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7. 경북 복귀를 위하여
1 나는 1974년 5월 1일, 경북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마음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문제 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를 이 혼란의 와중에 보내시는 하늘을 생각해 보며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면 달게 지고 가야겠다.
2 그리고 보내시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전심전력을 기울여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구에 부임했으나 교회는 건축 공사 중 자금 부족으로 중단된 채 예배볼 곳도 없었고 아직 이사할 방조차 비어있지 않은, 실로 어수선한 환경이었다.
3 나는 그 현장에 들러 “이곳 식구들의 심령도 지금 이렇게 혼란되어 있겠지요, 어떻게 해야 되겠읍니까 지혜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리고 나와서 25일 후에야 비로소 부임하게 되어 식구들의 수습과 성전 수리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9월 18일 준공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4 나는 식구들을 수습하기 위하여 중심 식구 40일 릴레이 철야 기도회와 40일 야간 원리수련회를 갖는 한편 모든 구역 활동을 점차 폐지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면담을 통하여 전후 사정을 설명하여 주었는데 6개월이 지나고서야 식구들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었다.
5 1974년도부터 A형 교회가 신축되어 27곳에 헌당식을 가졌고 1975년 4월 6일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대구 실내 체육관에서 희망의 날 대집회를 개최했는데 10만 명이 운집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흐뭇해하시는 선생님을 뵈올 때는 참으로 감명 깊었다.
6 나의 둘째 딸의 이름을 작명하여 주셔서 더욱 나의 가정에 기쁨이 된 것이다. 그동안 집회 준비를 위하여 140여 명의 전도 대원들과 조그마한 교회에서 한 달 동안 같이 살면서 있었던 일화는 잊을 수 없다.
7 국제 기동대 660명을 맞이하던 날은 모든 식구들이 눈물로서 상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00쌍 축복 준비를 하였으며 수차례에 걸친 선생님의 순회 집회를 주관하게 됨도 영광이었고, 시군별로 순회하며 희망의 날의 집회를 실시하여 기관장과 유지들을 초청하여 만찬과 영화 상영 그리고 교회 소개를 하였으며, 극장과 문화원을 빌려서 공개 강연을 갖게 되었는데 내가 주제 강연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부족한 사람을 세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체휼할 수 있어 더욱 감명 깊었던 것이다.
8 초교파에서 주관하는 목사 장로 원리 공청회에 10여 차례에 걸쳐 강의, 1980년도에 들어와서 27개 시군의 안보 단합대회에 격려사 및 주제 강연, 읍면 지부장과 자문위원 중심한 원리공청회 그리고 교수원리 공청회 등에서 원리강의를 맡아 실시케 된 것도 큰 영광과 은혜의 순간들이었다.
9 그리고 경북도내 이•동지부장 전체를 동원하여 실내체육관에서 승공단합대회를 가질 때는 버스만도 200대를 대절하였으며, 점심 식사를 위한 케이크만도 만개를 만들었는데 트럭으로 두 대분이었다.
10 대성황 속에 감명 깊고 은혜롭게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보희 총재님을 모시고 7개 도시 집회 시는 만찬 집회와 공개 강연을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큰 감명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11 또한 4개 학교에서 1천여 명의 대학생에게 네 차례에 걸쳐 승공 교육을 시키기 위해 중앙연수원에 입소시킨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처음 있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천주교 재단의 여자대학에서는 학장이 신부였는데 승공연합에서 하는 일을 믿을 수 없었던지 교수 4명을 동행시켜서 학생 옆을 떠나지 말고 전체를 관찰하여 기록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12 그러나 그들이 교육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고 돌아가서 수차의 회의 결과 전교생에게 두 차례에 걸쳐 교육을 시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이변이 생기기도 했다.
13 1981년 11월 3일, 모든 것 가슴에 길이 새겨 담고서 정든 곳을 떠나 새로이 맡겨 주신 중앙수련소에 부임하게 되었고, 반복되는 각종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