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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되지 않고 있는 문제의 문제제기
- 송명화의 <춘향에게>을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하는 일없이 피곤한 일생 나른해 난 기지개나 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비 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 모두 원해 나도 원해/
자우림의 <일탈> 중에서
I. 열며
이 수필은 본격수필을 지향하는대한민국 1등 수필전문지 에세이문예 송명화 주간의 작품이다. 그녀는 주로 남해에서 성장하면서 남해초, 남해여중을 나오고, 진주여고를 거쳐 부산교대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그리고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시대와 역사를 보는 관점도 이런 바운드리를 쉽게 넘어서지 않던 작가였다. 그러던 그녀가 신춘문예 수필 당선 이후로 ‘수필은 사회의 반영이다’라는 모토로 수필세계와 현실세계의 접합점을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작가로서의 의식 변화는 그녀의 수필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역사와 시대의 한가운데서 그 흐름을 직시하고 사회의 문제를 작품 속에 담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요즘 발표되고 있는 수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작가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그녀는 변화와 인식을 주제로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주의 사고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사회수필을 써왔다. 이번 작품 <춘향에게>는 관습제도를 소재로 삼아 시간의 관성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그런 무의식이 얼마나 여성의 삶을 아프게 하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이 수필은 세상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배우게 되는 과정을 정직한 눈으로 그려나가며, 언제나 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어 감동을 준다.
송명화의 수필은 수사나 이미지가 구체적이어서 명쾌하다. 역사와 시대성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저항에 대한 노래, 깨어있으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 동안 한국 수필이 보여주지 못했던 인식의 세계를 수용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그녀의 수필을 조망해 보면,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확실해진다. 수필이라는 장르에 사회의식을 지향하려는 가치를 언어로 실현하는 일은 수필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일 수 있다. 수필은 사회의 반영이다. 수필가 개인의 표현 욕구에서 꽃을 피운 수필은 결국 독자와의 감성적 공유를 추구한다. 따라서 한 작가의 수필세계는 현실세계와의 접합점을 찾는 데서 존립의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보수성을 지닌 그녀지만 작가의식의 측면에서 문화적 진보성을 확보함으로써 그녀는 균형 잡힌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녀의 수필이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은 세상을 다각도로 보여주려는 수필가의 세련된 인식과 지성의 눈이 있기에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런 균형 감각의 가치들을 언어로 붙잡아 수필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한 <춘향에게>를 통해 이 수필이 어떻게 한국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키는지 살펴보자.
II. 펼치며
송명화의 문학관은 보편성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개별적인 것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송명화의 문학이다. 이는 송명화가 문학의 기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수필 <춘향에게>에서 한 작가가 수필가로서의 작가적 사명을 깨닫고 역사의식으로 사회를 조망하면서, 우리 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문제들을 수필로 나타내어 함께 고민해보고자 하는 포부와 희망을 함께 읽어나간다. 여기에는 단순히 표현 욕구의 강박으로만 폄하할 수 없는, 여성에게 불리한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실존적 몸부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동일은 좋은 수필은 토론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결국 작가의 문제의식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작가라면 어떤 현상이든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관성에 매몰된 작가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데 주저하는 편이다. 우리나라 같은 유교문화가 오래 동안 사회 지탱 원리로 작용해왔던 나라에서 기존의 관습이나 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본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요, 모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춘향에게>가 주는 감동은 지금까지 봐왔던 춘향전에 대한 생각을 단숨에 뛰어 넘는다. 성숙한 의식의 표출이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연민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춘향을 새롭게 보고 쓴 연극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일방적 유교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탈선’은 매력적인 낱말이야. 만약 연극 제목이 ‘춘향전’이나 ‘열녀 춘향’이었다면 나는 표를 사지 않았을 테지. 「탈선 춘향전」이란 제목에 끌렸었거든. 아름다운 네 모습이 빛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재미있게 네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심지어는 남원을 찾아 광한루를 거닐면서도 2% 부족하던 이유가 아마도 그것이었지 싶다. 여성의 남성의존적인 삶의 모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어. 선을 그어놓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안전하긴 하지만 세뇌당하지 않은 자유로운 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
- <춘향에게> 발단 부분 -
춘향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수필의 갈피갈피에 진하게 배어있다. 특히 <춘향에게>는 작가적 자의식의 생성 과정이 시대와 사회성의 접목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수준 높은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 작품으로서 단연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송명화가 던지는 ‘여성적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실로 오랜만에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을 안겨준다. 근래 여성수필들 중에서 이처럼 진지하게 여성의식과 종속적 삶의 관계를 천착해 보인 수필이 있었던가. ‘탈선은 매력적인 낱말이야’라는 서두를 장식하는 멘트가 서늘한 감동마저 준다. ‘열녀 춘향이었다면, 표를 사지 않았으리라’는 멘트 역시 ‘일탈’이란 화두를 다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진다. 발단부 석 줄의 문장을 통해 그녀는 주제의식의 상상화를 놓으면서, 함축적인 언어 구사를 통해 산문에 긴장감을 더하고 있어 한층 문장의 맛을 느끼게 한다. “선을 그어놓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안전하긴 하지만 세뇌당하지 않은 자유로운 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라는 표현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이 수필에서 중요한 코드는 ‘선線’이라는 상징이다. 작가가 말하는 ‘선’은 작품이 전개되면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여기서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도모된다. ‘탈선’의 부정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논리적 교직을 통해 기존의 가치관을 작가는 정조준한다. 안전한 것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세뇌당하지 않은 자유로운 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시대착오적 유교적 가치의 부당성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감상하는 것은 이 수필을 읽어나가는 큰 묘미라 하겠다.
마패를 치켜들고 자랑스럽게 어사출도를 외치는 이몽룡에게 내지르는 너의 말에 속이 시원하였다. 눈꼬리를 추켜세우고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너를 보며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뒤이어 신나게 발길을 날리는 너의 날렵함 또한 얼씨구나 하고 박수를 받아 마땅하였지. “아이고, 경사났네. 서방니임.”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달려가 포옥 안기는 것이 지금까지 ‘춘향전’의 설정이 아니었더냐. 그것이 늘 의아하였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오매불망 그리던 낭군이라 해도 소식 한 자 없이 잊었던 소치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적어도 눈이라도 흘리고 패악을 부려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싶었다. 좋은 게 좋다며 받아들이기에는 시대적 배경에게 참으로 많이 양보하여야만 하는 처사라고 투덜거렸지.
탈선(脫線)이라고? 누가 그은 선이지? 춘향이, 네가 그은 선은 아니지 않으냐. 권력을 가진 자가 교묘하게 계급을 정하고, 힘 있는 자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법도를 정해 놓고 오랜 세월 굵게 덧칠해온 선을 사람들은 받아들여 왔다. 가부장제라는 무거운 지붕을 밀쳐내기에는 방자나 향단이나 너나 네 어머니나 아무런 힘이 없었지. 변학도나 이몽룡에게 정곡을 찌르는 욕을 퍼붓는 너의 용기를 그들은 탈선이라 부르고 우리는 편의상 받아들여. 하지만 그 선은 조선의 여성이나 하층민중들의 의지가 합해져 인정받은 결정이 아닐 것이기에 나는 옳은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탈선이라 부르는 것은 인습적 고리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이니 말이지. 그럼, 벗어나기 전의 선(線)이란 뭘까?
- <춘향에게> 전개 부분 -
‘일탈’의 개념이나 원인은 자우림의 가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화끈한 일’을 꾸미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짓, 무언가 색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일탈 행동은 주로 사회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규범이나 관습의 한계 밖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행동이 일탈 행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시대와 사회, 시간과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적 행동을 평가하는 가치관이나 규범이 역사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탈선이라고? 누가 그은 선이지? 춘향이 네가 그은 선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진술을 통해 남성중심주의의 무비판적, 무저항적 순종이나 맹종을 경계한다. 여성은 지배 권력의 사회화에 따라 안전선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남존여비라는 유교적 악습을 사회를 지키는 덕목으로 알고 지켜왔다. 열녀 춘향도 지배 권력을 신화화하는 도구에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이 수필은 열녀 춘향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탈선 춘향을 내세워서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적 가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일종의 여성문제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 수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춘향이라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물수필이기도 하다. 이 수필의 주요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과 다른 탈선 춘향이다. 이 수필은 춘향의 인물과 행동을 다루며, 이 행동의 연속적인 사건을 통해서 작가는 새로운 인식에 이르며, 이 인식이 작품 속의 주제로 연결된다. 이 수필을 읽는 쾌미는 주동 인물 춘향의 언변이나 행동을 해석하는 작가의 논리성에서 맛볼 수 있다. 작가는 춘향이 내지르는 욕설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조선 사회 내부의 합의되지 않은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조선의 여성이나 하층민중의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제도는 결국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페미니즘적 입장이 아니라 그런 페미니즘적 입장을 어떻게 문학적 효과로 연결시켜 내느냐 하는 문제다. 그녀는 당대적 여성의 현실을 직시하며, 여성에게 불리했던 그래서 당하고만 살 수밖에 없었던 여성적 삶을 특유의 논리로 설득의 근거로 삼는다.
부부가 되면 벼슬을 구해 당상 높이 백성을 호령하겠다는 이몽룡을 낭군 될 자격이 없다고 하는 장면은 마치 스승이 제자를 꾸짖는 듯하였다. 벼슬이 되거들랑 백성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준엄한 질책은 서릿발 같았지. 결혼하면 너를 귀부인으로 만들어 노상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겠다고 꾀는 말에 ‘그럼 나는 아무 생명 없는 나무 둥치가 되어서 연장처럼 시키는 대로만 해야 되겠냐’고 응수하는 모습은 그 시대 모든 여인의 인간적인 비애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짠하였다. 올바른 도리는 양반, 상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있는 것이란 것을 이 도령은 뼈저리게 느꼈지 싶다.
- <춘향에게> 전개 부분 -
‘벼슬이 되거들랑 백성을 호령하겠다는 발상을 버리고 백성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춘향의 준엄한 질책에 공감을 표하면서 작가는 조선시대 계급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면서 그 시대 여성의 인간적인 비애를 들추어내어 감성적인 설득에 나선다. 춘향의 말에서 나온 ’생명 없는 나무 둥치‘란 비유는 인간의 조건으로서 중요한 상징이다. 인권적 가치가 말살된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작가적 인식은 조선이란 시대를 넘어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춘향의 일탈 행동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작가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 문제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루함이나 고리타분함’ 등으로 인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회 규범의 약화, 상반된 규범으로 인한 혼란, 사회적 규율의 무기력, 개개인이 행동하는 반향의 혼란, 사회적 가치관의 혼미, 제도적 수단의 무기력 등으로 소외감을 느낄 때 개인에 따라서 일탈 행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춘향의 일탈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존의 문화적 사회적 틀을 부정하는 문화적 실험을 하는 것도 하나의 일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서 문화의 정체를 견지하고 문화변동의 무리한 에너지로 작용하여 위대한 사회 개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송 주간처럼 여성주의 의식을 가지고 춘향의 일탈을 예의 주시하여 분석하면 사회문제가 노골화되기 이전에 감지되어 가치 판단과 그 방법을 모색해 주어 우리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한다. 작가의 가슴에 역사의 강물이 흐르고 있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배우자를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경제력을 첫 손에 꼽는 풍토 덕분에 요즘 결혼상담소에서 내놓는 좋은 배우자의 조건이 참으로 희한하더라. 거기에 비해 일 순위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올바른 가치관을 두 번째로 꼽는 너의 바람이 기특하구나.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봉사 삼 년이란 말이 득세하던 시대에 너는 살았지. 아직도 여자라는 이유로 눈 아래로 두거나 밀쳐지는 슬픔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단다. 하지만 백년가약을 맺는 자리, 걱정이나 안락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보다는 부부의 동등한 인간적 성장을 논하는 너의 처세는 한 마리 학과 같다. 한 치의 꿀림도 없는 다부진 네 성정에 오히려 이 도령이 풀이 죽었구나.
- <춘향에게> 결말 부분 -
위의 인용 부분은 수필의 구조상 결말 부분에 해당된다. 수필은 대우적인 문학이면서도 직접성을 피하여 완곡하게 우회하는 은근성을 체질로 하는 문학이다. 작가는 ‘배우자의 조건이 참으로 희한하더라’는 진술을 통해 남녀의 잘못된 사랑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결말에 와서 작가는 진정한 부부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논하면서 동등한 인간적 성장이 보장되는 것을 전제로 내세운다. 이는 아무리 사랑이 최우선적 고려 사항이라 하더라도 동등한 인간적 성장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진정한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는 관점이다. ‘한 마리 학’, ‘한 치의 꿀림도 없는’ 등의 표현은 신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놓여 있다. 자신의 논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노력에 힘입어 탈선 춘향은 일반적 의미의 ‘탈선’한 춘향이 아니라 삶의 억압기제였던 ‘선’을 제거하는 선구자적인 여성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친다.
수필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이런 여성문제 수필이 지향하는 바는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은 설득으로 완성된다. 작가의 견해가 얼마나 타당한가, 설득의 논리가 얼마나 정당한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작가적 인식과 맞물려 있다. 탈선 춘향에서 탈선은 변증법적 역설성을 갖는다. 탈선은 이미 탈선이 아닌 것이다. 이미 ‘선’ 자체가 잘못 그어진 것이므로 탈선의 ‘탈’은 정반대되는 의미로 귀착된다. 부부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어느 일방적인 한 사람의 도구적, 부속적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이라는 춘향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는 데는 모든 부부간의 관계적 불행이 가치관의 부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상대의 처지나 입장을 자기의 것과 함께 하지 않는 토양에서는 그 어떠한 사랑의 기운도 자라지 않는다. 오직 삭막한 바람만이 몰아친다. 춘향의 언설이나 욕설은 바로 삭막한 바람을 의미한다. 춘향을 ‘한 마리 학‘으로 승화시켜 나타낸 것은 곧고 굳은 신념으로 결코 여성 억압적 사회에 불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 같은 상징을 통해 나타나는 송명화의 예술적 창조력은 독자의 체험을 깊이 있게, 풍성하게 한다.
III. 나가며
송명화의 <춘향에게>는 탈선 춘향의 언설과 행동을 다시 보기를 통해 페미니즘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작가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를 초월해 바람직한 부부관계상을 세우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메시지를 함축적인 비유나 이미지로 형상화한 표현을 통해서 정서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미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부부 관계에서 바로 세워야 할 가치를 ‘탈선’으로 설정한 역설은 참신한 발상이며, 흥미로운 접근이라고 하겠다. 수필 문장의 효과적인 의미전달을 위해 수사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수필 미학을 구축하는 작가의 개성적인 문장 수법도 높게 평가된다. 여기에 더하여 수필이라는 작품 양식 안에 유한적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판단과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그리고 여성작가로서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 녹아 있어 감동이 증폭된다.
태양을 무조건 노란색으로 칠하고 바다를 무조건 파란색으로 그린 사람이 세계적인 화가가 된 적은 없었다는 말처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사고가 필요할 때가 많다. 사회 문화 속의 일탈은 문학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문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이 아니다. 사회현상 가운데 아직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것들을 찾아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말하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문제를 들추어내는 송명화 수필을 통해서 독자들은 그 문제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나아가 충격을 표백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탈은 예술가에게 새롭게 인식되지 않으면 그가 창조해낸 예술은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란 뜻에는 사회의 드러나지 않은 문제를 먼저 발견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송명화가 인식의 눈으로 발견한 ‘탈선’은 단순히 벗어남만 의미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불행이 운명을 가로막지 않게 하기 위해 다 같이 생각해 보게 하는 일종의 여과장치이며, 완충장치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은 자신의 문학관과 사회현실의 접합점을 확보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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