운 잔치를 하루 세끼 밥 먹듯 벌이며 살고 있었던 종교 장사치들은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지만, 그들로부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한 압박과 함께 착취까지 당하고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꼭 필요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잎이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는 단 하나의 열매도 맺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있는 탐욕을 추구하기 위하여 온갖 비리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고 있었던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을 그대로 닮아 있었습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심판의 주이십니다. 세상 끝 날이 되면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외모가 아니라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감추면 쉽게 확인할 수 없는 내면을 관찰하십니다. 무성한 잎이 아니라 열매의 유무를 살펴보십니다. 그것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B. C. 19년 헤롯에 의해서 건축이 시작된 성전은 당시에도 여전히 완공되지 못한 채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의 성전보다 서너 배나 컸습니다. 그야말로 거대했습니다. 웅장했습니다. 화려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곳곳에 금박을 덧입혔습니다. 아침이 되면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할 정도로 빛났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 마당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안마당은 유대인들만, 바깥마당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 모두 거룩하게 구별된 성전에 속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사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바깥마당을 시끌벅적한 장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짐승을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았습니다. 각종 세금문제를 해결하고 헌금을 드릴 수 있도록 환전해 주는 과정에서는 과도한 웃돈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문학적인 이윤을 남겼습니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과 자릿세라는 명목으로 나눠가졌습니다. 거기다 뇌물까지 두둑이 얹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천문학적인 이윤 가운데 일부만 일한 대가로 차지하고 거의 대부분을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에게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실제 장사꾼은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들과 은밀하게 결탁하고, 그들에게 물품 판매를 맡긴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한 것에 대한 문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전반을 돌아보아야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자신들을 거룩하게 위장했습니다.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잘 섬기는 척했습니다. 실제로는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탐욕을 채우는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불경이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심각한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이렇게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에게서 거룩함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한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돌아보면 얼마든지,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장사꾼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에게만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막대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재물을 바치면 그에 비례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틀려먹은 아니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모르는 척 사줬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 종을 대적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마음을 빼앗긴 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없는가?”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돈을 받고 팔수도 없고,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주실 때 비로소 받을 수 있습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때 비로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구원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고, 복을 받고 싶다면 먼저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집요하게 요구합니다. 멀쩡한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돈을 “성전건축”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면서 강요합니다. 때로는 이번 한 번만 더 내놓으면 다시는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읍소합니다.
그렇게 해서 땅을 삽니다. 벽돌을 하늘 높이 쌓아올린 건물을 짓습니다.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빼앗듯 걷어서 지은 건물을 예배 용도로만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부를 임대해 주고 세를 받습니다. 받은 임대료는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나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나쁜 범죄를 수시로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자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오염시킵니다. 깨어있다는 성도들은 물론 세상 사람들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하나의 관행처럼 해 왔던 일이고, 누구도 문제를 삼지 않았던 일인 동시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묵묵히 순종해 온 일인데 왜 갑자기 시끄럽게 소동을 일으키느냐면서 따집니다.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사지로 내몰아놓고도 나몰라합니다. 그럼에도 절대 다수의 성도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침묵합니다. 일부 몰지각한 지도자들을 두둔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짐승들을 성전바깥으로 몰아내 버리셨습니다. 환전을 위해서 마련해 둔 상을 뒤집어 엎어버리셨습니다. 산같이 쌓여 있었던 동전을 바닥에 쏟아버리셨습니다.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버리셨습니다. 사고파는 물건을 쉬지 않고 실어 나르기 위해서 성전 뜰을 가로질러 다니던 사람들의 통행까지 금지해 버리셨습니다. 탐욕에 찌들어버린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축복을 위해 모르는 척 눈감아버렸던 백성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할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정화淨化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견디기 힘든 고난과 멸시와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과정을 돌아보는 사순절 절기 네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고의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을 가둬두고, 제사 용품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서 천문학적인 돈을 축적하는 최대의 종교 마켓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과 예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상은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과 그들과 결탁된 불의한 체제를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먼 길을 달려온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타협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해야할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이는 성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물론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만연되어 있는 총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그럴듯한 잎만 무성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열매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무화과나무는 아닙니까?
자신을 하나님께서 원할 때든 언제든지 임하서서 거할 수 있는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기는커녕 오히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리는 일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지자는 “보라! 싹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6:12b)라고 외쳤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11:1a)라는 증거대로, “싹이라고 이름 하는 사람”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골2:9)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육신은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2:21)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십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재건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짜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동시에, 귀신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듯 떠나갔습니다. 온갖 종류의 희귀한 질병들이 치유되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아픔과 상처와 절망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파렴치한 종교 장사치들은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던 자신들의 치부恥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죽음의 십자가 앞으로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참된 성전으로서 당신에게 주어진 삶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거룩한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듭난 그들은 또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그들은 내 것, 네 것이 없었습니다. 유무상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때로는 삼천 명이, 때로는 오천 명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탄생은 곧 거룩한 성전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들의 범죄와 함께 무너져버린 이 성전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지극히 적은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해 오셨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 회복이라는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고 위대한 사명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해 예비 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키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소중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거룩한 성전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한 가지 안타까운 마음이 떠나지 않고 맴돌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 마련을 위해서 쓰여 졌을 천문학적인 물질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웃들을 위해서 쓰여 졌다면, 성도 하나하나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쓰여 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혹, 그랬었더라면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를 멀리하거나 혐오하기까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주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사명 역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호흡하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아주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모든 것들이 낯선 선교지로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니 예배와 봉사, 희생과 헌신, 구제와 선교 등 신앙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는 그 어떤 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비록 고난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임하여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성전으로 존재하는 복된 사순절, 단 하나라도 열매 맺는 복된 사순절, 존재 목적에 합당한 삶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사순절 절기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