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나는 일곱 살,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칠십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생생하게 그때 일을 기억한다. 같은 질병을 앓던 동생은 죽고, 나는 이듬해 쇠약한 몸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할머니 손을 잡고 쉬엄쉬엄 먼 거리를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일제 강점기라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고 입학경쟁이 있을 때였다. 입학 적령에 가까워야 했고 주소와 성명을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고모님이 한자로 주소와 성명을 미리 가르쳐 주셔서 겨우 걷는 처지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동생이 하늘나라로 간 집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강아지만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죽은 동생의 시신을 산으로 묻으러 가던 날이 무시로 떠 오른다.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아버지는 삿갓을 쓰고 죽은 동생을 포대기에 싸서 안고 이모부는 삽과 괭이를 메고 사립문 밖으로 나갔다. 비도 오지 않는데 왜 삿갓을 쓰는지 그때는 몰랐다. 삿갓이 지붕과 비슷한 모양이라 죽은 아이를 땅에 묻으면 삿갓으로 덮어주었다. 집을 지어 분가하는 의미라 했다.
어느 날 배가 심하게 아팠다. 두 살 터울인 동생도 배가 아프다고 자꾸 울었다. 나와 동생은 혈변을 누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질에 걸리면 완치가 불가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알았다. 이질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다 키운 두 아들놈을 모두 잃을 것이 서러운지 먼 산을 바라보며 연신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만 뿜었다.
끼니도 겨우 잇는 빈곤한 시절, 의료시설이 없어 진료와 치료를 할 수 없었다. 시나브로 나아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위생이란 염두에 두질 않았다. 인분이나 가축에서 나오는 두엄을 주된 거름으로 농사를 지었다. 간식이 없어 풋감을 주워 균이 득실득실한 무논의 진흙에 묻어 떫은맛이 가시면 이리저리 닦아서 먹던 시절,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천행이었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부모님이 물려주신 타고난 건강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어른들이 모두 들로 나가고 나면 나, 동생, 강아지 셋이서 한나절을 보내야 했다. 변소에 가려고 일어서려면 힘이 없어 걷지를 못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배변을 했다. 동생은 마루에서 겨우 기어 내려와 죽담에서 배변했다. 두어 달이 지나자 문지방을 넘을 힘도 없었다. 곱똥이 차츰 혈변으로 변했다. 나중엔 핏덩어리인지 배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강아지가 배가 고팠는지 방에 들어와 둘이 배설한 혈변에 코를 대고 컹컹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배가 고픈가 싶어 기어나가 밥 몇 숟갈 던져주면 먹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한달쯤은 동생의 배변을 내가 치워주었다. 나중엔 힘이 없어 내 것도 치울 힘이 없었다.
점심때 어머니나 할머니가 잠깐 집에 들렀다. 둘의 배변을 치우고 밥을 찬장 안에 챙겨놓고 다시 들로 나갔다. 식은 밥에 김치가 전부였다. 배가 고파 엉금엉금 기어가 찬장 문을 겨우 열고 둘이 차례로 한 숟갈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연명했다. 두 달이 넘도록 앓았으니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했다. 배가 아파 울부짖는 나를 업고 할머니는 이런 말까지 하셨다.
“모진 말로, 기왕 살지 못할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죽어 아비 어미 고생이나 덜어주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픈 말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엉엉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가 뼈만 앙상한 동생을 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동생도 할머니가 어서 죽었으면 하는 말이 서러웠던지 힘없이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친구 같은 동생이었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일곱 살, 다섯 살배기 둘이서 집 앞을 흐르는 실개천에서 가재랑 송사리를 잡고 놀았다. 둘이 운신을 못 하면서도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가끔 장난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내가 동생을 세게 꼬집은 적이 있는데 앙상한 몰골로 우는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마주 보고 누워 서러움에 겨워 엉엉 울었다. 이틀쯤 지나, 동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형아, 형아.”
늘 내 이름을 불렀는데 그날따라 형이라 불렀다. 두어 번 부르더니 사르르 눈을 감았다. 직감적으로 동생이 죽어간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가서 손과 얼굴을 만져보았다. 싸늘했다. 문지방을 짚고 벌벌 떨면서 겨우 일어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영식이가 죽었다. 영식이가 죽었다.”
집 앞을 지나던 이웃 아주머니가 뛰어와 동생을 보더니 “죽었네! 불쌍한 것, 몇 달을 앓더니 기어이 갔네.” 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금 있으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뛰어왔다.
“오 년도 못 살다가 갈 거를 뭐 할라꼬 태어났더노.”
어른들의 곡성이 가슴을 찢고 동생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먼저 보낸 동생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렵게 학교에 다녔고 내 삶에 찌들어 살다 보니 삶의 끝자락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짧은 이승의 삶을 마감한 동생이 그립고 보고 싶다. 체면 없이 팔십 년 넘도록 산 것이 동생에게 미안하다. 뒷날 저승에서 영혼으로 만나면 사과부터 해야겠다.
첫댓글 가슴 아픈 추억입니다. 저도 동생을 다섯이나 잃은 사람이라 선생님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 됩니다.
나이 들어갈 수록 그리움은 짙어 간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