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로 하는 귓속말
정창준
파란시선 0132
2023년 10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57쪽
ISBN 979-11-91897-64-7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멀어서 반듯한 슬픔들은 어떻게 자랑해야 하나. 더 여위고 붉어지기 전에.
[수어로 하는 귓속말]은 정창준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내가 묻은 세계」, 「사춘기」, 「영종도」 등 5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정창준 시인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름다운 자] [수어로 하는 귓속말]을 썼다.
정창준 시인에게 삶의 연대기는 “열여섯 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파과」). 소설가 김연수는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라고 썼다(김연수, 「스무 살」). 그렇다면 정창준의 시에서 “열여섯 살”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 것일까? “오십 세”이다(「소년의 얼굴로 앓는 오십견」). “오십견을 앓는 폐가는 어깨가 비스듬하다”라는 진술처럼(「슈퍼문」) 시인에게 ‘오십’은 자신의 현재를 나타내는 기호이면서 늙음, 즉 “아름다울 것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식된다(「키오스크 앞에서의 독백」). 정창준의 시는 이러한 두 시간의 충돌과 거리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복수(複數)의 시간에서 과거와 현재의 가치는 균등하지 않다. 과거, 즉 기억의 시간이 항상 현재-시간의 무가치함을 ‘기소’하는 것이 정창준 시의 특징이다. 그리고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러한 시간의 충돌은 현재적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기능한다. (이상 고봉준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두부를 자른다. 먼 것들이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오는 시간, 두부를 자른다. 세상은 뜻 없이 나를 만들었기에 너는 나에게 그래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두부를 자른다. 서울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없기 때문일까. 분실한 색들은 어디에 있을까. 부드럽지만 부서지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당신에게 끌리는 것을 눈치챘습니까. 연필심을 뚝뚝 부러뜨리며 너는 대답했다. 마음만 닿았는데 죄짓는 기분입니다. 왜 어떤 기억은 기화되지 않고 와락 쏟아져 스며드는가. 나쁜 짓만 저질러 온 내 손이 네 젖은 얼굴을 더듬는다. 어리석게도 오래 당신을 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정말 먼저 잊혀질 수 있나요. 더 여위고 붉어지기 전에 두부를 자른다. 위험하지 않은 모서리를 모서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영혼에 상처가 없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일. 진짜 상처는 열여섯 살 이후에 생긴다. 뭐든 감추고 싶었던 소년의 세계.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젊어서 불안합니다. 다행히 진짜 얼굴은 들키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 앉은 시간보다 바깥에 나와 서성이는 시간이 더 긴 사람들. 오직 여윈 몸만이 선량하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들으며 두부를 자른다. 나는 조금 더 위험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나를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덜 새로운 날들을 살아야 한다. 망각은 꽃 속처럼 깊고 아득해서 멍든다. 우리는 얼마나 더 개량되어야 하나요? 단지 나는 조금 더 정의롭고 쓸모 있고 싶었습니다. 지난 세기는 지나서 아름답고 낯설구나. 역사 교과서 사진 속 이름 없는 의병처럼, 미얀마의 총성처럼, 재개발지구의 세입자처럼, 홍콩의 우산처럼, 망월동의 무연고 묘역처럼, 아프가니스탄의 기도처럼. 제 몸을 갈아 넣어야 원하는 삶이 가능한 걸까. 검은물잠자리만 수면을 만져 보다 달아난다. 밤이 되면 나의 수어는 사라진다. 문득 가지 않을 문병을 나서고 싶어졌다. 그래도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는 두부를 자른다. 혼자였고 혼자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새들은 죽을 때 한결같이 허공을 움켜쥔다. 없는 것, 그러나 없지 않은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것. 오늘은 당신의 흰 얼굴 앞에 부동의 자세로 선 소년이 되어 두부를 자른다. 잘라 낸 시간의 단면은 오직 눈부신 흰빛입니다.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서 아름답습니다. 그리하여 안녕. 정녕 안녕. 언제나 거기 있는 것. 뜻 없이. 고인 것들이 가진 악력이여.
―채상우(시인)
•― 시인의 말
멀어서 반듯한 슬픔들은 어떻게 자랑해야 하나. 더 여위고 붉어지기 전에.
•― 저자 소개
정창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름다운 자] [수어로 하는 귓속말]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내가 묻은 세계 – 11
시효 이후의 반성 – 13
사춘기 – 14
수어로 하는 혼잣말 – 16
녹(綠), 녹(rust), 녹(錄) – 18
연대할 수 없는 아침 – 20
파과 – 22
평화로움을 위한 후주 – 24
수성못 – 26
헤어질 결심 – 28
시 대신 쓰는 일기 – 30
시음(詩飮) – 32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 33
제2부
무화과 – 39
불행히도 음악이 있는 새벽 세 시 – 40
약속은 감자를 닮는다 – 42
두부를 자른다 – 44
덕 덕 구스 – 46
소년의 얼굴로 앓는 오십견 – 48
거리가 필요했던 거리의 즈음 – 50
거리는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필요한 거리는 없었기에 – 52
멀리 전하는 안부 – 54
조춘만춘(早春晩春) – 56
전람회 – 57
어금니 장례식 – 58
죄책감을 기르는 시간 – 60
금요일이 아닌 날에 떠나는 캠핑 – 62
제3부
여름 서출지 – 67
음성학적 연애 – 70
벤자민, 알비노, 조명등 – 72
목이(木耳) – 74
병든 후박나무섬 – 75
먹점재주나방 – 78
그리운 감옥 – 80
유실물 보관소 – 83
멀리 다녀온 꿈 – 84
지심도 – 86
MARSHALL MAJOR 4 – 88
타이레놀이 있는 사월 – 90
캐모마일이 있는 밤 – 93
친하기 좋은 날은 드물다 – 96
영종도 – 98
게스트 하우스 – 101
제4부
마시멜로 테스트에 대한 항변 – 107
베트남으로 전송되는 풍경 – 110
토이 스토리 – 112
사금파리—김민서 누나에게 – 114
슈퍼문 – 116
크림이 듬뿍 올려진 케이지 – 117
위험한 하구 – 118
I Killed My Granny – 120
회전초 – 122
그림자 숲과 검은 호수와 PPL – 124
새의 씨앗 – 126
채식주의자 – 128
키오스크 앞에서의 독백 – 130
포카리스웨트 옆 포카리스웨트 – 132
화이트 노이즈 – 134
해설 고봉준 기소(起訴)된 시간 – 137
•― 시집 속의 시 세 편
내가 묻은 세계
세상은 투명하고 긴
유리잔 안에 든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아서
나는 다만,
매끄러운 표면에 묻은 물방울의 표정을 하고
굴절된 내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지.
침묵에는 일정량의 습기가 포함되어 있고
고요히 고여서 언 손을 녹이며
증발의 시간을 기다리고 싶었다.
세상은 뜻 없이 나를 만들었기에
곁에 묻혀 두고만 있었고
입구 대신 유리 벽만 허락해서
바깥에 있는 내 몸은, 쉽게
글썽거리면서 흘러내렸다.
대기는 더없이 뜨겁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세상은
한없이 차가워서
아무도 부르지 않는
검고 아득한 어둠을 향해
수어로 하는 귓속말을 투명하게 들려주면서 ■
사춘기
깎아 낸 연필심의 길이만큼
영혼이 자란다고 믿었다. 어렸으므로,
영혼의 쓸모를 묻는 게 먼저 아닌가,
연필심을 뚝뚝 부러뜨리며 너는 대답했다,
우리가 함께 쓸 수 있는 낮은 늘 부족했고
밤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무지했다.
내게 160그램가량의 희망이나
희고 서울말을 쓰는 부모가 있었다면,
마른침을 뱉으며 너는 중얼거렸다.
대신 너는 공부를 잘하잖아.
그건 남들보다 그냥
조금 덜 착해도 덜 미움받는다는 의미일 뿐이야.
그러나, 없는 사람을 가슴에 담으면
등이 달처럼 둥글어진다는 너의 말이 좋았다.
우리는 종종, 서로, 한창,
엇비슷한 슬픔을 들려주는 놀이에 열중했고
남몰래 엄마의 죽음을 바라기도 했다.
버저 위에 손을 올린 퀴즈 참가자처럼,
얼룩진 불행을 번갈아 말하다 보면
점점 더 많은 그늘과 비극이 필요했다.
그것이 진정한 불행,
묵주처럼 나란히 이어져 닳아 가고 싶었지만
나는 너에게 이곳은 공장이 많아 안심이라고 했고
너는 나에게 그래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보름이어서 분화구가 선명해진 달에서 선뜻 계피 향이 났다. ■
영종도
1.
가을, 나는, 자박자박, 후회를 읽으며 그곳에 다녀왔다.
2, 3.
섬이 아닌 그곳에는 반백이 된 선배가 방 하나를 가지고 산다. 시간이 게으르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를 만나러 갔다. 십칠 년 만이었다. 구읍뱃터 어시장에는 오랫동안 해가 지지 않고 바람은 기억의 살갗 위에 쌓인 먼지를 쓸어 내고 늙은 호객꾼만 우리를 반긴다. 동석한 늙은 후배는 자신의 지병과 벌이를 번갈아 가며 고백했다. 반백의 선배는 조금도 쓸쓸해 보이지 않고 그렇지만 쓸쓸해진 나의, 늙은 손에 대해서 말했다. 몇 점의 회만 우리 사이에서 싱싱했다.
형, 그날 나는 염부(鹽夫)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서서히 소금이 정제되는 과정 속에서 삭아 가던 염부의 거친 손의 내력에 대해, 우리가 정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잘게 썰린 한 점의 개불을 씹는 시간만큼만 우리의 기억은 호명되고 나는 자꾸만 기억의 찢어진 페이지를 찾아 뒤적거립니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도 되지 않았을 내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당신을 만나 어떤 말을 더 해야 할까요. 염부가 오래 기다렸을 결정(結晶)은 사실 침전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증발의 시간을 기다리는 염전의 바닷물들을 함께 보러 가자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비가 내렸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단지 나는 조금 더 정의롭고 쓸모 있고 싶었습니다. 훔쳐보았던 당신의 시를 이제 당신 대신 나만 기억합니다.
4.
우리는 이제 늙은 손 대신 저녁과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우리가 더 다가서서는 안 됩니까. 울어서도 안 되겠지요. 영종도는 석양을 보여 주는 대신 건물 뒤로 해를 넘깁니다. 그 건물 안에 늙은 선배와 늙은 후배와 늙지 않았으면 하는 여자가 함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얼굴이 절반쯤 남아, 나는 자꾸만 눈이 묽어집니다. 여자의 세월을 대신 늙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린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쓸모없어지거나 지워질 뿐입니다.
1.
돌아오지 못할 곳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영종도의 하늘에 없었던 노선이 하나 사라질 듯 그어집니다. 나는 잠시 눈을 들어 노선의 끝에 있을, 이곳보다 먼 곳의 소년을 생각합니다. 남들이 그러하듯 떠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이었습니다. 영종도는 그런 곳이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돌아가면 환하고 깊은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