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테일러 (Robert Taylor,1911~1969)
'헐리우드'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활동하던 남자배우들은 정말로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던 배우가 대부분
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남자의 체취가 물씬 풍기면서도 필요할 땐 부드럽게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선이 굵은 미남배우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바로 1940~1950년대 영화팬들을 사로 잡았던 '로버트 테일러' 다.
'그저 여자 관객들을 끌어모을 만한 잘생긴 남자배우감' 으로 발탁되어
배우(俳優) 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한 그는, 그 수려한 용모 덕에 평단(評團)의
혹평을 묵묵히 감내(堪耐)해야 했다. 빼어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촬영장에서
성심성의를 다하며, 동료와 스탭들의 호감을 사는 성실남이었다.
1936년 당대의 대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공연한 『춘희(Camille)』에 이르러
마침내 '로버트 테일러'도 연기를 할 줄 안다'는 익살스런 호평을 얻었고, 진정한
연기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귀족적 풍모의 당당한 미남(美男), '로버트 테일러'의 출세작은 단연 '애수'
(Waterloo Bridge, 1941)다. '비비안 리'와 공연한 이 영화 한 편으로 그는
단박에 전세계 여성팬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워털루 브릿지' 위에서 중년의 장교가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이십여 년 전 과거로 돌아가
1차대전 당시. 공습(空襲)을 피하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젊은이의 운명은,
전쟁의 와중에 얽히고 꼬여, 결국 비탄(悲嘆)에 빠진 여자는 사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트럭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사랑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가슴 아프게 끝나버린 비련(悲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전 세계
영화팬들로 하여금 눈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시게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으로 '로버트 테일러'는 '풋내기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
버리면서 당대의 배우로 올라섰고, 동시에 손에 닿을 수 없는 헛된 연모
(戀慕)의 대상(對象)으로 전 세계 여성의 가슴 속에 깊숙히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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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미국 네브라스카 州 출신인 그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담당교수를 무척이나 따랐던 모양이다. 그가 LA의 '포모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테일러'도 그를 따라 학교를 바꿀 정도였다. 그 결정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연극활동 중 그는, MGM 영화사의 스카우터에게 픽업이 된다. 빼어난
용모덕을 본 것이지만, 이후 그의 용모는 배우경력에 실상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가 다양한 배역을 시도하는데 오히려 장해가
되었고, 연기력을 인정받는데도 걸림돌이 된 것이다.
"헐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미남자"인 그의 주변에 여자가 들끓지 않았을리
없지만, 그렇다고 고질적인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1939년 당대의 여배우였고 네 살 연상인 '바바라 스탠윅'(두번째 결혼)과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유독 많은 작품을 공연한 '에바 가드너'
(이 여자의 남성편력은 대단히 유명하다)를 비롯한 다수의 여배우들과
심심찮게 염문을 뿌리며 '바바라'의 속을 끓인 끝에 결국 1951년 이혼했다.
▲ 부인 '바바라 스탠윅'과 함께
▲ 여배우 '라나 터너'와 함께
▲ 여배우 '에바 가드너'와 함께
▲ 여배우 '데보라 카'와 함께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쓴 로마 장수(將帥)의 고전적(古典的) 카리스마가
썩 잘 어울린 '로버트 테일러'에게 적역(適役)이었다고 할만한 이 영화에서
사실 남자 관객들은 도도한 고전미(古典美)를 자랑하는 '데보라 카'에게도
넋이 나갔다. 특히, 보라색 드레스 차림으로 처형되기 위해 '콜롯세움'
한 가운데로 끌려나올 때의 그 아플만치 아름답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다.
'월터 스콧'의 고전을 영화화한 '아이반호(1952)'에서는 '세기의 미녀'
'리즈 테일러'와 공연, 한 영화에 두 명의 테일러가 이름을 올렸다.
아마 우리나라 개봉명은 '흑기사'였을 것이다. 중고등학생 단체관람을
많이 한 영화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50년대 후반부터 그의 캐리어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제작사를
세워 제작을 겸하기도 하던 그는, 말년까지 계속 활동하다가 1969년 폐암으로
죽었다. 향년 58세. 그의 장례식에서는 절친한 친구였으며,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고인(故人)을 기리는 조사(弔辭)를 읽었다.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별을 남겨둔 채로 그는 정말로 밤하늘의 한 점
별이 되었다.
사실, '로버트 테일러'는 '불운한 배우'였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가
오히려 배우(俳優)로서의 성장을 방해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상복(賞福)도
없었고, 어마어마한 '필모그래피'를 남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올드 영화팬들의 가슴 속에 그는 영원히 '세기의 미남'으로 남아, 전설(傳說)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