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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생사의 갈림길
선비는 단지흥을 자신의 몸으로 덮고 이를 악물었다. 일순 뱃속에서 그 어떤 강한 기운이 차 올랐다.
'나는 밟혀 죽어도 황제는 살려야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다짐하며 큰소리로 연신 단지흥을 불렀다.
"폐하! 폐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정적이 고요히 깃들였다. 벌써 죽은 것일까.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치떠 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지 않은가.
바로 코앞까지 덮쳐 들었던 코끼리 발바닥은 보이지 않고 거물 같은 코끼리들이 모두 두 사람 주위로 바싹 몰려들어 제가를 길다란 코를 킁킁거리며 그들의 몸에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선비는 적이 의아하여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얼떨떨하니 코끼리들을 올려다보았다.
동주 처녀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코끼리 두 마리가 길다란 코를 들이대더니 선비와 단지흥을 휘감아 천천히 코끼리 잔등 위로 올려 놓았다. 동주 처녀는 선비를 보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대리국 승상이 맞지요?"
선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처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승상이란 벼슬은 황제 아래에 있는 벼슬인가요?"
선비는 갈수록 의아했으나 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처녀는 선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나는 당신이 왜 이 단황을 대신해 죽으려 했는지 그게 알고 싶어요. 단황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이런 사람을 대신해 죽는다는 것은 실로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죽음이란 말이에요."
선비는 길게 장탄식을 했다.
"세세대대 대리국 황제 중에서 단황이 제일 덕행이 있는 황제입니다. 하기에 저는 대신 목숨을 잃는다 해도 되레 영광이오!"
처녀는 한참이나 선비를 훑어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당신 말씀을 들어 보니 단황은 신하들에게는 아주 어진 것 같은데 왜 유독 우리 할머니에게는 그토록 모질게 굴었을까요? 우리 할머니의 재간이나 용모는 당신도 아시겠지만, 세상 어디에 가서 그런 분을 찾을 수 있겠어요?"
선비는 잠시 주춤하더니 대답했다.
"저도 황비님 일에 대해서는 얼마간 알고 있습니다만, 그, 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답니다……."
"입다물지 못할까! 누가 자네더러 그런 말을 하라던가?"
단지흥은 내내 두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겨 있더니 선비가 조심스럽게 허두를 떼자마자 발끈 화를 냈다. 선비는 더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단지흥이 영고의 일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라도 누설되는 것을 한사코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동주 처녀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선비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처녀의 눈길에 선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상님께서 말하지 않으시면 승상님은 물론이요, 승상님이 그토록 받들어 마지않는 저 폐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선비는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니 저도 어쩌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그건 당신 뜻에 달린 겁니다."
그리고는 선비는 묵묵히 처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 있었으나 서로 거리가 가까워 선비는 처녀의 몸에서 풍겨 오는 향기마저 맡을 수 있었다. 처녀는 선비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참말로 괴이한 일이야. 승상도 말을 하려 하지 않으니……."
코끼리 잔등 위에서 내려다보니 코끼리 진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그야말로 일목요연하니 한눈에 다 들어왔다. 농부와 나무꾼은 한창 대환희 보살의 무리들과 어렵사리 대항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 어부는 낚싯줄을 휙휙 돌리면서 몇몇 사내들과 싸우고 있었다. 선비가 보니 밖에서의 싸움은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자기가 돕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는 차녀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가 단지흥에게 무슨 말을 꺼내는가만 기다렸다.
이윽고 처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단황 나으리께서 훌륭한 황제인 것을 익히 알고 존경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 방금 전에도 살려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제가 우리 할머니를 위해 복수하려던 마음을 버렸다는 건 아니에요. 폐하께서 그 일의 내막을 알려 주시기만 하면 저는 꼭 폐하를 돕겠어요."
그러나 단지흥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영고의 아들 애를 죽였어. 변명할 나위 없이 난 살인자야. 그때 난 심사가 너무나도 비뚤어졌었어. 그렇게 애원해도 못 본 척 했으니……. 영고를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하고서 이제 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단지흥이 역시 대답이 없자 처녀는 한껏 목소리를 죽여 다시 물었다.
"제가 폐하께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대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단지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단 같은 머리를 내려 드리우고 코끼리 잔등 위에 살포시 앉은 얌전하게만 보이는 처녀가 저렇듯 사납게 사람 목숨을 빼앗겠다고 하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들이 영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박속같이 새하얀 이가 곱게 드러났다.
"폐하, 폐하께서는 왜 말끝마다 영고의 아들, 영고의 아들 하십니까? 영고의 아들이라면 바로 폐하의 아들이 아니온지?"
그러자 단지흥은 더 더욱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코끼리 진 밖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처녀의 질문을 듣고 일시 싸움을 멈췄다. 그들은 과연 이쪽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자못 궁금해 전심전력으로 싸우면서도 귀는 내내 이 쪽으로만 열려 있던 터였다. 모두들 단지흥이 뭐라고 대답할지 자못 궁금했다. 대환희 보살마저도 영고란 여자가 대관절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단지흥을 이토록 얼빠진 바보로 만들어 놓았는가 몹시 알고 싶었다.
단지흥은 대답이 궁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하나 그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만일 영고의 아들애가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자기와 영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영고의 아들 애를 자기 아들이라고 승인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단지흥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폐하, 만일 영고의 아들이 바로 폐하의 아들이라면 단황 나으리는 영고를 미워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고의 아들이 자기의 아들인데도 단황 나으리는 영고를 그토록 구박했으니 참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고 뭡니까? 더욱이 그 애를 단황 나으리가 죽이셨다면서요……."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단지 흥에게로 쏠렸다. 다들 그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망설이기만 하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또다시 숙녀동에서 영고와 함께 보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도 오늘처럼 달이 휘영청 높이 솟았었다. 그는 그날 밤 영고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팠다. 자기와 영고 사이에는 실로 정이 없었던가? 자기는 참말로 영고한테 미안해하고 있는가? 아니 미안해해야만 하는가? 영고는 진정 자기한테 미안해해야 할 짓을 저질렀는가?
단지흥은 자기가 대답을 못하면 영고의 이름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자기의 체모도 깎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용단을 내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고의 아들이면 바로 내 아들인 게야."
그러자 사람들은 삽시에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코끼리 잔등 위에 앉아 있는 처녀들은 단지흥의 입에서 필시 다른 말이 튀어 나오려니 하면서 숨을 죽였으나 뻔한 대답이 나오자 더한층 영고를 동정하고 단지흥을 증오하게 되었다. 자기가 데리고 사는 황비의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마저 승인하기 싫어서 짜 내다시피 간신히 대답하니 정말 황제랍시고 더러운 심보를 부리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계집애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요. 내 오늘 소원을 풀어 드리겠어요. 우리 할머니를 위해 폐하를 죽여 버리겠단 말이에요!"
이 계집애는 원래 영고가 숙녀동에 있을 때 데려다 기른 의지가지없는 불쌍한 아이였다. 영고는 이 계집애를 진심으로 가여이 여기면서 잘 보살펴 주었었다. 계집애는 영고의 은혜를 언제나 가슴깊이 간직하면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폐하, 만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죽음으로 영고한테 속죄하는 길밖에 없는 줄 아세요."
처녀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단지흥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자기가 영고의 아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숙녀동의 처녀들이 자기를 죽인다 해도 결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다.
단지흥이 인자한 척 웃고만 있자 계집애는 더 이상 못 참고 와락 달려들어 단지흥의 볼따귀를 연거푸 세 번이나 후려쳤다. 단지흥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의 입가에서는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자 계집애는 되레 자기 쪽에서 놀라 손을 멈췄다. 단지흥이 말은 그렇게 성인군자연하며 해도 일단 대들기만 하면 힘껏 막으면서 본색을 드러내리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가 가만히 맞고만 있는 게 아닌가. 계집애는 멍청하니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황제인데 어찌하여……."
계집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흥이 왜 가만히 앉아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는 생각을 굴리다가 뺨 정도니까 그러겠거니 하며 다시 용기를 내 채찍을 휘둘렀다. 첫번의 채찍질에 단지흥은 코끼리 잔등 위에서 나가떨어졌다. 두 번째 채찍질에 선비 역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단지흥은 코끼리 진 안에, 선비는 코끼리 진 밖으로 각각 떨어졌다.
계집애는 이만큼 성깔을 부리고도 여전히 앙앙불락이었다.
단지흥은 조그만 계집애한테 수모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얘야, 때리고 싶으면 실컷 때리려무나.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 내 그냥 맞고만 있을 테니."
농부, 나무꾼, 어부는 발끈하여 일제히 소리쳤다.
"감히 폐하를 때려? 네 년을 잡아죽이고야 말 테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어부지리를 얻는다 싶어 얼른 고함을 내질렀다.
"네 놈 셋은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잠자코 여기서 구경이나 해!"
그녀가 휙 손짓을 하자 뚱뚱보 여인 몇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셋의 앞을 떡 가로막았다.
"썩 물러나지 못할까!"
농부가 호통을 치자 어부는 그 서슬에 낚싯줄을 빙빙 휘두르면서 뚱뚱보 여인들을 향해 덮쳐 들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대환희 보살이 바라보고 있는지라 감히 도망칠 염을 못 내고 죽기살기로 대항했다. 세 사내는 이 뚱뚱보 여인들을 단번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 여인들은 시위들이 짓쳐 나오면 슬쩍 물러섰다가 틈만 있으면 다시 달려드는 것이었다. 세 시위는 이 여인들에게 애를 먹으며 선뜻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단황 나으리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라마 중은 그때껏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다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대뜸 대환희 보살의 사내들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라마 중이 합세하자 형세는 급격히 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환희 보살의 수하들이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다급해져서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싸움판에 끼여들었다.
동주 처녀는 단지흥을 보면서 계집애에게 말했다.
"얘야, 넌 너무 참견해서는 못 쓴다. 코끼리 진 속에 갇혀서 밟혀 죽으면 그것으로 보응하는 셈이니까."
그 말에 계집애는 몸을 비켜 몇 발자국 뒷걸음질치더니 몸을 훌쩍 날려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갔다.
단지흥은 다시 코끼리들한테 포위되어 하늘을 우러렀다. 그는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 세상에 무슨 욕망이 있겠는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려는 이 시각에도 그의 마음속은 빈집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황궁에는 누구 한 사람 미련을 둘 만한 사람이 없고 이 천하에도 누구 하나 뼈에 사무치게 그리는 사람이 없다. 천하의 황제라도 이따위 인생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인생의 고통을 맛볼 대로 다 맛보았는데 코끼리 발에 짓밟혀
죽는다 한들 그 무슨 여한도 없을 것 같았다.
코끼리들은 천천히 조여 들었다. 이제 단지흥은 복판에 납작 끼여 몸을 돌릴 틈도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하늘은 손바닥만하니 빠꼼히 드러날 뿐이었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한치의 땅도 보이지 않았다. 사위에서는 코끼리들의 거센 숨소리만 들려 왔다. 이제 남은 것이란 죽음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동주 처녀의 가슴은 까닭 모르게 심하게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현듯 단지흥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사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대리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노래 한 가락이 떠올랐다.
어화 절싸 좋구나
황제 계시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근심이 없구나
태평성세 호시절에
인심도 좋아서
농부들 밭에서
흥타령을 부르네.
단황 치하에서 대리국 백성들은 확실히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만일 단황이 죽고 그의 동생이 뒤를 잇는다면 단황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처녀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뭇처녀들 앞에서 어찌 단지흥을 쉽게 용서해 줄 수 있으랴.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내흔들고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단지흥 이 놈! 저승에 갈 차비나 하거라!"
바로 그때였다. 코끼리 진 밖에서 불현듯 염불 외우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 왔다. 그러더니 기이하게도 코끼리가 점점 바깥으로 물러났다. 처녀들이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대도 코끼리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음 순간, 코끼리 사이를 비집고 중들이 한 무리 안으로 들어와 단지흥 주위를 빙 둘러쌌다. 누런 가사를 걸친 중들은 연해 염불을 외우면서 사위를 향해 정중히 합장을 했다. 그리고는 개중 하나가 선뜻 입을 열었다.
"숙녀동의 시주님께서는 종래로 속세의 일들에 대해 참견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무슨 연고로 우리 대리국 황제를 괴롭히십니까?"
동주 처녀가 얼핏 세어 보니 중들은 모두 여덟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응대했다.
"대리국 국운은 천룡사와 많이 이어져 있다는 걸 저도 익히 알고 있어요. 그러니 대리국 황제를 다치면 천룡사 여러 스님들을 노엽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단황 나으리와 우리 숙녀동 사이의 은원은 당신네 천룡사와는 실로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동주 처녀는 짐짓 준엄하게 말했다. 나이가 제일 많고 얼굴에 불긋불긋 화색이 도는 노승이 나지막하게 개탄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고선 장로였다.
"숙녀들의 정갈한 마음 역시 불심처럼 득실하구먼. 하지만 동주 처녀께서 우리 황제 폐하를 이 코끼리 진에서 풀어 놓지 않는다면 우리 천룡사는 동주 처녀와 원한을 맺게 될 겁니다."
동주 처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대꾸했다.
"보아하니 천룡사 사람들은 아직 범심(凡心)을 채 지우지 못했군요. 그러니 고승이랄 수 없음이요, 또 매일 염불이나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고선 장로는 낮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대답했다.
"불심은 재기(在機), 재심(在心)이고 무심고심(無心固心)은 본래 부처님 뜻이라 했소."
그러나 동주 처녀는 호락호락 꺾이지 않았다.
"이 코끼리 진 속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원래 하나뿐이었는데 지금 대사님께서 여러 승려들을 끌고 와서 억울한 사람 목숨을 여덟이나 더 내던지려 하니 그게 부처님 뜻을 어기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지요?"
고선 장로 역시 수그러 들지 않았다.
"당신이 황제 폐하를 해치는 것은 바로 대리국을 해치는 것이요, 대리국을 해친다면 수천수백만 중생들이 유리걸식하게 될 것인즉, 그 죄는 경하지 않은 것이오."
동주 처녀는 고선 장로의 말에 매우 일리가 있다고 여겼으나 겉으로는 그냥 고집을 부렸다.
"단황 나으리는 일국의 황제예요. 그러니 그 처사도 깨끗하고 바르며, 밝고 도량이 넓어야 할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단황 나으리의 영고에 대한 처사는 참으로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래 이런 처사가 불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고선 장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처녀는 아직 견식이 모자라는구려. 보아하니 당신은 비록 동주 노릇은 하고 있으나 결국은 한갓 처녀에 불과하군. 처녀는 아직은 이 세상의 사내와 여자들 간의 일에 대해 다는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오. 이 노승도 비록 금년에 백하고도 십 년을 더 살았지만 아직 남녀 사이의 정에 대해서는 죄다 알 수가 없다오. 자기도 다 알지 못하는 남녀 사이의 일을 가지고 처녀는 왜 이다지도 고집을 부리는가 말이오?"
동주 처녀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노승의 말에 감복되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단지흥에 대해 억하심정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아무튼 그녀는 점점 기세를 잃어 갔다.
"노승의 말씀이 설사 죄다 옳다고 해도 우리 영고에 대한 단황의 증오심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지 않아요?"
고선 장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처녀는 이 노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구먼. 그러면 우리 천룡사의 여러 스님들에게 손을 써 보오. 처녀가 나까지 포함해 우리 천룡사의 이 여덟 스님을 죽이기만 하면 단황 나으리의 일에 대해 우리 천룡사에서는 더 상관치 않겠네."
처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덟 중 놈들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이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는 거야! 천룡사의 무예가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저 말이 그럴 뿐이지. 좋아 내 눈으로 친히 한번 봐야겠어.'
처녀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 보니 이젠 마음이 점점 모진 쪽으로만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룡사 중들과 승부를 가려 보고 싶은 마음이 발끈 동해 단호히 내뱉었다.
"천룡사 스님들께서 싸울 뜻이 있으시다면 우리 숙녀동의 여인들은 달갑게 응하겠어요. 하지만 지는 날에는 우리들에게 공정하게 대해야만 됩니다!"
"허, 공정하게 대한다뿐이겠소. 한 사람의 마음도 자네들한테 돌려주겠네."
고선 장로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처녀는 갑자기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육중한 코끼리들이 한층 더 뒤로 서서히 물러서는 것이었다. 코끼리 떼가 한쪽으로 물러서자 선비는 얼른 단지흥 곁으로 달려왔다.
고선 장로는 단지흥을 바라보면서 정중하면서도 엄하게 말했다.
"남녀지정이란 흔히 그 속에 빠질 수도 있사옵니다. 하지만 빠졌다가도 느끼고 깨달아야만 하옵니다. 폐하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계시옵니까? 나라와 백성들을 다 망친 후에야 깨달으려 하시옵니까?"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정이란 것은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옵니다. 지금 나는 대사님이 승상과 함께 돌아가시어 함께 단지방을 보필하여 등극하도록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또 그래야만 남한테 진 빚을 갚을 수 있으며 그것이 제 도리인 줄 아옵니다."
선비는 단지흥이 이미 세상만사를 귀찮게 여기고 있고 유독 영고와의 그 일만을 못 잊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단지방님께 황위를 물려준다 하더라도 이 일은 심사숙고 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이런 경황중에 한마디로 해결할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처사 하시어 나라 안에 난리가 없으리라 생각하시옵니까?"
선비의 말은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었다. 단지흥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니 사직이니 하는 것은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복수를 다짐하던 영고의 얼굴만이 자꾸 어른거릴 뿐이었다.
"난 나라일은 더는 상관하지 않겠소이다. 스님들은 자꾸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 단지방이나 잘 보필하십시오. 잘만 보필하면 단지방도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황제가 나라일을 상관하지 않겠다는데 그것도 과히 나쁜 일은 아니옵니다. 우리 천룡사에는 이전에 대리 황제 몇 분이 머리를 깎고 귀의하신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들이 쳐 놓은 코끼리 진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황제께선 정신을 단단히 차리시고 이 코끼리 진을 타계할 궁리를 하셔야 합니다. 대리 단씨의 가학인 일양지를 남들이 초개처럼 보지 말도록 말입니다!"
그때 동주 처녀가 크게 소리쳤다.
"천룡사 승려들께 미리 알려 드립니다. 이제 곧 우리 숙녀동의 상취광풍(象鷲狂風)이 터질 거예요, 조심들 하세요!"
고선 장로가 손짓을 하자 나머지 일곱 중들은 고선 장로와 함께 재빨리 여덟 방위로 갈라져 자세를 취했다. 이들이 지키는 방위는 팔괘의 방위와 완전히 합치되는데 고선 장로는 태위(兌位)에 서 있었다. 이윽고 여덟 스님은 《금강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독경 소리는 밤 하늘로 높게 올려 퍼졌다. 그 소리에 지상엔 적이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숙녀동에서는 종래로 천룡사 무예를 구경해 본 적이 없는 데, 오늘 이처럼 안계를 넓히게 해 주시니 고선 장로님께 대단히 감사드려요."
동주 처녀가 불쑥 내뱉었다. 고선 장로는 원래 입에 발린 말에는 아랑곳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코끼리들이 갑자기 대가리들을 쳐들더니 무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 땅이 진동하는 듯했다. 모든 사람들의 낯빛은 삽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한 순간, 울부짖음이 멎고 코끼리들은 여덟 사람들을 향해 터벅 터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비가 소리를 질렀다.
"코끼리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그 어떤 초수도 다 소용이 없으니까!"
하지만 고선 장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코끼리들이 다가들든 말든 목청을 길게 빼며 경문만 외우고 있었다. 그 독경 소리는 마치 바다에서 용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다른 일곱 스님들도 일제히 따라서 경문을 외우고 있었다. 여덟 스님이 합세하여 독경하는 소리는 마치 끊임없이 기복을 이루며 밀려드는 밤 바다의 파도처럼 비장했다. 그 소리에 코끼리들은 자못 불안한 기색으로 멈칫멈칫하더니 한 마리씩 차례로 제자리에서만 빙빙 맴돌 뿐 더는 앞으로 다
가들려 하지 않았다.
동주 처녀는 당황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코끼리 잔등 위에 올라탔던 처녀들은 속속 독수리들을 풀어 놓았다. 독수리는 날 짐승인지라 땅 위에서 사는 맹수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들은 공중에 높이 날아올랐다가는 슬슬 저공으로 선회해 내려오면서 고선 장로를 비롯, 단지흥 쪽 열 사람을 낚아챌 기회만 노렸다.
"승상, 얼른 내 등뒤로 숨게!"
단지흥은 급급히 외쳤다. 선비는 자기 재간으로는 도저히 이 코끼리와 민대머리 독수리들의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어 얼른 단지흥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짐승은 짐승일 뿐,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더냐?"
고선 장로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윽고 독수리 한 마리가 고선 장로를 겨냥하고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고선 장로는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독수리의 그 억센 발톱을 툭 퉁겨 냈다. 독수리는 비명 같은 울음을 한 번 토해 놓더니 놀란 듯 공중으로 홱 날아올랐다. 다른 독수리도 단지흥에게 덮쳐 들었으나 손가락을 한 번 퉁기니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다.
선비는 단지흥의 등뒤에 서서 여덟 스님들의 초수를 눈여겨보았다. 지금 이들은 대리 일양지의 최고 초수인 육맥신검을 쓰고 있었다. 이 육맥신검은 원래는 보정제와 서역의 중인 구마습이 무예를 겨룰 때 그 위풍을 나타냈던바, 단지흥에 이르러 더욱 세련되어진 초수였다. 단지흥과 여덟 스님이 매섭게 지풍을 날리니 독수리들은 조금도 범접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연거푸 내지르는 지풍은 마치 공중에 그물을 쳐 놓은 듯하여 독수리들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그들의 살점
하나 할퀴지 못했다.
"처녀, 이제는 그만둘 때가 안 됐나? 이만하면 중생들도 다행히 무사한 셈이고 우리도 덕을 쌓은 셈이야."
고선 장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자 동주 처녀가 깔깔 웃어댔다.
"호호호, 대리 단씨의 이 일양지는 참말 볼 만하군요. 육맥신검 역시 세상에 둘도 없는 신법이구요. 좀더 구경을 하십시다."
동주 처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와 코끼리 잔등에 앉은 처녀들은 일제히 코끼리를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삽시에 복판에 있는 넓다란 공지는 점점 좁혀지고, 코끼리들은 시시각각으로 단지 흥과 스님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자 하늘에는 민대머리 독수리들이 새까맣게 날아와 빙빙 선회했다. 천룡사 스님들과 단지흥은 복판에 완전히 포위됐다.
'폐하, 폐하는 내게 꼭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다들 일심양용(一心兩用)이라고들 말하지만 난 안 믿어요. 단황께서 내 독수리 떼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코끼리 떼의 공격은 막아내기 힘들걸요. 설사 내 코끼리 떼를 막아냈다 하더라도 우리 숙녀동의 숙녀들이 아직 손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동주 처녀는 적이 의기양양했다.
단지흥은 사뭇 정중히 말을 받았다.
"이 천룡시 스님들을 너무 핍박하지 말게! 기어코 트집을 잡아 싸움을 벌이면 서로간에 다 끝이 안 좋을 테니!"
"그럼 우리 영고를 왜 그토록 구박했어요? 그랬는데도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단지흥은 그 말에 그저 장탄식을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선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님께서는 손을 쓰시더라도 사정을 봐 가면서 써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 여인들은 모두 영고의 자매들입니다."
고선 장로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코끼리 떼가 다가오는 것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불현듯 고선 장로가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휙 뛰어오르더니 허공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발을 굴러 한 코끼리의 잔등 위로 사뿐 날아 내렸다. 잔등 위에 있던 세 처녀는 당황하여 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가 일며 채찍 세 개가 연거푸 장로의 몸에 떨어졌다. 세 처녀들은 설사 이 호된 채찍질에 상하지는 않는다 해도 코끼리 잔등 위에서는 쉽사리 버틸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장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코끼리 머리 위에 우뚝 올
라서 있었다. 그 코끼리는 자기 머리 위에 사람이 올라섰는지라 이내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또 아래로 처박기도 하면서 땅바닥으로 떨궈 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코끼리가 제아무리 애를 써도 고선 장로는 끄떡도 안 했다.
드디어 코끼리는 있는 대로 화가 나서 무섭게 울부짖으면서 두 앞발을 쳐들고 몸뚱이를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새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잔등 위에 앉아 있던 세 처녀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코끼리 가죽을 움켜잡고 발악을 했다. 이제 몇 번만 앞발을 쳐들고 일어서는 날이면 고선 장로가 나가떨어지기 전에 세 처녀들이 내동댕이쳐질 판이었다.
고선 장로는 세 처녀들을 보면서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낭자들! 부처님께서는 자비하십니다. 그러니 세 처녀들은 어서 내려가는 게 좋을 듯하오."
그리고는 옆의 코끼리 머리 위로 훌쩍 건너뛰었다. 그러자 그 코끼리 잔등 위에 타고 있던 처녀들은 모두 기겁을 해서 마구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고선 장로는 코끼리 머리 위에서 단번에 잔등 위에 달아맨 앉은뱅이 의자까지 날아가더니 손으로 힘껏 의자를 당기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려가게!"
세 처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러자 코끼리 진 안에는 단지흥, 선비, 일곱 스님과 더불어 이 세 처녀들도 함께 갇힌 격이 되었다.
동주 처녀는 세 처녀들의 꼴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졌다고 승복을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싸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고는 단지흥이 선뜻 나섰다.
"세 아가씨는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단지흥은 즉시 한 처녀를 두 손으로 잡아서는 공중에다 휘익 뿌렸다. 묘하게도 그 처녀는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곧바로 코끼리 잔등 위로 떨어졌다. 다시 한 처녀를 잡아서 뿌리니 그녀 역시 코끼리 잔등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세 번 손을 쓰니 세 처녀는 모두 자기가 탔던 코끼리 잔등 위로 다시 올라타게 되었다.
이때 고선 장로는 이미 진 안으로 도로 내려와 서 있었다.
"이봐요 동주 처녀, 이만하면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천룡사의 여덟 스님들과 함께 있는 이상, 이제 다시 독수리 떼를 풀어 놓아도 소용이 없을 게야."
단지흥은 고선 장로를 힐끔 보더니 천천히 운을 뗐다. 그러자 동주 처녀는 공중에서 빙빙 날아 도는 독수리들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단지흥의 말마따나 독수리들은 평소와는 달리 마구 덮쳐 들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 먹고 소리를 질렀다.
"허튼소리 말아요! 단황이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천룡사까지 도와 나서기는 했지만, 우린 숙녀동의 영고를 구박한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어요!"
그 순간, 단지흥은 부지중 영고가 남기고 간 말이 불쑥 떠올랐다. 영고는 옥팔찌를 그에게 도로 돌려주는 날이 그녀가 칼로 그의 가슴팍을 찌르는 날이 될 거라고 했었다. 단지흥은 잠시 생각에 잠져 있더니 이윽고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나와 영고 사이의 일들은 내가 요량해서 처리할 것이다. 그대들과는 정녕 상관이 없노라……."
그러자 계집애가 대번에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우리 할머니를 망쳐 놓았어요. 우리 할머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당해 내요?"
"사람들 사이의 잘잘못은 하늘이 굽어보는 법이다. 만일 나와 영고 사이에 참말로 원한 맺은 일이 있다면 조만간 우리 둘이 결판을 지을 것이다. 네가 왜 나서서 이다지도 조급해 하느냐?"
단지흥은 단호하게 내뱉더니 동주 처녀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난 일찍이 숙녀동과 등을 지고 살 생각이 없었노라. 오늘 일에도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저 독수리들은 물러가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차후에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 주겠으니……."
"지금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내일이라고 말하겠어요?"
동주 처녀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뜸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단지흥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입을 뗐다.
"그래 난 그 일을 발설할 수는 없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난 결코 알려 주지 않을 테야!"
동주 처녀는 날카롭게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단지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일순 고선 장로 쪽으로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장로님, 나는 잠시 여기서 이 처녀들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여러 스님들과 승상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가셔서 대환희 보살네 무리들에게 혼찌검을 좀 내 주십시오. 그들은 대리에서 악독한 짓을 너무나 많이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단호했다. 고선 장로와 선비는 말없이 단지흥을 쳐다보기만 했다. 단지흥 홀로 여기에 남으면 그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황제의 분부를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난 차후에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 둘이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더욱이 오늘 일은 나와 숙녀동 사이의 일인즉, 저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러니 저 사람들은 순순히 밖으로 나가게 허락해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후 나 혼자서 결판을 짓겠다! 어떤가?
의외로 단지흥이 그렇게 나오자 동주 처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거니! 여덟 중 놈이 곁에 있으니 당신이 무사했지, 이제 그들이 나가만 보아라, 당신은 죽는 길밖엔 없어!'
동주 처녀는 방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과연 대범한 분이시군요. 단황 나으리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코끼리들은 천천히 움직거렸다. 이내 코끼리 무리 사이로 한 갈래 길이 생겼다. 천룡사 중들은 지리를 뜰 생각을 않고 근심 어린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단지흥은 고선 장로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근심일랑 하지 마십시오. 대사님께서 나가시기만 하면 나 홀로라도 빠져 나가는 수가 따로 있습니다."
고선 장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안에 있던 사람이 밖을 내다볼 때 기실 나가나 들어오나 다 같은 거지요, 허허허……."
그리고는 고선 장로는 더는 두말도 않고 몸을 훌쩍 날려 코끼리 진 밖으로 떨쳐 나갔다. 그는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대환희 보살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단황께선 나더러 너희 사악한 무리들을 극락세계로 제도하라 하셨다. 알아들었느냐?"
동주 처녀와 숙녀동 처녀들은 이 고선 장로의 재간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녀들은 일단 고선 장로가 손을 쓰기만 하면 자기네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흥의 말을 듣고 의리를 지켜 코끼리 떼를 날아 넘으면서도 손가락 하나 내흔들지 않았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고선 장로의 인품에 감복해 마지않았다.
코끼리 진 안에 남아 있던 선비와 일곱 중들도 일제히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코끼리 사이로 난 비좁은 길로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 나갔다. 밖에서 뚱뚱보 여인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농부, 어부, 나무꾼 그리고 라마 중은 이들이 진 밖으로 나오자 다급히 소리를 질러댔다.
"폐하는 어디 가시고 이렇게들만 나오십니까?"
평소에는 언제나 늑장을 부리던 어부마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승상, 폐하는 어디 계시오?"
선비는 워낙 궁리가 깊은 사람인지라 이쪽의 전열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짐짓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영을 내리셨다! 이 극악무도한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깡그리 잡아죽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급급히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농부와 나무꾼, 어부도 단지흥의 신변이 안전함을 확인하자 마음이 한결 놓여 더욱 기세 사납게 공격을 들이댔다.
대환희 보살은 그만 기겁을 하여 충피를 마구 불러댔다.
"충피! 어디 갔느냐? 빨리 독벌과 독사들을 풀어 놓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충피는 다시금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쥐죽은듯 엎드려 있던 독사들은 대번에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는 어부, 농부, 나무꾼, 선비를 향해 덮쳐 들었다.
여덟 중들은 얼른 내달아 손가락을 휘둘러댔다. 독사들이 새까맣게 몰려 와도 누구 하나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독사들은 두 동강이 나 널브러졌다.
"고선 장로님, 이 독사들을 모조리 죽여 주십시오. 살려 두었다가는 이후에도 숱한 생령을 해칠 겁니다."
선비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고선 장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뱀들을 모조리 죽여라!"
여덟 중들은 일제히 손가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삽시에 공중으로 독사들이 마구 날아오르고 핏방울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선 장로와 일곱 스님이 쓰는 지법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눈여겨보니 이들의 지법은 단지흥의 지법과는 퍽 달랐다. 여덟 스님의 손가락이 어지러이 오락가락하자 마치 공중과 땅에 날카로운 검으로 만든 그물이 둘러쳐지기라도 하는 듯 독사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 장 남짓 밖에서 벌써 몸뚱이가 몇 토막
으로 동강나곤 하는 것이었다.
"충피, 저 중 놈들과 결판을 내거라!"
대환희 보살은 조급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충피도 흠칫 놀라며 독사들을 몽땅 풀어 놓았다. 하지만 독사들은 기어가는 족족 여덟 스님의 칼날 같은 지풍에 맞아 무더기로 죽어 갔다. 잠깐 사이에 독사들은 거의 다 죽거나 상했다.
대환희 보살은 악에 받쳐 또 소리를 질러댔다.
"충피, 독벌! 빨리 독벌을!"
"알았습니다!"
충피는 얼른 또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금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갈수록 점점 커지더니 하늘을 가득 메우고 독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고선 장로는 그 모습을 보고 황황히 소리를 질렀다.
"독벌이야, 조심하게나!"
고선 장로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선비, 어부, 나무꾼, 농부 앞에 막아 서서 다시금 지풍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법은 여전히 위력이 대단했으나 방금 전 독사 떼를 소탕할 때보다는 훨씬 못했다.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 내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흐르자 일곱 중들은 몹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고선 장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았다.
'어찌 이다지 흉악할 수 있는가.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려 했더니 그랬다가는 후한이 무궁하겠구나.'
고선 장로는 즉시 대환희 보살을 향해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대환희 보살, 공손히 승복하지 않으면 당장 너를 죽여 버릴 테다!"
대환희 보살은 점점 우세로 나아가고 있는지라 득의양양하게 응수했다.
"이 늙다리 중 놈아, 네가 만일 환희선을 좋아한다면 내 곱게 승복하마. 그런데 환희선을 하더라도 나와 같이 하면 어떠냐? 듣자니 넌 그런 짓거리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하더라만!"
고선 장로는 대로하여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곧추 대환희 보살한테 덮쳐 들려 했다. 그 순간 선비가 얼른 옷깃을 잡았다.
"고선 장로님, 아직은 내버려둡시다. 지금 제일 괘씸한 것은 저기 숨어 있는 저 난쟁이올시다."
고선 장로는 선비가 가리키는 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무 뒤에서 괴상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네 놈은 이미 우리 천룡사와 원수진 일이 있는 터, 내 오늘은 가만두지 않으리라!"
충피는 고선 장로의 비범한 초수와 재간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대갈일성을 내지르자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도망치려고 엉겁결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계속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냅다 뛰었다. 그러자 독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웅웅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고선 장로는 훌쩍 몸을 솟구쳐 그의 눈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삽시에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짓누르면서 호통을 쳤다.
"밥 먹듯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뉘우침도 없느냐?"
"후……후회……."
그러나 고선 장로가 힘을 한 번 주자 그는 채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두개골이 우그러 들며 두 눈에서 삽시에 피가 솟구쳤다. 충피는 그대로 땅바닥에 뻗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충피는 평소 피를 먹여서 독벌들을 길들여 왔는지라 독벌들은 충피의 몸뚱이에서 피 냄새를 맡자 대번에 그의 몸뚱어리에 달라붙어 윙윙거리며 피를 빨아먹었다. 충피의 몸뚱이에는 분봉하는 벌 떼처럼 삽시에 독벌들이 몰려들었다.
대환희 보살은 충피가 이미 죽은 송장이 된 줄도 모르고 마냥 충피를 불러댔다.
"충피! 빨리 독벌을 풀어 놓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어서 독벌을 풀어 저 놈을 죽이거라!"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충피는 대답이 없었다. 뿐더러 독벌도 보이지 않았다.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더럭 겁을 집어먹고 얼른 사위를 훑어보았다. 오로지 충피만 보이지 않을 뿐 늙은 중이나 단지흥의 네 시위나 라마 중, 천룡사의 일곱 중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래도 버티고 서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질겁을 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얘들아! 저…… 저 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여라!"
사내들과 뚱뚱보 여인들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기는 했으되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고 그저 몇 합 싸우다가는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이 사내들은 모두 미약을 먹고 이성을 잃은 놈들이니 각별히 조심들 해야 합니다!"
선비는 나직이 귀띔을 했다. 그러자 천룡사 중 서넛이 달려나가 순식간에 사내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왔다. 사내들은 무릎을 꿇려서도 계속 발악을 해댔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봐라! 난 공동파의 검객이다! 육각유성수가 뭔지 알기나 아는가?"
선비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사내들을 똑바로 노려보더니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이따위 악종들을 죽여 버리지 않으면 후일 우환거리만 남기게 됩니다. 가차없이 죽여 버리시오!"
하지만 중들은 차마 살생을 할 수 없어서 죽지 않을 만큼 사정을 두어 팔다리만 끊어 놓았다. 놈들은 팔다리가 끊겨 땅바닥에 나뒹굴면서도 마냥 악담을 늘어놓았다. 고선 장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중 놈들, 감히 내 수하 사람들한테 손을 대다니! 이 어르신이 오늘 네 놈들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대환희 보살은 두 눈을 까뒤집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 분에 못 이겨 윗통을 활활 벗어젖히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어댔다.
"단지흥 이 놈! 냉큼 나서지 못할까! 내 오늘 네 놈과 사생결단을 낼 테다. 네 놈의 대리국에는 모두 죽일 연놈들밖에 없어!
사내 놈들은 죄다 쓸개 빠진 놈팽이들뿐이고 계집들은 죄다 낯가죽이 쇠가죽보다 두꺼운 화냥년들뿐이야! 이 노옴, 내 네 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눈을 감으리이……."
코끼리 진 안에는 달랑 단지흥 혼자 서 있었다. 동주 처녀는 그윽이 그를 바라보고 있더니 넌지시 물었다.
"폐하의 용기에 참으로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저의 코끼리 떼를 당해 낼 수 있을까요?"
"난 살고 죽는 건 이미 초월했다. 그런 건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야. 영고의 아들은 내가 죽였다. 난 영고한테 크나큰 상처를 주었다. 죽어 마땅한 죄지! 하여 네가 나를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노라!"
단지흥은 비장하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푹 주저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할머니, 무슨 술수라도 피우는 게 아닐까요?"
계집애는 대뜸 소리치면서 코끼리 잔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내처 단지흥 앞으로 바투 다가가 갑자기 단지흥의 대혈을 쿡 찌르고는 연거푸 몇 군데 혈도를 거의 다 찔러 놓았다. 선중혈( 中穴)이 찔릴 때 단지흥은 일순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내비치고 낯빛마저 삽시에 변했지만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할머니, 이제는 용 빼는 수가 없을 거예요. 어서 내려오세요."
다른 계집들도 여남은 코끼리 잔등 위에서 뛰어내려 단지흥에게 바싹 다가갔다.
"달갑게 죽으려 한다는데 그 소원 기꺼이 성취시켜 주마. 지옥에 가서 고생이나 실컷 해 보아라!"
동주 처녀는 행여 다시 망설이게 될까 봐 급급히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때였다. 계집애가 갑자기 외쳐 불렀다.
"할머니!"
동주 처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언뜻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머리가 돈 것 같은데…… 참말로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요? 사람을 억울하게 죽여도 마음이 편치 못할텐데……."
"그게 그러니까……. 나도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냐! 말끝마다 영고의 아들이라고 하니 정말 이상스럽지 않느냐? 필히 영고의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란 뜻이 아니고 뭐냐? 난 지금도 바로 그 말 때문에 어쨌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동주 처녀는 사뭇 시무룩했다. 계집애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순 손뼉을 탁 쳤다.
"묘한 수가 있어요. 죽이지 말고 먼저 우리 숙녀동으로 끌고 가요! 그런 연후에 영고더러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면 되잖아요! 어때요?"
동주 처녀는 대번에 반색을 했다. 실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조그만 것이 영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좋다. 그럼 네가 끌고 가도록 해라."
계집애는 단지흥을 움켜잡은 채 몸을 날려 코끼리 잔등 위로 단 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다들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대리국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귀담아들으라! 너희들의 황제는 우리가 끌고 간다. 너희들이 황제의 목숨을 중히 여긴다면 섣불리 우리 숙녀동 사람들을 노엽게 하지 말거라!"
독수리들은 무리를 지어 빙빙 하늘을 맴돌고 코끼리 떼는 수림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