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롱이 일지 · 1 외 8편 / 이인평
황조롱이 일지 · 1
우리 아파트 25층 작은방 발코니에서
7년째 터 잡고 있는 황조롱이 한 쌍.
산란기를 맞아 짝짓기에 바쁘다.
매년 3월 중에 알을 여섯 개 정도 낳는다.
암수가 교미하는 순간은 늘 짜릿짜릿하다.
암컷이 생식기를 쳐들면 나도 들린다.
수컷이 생식기를 움직이면 나도 선다.
나는 봄마다 황조롱이의 삶을 보고 있다.
아침 햇살이 고요히 알을 비출 때
지상은 더없이 평화로운 시간.
내게도 주님의 은총이 알처럼 안겨온다.
성모님의 자애가 알처럼 따뜻해온다.
황조롱이 일지 · 2
알을 품고 있는 건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는 것이다.
한 뼘 가까이 카메라를 갖다 대도
암컷은 알을 떠나지 않는다.
목숨 걸고 알을 지키고 있다.
때론 날개를 부풀리며 공격 자세를 취한다.
죽음도 무릅쓸 날카로움을 벼르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건 사랑의 신비이고
사랑은 두려움을 모른다.
사랑을 품고 있는 본능의 힘을 깨닫는다.
사랑이 강할수록 두려움도 없기에
오히려 삶의 둥지를 25층 벼랑 끝에 두었다.
황조롱이 일지 · 3
황조롱이는 날마다 8.0 시력으로
공중을 날며 아파트 단지 전체를 살핀다.
들녘의 높은 하늘에서도 먹이를 찾아낸다.
나는 한 길 내 마음도 살피지 못한다.
한 길 가족의 생각도 알아내지 못한다.
하느님이 내게 8.0의 시력을 주셨다 해도
나는 내 인생을 똑 바로 볼 수 있었을까 싶다.
내 어깨에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주셨다 해도
가족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었을까 싶다.
황조롱이는 학교도 직장도 다니지 않는다.
먹이와 재산을 따로 쌓아 두지도 않는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도 근심을 떨치지 못한다.
황조롱이 일지 · 4
황조롱이는 매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먹이를 잡아 와서
새끼들에게 골고루 뜯어 먹인다.
나는 새벽마다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냈던
어릴 적 어머니 모습을 떠올린다.
끼니가 모자랐던 친구네 어머니도 떠오른다.
새끼들을 두고 먹이를 구하러 간 황조롱이.
먹이를 구하자마자 둥지로 날아드는 황조롱이.
알이 부화하기까지는 수컷이 먹이를 잡아 온다.
알이 부화된 뒤엔 암컷도 먹이를 구해 온다.
우리 부모는 팔남매를 키우기 위해 일을 했다.
한평생을 일만 하다 인생을 마쳤다.
황조롱이 일지 · 5
황조롱이와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새가 되었다.
멋지게 하늘을 날며
생을 즐기듯 활강을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시혼의 날개를 얻었다.
세상의 욕망을 비워내고
푸른 하늘을 얻었다.
일찍이 나는 건물 4층에서
추락한 적이 있다.
하늘을 날게 되고나서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
황조롱이 일지 · 6
내가 이른 새벽에 시를 쓰고 있을 때,
새끼들을 둥지에 놓아둔 채
황조롱이도 먹이사냥을 나갔다.
황조롱이는 좌절을 모른다.
그들에게도 삶과 죽음은 운명일 뿐,
열심히 날고, 열심히 낳고
열심히 새끼들을 기르는 모습은
그 자체가 축복받은 자연의 숨결이다.
황조롱이는 빠르고 용맹하고 검소하다.
먹이도 용맹도 낭비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용기,
황조롱이에게서 은총을 깨닫는다.
황조롱이 일지 · 7
봄마다 황조롱이 암컷이 알을 부화시켜
새끼들을 정성껏 키워내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절로 떠오르네.
어머니는 가난했어도 팔 남매를 낳아 키웠지.
골고루 먹이고 입혀서, 다독거려서
숙명을 다해 모성의 사랑을 베풀어주셨지.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도 어린 것들 키우느라
들녘의 뙤약볕 아래서 힘이 부쳐도
온 육신이 아리고 저리도록 일만 하셨지.
먹이 달라고 입 벌리는 황조롱이 새끼들처럼
자식들 하나같이 제 생각만 하는 시대에
황조롱이 둥지를 보니 어머니가 눈물에 젖네.
황조롱이 일지 · 8
갑자기 이른 아침부터 까치 떼가 몰려와
격렬한 영공 다툼이 벌어지자, 이내
아파트 단지는 온통 앙칼진 새소리들로 소란했다.
황조롱이 수컷은 드디어 매다운 용맹을 펼친다.
암컷은 새끼들을 지키면서 순간순간 협공을 하고
수컷 혼자 까치 떼를 물리치는데 과연 일당백이다.
수컷에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까치 떼를 맞아
용감무쌍하게 전개하는 전략전술이 일품이다.
둥지에서 새끼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한 시간 정도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수컷이
앞 동 지붕 위의 피뢰침 끝에 앉아 숨을 고를 때
마치 황금월계관을 머리에 쓴 듯 햇살이 빛났다.
황조롱이 일지 · 9
내게 황조롱이를 관찰하는 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존법칙의 흥감이 절로 밀려온다.
알고 보면 생은 지극히 단순한 것.
고난도 울음도 끝내 기쁨 되는 것.
황조롱이와 함께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평생 해야 할 일도 환하다.
품어라, 품어라, 네 삶을 품어라!
날아라, 날아라, 네 꿈을 날아올라라!
봄마다 황조롱이는 죽지 않고 찾아왔다.
삶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날자, 날자, 꿈을 안고 날아오르자!
■ 시작노트 ------------------------------------
이번 시들은 수년 전에 써놓은 것들이다. 테마 소시집 꼭지라 해서 꺼냈다. 서울 구의동에서 살다 이곳 고양시로 이사 온 지도 벌써 16년이 되었다. 그런데 13년 전 뜻밖에도 내가 서재로 쓰고 있던 작은방 발코니로 황조롱이 한 쌍이 날아들었다. 마치 시인을 지켜 주려고 온 수호천사들 같아 얼마나 반가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발코니라고 해보았자 에어컨 실외기를 놓기위해 만들어진 좁은 공간인데, 그곳을 그냥 비워두기보다는 꽃씨라도 심어볼까 해서 직사각형으로 된 바둑판 넓이의 고무통 두 개에다 흙을 채워두었던 곳이다. 처음엔 화초를 심기도 했지만 어느새 화초들은 사라지고 잡풀들이 제멋대로 자라서 우거지기도 하는 바람에 그런대로 그것도 괜찮다고 여겨 그대로 방치하고 있던 차에 그놈들이 찾아와 그중 하나에다 둥지를 틀었다. 그로부터 장장 7년을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어느덧 그놈들을 떠나보낸 지도 5년이 지났다. 아마 조류독감의 위협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도 대를 이어 살았을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323-8호인 황조롱이는 텃새이면서 매에 속한다. 작지만 본능적으로 날카로움과 예리함을 지녔다. 얼핏 보면 귀여우면서도 매다운 용맹스런 습성을 대하면 자못 위협을 느끼게도 한다. 그놈들에게서 맹금류의 타고난 생존본능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빠른 판단력과 직관능력, 자유자재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유연한 동작, 그리고 새끼들을 사랑으로 엄격하게 기르는 지혜와 스스로 방심하지 않은 냉철한 자기관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황조롱이와 똑같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놈들과 함께 살다 보 니까 내 시정신도 황조롱이의 생태적 습성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40년 넘게 시를 써오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습관이 있다. 그중에는 어떤 대상을 시로 쓰기 전에 오래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 끝에 정작 시를 쓸 때는 빠르게 초고를 써내는 것이다. 마치 황조롱이가 공중에서 한곳에 떠 있는 연처럼 정비범상停飛帆翔하고 있다가 먹잇감이 나타나면 한순간에 쏜살같이 덤벼들어 낚아채는 것과 같다. 나는 특히 인물시를 20년 넘게 써왔다. ‘시의 첫줄은 신의 은총’이라는 발레리의 말이 있거니와 한 인물을 대상으로 전후좌우로 묵상하다 보면 그에게 알맞은 시상과 더불어 첫줄이 떠오를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바로 이 첫줄이 떠오르기까지 그 대상을 사랑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 인물시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한때 황조롱 이와 유유상종類類相從하다 보니 이런 말까지 잇대어 하게 되었다. 아무튼 내게 황조롱이의 추억은 매우 특별하다. 그놈들의 삶을 소설로 엮어보려고 기록을 해놓기도 했지만, 시 역시 열댓 편을 써놓은 것이 있어서 그중 아홉 편을 순서대로 여기에 싣게 되었다. 처음 쓸 때부터 문장부호를 사용했는데 지금 봐도 괜찮은 것 같아 그대로 놔두었다. 7년을 함께 살았으니 말을 하자면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황조롱이를 소재로 한 테마시의 특성이 독자들에게도 다소 특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졸필을 줄인다.
ㅡ 『우리詩』 2018년 8월호
첫댓글 고맙습니다.
유진 선생님,
요번 시인학교 행사 때,
먼 길 오가시느라 수고 많으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