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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역사이야기
사적 제10호 (1963.01.21 )
♧ 한양도성의 축성 역사는 ~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혜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계획 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 그 후에 유지 보수 관리는 ~
*세종 4년(1422) 도성 수축(修
*문종 1년(1451) 도성을 수축
*광해군 8년(1616) 개수
*인조 14(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조약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병자호란 때 성곽이 부서진 채로 방치
*숙종 30년(1704) 이조판서 이유의 주장으로 오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성곽을 대대적으로 수축.
♧ 도성 문의 개폐(開閉)는 ~
도성의 문은 보신각에서 인경(人定)을 치면 닫고, 바라(罷漏)를 치면 열었다.
인경은 종루의 종을 28번 치고 바라는 33번을 친다.
한자음은 인정과 파루이지만 옛날에는 인경과 바라로 더 많이 발음하였다고 한다.
♧ 도성의 순라(巡邏)는 ~
도둑과 화재를 방지하고, 성문의 개폐 상태와 수문군의 근무 여부를 살피며,
시설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궁궐과 도성 둘레를 순찰하는 것을 순라라 했다.
처음에는 순청(巡廳)에서 담당하다가 현종 11년(1670)부터는 삼군영(三軍營)에서
담당, 삼군영에서는 8패(8조)로 나누어 교대로 순찰을 했다.
♧ 사대문의 이름은 ~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와 동서남북 4대문의 이름에 담았다.
숙정문의 '靖'자는 의미가 서로 통하는 '智'자를 대신했으며, 信은 보신각(普信閣)을 말한다.
仁義禮智信 五常之道 王者所當修飾也 (漢書 董仲舒傳)
(어질고 의롭고 예절있고 지혜롭고 믿음있음은 사람이 지닐 5가지 도리이니,
임금된 사람은 마땅히 정돈해 꾸며야 할 바이니라)
♧ 서울한양도성의 산 이름은 ~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이다.
♧ 대.소문과 도성의 훼손은 ~
일제는 도로를 낸다는 명목으로 성과 성문을 허물고 신사와 동대문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훼손하였다.
해방 후에도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과 개발시대에 도성은 집의 석축이
되기도 하고 석재로까지 이용되었다.
훼손의 시대를 거쳐 1976년부터 성곽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 한양도성 순성길을 돌아보는 탐방길은 ~
도성 18.2km를 여섯 구간으로 나누어 돌아볼 수 있다.
◇ 인왕구간 (4km, 2시간 30분 소요)
돈의문터→ 경교장→ 월암공원→ 인왕 안내쉼터→ 인왕산 정상→
윤동주 시인의 언덕→ 창의문
◇ 숭례문 구간 (1.8km, 1시간 소요)
백범광장→ 숭례문→ 대한상공회의소→ 소의문터→ 배제공원→
러시아대사관→ 창덕여중→ 돈의문 터
◇ 목멱구간(남산) (4.2km, 3시간 소요)
장충체육관→ 다산팔각정→ 반얀트리호텔→ 국립극장→ 나무 계단길→
N서울타워→ 중앙광장→ 백범광장
◇ 백악구간 (4.7km, 3시간 소요)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백악곡성→ 숙정문→ 말바위 안내소→
와룡공원→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혜화문 ※ 신분증 지참구간
◇ 낙산구간 (2.1km, 1시간 소요)
혜화문→ 나무 계단길→ 장수마을→ 낙산놀이마당→ 낙산정상→
이화마을→ 한양도성박물관→ 흥인지문
◇ 흥인지문 구간 (1.8km 1시간 소요)
흥인지문→ 오간수문 터→ 동대문역사관→ 이간수문→ 광희문→
장충동 골목길→ 장충체육관
12월 초에 서울의 한양도성과 4대문, 그리고 4소문을 하나 하나 돌아보면서
서울역사박물관과 한양도성박물관을 찾아 역사적인 자료들을 요약 정리 해 보았다.
날씨나 그날 형편에 따라 순서없이 여유롭게 건강을 위해서 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4대문과 4소문의 설명순서는 숭례문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올렸다.
서울 사대문과 사소문 역사이야기
◇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를 통해 잘 보존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1호로 지정되었다.
1899년 숭례문의 홍예 아래로 전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도성 고유의 기능이 사라지게 된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문루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에 복구되었다.
▲ 현재의 숭례문 전경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禮'자가 오행에서 화(火)에 해당하므로
'崇禮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며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좌우로 성곽을 복원해 놓은 숭례문은 예전과 사뭇 다르게 보인다.
외국인 관람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虹霓門)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으며 그 위쪽에 2층 문루(門樓)를 세웠다.
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동서 양쪽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문루 둘레에
전통 벽돌 담장을 두르고 작은 문을 내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처마로 만들어졌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라 불리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웠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 우진각지붕이다.
숭례문은 2008년 2월 발생한 방화로 문루가 소실되어 기존에 작성된 정밀
실측도면과 사진을 활용하여 2013년 5월 4일에 복구공사를 완료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07~1909년 사이에 헐려나간 성문 좌우 성곽을 동쪽 53m, 서쪽 16m를 복원하였다..
숭례문 양쪽 구간의 한양도성은 시내 평지구간으로 성벽이 가장 많이 훼손되어 있는 구간이다.
▲ 숭례문의 옛모습
<어처구니 없는 숭례문과 도성의 수난 이야기>
1907년 10월 통감(統監)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후일 大正天皇이 된다)를 초청한다.
요시히토를 더럽고 누추한 숭례문을 통과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례문의
좌우 도성 가운데 서쪽 부분을 헐어 도로를 내었고. 이듬해에는 동쪽 부분도 헐어 내었다.
이때 전차 선로는 홍예문을 통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선로를 옮겼다.
♧ 숭례문 찾아가기
지하철 1호선 서울역 4번 출구,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
◇ 서소문(昭義門)
4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다.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 집행장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 밖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다.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한 기념물이다.
1914년 일제의 시구(市區)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다.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 소의문 터 표석
▲ 소의문터 위치는
시청역 9번출구에서 직진, 중앙일보 표지판을 지나면 소의문터 표석이 있다.
숭례문쪽에서는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성곽재현구간을 따라 직진하면 된다.
▲ 옛 서소문의 모습
▲ 서소문(소의문)을 주제로 한 '창석 이억영'의 수묵담채화이다.
그림에는 서소문과 그 앞의 거리, 거리의 집들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 돈의문(敦義門)
돈의문은 한양도성 서쪽 문으로 흔히 서대문이라고 불린다.
도성에서 한강변의 마포,서강,양화진 등의 포구와 무악재를 넘어 개성.평양.의주로
이어지는 서북로로 나가는 관문이다.
최초의 돈의문은 1396년(태조 5년)에 도성의 8개의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으나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남쪽으로 새로 지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성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1422년(세종 4년)에 다시 서전문을 닫고 이 지점에 새로운 돈의문이 세워졌다.
1899년 5월 청량리에서 경교를 잇는 전차노선이 돈의문을 통과하였다.
이후 새로운 문이라는 뜻의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3월 도로 확장공사로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 돈의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돈의문의 옛모습
▲ 서대문의 경매
총독부 토목국 토지과에서는 1915년 3월 7일 경쟁입찰을 행하여 205원50전(쌀 17가마)으로
경성 염덕기에게 낙찰경매한 것은 거의 목재 뿐이었다고 한다.
▲ 돈의문 터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돈의문터를 찾기위해 이곳 계단을 여러차례 지나다녔는데도 시력이 부실해서인지
그냥 지나치곤 했다.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올라가는 길 입구, 새문안로 길가에 있다.
이곳에서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성병원 안에 김구선생의 경교장과
마주보고 있는 돈의문 박물관마을 사잇길을 지나 서울특별시 교육청, 기상청,
홍란파가옥 등을 지나게 된다.
인왕산 도성길로 이어지는 이길은 조용하여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 이 도성은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인왕산(339.9m)은 산기슭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어
유래된 이름으로 조선 초에는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 돈의문터 찾아가기
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에서 도보 5분거리이다.
◇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 1881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4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의란 올바름을 밝힌다'는 뜻이 있다.
▲ 창의문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세웠다,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인조반정은 1623년 3월 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능양군이 제16대 왕(인조)으로 즉위한다.
▲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 창의문 원경사진
▲ 창의문의 옛모습
♧ 창의문 찾아가기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자선초록버스 7212, 1020, 7022번 승차,
자하문고개.윤동주 문학관 하차
◇ 숙정문(肅靖門)
북악산 한양도성을 탐방하려면
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다음 신분증을 제시하고
목걸이형 표찰을 받는다.
▲ 말바위안내소에서 숙정문,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까지 2.2km,
소요시간은 2시간정도이다.
창의문안내소 부터 시작하면 가파른 계단길을 계속 오르게 된다.
그래서 난 말바위 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가는길을 택했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처음에는 이름이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후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다.
현존하는 도성의 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며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세워 젔는데 이때는 문루가 없었던걸로 추정하고 있다.
▲ 1396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숙정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숙정문에서 20여분 올라가면 백악곡성이 나온다. 곡성에 올라가 보면
성벽의 구조를 알기쉽게 설명한 안내판이 있어 여기에 소개해 본다.
▲ 치(雉)에 대한 설명
치성(雉城)은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3면에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곡성(曲城)은 밖으로 굽은 지형을 활용하여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하도록 쌓은
구간으로 백악산 동측과 인왕산 서측 정상부에 하나씩 있다.
▲ 여장에 대한 설명
군사보호구역이라서 주변 곡성사진은 촬영하지 못했다.
▲ 성의 내부와 외부의 모습
▲ 청운대로 이어지는 도성
▲ 청운대
북악산 한양도성 내에서 가장 조망권이 좋은 곳으로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총탄자국(18발)이 있는 이 나무를 1,12사태소나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비군이 창설('68. 4.1)되었다.
▲ 성 밖으로 북한산이 보인다.
▲ 백악산(해발 342m) '백악마루'이다.
백악산은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산이라하여 백악산이라 불렸다.
북악산(北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불렀다.
♧ 숙정문 찾아가기
* 말바위안내소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에서 지선초록버스 종로 02번 승차 → 성균관 후문에서 하차 →
와룡공원 걸어서(10분) → 와룡공원에서 한양도성 따라 걸어서 20분
* 숙정문안내소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에서 지선 초록버스 1111번, 2112번 승차 →
종점(서울다원학교 회차지점)하차 걸어서 15분
* 창의문안내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지선초록버스 7212번, 1020번, 7022번 승차 →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에서 하차
◇ 혜화문(惠化門)
사적 제 10호
한양도성의 동북쪽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으로 불렸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조때에는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다. 혜화문은 동소문이라고도 불렀다.
혜화문을 나서면 한양에서 원산으로 이어지던 경원가도로 연결되어 많은 사람이
통행하였으며,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어 북대문의 역할까지 했다.
도로를 낸다고 혜화문도 헐리게 된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리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었다.
▲ 현재의 혜화문
현판의 글자가 왼쪽에서 시작한다.
▲ 왼쪽의 성곽은 북정마을. 와룡공원, 말바위 안내소를 거쳐 숙정문으로
연결이 되며 거리는 2,7km, 한 시간 정도 걸린다.
▲ 혜화문의 옛모습
♧ 혜화문 찾아가기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에서 걸어서 5분
▲ 혜화문 인근에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가 있다
전 서울시장 공관을 안내센터로 개관했다.
전시실에는 순성놀이 기록, 혜화동 주변 모형지도, 지도로 보는 한양도성과
역대 시장의 영상 및 기증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혜화문 아래 길은 창경궁로이며 벼랑위에 성문이 서 있다.
동대문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또한 이곳에서 잘려진다.
혜화문에서 창경궁로 건너편을 바라보면 낙산으로 가는 도성길이 보인다.
▲ 낙산공원
낙산(駱山)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산이라 하며
낙타산(駱酪山)혹은 타락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124.4m)
▲ 낙산구간의 도성모습
◇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1396년(태조 5)에 세운 한양도성의 동쪽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2층으로 되어있다.
동쪽으로 나가는 대로의 출발점이며 성 안으로는 운종가로 이어져 도성 동서의 중심축이 된다.
▲ 흥인지문(동대문)
▲ 흥인지문 현판
현판에 특별히 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
▲ 언덕위에 보이는 하얀 건물은 흥인지문공원에 서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이다.
전에 이대병원이 있던 자리다.
건물 오른쪽 성벽을 따라가면 낙산공원을 지나 혜화문(동소문)에 이르게 된다.
거리는 2.3km 한시간 조금 더 걸린다.
▲ 흥인지문은 다른 성문과 달리 문밖에 반원형으로 둘러싼 옹성(甕城)이 있다.
한양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홍예문이 있는 석축기단위에 2층의 문루를 올리고 상하층 모두 우진각지붕을 하고있다.
▲ 전차차고지 표석(동대문역 8번출구 옆)
▲ 전차표에 전차 노선이 그려져 있다.
오는쪽 전차표에는 금오전(金五錢)이라고 써 있다.
(출처 : 한양도성박물관)
▲ 동대문 차고지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1899년
흰 옷을 입은 군중들이 전차차고지, 흥인지문 육축. 도성과 산자락에 빼곡히 차 있다.
▷ 여기서 우리나라에 전차가 처음 도입될 때 흥인지문 일대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898년 1월, 고종의 전액 출자로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어 서울시내 전기사업권을 독점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콜브란 보스트윅 상사(Colbran & Bostwick Co.)와 합작으로
전차 사업을 추진하여 1899년 5월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궤도를 부설하고 전차 운행을 개시했다.
발전소와 전차 차고는 흥인지문 서남쪽, 현재 동대문종합시장과
JW메리어드 동대문스퀘어서울이 있는 자리에 마련했다.
이곳이 한국전기 산업의 발상지이다. 전차운행을 위해 흥인지문 옹성의 일부를 절단했으며,
보신각 종소리에 따라 성문을 여닫는 관행도 중단되었다. 그 대신 정오에 오포(午砲)가 시행되었다.
전차는 1968년에 철거되었다.
출처 : 동대문역사관
▲ 동대문 전차시설공사
▲ 동대문과 전차
전차와 소달구지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 한양도성박물관
♧ 흥인지문 찾아가기
1호선 동대문역 6번출구, 4호선 동대문역 7번출구,
♧ 여기서 성 아래에 있었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 오간수문(五間水門)터
(사적 제461호)
도성은 흥인지문에서 청계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지나 광희문으로 이어진다.
이 부근은 서울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서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 원래의 오간수문
▲ 오간수문지를 재현해 놓은 모습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수구(水口)를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홍명학의 임꺽정전에서는 황해도의 도적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달아날때에도 오간수문을 통해 빠져나갔다고 한다.
▲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1760년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천(濬川)할 때 영조대왕이
오간수문에 친림한 광경이다.
영조는 청계천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고 도성 내 홍수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준천을 실시하였다.
지속적으로 준천을 실시하기 위하여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2~3년 주기로 실행하였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 흥인지문과 옹성이 살짝 보인다.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 콘크리트 다리로 바뀐 현재의 오간수교
◇ 이간수문(二間水門)
1925년 5월 24일 경성운동장을 짓기 시작해서 그해 10월 15일에 완공한다.
이때 이간수문이 사라지게 된다.
2007년 12월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짓기 위하여 동대문 야구장을 철거하고
이어 동대문 축구장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이간수문이 발굴되었다.
▲ 구 동대문운동장 발굴은 2008년 1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해 9월 축구장부지 발굴에서 이간수문 홍예부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간수문은 동대문 운동장 지표 3.7m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일제 강점기때 토목공사를 하면서 그대로 생매장 당한 꼴이다.
▲ 복원된 이간수문
이간수문은 지면보다 낮은곳에 있어 지나치기 쉽다.
◇ 광희문(光熙門)
광희문은 광명의 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도성의 동남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이름도 한강과 통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문으로 장례행렬이 나가고 시신이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屍口門) 이라고도 했다..
그 당시에는 도성 안에서는 묘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 광희문에서 동대문 방향으로는 성벽이 없으며,
오른쪽 장춘단공원 방향으로는 사진에 보이는만큼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 광희문 오른쪽도로는 도성이 잘려나간 퇴계로이다.
▲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는 성벽을 벽삼아 초가를 얹은 헛간이 있고
오른쪽 마차는 고무신 신발을 진열해 놓은 가게이다.
▲ 광희문의 옛날 모습
이 사진의 왼쪽 초가집을 보면 처마에 전선용 완금에 애자같은것이
보이는데 전기를 사용한 걸로 보인다..
물통을 진 사람과 소달구지도 보인다.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 흔적은 사라지는데.
1930년대 주택단지 조성으로 성벽이 파괴된 지역이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으로 가는 도성길 안내표지판을 놓치는 바람에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면서 길을 물어가면서 찾아갔다.
장충동 족발동네에 도착하니 눈발이 내린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족발집 두 세군데를 들렸으나 혼자라서 인지
식사는 안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뒷골목으로 들어가 순대국밥집을 찾아 들어갔다.
♧ 광희문 찾아가기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출구, 4호선 4번출구, 5호선 4번출구에서 걸어서 8분
※ 위의 옛날 사진들은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박물관, 동대문역사관, 리플렛 등에서
참조하였으며, 옛날 사진을 많이 올리고 싶은 마음은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이다.
목멱구간(남산)
장충체육관에서 백범광장 사이 도성길이다.
해발 270m의 남산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으로 본래 이름은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들인다는 인경산(引慶山)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남산의 산신에게 목멱대왕이란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목멱산(木覓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멱산은 남산을 뜻하는 '마뫼'의 이두식 표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 장충체육관에서 남소문으로 가는 사이의 도성과 암문이다
순성길을 계속 따라가면 국립극장, 목책계단길, 서울 중심점, 서울타워,
남산팔각정, 목면산 봉수대터를 거쳐 백범광장, 숭인문에 이르게 된다.
순성길을 돌아볼 때 성 밖과 성 안의 길이 있는데 축성된 성의 모습 또는
성의 높이, 규모 등을 가늠해 보려면 성 밖 길을 택하는게 좋다.
성 안은 걷기는 좋은데 성곽의 여장을 주로 보게 된다.
▲ N서울타워와 팔각정
N서울타워는 남산 243m(건축지점), 탑 높이 236.7m로 합이 해발 479.7m이다.
▲ 서울 중심점(The Geographical Center of Seoul)
이 표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 결정을 위한 측량의 출발점인 대한민국 최초의
경위도 원점이었던 곳에 설치된 것으로, 국가기준점(서울25삼각점)과
지리적 삼각점으로서 측지와 지적측량에 쓰인다.
▲ 남산의 성곽과 팔각정
▲ 목멱산 봉수대(烽燧臺)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는 곳이다.
봉수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또한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 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은 1993년에 김정호의<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지방 여행을 하다보면 봉수대를 만날 때가 있다.
봉수대 신호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한양까지 전달되는지 이제 궁금증이 풀린다.
전에 없던 투명안전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마도 실족하는 관람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 국사당 터 표석
목멱산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지금은 인왕산 범바위 인근에 있다.
▲ 남산전망대
남산에 올랐을때 12월 초인데도 밤사이 비가 내린 후 날씨가 포근해서인지 안개가 자욱이 시야를 가린다.
▲ 남산 팔각정에서 도성을 따라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잠두봉 포토아일랜드에는 많은 산책객들이 시내를 조망하고 있다.
▲ 서을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 건물과 서울타워가 잘 어울린다.
▲ 백범광장의 도성
▲ 백범광장에서 성을 따라 내려가면 숭례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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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4소문 외에 남소문이 있는데 광희문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광희문과 남소문은 서로 다른 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남소문(南小門)터
남소문(南小門)은 1457년(세조 3년) 도성 안에서 광희문을 통해
한강으로 가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새로 만든 문이다.
그러나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 원년)에 폐쇄하였다.
이후 문을 다시 개통하자는 의견이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 남소문터 표석
3호선 동대입구역 6번출구에서 장춘단로 길을 따라 올라 가다가 보면
국립극장앞의 남산공원 표시판을 지나게 된다.
고개나루의 커브길 모퉁이에 사진과 같이 먼지를 둘러쓰고 있다.
▲ 휴지로 먼지를 닦아내고 사진을 찍어서 보니 알아 볼 수가 없어
여기에 그대로 옮겨 써 보았다.
이번기회에 仁義禮智信의 서울한양도성 4대문과 4소문을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에 다시한번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서울 주변에 걷기 좋은 길 서울한양도성 순성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역사이야기는 한 세기 전의 이야기인데
앞으로 한 세기 후에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아니 한 세기가 아닌 10년 후의 모습은 어떻게 될지?
첫댓글 수고 수고하셨네요. 허나 그 고생으로 이런 명작이 태어나서 보는 이들을 호강하게 만드네요. 그 동안 KCCA의 보물을 몰라봐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