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 1 - 4 믿음이 약한 자를 용납하라 1.
14 장 : 서로 덕을 세움
1. 믿음이 약한 자를 용납하라 ( 14: 1 - 4 )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롬 14: 1 비판하지 말라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배워 알고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초대 교회에는 음식 문제나 절기 문제에 있어서 그런 자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에 규정된 의식법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폐지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자들은 옛 습관에 젖어 거기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용납하고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 '한편')는 12: 1 - 15: 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 19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 절의 '연역한 자'(*, 아스데눈타)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스데네사스)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 19의 '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 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 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 7,9-10. 9: 22의 '아스데네스'(*, '약한')나 고전 8: 11-12의 '아스데네오'(*, '약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 고전 8: 7, 9-10 -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 고전 9: 22 -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고전 8: 11-12 -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즉 본 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Sanday and Headlam).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 26).
그런데 본 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 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2] 너희가 받되(*, 프로슬람바네스데)
이 단어는 '받아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 27과 28: 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welcome;RSV, LB).
* 행 18: 27 -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 행 28: 2 -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견을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다.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롬 14: 2 연약한 자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성경에는 명료하게 계시된 진리들이 있고 명료하게 계시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진리들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과 견해를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록 성경에 계시된 진리에 비추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행하지만 다른 이들은 믿음이 연약하여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믿음이 있는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1]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 1-47)도 있었고 생명 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
* 딤전 4: 3-4 -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만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Godet).
* 창 9: 3 -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 잠 15: 17 -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 장),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