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내 주도권 싸움하다 붉은 군대에 참변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은 12개 조직을 재편성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다 힘을 합해 대일항전을 이어가고 자치주를 보장 받으려 했다 그러나 1921년 붉은 군대는 독립군단을 총공격한다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다 3천 5백여명 대부분 죽거나 다치고 생존자는 수용소로 끌려갔다'자유시 참변' 이다
탐방단은 하바롭스크 공항을 출발해 마지막 일정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이르쿠츠크는 비 내리던 하바롭스크와는 달리 맑고 선선한 날씨를 보여 긴 여정에 지친 탐방단을 들뜨게 했다.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우리나라에 여러 의미로 뜻 깊은 곳이었다.이르쿠츠크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한데다, 가장 많은 민물을 담고 있다는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수의 알흔섬에서는 한민족의 원류인 브리야트족의 발자취도 찾을 수 있었다.1910년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범윤, 김좌두, 안한주, 이규풍, 이범석, 권유상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유형을 당한 곳이 이르쿠츠크며 한국공산주의 본산의 하나인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결성된 곳이기도 하다.또 1925년 4월 조직된 조선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탐방단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체취가 스며있는 레닌 거리 23번지 옛 극장이다.이곳은 1920년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외국 혁명가들이 자주 모임을 갖던 자리이다. 벽면에는 그런 역사의 현장임을 전하는 동판이 여러 장 붙어있다.
이에 앞서 1910년대에 이범석, 이범윤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이르쿠츠크는 자유세계를 찾아 방황하던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이곳에서 고려인으로선 유일한 러시아 연방의원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이 배출되었으며, 100여명의 한국인 교민과 유학생들이 살고 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1919년 연해주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등이 중심이 돼 결성한 사회주의 단체이다. 정식명칭은 '전로 고려공산당'이지만 이동휘의 고려공산당과 대비시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른다.1918년 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로 출발해, 1919년 9월 '전로 한인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20년 7월 다시 '전로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고문에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군정부장 최고려, 오하묵, 비서장 이성 등이다. 청년교육과 군사훈련에 힘썼으며 기관지 '경세종'을 발행했다.1921년 상하이에 지부를 설치, 김만겸, 여운형, 조동호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고, 고려공산청년동맹을 결성,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청년동맹의 주요간부로 일했다.고려공산당은 중국 상해에서 세워진 조선인들의 공산당으로 여운형, 이동휘 등이 창립하였다. 국제공산당은 일국일당 원칙을 내세워 고려공산당은 중국공산당에 흡수되었는데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에 소속하게 되었다. 여운형, 안영흠, 김원식, 현창건, 홍남표 등이 한인지부를 이끌었다. 이를 가리켜 조선공산당 상해지부라고도 부른다.이처럼 1919년과 1920년에 한국인이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이 2개가 만들어지면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으로 나뉜다.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서로 대립하면서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지원을 얻고자 경쟁, 반목하는 한편, 한인투장 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벌여 자유시참변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양파의 파쟁이 극심해짐에 따라 코민테른은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시킨 후 꼬르뷰로를 설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게 했다.상하이, 이르쿠츠크 양파의 무원칙한 파쟁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 자유시참변
고려공산당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나눠지면서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이는 자유시참변이라 불리는데 이는 1921년 러시아 스보보드니에서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이 참변 이면에는 일본과의 마찰을 없애기 위한 소련 혁명정부의 야합도 도사리고 있었다.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성과를 보였던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궤멸한 결과를 낳게 됐다.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이에 한국 독립군은 적군파에 가담했는데,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독립군은 이 지역을 벗어나면서 독립군을 통합해 재편성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이 대한독립군단은 서일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구천선의 간도국민회, 김성배의 대한신민회, 이범윤의 의군부와 광복단, 김국초의 혈성단, 최여록의 도독부, 김소래의 야단, 이규의 대한정의군정사, 김백일의 군비단 등 12개 독립군이 모인 조직이었다.독립군들이 자유시로 모인 이유는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대 내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루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군권장악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발생했다.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혁명정부는 일제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한국의 독립군부대들을 궤멸시키겠다는 것을 약속했다.이에 1921년 6월27일 붉은군대는 대한독립군단 낸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을 벌였는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었다.이 참변으로 자유시에 모였던 3천500여명의 대규모 부대의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부상당했고 생존자는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조선의 독립군 세력은 와해하게 됐다. 바이칼 호수 내 알흔 섬에 있는 불한바위 앞에서 기념촬영한 탐방단. 불한바위는 브리야트족에게 신성시 되는 바위다. 브리야트족은 우리민족과 유전자가 가장 비슷해 우리 민족의 조상이 이곳에서 건너온 것 아니냐는 가설이 힘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