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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욕망과 달리 한 마음의 결어
-함진원 시집《가만히 불러 보는 이름》
-허정분 시집《어느, 아낙의 병풍도》에서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병오년 새해가 붉은 기운으로 힘차게 열렸다. 새해에 담은 소망은 다양할 것이다. 시인들은 윤리의 실종과 염치를 묻지 않는 시대에 대하여 묵인할 수 없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양심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쪽저쪽을 기웃거리지 않고 올바른 세상을 향해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한 회복을 문장으로 펼쳐 보이는 것일 테다. 이토록 험난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살고자 한 삶의 시간들을 기록한 두 권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전남 광주에서 문학의 동지를 튼 함진원 시인의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과 경기도 북한강변 양평 두물머리께에 산다는 허정분 시인의 《어느 아낙의 병풍도》이다. 두 시인의 시집 속에 공감으로 다가온 시대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을 만나보자.
1. 새롭게 맞서려 한 세계의 형용 언
함진원 시인의 시 세계는 살아온 삶. 즉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를 재 구성하면서 시작된다. 사는 일이 곧 관계라며 그에 대한 소중함의 인식이면서 재발견이다. 시로 형상화한 언어에서 추구하고자 한 사랑과 온정에 대한 모음들은 단순하지 않다. 그 궁극에 도달하고자 한 지점은 혼자가 아닌 동행을 꿈꾸는 긴 여정이다. 오래전 실재했던 시공간들 속에서 찾아가는 마음은 흐트러진 이정표를 되짚어가듯 어렵기만 하다. 빛바랜 아득한 것들을 원형처럼 조심스럽게 색칠을 하여보지만, 본래와는 다르기에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마치 지난밤의 흐릿한 꿈처럼 또렷하게 재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현실의 여러 상황에서 좌절되곤 한다.
그대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차가 있고 나무 그늘과 모란 피는 날 기다리며
겨울을 보내요 그리고
서로 손을 잡아요
-<손을 잡아요> 부분
‘그대’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혼자’인 상태로 놓여 있다. 예전에는 함께였으나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그대’를 한동안은 소원하게 대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혼자인 상태로 지내야 했던 그대는 절실한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마음을 알고 난 이후 따뜻한 차 한잔을 끓여내 “그대 한 모금 나 한 모금”을 나누며 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서로 손을 잡아요”라며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동행하겠다는 순한 마음이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당신이 했으니 좋은 일이지>에서 “달그락거리며 밥을 먹으면서/ 잘했네 누군가 주머니 여는 것이 힘들 텐데/ 당신이 했으니 좋은 일이지”라며 아내의 미안함을 다독여 준다. 그날 지출한 용도를 보면 아마 24년도 12월 광주 금남로 광장에서 계엄을 성토하던 시기로 추정된다. 그날 사람들이 모인 의미도 남다르거니와 흔쾌히 주머니를 털어 ‘따순 밥’을 대접하다 보니 지출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 소원해질 수 있는 관계에서 이해와 공감에 더없이 감사한 것이다.
가슴이 여려서 그럴 것이다. 가슴에 맺힌 붉은 덩어리가 솟구쳐 더는 살아갈 욕망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사람이니까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렇다. <가을이 돌아서서 울었다>에서 “화순 보성 율포 녹동 장흥 보성녹차밭 마량 관산 회진 대덕 어디로 가랴”,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도통 진정되지 않는 심사다. “곡성장 순대처럼 새까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사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가을이 와 있었다. 살다 보니 좋던 시절이 다 흘러가 버렸다는 사철가 한 대목처럼 말이다.
따로국밥인 세태다. 한 가족이라고 해서 똑같은 음식을 나눠 먹던 정겨움은 오래전 사라져 버렸다. 한 집안에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차린 둥근 밥상을 마주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은 보낼 수 없다는 인정머리가 아직도 남아있다. 닳고 닳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성공한 삶이다. <저녁은 먹고 가요>의, 시 “당신이 좋아하는 반찬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모처럼 따습게 저녁은 먹고 가요”라며 지금껏 먹고 살아왔던 찬거리들을 주섬주섬 밥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혹시 모를 불편을 염려하고 있다. 많고 많은 찬 중에 입맛에 닿는 것이 없다면 하는 미안함이 앞선다.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맨 먼저 가족의 안색을 살피며 살아왔다.
<비에 젖은 것들은 그리움으로 온다>의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이때가 2024년 12월 3일은 윤석열이 엉뚱한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이다. 다들 살맛 나는 세상을 꿈꾸는 속내는 방향의 차이지 누구나 다 같다. 화자도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한 공포가 유별하게 마음이 쓰였던가? 나라가 시끌시끌할 때마다 사람들이 일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다시 찾은 평화다. 그 시간까지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보태며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이 담긴 시다. 그리고 <부드러운 고드름>의 “남태평 고개를 넘고 넘는다/ 눈 내리면 눈 맞으면서 바람 불면 바람 먹고/ 트랙터 앞세워 요단강 건널 각오로 나아간다/ 야반도주한 무성한 말들이/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십이월 삼일 밤”은 길고도 멀었다.
그러나 동이 트기 전 위대한 태양은 저 멀리서부터 이 땅에 찾아오는 것이라며 <아리랑을 부른 날>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남태령 고개를 넘지 못하고/ 등신불로 눈 맞고 있는 광장은 왜 울고 있는가”라며 그날을 상기하고 있다. 밤톨만 한 비비새를 보고 자란 필자다. 울타리를 쉼터 삼아 대밭으로 날아가는 비비새는 그 작은 눈부터 서럽다.
함진원 시 속에 그림자처럼 비치는 설움의 흔적들이 잦다. 슬픔을 유발하는 진원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패거리 진영 논리에서 촉발한 사회의 부정적인 일들에 관한 것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다 해도 딱히 세상이 온통 그렇지만은 않다. 그 슬픔의 진앙이 된 삶의 시간이 비록 그렇다 해도 <비비새가 비비비 우네>의 “사방이 죄로 차고 넘는데/ 땅에는 슬픔을 먹고 자란 억울함을 싣고/ 키만 멀뚱히 큰 세상이 어지럽게 돌고 있다/ 슬픔이 태어나면 슬픔이 자라/ 슬픔으로 다시 어른이 되고/ 일하고 일하다 새벽을 맞도록 일해도”라고 말을 한다. 화자는 “올해도 아픈 소식이 많네”라며 어느 해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 짧지 않은 한 해 동안 벌어진 일들을 가족의 대소사가 아닌 사회 전반적인 관계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에 찬 발설을 시의 문장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의 근원은 부정과 부패 그런 사회악들을 일소하지 못한 시대 권력에 대한 원망에 찬 슬픔이 아닐까?
<곁>, 아직도 춥다는 “입춘, 지났어도 춥기는 많이 춥습니다/ 봄은 오는데 애달픈 얼굴 떠오르는 저녁입니다/ 새소리 들으며 묵언 중인 동백 곁에/ 깊은 외로움이 붉”다 말한다. ‘곁’에 누군가 있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미안함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그 슬픔을 위로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부재하므로 인해 쓸쓸함이 우울하도록 짙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마음의 곁을 내줄 수 있을까? 숱한 사람들이 공감하는 역사의 진실도 일거에 한 진영의 논리에 따라 뒤집어지는 것을 본다.
<붉은 울음>에서는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이전 문제로 몸살을 앓던 시기로 추정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워온 홍범도 장군의 과거사가 문제라니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그 당시 일제 강점하에 있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선택한 사상이 문제라니 잘못 나가도 한참을 잘 못 나간 것이다. 농부가 논에서 낫으로 벼를 베는 것을 보며 흉기를 휘둘렀다고 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한 시대를 갈등으로 몰아가는 정권의 종말은 파멸이란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사는 일 힘들면 어디엔들 못 가랴>의 “잘못 든 길에서 허우적거리다 지친/ 얼룩진 상처 누군들 없겠는가/ 풍경은 또 다른 풍경으로 평온을 주고/ 어제는 실천이 부족했으며/ 오늘은 묵묵한 소식 넘치는데/ 하늘은 높고 어린 모 다릿심 짱짱하게/ 오월의 비방록을 받들고 있다”는 화자는 지금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훌훌 벗어던지고 ‘나’에 대한 참회를 하고 있다. 지금껏 크고 작은 일들에 연연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그 중심에 언제나 똬리처럼 욕망하고 있던 ‘나’의 사심이 먼저였음을 고백한다.
아버지 들뜬 목소리 울창한 담벼락 사이로
유년의 뜨락에 피지 못한 채 엄마 기다린 눈물 꽃
어둠이 왔는데 어마 베개를 끌어안고 자는 소리
귓바퀴 아래까지 달려 나와
만국기처럼 펄럭거리는 정월 세수하는 소리
미나리 밭에서 희망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소리
귓속 물관부 어디쯤 돌이 숨어 있었나 봐
물푸레나무 푸른 꿈이 자라고 있어
-<물푸레나무 자라고 있다> 부분
“자꾸만 돌돌돌 소리 나는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명처럼 잦다. 그 소리를 통해 잊고 살았던 시간들이 추억으로 재현되는 듯 “개여울 소리 듣고 자란/ 바닷길 일몰, 한 겹씩 덮고 돌아누우면/ 숨죽인 상사화 물결 찰방찰방,/ 쌍봉사 은행나무 곁에 다랑포 따오기 부부 정다운 소리”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 시간이란 것이 가슴을 아리게 하지만, 한편으론 아버지와 엄마에 깃든 추억이 슬픔처럼 배어 있다. 나이 들어서야 알았다. 아픈 시간들이 실존의 든든한 지양분이 되어 내 삶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추억 속 아련한 풍경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물푸레나무처럼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고생 안 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안 믿을 것 같아/ 더 울었던 생일이 저물었다”는 <생일>은 어머니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준 말들을 재현하고 있다. 그동안 딸을 낳아 애지중지 키워 시집을 보낸 이후에도 잘 살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다. 한 생애를 살다 보면 부침 없는 삶은 없다. 다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아가 항상 니 옆에 내가 있다 생각하고 차분차분 살아보그라 어쩌것냐 사는 것이 오래 참다 보면 좋은 날도 돌아온께”라며 당부하는 엄마의 마음은 이 세상 모두에게 해당되는 심정일 것이다.
<화정사거리에서>에서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기시감처럼 문득문득 그 거리를 지날 때면 욱신욱신 아픈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익어가는 벼 추수하지 못하고/ 논이 사라졌던 그해 겨울은/ 저문 들녘에서 울고 있는 벼 이삭을” 어린 마음에도 지나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였을지 모르지만, 어느 땐가 주인이 바뀐 논을 지나면서 당시 상황이 생각난 것이다. 눈에 밟힌다는 말이 쉬운 말은 아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모든 것이 그립다. 추억 속의 따뜻한 인정이 넘치던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처럼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어느 때부턴가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소중한 풍경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암마을>의 “귀님이 딸 왔네/ 따뜻할 때 먹으면 다 약이여/ 부침개 해서 점심으로 먹자”던 정겨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그곳은 어찌 보면 터울 없이 “마음 편히 느긋하게 앉아/ 둥근 세월을 품고 있는 곳”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 같은 ‘이암마을’의 풍경이었다. 그저 순둥한 마음으로 피운 꽃무뉘 옷을 입고 험한 세상 고통이 닥쳐도 군소리 없이 알콩달콩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립기만 하다.
<적벽은 멀리 있다>에서 이제 세상은 아귀다툼으로 변해버린 전쟁터다.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피안에나 있을 법한 ‘적벽’을 꿈꾸고 있다. “적벽이 아름다워 운 적은 있지만/ 적벽은 멀리 있고 눈물은 가까이 있다”며 고통에 찬 현실을 에둘러 밀한다. 그곳은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이상의 세계다. 하루해가 시간을 재우며 저물어 가는 적벽도 서서히 고요에 빠져들 것이다. 그 평안으로 가는 시간은 순간이라 더는 늦출 수 없다.
“오동꽃 피어 있는 월평으로/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자/ 배롱꽃 가로수 따라 행복리 저수지 지나/ 마지막 기차 옥수수밭 건너면/ 서로서로 손잡고/ 달도 쉬어가는 툇마루로 어서 가자”는 <해 지기 전에>의 행간은 마음을 흔들고 있다. 그토록 열망하는 지점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며 너무 많은 것을 잃거나 지우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바로 그곳이 ‘적벽’인 것이다. 아직도 우리가 꿈꾸어 가는 세상이 꼭 늦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못다 한 말들은 함진원 시인의 가슴에서 또 다른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
2. 삶에서 추수한 진솔한 문장들
허정분 시인과는 2003년 한번 뵌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농사를 짓고 있다 했는데 여전히 농사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시인은 시로 말하기 때문 문장을 살피다 보면 살아온 삶의 저간을 말해 줄 것이다.
전철 경로석 눈 감은 늙은이들 사이에
몸으로 중심을 잡는 앳된 처자 둘
막 피어나는 봄꽃 같은 얼굴로
개나리꽃 벙글듯
살구꽃 피어나듯
소곤소곤 까르르 터지는 웃음
경쾌한 소프라노 허공에 퍼진다
-<꽃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부분
수도권이라 지방 소읍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지방 같으면 버스나 자가용을 이용하는데 수도권은 전철이 수단화되어 있다. 신풍속도로 간혹 회자되는 전철 안, 낯을 붉히는 풍경들이 많다. 다행스럽게 “몸으로 중심을 잡는 앳된 처자 둘”을 통해 우리 사회의 환한 모습을 본다며 즐거워한다.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는 불편한 아이들이 아닌 청춘 남녀가 발산하는 명랑함을 더 좋은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다. 청춘남녀가 전철 안에서 어른을 섬긴다고 서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가상하고. 밝게 웃고 나누는 대화를 보며 환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화자다. 그들을 보며 “막 피어나는 봄꽃 같은 얼굴로/ 개나리꽃 벙글 듯/ 살구꽃 피어나듯/ 소곤소곤 까르르 터지는 웃음”의 거침없는 표정에서 설핏설핏 잊힌 자신의 그맘때를 상기한다. .
가을이 오는 소리
늦은 참깨 톡, 톡, 여물어 벌어지는 소리
풀여치 처연히 짝을 찾는 소리
귀뚜라미 또릉, 또릉, 숨어 우는 소리
뒤뜰 감나무 말매미의 울음까지
콩밭 들깨밭 나물밭에서 여린 생들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판 벌이는
가을이 오는 소리
-<구월이 오는 소리> 부분
사는 것이 궁금했던 일이기도 했다. 인생에서 구월은 가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 년 농사를 수확하는 계절이 즐거운 일이지만 농부들에게 가을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여름 불어닥친 태풍에 하우스 농사를 하던 남녘 친구의 엄청난 피해 소식을 들은 이후 연락이 끊긴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런 아픔을 겪은 뒤 가을이 오는 소리가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두근두근 인생>에서 “가야 할 저승길 머잖아 눈 감으면 이리도 온몸이 편한 것을, 아직 세상 미련이 남았는지 죽음이 마중 오는 날까지 먹어야 한다는 심장약 3개월분을 또 받아 오네”라며 화자의 신산했던 삶을 회상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더는 못 살겠다고 보따리 싸 들고 집을 나서는데, 고만고만한 자식들도 그렇고 중풍과 치매로 고통받는 시부모를 팽개치고 떠날 수 없어 참고 살았던 세월이라 했다. 당신 눈 한번 질끈 감고 괴롭고 힘든 일 그저 팔자려니 하며 살면 될 것이라고 싸 놓았던 보따리를 풀었다고 한다. 천생연분으로 만나 한평생 살자 했던 기약을 수도 없이 가슴에 새기며 참고 살았던 세월이었으리. 그것도 타고난 심성이 순해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몸에 든 지병이 깊다. 화자는 심장약 3개월 치를 처방 받아 오며 심사가 우울하고 쓸쓸해진 것이다.
“읍내에서 집으로 오는 길옆 쓰레기 수거 장소에/ 낯익은 듯 낯선 고딕체 장롱들이 나란히 줄 서 있다”라고 말하는 시 <장롱>도 그렇다. 세대 간 갈등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사회문제가 되곤 한다. 구세대와 신세대라는 간극은 어떤 기준으로 이해하고 포용해야 좋은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신세대들의 생각들이 그들을 낳아준 부모로부터 나왔을 텐데 이해 불가한 경우가 허다하다. 쉽게 버려진 장롱도 그렇거니와 폐기물을 처리하는 방식도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으로 나뉜다. SNS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식은 눈에 보이는 딱지가 아니기에 무단 투기로 오해를 살 만도 하다. 신세대라는 그들은 쓰레기 처리 절차를 그들 방식으로 완벽하게 처리했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렇지만, 쉽게 쓸만한 물건을 버리는 세태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
<좋은 시>에서 “좋은 시 표제가 붙은 시집 한 권/ 붙들고 앉은 지 한 시간도 못 돼서/ 머릿속이 어질어질 책 멀미가 난다”는 화자다. 세대 간 차이라는 것이 문학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 부쩍 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시들이란 것을 읽다 보면 무슨 통속인지를 아예 못 알아먹을 때가 많다. 세대 간의 상상력이란 것도 구태를 답습한 표현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강박에서 출현한 문장으로 모호성 그 자체가 진정한 시의 언어라고 항변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바탕은 세끼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다 알아먹듯 시의 언어와 문장도 전달 가능에 소홀해 선 안된다. 이해와 소통의 임계점을 벗어난 조합으로 구성된 난해함은 낯설기만 하다. 시는 이상적인 언어의 결합이 아니라 시 속에 담긴 삶의 서정이 얼마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으로 다가가느냐의 관건인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안타까워한다.
삼동三冬 내내 지워지지 않는 풍경화 지겨워
시오리길 걸어 돈 벌어 오겠다고
큰소리치고 서울로 가던 그해도
매서운 눈발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던
이맘때 겨울이었다네
-<그 겨울에> 부분
1950년대를 출생력으로 살아온 허정분 시인이다. 태생지가 강원도 홍천이라 했다. 요즘은 생활환경이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버린 첩첩산중과 같았다. 화전을 해서 겨우 살아가는 화전민의 생 자체가 고역이다.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고 솥에 시래기를 깔고 밀가루를 풀어 끼니를 준비한 것이 다반사였다. 거기에 아버지가 “전쟁 중에 끌려간 국방군에서/ 포탄 파편 맞아 피 흘린 자리마다 썩어가던 상처/ 이명래 고약도 십 년 묵은 된장도/ 다 소용없는 무용지물이라/ 불혹의 나이 넘겨 아버지 극락정토 가셨다”라고 하는 불행으로 인해 집안은 빈곤의 연속이었다. 1950년 6·25 남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시작된 궁핍은 온 가족을 덮쳐 버렸다. 아버지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운이 좋아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은 집안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가장인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해 입은 부상인데 무심한 세상이 서럽고 원망도 깊었을 것이다. 세상 사는 것이 미안해서였을까? 무엇이 급했는지 사십을 갓 넘긴 아버지가 병환이 깊어 돌아가셨다는 “그때도 섣달그믐 때였지”라며 암울한 기억을 다시 회상하고 있다.
시인은 시대와 사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을 아픈 가슴으로 바라본다. 그 불행을 안고 살던 사람이 안타깝게도 오빠라면 고통은 더할 나위 없다. <오라버니>에서 “과수원 사다리에서 떨어진 십수 년/ 목에 감긴 깁스를 풀지 못하는/ 장애인 오라버니가 운다/ 당뇨합병증으로 앓던 아내마저/ 요양원으로 실려 간 반년 세월”은 온전치 않은 생마저 앗아간 셈이 되었다. 이제 희망보다 더 긴 고통으로 모든 것들을 체념해야만 한다. 혈연 간 만남이지만, 어느 것 하나 도움이 되어 줄 수 없는 미안함이 죄가 된다. 우린 살며 우연처럼 다가온 부조리한 상황을 맞곤 한다.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까닭 없이 안기는 것일까를 묻는다. 신도 자연도 그 누구도 우연에 대한 결과를 답해줄 수 없다. 질곡 같은 삶은 누군가에게 또 일어날 수 있다. 저 순한 사람들이 아등바등 몸뚱어리 하나로 살아보겠다 하는데 천형 같은 형벌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그것을 초월한 신과 자연에 기반한 순리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거름을 펴면서>에서 “삼동을 견딘 참나물밭에”, “흑갈색 거름을 우르르 쏟는” 화자의 마음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고 자란 봄기운에 ‘거름’을 뿌려주며 돋아날 새싹을 보며 새로운 활기를 고대한다. 수고에 부쳐 새참으로 먹는 막걸리 한 잔도 고수레로 흩뿌리고 있다. 지금껏 자연을 통해 받은 만큼 되돌려 공생하는 마음이 곧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는 경건함일 것이다.
<암탉>에서는 사람을 위한 이기심으로 닭을 키웠는데 무정란 알을 낳아 그 알을 품고 있다. 도저히 새 생명이 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암탉이다. 그것을 본 화자의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유정란을 낳을 기회마저 앗아가 버린 현실에서 자연의 순리를 어긴 인간들을 대신하여 참회하고 있다.
<우리 집 풍경_설날> “어릴 때 내 설빔은 노란 저고리 검정 치마였다/ 서러워 설이라고 좁쌀 인절미 찧던 어머니/ 노릇노릇 화롯불에서 구워지던/ 차좁쌀 인절미 떡 먹으며 큰/ 화전민 딸의 서러운 날이 흘러/ 설날 아침 어린것들 세배를” 받으며 감회에 젖는다. 그날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행복에 겨운 날인 것처럼 살며 고통은 잠시 잊기로 하자. 하지만 화자가 살아온 시절의 빈궁은 생애의 멍에처럼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옥죄고 있다. 그나마 지난 시간을 시로써 발화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앞으로도 대를 이어 이런 날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이 작은 행복도 알고 보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이룬 평화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까치와 비둘기, 참새 무리, 직박구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텃밭을 배경으로 한 <영역 싸움>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과 눈빛을 알 수 있다. 집 둘레를 감싼 빌라 틈에 일군 텃밭에 주인 몰래 먹거리를 훔쳐 먹는 새들의 정경이 사뭇 잊어버린 시골의 온정처럼 느껴졌다. 그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별개가 아닌 생명공동체로 바라보고 있다.
허정분 시인의 시를 일독하면서 공감으로 파동해 온 진솔한 모습을 보았다. 흙을 통해 진실을 말하려 한 삶의 정신이 시 속에서도 일관되게 발현하고 있다. 그 마음의 결이 추구하는 시심이란 것은 뿌린 만큼 거두겠다는 농부의 지고지순한 생이란 것도 깨닫게 된다. 아직도 흙을 소중히 여긴 문장으로 추수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운이면서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 가능성을 몸소 실천하고 있음에 우린 진실함이 깃든 시를 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