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피에타
권예자
피에타를 본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경건함이 어우러진 대리석 조각을. 피에타는 경건, 자비, 측은함을 나타내는 이탈리아어지만, 미술 용어로는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미술품을 말한다.
여러 종류의 피에타 중에서 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좋아한다. 자연스럽고도 슬픈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피에타는, 살아 있는 마리아와 죽은 예수가 일심동체로 여겨질 정도로 조화롭게 보인다. 무릎 위에 안은 아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성모의 모습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고통을 초월하여 명상에 잠긴 듯한 마리아와 어머니에 의지하여 잠든 듯 보이는 예수. 성모의 머리를 덮은 미사포와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은 대리석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하늘을 향하여 가만히 열린 기도 같은 성모의 왼손, 경이롭다. 그러나 나는 피에타를 보면 그와는 또 다른 아픔을 느낀다. 내 안에도 깊게 새겨진 세 개의 피에타가 있기 때문이다.
내게 피에타의 성모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서러운 여름날 서른한 살 젊은 아버지는 스물아홉에 이승을 떠나는 아내를 안고,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울고 또 우셨다. 어머니는 무릎 아래가 이불자락에 덮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왼팔을 축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일곱 살 어린 나는 그때까지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방안에 계시던 고모 내외와 동네 어른들이 큰 소리로 울어서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고, 어른들의 만류로 그 방에서 쫓겨나온 것이 서운했을 뿐이다.
어머니는 당시로선 치료할 수 없었던 유방암이었다. 대전에선 최초로 수술받았지만, 재발, 또 수술 끝에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하라는 권유를 받고 퇴원하셨다. 사랑하던 모든 것들과의 영원한 작별을 위해 퇴원한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아내를 안고 당신이 아는 모든 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또 하셨단다. 그러나 신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삼우제를 지낸 후 아버지는 훌쩍 집을 떠나셨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숙이와 나를 버려둔 채. 이것이 아버지가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시작한 첫 방랑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1년에도 몇 번씩 가출하셨고, 어떨 때는 2년이 넘게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나와 동생의 생활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우리는 한집에 살던 고모 내외가 자식처럼 소중하게 길러 주셨으니까.
두 분은 당시로는 드물게 연애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부유한 양반가에서 백일 불공을 드려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 탓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그 충격의 여파로 할아버지 내외분이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가 아버지 나이 열 살, 삼대독자로 손이 귀한 집안이라 친척도 없이 전라도 남쪽 끝점에 홀로 남겨진 아이.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도 침착하게 대전 쪽에 시집와 살던, 열 살 터울인 누나를 찾아서 함께 살게 되셨다. 그러나 평소 할아버지가 늦게 둔 자식을 염려하여 일러준 말은 기억도 못 하였단다.
“혹시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이 족보만 가지고 안동 향교를 찾아가거라. 그러면 너를 돌보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를 낳은 후에야 그 말이 생각난 아버지가 찾아보았지만, 족보는 장례 중에 잃어버렸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처음 만날 무렵에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야학을 열어 글 모르는 이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어머니도 그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드렸단다. 인물도 좋았지만, 재주가 많으셨던 아버지는 인기가 높았다. 아버지가 노래하거나 하모니카를 불면, 동네 처녀들이 담 밖에서 기웃거렸다고 고모는 종종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모니카로 부는 ‘봉선화’에 감동하여 구혼을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열여덟 처녀와 스무 살 총각은 그렇게 만났고, 결혼 후 5년이나 기다린 끝에 나를 낳으셨다. 그러나 착한 아내와 멋진 남편의 아름다운 사랑은 짧게 끝나 버렸고, 아버지의 생활은 나날이 황폐해져 갔다.
장례 후에 집을 떠나셨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신 것은, 6·25가 일어나고 가족이 뒤늦은 피란길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50여 명의 동네 사람들과 함께 피란하였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그 피란 끝에 하나뿐인 동생을 잃게 되었다. 젖도 떼기 전에 엄마를 잃고 미음과 병 우유로 근근이 살아오던 숙이는, 전쟁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매우 허약하였다. 그때 겨우 두 돌이 된 어린아이가, 어른도 견디기 힘든 굶주림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마루에서 동생을 안고 소리치셨다.
“어서 고모를 모셔 와. 아무래도 숙이가 이상해.”
나는 급하게 뛰어 우물에서 나물을 씻고 계시던 고모를 모셔왔지만, 동생은 벌써 우리 곁을 떠난 뒤였다. 아버지는 어머니 때와는 다르게 큰소리로 오래오래 통곡하셨다. 숙이가 그리된 것은 아비인 자신의 죄라며 가슴을 치고 또 치셨다. 지난밤에 큰소리로 엄마를 세 번이나 불렀을 때 알았어야 했다면서….
나는 자라면서 먼저 간 아내에 대한 아픔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많았다. 부모와 함께하는 즐거운 가족을 볼 때나, 돈을 마련할 곳이 없는데 수업료 독촉을 받을 때, 여중을 졸업하고 1년을 쉬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아버지가 미웠다.
더구나 장학금으로 근근이 고등학교에 다니다 3학년 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을 때도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입학금을 대준다던 고마운 선생님도 계셨지만, 나를 길러 주신 고모 내외를 부양하여야 했다. 고종사촌 남동생의 학비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걱정하실까 봐 의연한 척하면서,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죽여 울었다. 훗날 아쉽게 놓쳤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을 그때는 알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에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시곤 근사한 음식점이나 제과점에 나를 데리고 다니시길 좋아하셨다. 천재 소년이 지방 순회를 왔을 때는 그 아이가 어려운 미적분을 척척 풀고, 외국어를 유연하게 하는 것을 보게 하셨다.
책도 많이 대본해 보셨고, 축음기판도 열심히 사들이셨다. 기타도 잘 치셨다. 동네 사람들에게 밤새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상하신 아버지. 그러나 그런 기간은 짧고 쉽게 지나갔다. 다시 가출, 귀가, 또 가출이 되풀이되면서,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점점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 떠나신 지 15년이 지난 후에야 재혼하셨다. 당신이 아내와 자식에게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그만한 방황의 시간이 필요하셨던 모양이다. 새어머니는 나와 함께 산 적은 없으나 마음씨가 곱고, 현숙하시며 동생들도 생겼다.
일흔아홉에 건강이 나빠져서 혼수상태에 들기 전,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을 바라보시다가 힘들여 말씀하셨다.
“너한테 미안하다. 미 - 안 - 하 - 다.”
나는 억장이 무너져 아무 말씀도 못 드렸다. 다정다감하신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을 품 안에서 떠나보내며 겪어야 했던, 그 고통을 오래전에 이해하였음에도.
그날 나는 또 하나의 피에타를 가슴에 새겨 넣었다. 병든 아버지를 안은 아리고 창백한 내 모습을….
첫댓글 내 안의 피에타......
한 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네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왜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지 이해가 되어요....
사람은 누구나 피에타를 안고 살아가지만 선생님의 피에타는 절절하게 다가오네요.
항상 밝은 웃음을 짓는 선생님은 어쩌면 이미 피에타를 넘어서신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