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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전을 버리지 않으면
성경본문 : 느헤미야 10: 37-39
37.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38.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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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걸려있는 축복정보에 대하여 세 번째 시간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 라는 뜻이고 하나님의 전을 버린다 함은 곧 우리에게 임하여오신 하나님을 박대해서 밀어내는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느헤미야 10장 39절 마지막에 보면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이 '그리하여'가 어떤 내용인지 그 내용이 짧지 않아서 오늘 마지막 부분만 읽었습니다.
그러면 그리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겠는데 즉 우리에게 임하여 오신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는데, 이 그리하여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고 하니까 이 문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종결이 되는지 그 시작을 제대로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성경을 보니까 이 문장 종결된 문장의 처음 시작은 8장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선 참고로 말씀드리면 10장 1절을 보면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스라야…" 이렇게 나옵니다.
'그 인친 자는' 그러니까 이 10장 1절은 바로 처음 문장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인친 자라는 말을 보니까 그 앞장과 연결이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좀 옛날에 배운 것이지만 국어실력도 되살려서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앞장 9장 28절 마지막에 보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그 인친 자는…"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니까 앞장과 이 9장과 10장이 완전히 다른 편지가 아니고 다른 글이 아니고 연결된 것이다 라고 이해가 되시지요.
그 다음에 또 9장 1절을 또 보실까요? "그 달 이십 사일에"라고 했습니다. 문장을 처음 시작한다면 앞에와 연관이 없다면 '그 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뭐 몇월 몇일 이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이 '그 달'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벌써 그 앞에 문장과 연결이 되는구나. 오늘 이 성경 해석에 대해서 말씀드리므로 여러분께서 저의 지금 표현하는 이런 내용들을 알아두시면 목사가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을 좀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9장 1절에 '그 달 이십 사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그'라는 말이 붙은 것을 보아서 이 9장 1절부터에 문장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앞장과 연관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앞장 마지막 절을 보실까요?
"에스라는 첫날부터" 벌써 날짜 나오지요.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그 달 이십 사일에…" 이렇게 해야 이제 연결이 됩니다.
8장도 9장과 연결이 되고 9장도 10장과 연결이 되는데 그러면 10장 제일 마지막 절에 아까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이 종결이, 이 마감하는 문구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서 이런 문구가 나왔느냐? 8장 1절부터입니다. 8장 1절부터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7장 마지막과 8장 1절은 문장상 연관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8장 1절부터 시작한 말씀에 그 마지막 말이 결론적인 말이 10장 마지막 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시간 되는대로 우선 8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8장 1절부터 몇 절을 읽겠습니다. 6절까지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지금 여러분께서는 어떤 주제로서 이 성경을 읽어가셔야 하느냐 하면 그 이 문장의 끝이나는 10장 마지막 절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즉 지금 오늘 이 시간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고, 또 저렇게 저렇게 하면 하나님을 박대하고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말씀드리는 이런 내용들을 관심있게 받아들이고 그 내용들처럼 여러분께서 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입니다. 아주 중요하지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늘 동행해야지 하나님을 밀어내고 박대하고 오히려 성전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에 있었으면 괜찮을 텐데 성전에 나와서 잘못하므로써 하나님의 전을 버리고 곧 하나님을 버리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면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면 그 내용을 잠시 설명을 드려봅니다. 이 총독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학사 에스라를 청하였습니다. 신학에 대해서 잘 아는 성경을 잘 아는 오늘로 치면 목사나 신학교수나 그렇게 되겠습니다. 이 에스라를 청하여서 뭘 해 주기를 바랬느냐 하면 성경을 읽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가져와서 읽는데 아무 데서나 읽는 것이 아니라 따로이 특별하게 만든 나무단 위에 섰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강단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 이런 강단에 이제 에스라가 성경을 이렇게 그날 읽을 성경을 받아서 펴들고 읽으려고 합니다. 읽으려고 할 때 모든 백성들이 어떻게 했느냐? 전부 일어섰다 그것입니다.
이 성경을 특별히 만든 단상에 서서 이 성경을 받들어서 읽으려고 할 때 모든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그겁니다. 왜 일어섰느냐? 이 성경속에 있는 말씀은, 이 율법책 속에 있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통해서 누구의 목소리로 나오던지, 구약성경에 보면 천사들을 통해서 말씀 많이 했어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했는데 그때 천사가 말했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에스라가 섰던지 누가 섰던지 하나님의 말씀책을 들고서 낭독을 하기 시작할 때 일제히 일어섰다 그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 것이지요.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할 때에 그저 하나님이 앞에 서서 말씀하는 것으로 여기는 자세를 갖지 못한다면 이건 하나님의 전을 버리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나올 때마다 여호와를 송축하면서 6절에 보면 아멘 아멘 응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물론 에스라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집니다. 이 들려졌을 때 저들은 경배했다 그겁니다.
보통 이 성경 읽는 것을 "성경 읽겠습니다. 낭독하겠습니다." 이렇게 잘 하지 않고 "성경을 봉독하겠습니다." 이렇게 잘 말씀합니다. 봉독은 받들 봉(奉)자 읽을 독(讀)자, 그러니까 받들어 읽겠습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성경은 받들어 읽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이크 잡고 다니면서 성경 꺼풀만 하나 잡고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
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을 열때에는 봉독한다 그겁니다. 받들어 소리내어 낭독하여 백성으로 듣게 한다 그겁니다.
그러면 듣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 그겁니다. 그러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말하든지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서 발하여져서 내 귀에 들어오는데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뭡니까?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 봉독할 때 전부 일어나서 경건한 마음으로 이제 받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금 이 성경 내용이.
또 우리 교회는 순서가 그렇게 안 짜여져 있습니다마는 일반 말씀에 대하여 비중을 두는 교회에서는 성경봉독 후에 찬양을 합니다. 성경봉독 후에 찬양을 하고 찬양 후에 설교를 합니다. 왜 성경봉독 후에 찬양을 합니까? 예배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순서가 아직까지 제대로 들려지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봉독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까 바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지요.
누구에게 찬양? 주께 찬양이다 그겁니다. 단을 통하여 말씀을 그 종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타나신 우리 하나님. 그래서 바로 찬양을 바로 봉독 후에 드리게 되지요. 그것 바람직한 겁니다. 그러나 저희의 경우는 찬양 후에 성경을 봉독하고 성경봉독 한 후에 바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성경봉독 할 때에 과연 하나님이 오셔서 오늘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해서 심각하게 듣고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성도는 오늘날 많지 않고, 찬양을 하는 동안에 읽었던 본문을 다 잊어버리더라 그겁니다.
"찬양 잘 하네. 누가 입을 잘 벌리네. 누가 튀어나오네…" 이렇게 하면서 그 앞에 나타났던 하나님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기 때문에 뒤에 설교를 할 때에는 무슨 본문을 했는지. 또 본문과 상관없이 설교자는 설교를 막 해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되기 때문에 본문을 읽고 바로 해석을 해서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를 빨리 알게 해 드리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는 합니다마는 성경봉독 직후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 전에 현현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런 뜻에서 성경 봉독후에 찬양을 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전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므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했다 그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다 그겁니다. 그러나 이제 깨닫고서 이제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주일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주일 예배당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주일 예배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8장부터 10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7절부터 또 읽어보겠습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바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아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그랬습니다.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이 7절에 보면 예수아부터 지금 제가 이름을 바로 읽었는지 틀리게 읽었는지 모릅니다 하도 여럿이 나와서. 그런데 왜 이 여러 사람이 나왔는가 하면 이 여러 사람들이 다 성경을 낭독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교사 자격증을 정직으로 획득하신 분들도 계신데 이와 같이 그 가르치는 분들이 여러 사람이고 또 레위 사람들과 합해서 여러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공히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의 앞에서 서 있는, 즉 말씀 앞에서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첫째 단계는 뭡니까? 율법을 낭독하고. 낭독할 때 어떻게요? 받들어 읽는다 그랬지요.
낭독한 그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절 다시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그러니까 읽은 본문을 해석해야 됩니까, 본문 읽어놓고 자기가 준비한 대로 엉뚱한 설교를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야 됩니다.
이 특별히 만들어진 단상과 그 앞에 모인 백성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났을 때에는 백성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책망을 받든지 위로를 받든지 축복을 받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영혼에 생명이 되는 것이지 목사 개인의 사상이나 개인의 지식은 소용이 없는 겁니다.
들을 때에는 재미있고 고개 끄떡끄떡 하지만 세상 사는 지식은 영혼에 양식 되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해 주어야 된다 그겁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 가서도 이 내용으로 강의할 때 많은 목사님들이 굉장히 도전을 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주고 받은 말이 뭔가 하면, 이렇게 놓고 볼찐데 목사가 설교준비를 많이 할수록 엉터리 방향으로 간 것 아닌가 그랬어요.
설교준비를 많이 하면 성경을 많이 읽고 이 성경의 뜻이 백성들로 하여금 한 번 낭독했을 때 들려졌을 때 "이 뜻은 이런 것이요 이 뜻은 이런 것이요." 하고 읽은 성경을 풀어주어야 되는데, 준비를 많이 하다보니까 본문은 내버려 놓고 자기 마음대로 첫째 둘째 셋째 다 갔다 그겁니다. 그리고 본문 구절은 어떻게 썼느냐? 본문을 위하여 해석을 해준 게 설교가 아니가 설교를 위하여 본문을 양념으로 갖다 썼다 그겁니다.
그래서 "어이할꼬! 하나님을 모시는 날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서 임하신 성령을 우리가 밀어낸 것이 아닌가. 이 단에서 하나님 외에 누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이땅에 오셔서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는 한 마디도 내 말을 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앞에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것 낭독했으면 그 낭독한 것을 해석해야 되는데, 그것은 그저 어디를 가든지 말든지 자기 생각대로 꾸며서 준비를 해온 것을 설교하고 그 자기 준비한 지식과 어떤 방향을 성도들에게 의식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끌어다가 오히려 보탠다 그겁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지 말씀이 엑스트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분들이 이같은 행위에 대해서 또 이같은 일에 대해서 크게 함께 고민했어요.
느헤미야서에 나타난 이 백성들은 어떻게 했느냐? 특별히 구비된 단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봉독하고 그리고 읽을 때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내가 섰다 생각하고 겸손하게 조용히 일어서서 경건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난 다음에 이제 그 뜻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자로 나누워서든지 한꺼번에든지 설명을 해 주는데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되 다 깨닫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백성 전부가 깨달아야 되겠지만 여기에 '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쯤만 알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뜻을 풀어주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외에는 내가 결코 말하지 않겠노라. 성령께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외에는 절대 말하지 않겠노라. 내가 이미 있는 말씀만을 기억나게 하겠노라 했는데,
여기에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타나고 그 말씀 중심으로 풀어드리는 그래서 백성이 깨닫게 되는 이런 모습이 될 때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과 함께 깨닫는 자 심령 속에 들어가시고, 그 깨닫는 자가 그 말씀대로 행동하게 될 때 하나님의 열매가 나타난다 그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낭독하고 그 낭독한 말씀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9절을 보시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나 설교를 할 때 보면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장 32절에 말씀한 것과 같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도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백성들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자가 있었어요.
기쁜 내용을 전하여도 그저 태연하고 슬픈 내용을 전하여도 태연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성경을 봉독할 때나 설교를 할 때에 때로는 여러분이 들을 때에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책망받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속이 상하지요 일단은. 그래서 좀 시무룩해지지요.
또 어떤 때에는 축복을 받으시고 가정마다 창대해지고 번성하십시오 축복합니다. 금년에 제일 좋아했던 설교를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길갈" 수치는 다 굴러가고 이천년 새해 좋은 일만 있게. 그때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것 뭡니까? 피리를 불 때 춤추고 또 큰 책망이 갈때에는 시무룩해지고. 성전 대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지대를 쌓기 위해서 배가헌금을 해야 됩니다 라고 하니까 아멘아멘 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제 좀 짐이 된다 싶어서 약간 무거워지더라구요.
그러니까 무거운 내용이 오면 무거울 줄 알고 또 기쁜 내용이 오면 또 팔팔 뛸 줄 알아야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더라 그겁니다. 슬픈 애곡을 해도 같이 울지 아니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도 기뻐 뛸 줄도 모르더라 그겁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자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자다 그겁니다.
그건 뭡니까?
기쁜 내용이든지 슬픈 내용이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면 내가 충격을 받지요. 기쁜 충격도 받을 수 있고 슬픈 충격도 받을 수 있는데, 설교든지 봉독해 읽어드리는 낭독하는 말씀이든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그게 무슨 하나님이야? 그리고 또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해서 슬픈 얘기를 해도 슬프지도 아니하고 기쁜 얘기를 해도 즐거워도 하지 아니하는 완전한 무반응, 그 무반응한 사람은 주일에 교회 와 앉아있어도 하나님과는 정확하게 남이다 그겁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이 말씀에 생명이 있음을 또한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이 말씀대로 이루어짐도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없다는 것을 아시면 아멘합시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는 나오지만 체면상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과는 일단 담치고 있는 사람이지요. 주로 처음 오신 분들, 좀 오래 왔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 거듭나지 못했거나 신앙의 마음이 열리지 아니한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있어요.
"아이구 뭐 저렇게 목사가 설교하는데 회개도 하고 목사가 설교하는데 아멘하고 저렇게 왜 저럴까?" 이런 분들이 있어요. 그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경우에 이런 경우가 있겠지요. 이런 분들이 있겠지만 오늘 그것과는 달리 아까 읽었던 말씀 9절 말씀 아주 중요합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게 무반응입니까, 반응했습니까? 반응했어요.
이 반응을 하므로써 여호와의 전을 버리지 않게 되었어요. 다 우는지라. 그런데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라. 울지 말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게 참 중요한 얘깁니다.
주일이 맞습니까, 일요일이 맞습니까? 이상하네요. 일요일도 맞지요 주일도 맞지요. 휴일도 맞지요. 그런데 우리가 왜 굳이 주일이라고 합니까? 주일은 내 날입니까, 주의 날입니까? 주의 날입니다. 이 전은 우리가 기도하는 집인데 우리 교회인데 또한 이 전을 가리켜 우리의 전이라 합니까, 주의 전이라 합니까? 주의 전이라 합니다.
예배는 내가 받습니까, 주께 드립니까? 주께 드립니다. 그러면 주의 날 주의 전에 드려지는 모든 예배와 또 주의 날 주님의 전에 올라온 백성들은 백성 위주입니까, 하나님 위주입니까? 하나님이 위주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날에 기분은 하나님께 맞춰드려야지 내 기분이 살아나서는 안 된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날따라 아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면 그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고 설명을 해석을 잘 했던 모양인데 그 해석을 따라보니까 그만 이 백성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보니 하나님앞에 죄송하고 전부 슬퍼서 울었다 그겁니다.
우니까 이 에스라를 비롯한 가르치는 모든 이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네가 울고 싶다고 울어서는 안 된다. 여기가 어디냐? 하나님 앞이 아니냐. 오늘이 무슨 날이냐? 하나님에게 드릴 성일이 아니냐. 오늘 네가 이 자리에서 이 날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네가 슬프다고 네 기분을 드러낸다면 오늘 주인되신 주님의 기분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네가 슬퍼도 너는 오늘은 슬퍼할수 없다. 왜? 네 날이 아니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오늘은 하나님만 기분이 살아야 되는 날이야.
반대로 기쁜 말씀이 주어져서 "야 너희의 수치는 어제 날짜로 길갈하고 이제는 새로운 날이 펼처진다. 뉴 밀레니엄." 하면서 막 좋은 말씀이 올 때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대단히 커집니다. 그럴 때에 반드시 지도자는 무엇을 절제시켜야 되겠습니까?
오늘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 기쁨의 말씀 위로의 말씀을 들었으나 오늘 이 자리가 어디냐? 하나님의 전이요. 오늘은 누구의 성일이냐? 하나님의 성일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쁘다고 너희가 주인공이냐? 너희 오늘은 기뻐도 기뻐할 수 없느니라. 왜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시며 오늘은 기쁘든지 슬프든지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나타내시는 날인데 어찌 네가 네 기분을 따라 슬프다 기쁘다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답시고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그저 기뻐하고 하나님의 기분은 기뻐하는 우리를 인하여 슬픈지도 모르고, 또 우리가 책망을 받으면 그냥 고개가 떨어지고 책망하는 설교가 계속되면 시계를 보면서 안 끝나나 이렇게 된다면 그 성전 안에 주인은 누굽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 중심입니까, 자기 중심입니까? 자기 중심이지요. 예배 잘 드리고 간 것 같지만 자기 중심으로 기분을 다 내어버렸다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한 것이지요.
9절 하반절에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이나 기쁨을 너희의 기분대로 나타내지 말라"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10절 이하 계속 읽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의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일어서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그대로 낭독한 그것을 해석해 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가 어이할꼬. 큰 죄를 지었도다." 하면서 모두 슬퍼서 울었더니 지도자가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
“오늘 이곳은 너희 집이 아니로다. 일주일 중에 엿새가 아니로다. 오늘 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일이요 하나님의 전이요 오늘 나타나서 영광을 받으실 이는 그리고 마음대로 자기의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이시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들어온 너희가 너희 기분을 따라서 이렇게 기분을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근심하지도 말라. 슬퍼하지도 말라.”
제가 항상 여러분에게 주문하지요. 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한시 간 만이라도 제발 주시옵소서 기도 좀 덜 하라고요. 엿새 동안에 내내 주시옵소서 하다가 이 하룻 만이라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아파도 괴로움이 있어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그 아픈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그리고 다 마치고 난 다음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나아가서 먹고 마시라.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미리 예비해온 사람들이 있어서 다 모아가지고서 즐기라. 춤추라. 노래하라.
이게 무슨 말씀이냐?
예배를 마쳤으니 이제는 먹고 놀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요. 그러나 자 이제 11절 이하를 보시겠습니다.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제가 이 내용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이 11절과 12절에 보면 종용히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안식일 날에는 주의 날에는 종용히 있는 줄로 생각해요. 종용히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진정 이 뜻은 무엇입니까? 12절에 가서 보면 먹고 크게 즐거워하라 그랬어요.
음식을 먹고 단 것을 마시고 없는 사람 안 해온 사람이 있으면 나누면서 막 즐기라는 겁니다. 왜 즐기느냐? 즐길 이유가 마지막에 나왔지요.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왜 그날 파티를 해야 되느냐? 주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 기쁘고 즐거워서 파티를 하라는 겁니다.
그 읽어 들린 말씀을 잘 해석해주므로써 잘 깨달았기 때문에 너무 너무 기뻐서 우리 이대로는 못 돌아간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곧 하나님을 뵈옵고 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거리에 계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리리요마는 우리가 주의 종을 통해서 다 풀이하여주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 깨달았으니 우리가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으랴. 자, 단 것을 마시고 살진 짐승을 먹읍시다. 그리고 춤을 춥시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겁니다.
그러나 요즘 어떤 경우에 가만히 살펴보면 무슨 크리스마스 때나 추수감사절 때나 예배 후에 음식을 드리거나 선물을 드리는 게 있으면 하나님 전에 올라오다가 벌써 보고 "아이고 큰 가마솥에 김이 한 가마솥 다섯 개가 펑펑 나구나. 또 떡국이구나." 그리고 또 조용하면 "오늘은 뭔가?" 사각 봉투에 주면 "오늘은 빵인가? 과자인가?"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그저 식품이 뭔가 종류가 뭔가 먹는 것은 먹는 것대로 관심하는데 이 성경은 주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그냥 집에 가지 못하고 전부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왜 모여서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해야 되느냐? 그날 들린 말씀 인하여 즐거워 먹는다 그겁니다.
그리고 그날 들려진 말씀을 깨달아서 모든 내용을 깨달은 것이 너무 기뻐서 "이대로는 못갑니다. 오늘 우리 놀러갑시다. 오늘 우리 운동합시다. 오늘 우리 그냥 갈 수 없잖아요." 그런데 운동을 위하여 운동하는 것 아닙니다.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내 귀로 들었다는 그 거리에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것 그 기쁨에 넘쳐서 운동도 하고 즐긴다 그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사야 오늘 인용성구로 나타나 있는 58장 13절 하반절에 보면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어느 날을요? 여호와의 성일.
자 성일이면 우리의 성일입니까,
여호와의 성일입니까?
여호와의 성일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입니까,
주님의 날입니까? 주님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존귀히 여기고. 그러니까 무엇보다? 우리의 감정보다 주님의 감정을 존귀히 여기고. 인정하시면 아멘합시다. 그리고 그 날에 내가 쉬는 것보다 주님의 즐거움을 더 존귀히 여기고. 인정하시면 아멘합시다.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아 주일날은 오락을 안 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러니까 주일날은 누구의 길로 가야 됩니까? 주의 뜻대로 가야 된다 그겁니다. 그리고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너의 오락을 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절에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주일날 아침부터 여러분이 경건하여 오늘은 내 날이 아니니 우리 가족끼리 노는 것은 계획하지 말자.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주의 전에 올라가서 주님의 기분만을 위하여 영광을 돌려드리자.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주의 음성이 내 귓전에까지 오셨으니 불과 몇 미터 거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하시고 만나주시니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려졌을 뿐만 아니라 풀이해주는 자로 하여금 그 낭독한 말씀을 우리가 다 깨달았도다.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러므로 이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우리 모여 음식을 나눕시다.
그런데 음식을 먹을 때에 이 내용을 보면 그저 먹는 사람 먹고 마는 사람 말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곧 다 와서 모여서 먹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잔치를 잔뜩 벌려놨는데, 칠순 잔치든지 또 아니면 돌잔치든지 결혼식에 피로연을 준비해 놨는데 백 명분을 준비했는데 오십 명밖에 안 와도 참 준비한 사람 속이 상하고, 백 명분을 준비했는데 백 명이 와 가지고서 예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바깥에서 봉투 하나 딱 던져놓고 미리 가버리고 이렇게 되면 그 주인공에 대하여 예의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예의 없습니다. 마지못해 왔다고 점만 찍고 가지요.
또 이제 오늘 우리가 축하해 주러 오신 여러분을 위하여 참 소찬이지만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준비했는데 다 잡숫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면 오늘 음식이 뭔가. 육식이냐 채식이냐 양식이냐 뷔페냐 이런 것 따질 것 없이 누구를 위하여 먹는 겁니까? 그 주인공을 위하여 먹는 겁니다. 자기의 입맛을 따라서 먹고 마시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참 좀 죄송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무슨 모임이 있어 가지고 무슨 회갑이다 결혼식이다 돌이다 해 가지고 모여들면 그 주인공의 기분과 그 주인공 가족을 위하여 같이 웃을 때 웃어도 주고 가기 싫은 데도 가 주고 이래야 되는데, 그만 거기서 음식이 나오든지 하면 "이건 내 입에 안 맞네. 뭐 한다 하나? 윷놀이? 아 나 윷놀이 싫어."
그 뭡니까? 주인공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를 위하여 산다 그겁니다. 세상 그래서는 못삽니다. 선진국으로 갈려면 그 주인공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시킬 줄 아는 수준 되야 됩니다. 남을 배려할 줄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지요. 하물며 세상도 그러한데 하나님 앞에서야 오죽하겠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음식을 차려놓으면 전부 다 와서 먹는데 그 먹고 즐거워하고 크게 즐거워했는데 그 즐거워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이요, 그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
요즘도 그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교회 특색은 설교를 듣고 이제 진해나 창원이나 마산으로 차 타고 버스 타고 가시면서, 요새는 뭐 자가용으로 가니까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주로 이 버스로 갈 때는요 저 장복산 터널 넘어갈 때 계속 "오늘 말씀이 멋지지 않느냐. 오늘 말씀이 어떤지 아느냐." 가면서 그 얘기 계속이고, 또 구역예배 가서도 주일날 설교가 계속이고.
들었던 주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주고 그 말씀이 대단하지 않느냐 그렇게 하는 순간은 누가 함께 계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전이 자기에게 있다 그겁니다. 그렇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자다 그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슬프든지 즐겁든지 하나님의 전에서는 자기를 들어내지 말라 그겁니다. 오직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기분만을 생각하라 그겁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요. 어명을 받는 신하들, 역사책이나 혹은 역사 드라마 보게 되면 나오지요. 이제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그 신하 귀양가 있는데 사약 약사발 하나 하고 어명장이 딱 떨어졌습니다. 그래 사람이 와 가지고서 "어명을 받으라!" 옆에다 뭘 놔 놓고요? 약사발 놔 놓고요. 그 어명은 뭡니까? 이것 마시고 죽어라 그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약사발의 내용은 참으로 슬프고 기가 막히지요. 막 주저앉을 내용이지요. 마시면 죽는데. 그러나 그 신하들은 임금을 귀하게 여겨서, 이것을 내린 임금을 기분을 살려서 탁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탁 받습니다. 그래 약사발 받을 때도 먹으면 죽는 약인데도 대강 이렇게 칠칠 먹지 않아요. 그저 임금이 주신 것이니까 어주를 내린 것처럼 조용하게 먹습니다. 먹고 난 다음에 뒤틀리니까 팍 꾸부러지지만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슬퍼도 임금이 내렸기 때문에 사약이라도 슬픈 기색을 내지 않고, 그것을 받기 전에 저 임금이 계신 왕궁을 향하여 북향재배를 하고 그리고 받는다 그겁니다. 이 뭡니까? 임금 앞에 신하는 충성만 있을 뿐이다 그겁니다. 기분은 임금만 있을 뿐이다 그겁니다. 임금이 나를 죽기를 바라니 이 약 먹고 내가 죽어드리는 것이 임금의 기분을 살려드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주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진정 이래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신 거지 그렇지 않고 내 기분 나쁘면 뛰쳐나가 버리고, 조금 책망 들으면 조금 시험든다 싶으면 그냥 교회도 안 나가고 그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에 있는 자지요.
또 기쁜 소식이 와도 마찬가집니다. 임금이 옆에 앉아있는 신하들을 보고서 "아 그대는 오늘부터 영상 자리에 올라앉으시오." 영상 자리는 뭡니까? 일인지하 만인지상. 요즘의 총리.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임금 하나밖에 없고, 모든 백성 위에 서는 영상에 올라앉으시오. 맞지요? 영상이 그런 거지요?
그랬을 때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 기쁘다고 해 가지고 우리처럼 "아멘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런 신하 없습니다. "아이고 신났네. 이제 됐네. 야 이제는 잘 살게 됐다." 임금 앞에서 그런 표현 하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거두어 주옵소서."
속으로야 어디 거두고 싶어? 정말 기쁘고 즐거운 것이지요. 그러나 임금 앞에서는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는 늙었고 그리고 경륜도 짧고 지식도 적은데 이 큰 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또 임금이 "아, 너무 사양하지 마시라. 그대가 가장 잘 할 사람이라. 열심히 해 보게나."
이렇게 하면서, 죽을 죄를 진 것처럼 이렇게 나가 가지고 이제 가마 타고 자기 집에 가 가지고서는 자기 부인에게 "임자, 빨리 들어와 보소. 나 오늘 영상 먹었어." "아 그럼 당신 말고 당신보다 더 잘할 사람 없습디까?" "나 말고 어느 놈이 할 놈 있어?" 자기의 집에 가서는 자지 맘대로 말하더라도 임금 앞에서는 자기 기분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 자리는 임금의 기분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겁니다.
우리가 주의 전에 올라와서 주님 앞에 예배드릴 때 슬픈 말씀 기쁜 말씀 들어도 아무 반응도 없는 사람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등돌린 자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말씀이 내게 들려온다. 오늘 목소리는 누가 내느냐 그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까 8장에 나온 특별히 제작한 단 위에 서서 그 백성 앞에 주의 날에 말씀을 시작하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온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이더란 말이냐? 그 뜻만을 해석해 주는 학사, 그 뜻만을 해석해 주는 교사가 되야 된다 그겁니다.
주의 날 주의 전에서 하나님만을 선전하고 하나님만을 소개해 드려야 될텐데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철학들을 준비해 가지고 자기의 방향대로 백성을 이끌어간다면, 이미 하나님과는 등을 돌렸다 그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 뜻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풀어주는 주의 종이 있어야 되고, 그 풀어줄 때에 주의 말씀을 그대로 풀어주는 그 낭독한 것을 풀어주는 일이 있고 여러분께서 그것을 밝히 깨닫게 되었을 때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 깨달은 것 자체는 어떤 것이냐?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생명이 되었다 그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능력이 이미 되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성공하고 가정으로 돌아간다면, 여러분 안에 드신 진정한 깨달아지신 하나님이 그 깨달아진 대로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께 찬송을 드리십시다. 50장 입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참으로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지금도 임하여 오셔서 운행하시며 역사하시며 주의 말씀하신 그대로 그 믿는 자에게서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심이, 진실로 주의 날을 주의 날로 주의 전을 주의 전으로 주께 드리는 예배를 주께 드리는 예배로 온전히 구별하여 드려서 주의 말씀책을 읽어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 깨달음으로 오셨으니 이 말씀 깨달을 대로 내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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