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소도, 고구려•백제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
3. ‘소도(蘇塗)’의 기원
‘소도’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사장 천군(天君)이 있고, 백성에게 하늘님과 조상숭배, 그리고 단군임금의 통치이념인홍익인간을 포함한 정체성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곳은 신성한 장소여서 국법이 범접할 수 없었다. 죄인이 소도에 들어오면 내보내지도 않고 잡아가지도 못했다. 삼한관경 넓은 강역 여러 곳에 소도를 세우고, 경당을 두어 백성을 교육한 것이다.
고대 교육의 핵심내용에 대해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신시(배달국)로부터 나온 ‘대원일(大圓一)’, 복희의 환역(桓易), 자부선생의 ‘오행(五行)’을 비롯하여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신지비사(神誌秘詞), ‘가림토(加臨土)’등 한민족의 고대문자, ‘어아가(於阿之樂)’를 비롯한 고대음악과 제사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단군세기』의 소도에 관한 기록은 11세 도해 단군(B.C.1891), 13세 흘달 단군(BC 1782), 24세 연나 단군 (BC 1161) , 25세 솔나 단군(BC 1150) 등 네 단군의 치세에 기록되어 있다. 도해 단군 때에 전국의 열 두 곳 명산에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여 제사를 드렸고, 흘달 단군과 연나 단군 때에도 소도를 증설하고 제천(祭天)하였다. 솔나 단군 때에는 단군께서 상소도(上蘇塗)에서 옛 예절을 강론했다.
4. 高句麗 상서(庠序)와 태학(太學)의 설립
BC 30년 (동명8) “총명하고 뛰어난 자제들을 뽑아 ‘낭도(郞徒)’로 삼고(중략), 6례지학(六禮之學)을 가르쳐 가려 뽑아서 등용하는 방도로 준비하게 하셨더니, 이것이 바로 ‘상서(庠序; 周庠殷序)’의 시초였다.” (選聰俊子弟為<郞徒>,(中略) 「六禮之學」,以備選用之道.是「庠序」之始) 이는 고구리 최초 역사서인 ‘추모경’ 기록으로 경당 체계의 육례교육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경당이 태자 부루로 부터 시작되어 2,600여 년이 흐른 372년, 고구리 소수림왕은 또 한번 교육의 방식에 변화를 꾀했다. 태학의 설립이다. 경당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교육한데 비해 태학은 5품 이상의 자제를 입학대상으로 하는 국립학교를 도성에 세워 경당과 이원화를 꾀했음을 볼 수 있다. 박사와 조교를 두고 수업 년한은 9년이었다. 효경, 논어, 서경, 춘추, 역경, 주례 등 유학의 주요경전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산술·시무책을 익히며, 틈나는 대로 국어, 설문(說文), 자림(字林), 삼창(三倉), 이아(爾雅) 등을 겸해서 읽게 했다. 정원은 300명이었다.
이는 소수림왕이 그동안 중국과 계속된 전쟁 및 적대관계를 중단하고자 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대륙 문물을 수용,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국력배양으로 정책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이즈음 불교를 수용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태학의 명칭은 유위자(有爲子)선사가 대종(大倧), 즉 상고의 큰 신인의 가르침(敎)을 의역하여 한(漢)나라가 태학이라 부른 것으로 본다. 이는 동중서(董仲舒 BC 170~120?)의 건의에 의해 설립되고, 이후 위(魏)나라 태학으로 이어졌다. 국자감(國子監) 명칭 또한 경당의 학동이었던 국자랑을 취해 수(隋)나라가 국자감이라 부르고, 당(唐). 송(宋) 국자감, 원(元). 명(明). 청(淸)의 국자감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 백제, 신라의 교육기관
백제는 545년(성왕 23)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이 일본에 전파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602년(무왕 3) 승려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서(天文書)를 일본에 전하고 가르쳤다는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의 교육열 또한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 통일에 의해 백제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백제 역시 태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백제 유민의 묘지명이 중국 당나라 때 수도 서안에서 발견되었다는 보도문이 나왔다. 내용에 따르면 “묘지명의 주인공은 진법자(陳法子)이며, 증조(曾祖)인 진춘(陳春)으로 본방(本邦), 즉 백제에서 태학의 정(正)을 지냈으며 관등은 은솔(恩率)로 나온다.
정은 그 최고 책임자로 추정되며, 진법자의 증조 진춘이 태학정으로 일한 시기는 위덕왕(재위 554-598) 무렵으로 볼 수 있다"고 묘지명을 분석했다.현재 묘지명은 서안의 대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역본(曆本)과 천문서(天文書)를 전하고, 가르쳤다는 시기와 맞물려 진다.
신라의 국학(國學)이 설립 된 것은 김춘추가 648년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의 국학에서 석전(釋奠)과 경전(經典) 강론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에 건의하여 682년(신문왕 2)에 설립되었다. 고구려 보다 276년이 늦은 시점이다.
『삼국사기』에는 “국학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하고, 또한 “국학은 예부(禮部)에 속한다.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다. 교수과목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전·모시·논어·효경을 가르치며, 혹은 상서·논어·효경 등을 가르쳤다.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인을 명해서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케 하기도 하였다.
모든 학생의 관등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우둔하여 향상하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그릇됨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하게 하여, 관등이 대나마(大奈麻)나 나마(奈麻)에 이른 다음에 내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717년 (성덕왕 16년)에는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공문십철, 그리고 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신라의 국학은 고조선이 설립, 운영한 경당의 교육 계념과는 다른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가르쳐 그 양상이 크게 다름을 보인다.
신라의 국학(國學)이 설립 된 것은 김춘추(金春秋)가 648년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의 국학에서 석전(釋奠)과 경전(經典) 강론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에 건의하여 682년(신문왕 2)에 설립되었다. 고구려 보다 276년이 늦은 시점이다.
『삼국사기』에는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하고, 또한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한다. 신문왕(神文王) 2년에 설치하였다. 교수과목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博士)나 조교(助敎)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전·모시·논어·효경을 가르치며, 혹은 상서·논어·효경 등을 가르쳤다.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인을 명해서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케 하기도 하였다.
모든 학생의 관등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우둔하여 향상하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그릇됨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하게 하여, 관등이 대나마(大奈麻)나 나마(奈麻)에 이른 다음에 내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717년 (성덕왕 16년)에는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唐)나라로부터 공자와 공문십철, 그리고 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신라의 국학은 고조선이 설립, 운영한 경당의 교육 계념과는 다른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가르쳐 그 양상이 크게 다름을 보인다.
6.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고려는 992년 (성종 11)에 국자감을 설립했다. 이 명칭은 경당에서 수련했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칭한 데서 황제국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국자감 교육을 매우 중요시 했다. 1109년(예종 4)에는 교과 과정을 체계화하기 위해 국자감 안에 7재(七齋)를 설치하였다. 7재는 7개의 전문 강좌로, 주역(周易)을 공부하는 여택재(麗澤齋), 상서(尙書)를 공부하는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를 공부하는 경덕재(經德齋), 주례(周禮)를 공부하는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를 공부하는 복응재(服膺齋), 춘추(春秋)를 공부하는 양정재(養正齋), 그리고 무학(武學)을 공부하는 강예재(講藝齋)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과거제도에서 무과(武科)가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가운데 강예재가 포함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당시 여진과의 관계가 긴박했기 때문에 설치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나 1133년(인종 11) 문신들의 반대로 무학재는 폐지되고 말았다. 인종(仁宗)은 그 동안 형부에 예속되어 있던 율학(律學)을 국자감으로 옮겨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의 경사6학(京師六學)을 설치하였다.
국자감의 입학 자격은 신분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손이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술학부에는 8품 이하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 성균관의 모습
7.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은 1298년 (忠烈王 24)에 원(元)의 압박으로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忠宣王 즉위년)에 다시 성균관(成均館)으로 강등되었다. 성균관은황제 나라의 교육기관이었던벽옹(辟雍) 또는 국자감(國子監)보다 한 단계 낮은 이름이었다.1356년(恭愍王 5) 배원정책(排元政策)과 왕권 강화 일환으로 국자감으로 환원하였으나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바꿨다. 성균관은 1910년 한·일합방늑약 이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는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다.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주(周)나라 교육기관을 벽옹(辟雍), 제후국은 반궁이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개성(開城)에 있었던 성균관은 1398년(조선 태조 7) 서울[漢陽]으로 이전했다.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1601년(선조 34)부터 6년에 걸쳐 복구했다. 소도(蘇塗) 자리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과 공자(孔子) 및 중국과 조선의 역대 성현들의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가 자리를 잡았다.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가르쳤으며,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학지(太學志)에 따르면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고 했다. 열 두 명산에 자리했던 소도에는 서원(書院), 향교(鄕校)라는 이름이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