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의 승리
제 2강 구원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종교개혁과 성경의 인쇄
중세 교회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성례전은 무엇이었습니까? 가톨릭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미사성찬식, Eucharist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사야말로 가장 으뜸 되는 성사였습니다. 미사에서 주된 인물은 누구였습니까? 사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명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성찬떡 속으로 들어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권한을 가졌습니다. 사제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참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안 된다."라고 말씀하실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더 이상은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떤 일이 발생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다시 빛을 비추도록 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분명 인쇄술이 큰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요인이 있었는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사실 나는 수년간 이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못 찾으신 걸까. 참으로 두려운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까? 엘리야나 바울 같은 사람이 없었나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려야만 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손에는 어떤 사람이 들려있었나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였으며 그 말씀을 위해서라면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의회를 뒤로하고 걸어 나왔을 때, 그 의회는 이 땅의 임금들과 사제들, 추기경들과 감독들이 모인 그 어느 때보다 더 휘황찬란하고 호사스러운 회집이었습니다. 루터가 이런 의회를 등지고 걸어 나온 그때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루터는 등을 돌리고 그냥 걸어 나왔습니다.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마 역사를 아신다면 작센의 현명한 선제후 프리드리히 Friedrich der Weise의 주도 아래 루터를 납치하다시피 하여 어느 성으로 빼돌린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거기서 루터는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기성의 종교 제도권은 성경이 평민들의 언어로 인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그 첫 번째 요인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슬에 묶여있던 그 말씀을 평민들을 위하여 풀어 놓을 사람 그 둘이 동시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적 논제는 앞 장에서 살펴본 대로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 곧 가톨릭은 은혜란 '얻을 수 있는 것' 혹은 심지어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신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 매체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구원에 관한 두 개의 사상 혹은 학설이 종교개혁으로부터 발생했습니다. 한편에는 개혁주의자 장 칼뱅 Jean Calvin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소위 칼뱅주의 Calvinism라 부르는 진리에 대한 그의 견해와 가르침을 모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물론 나도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칼뱅은 우리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 글을 저술하였습니다. 침례의 의미에 대한 칼뱅의 해설은 내가 지금껏 읽었던 중에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통찰력으로 칼뱅은 침례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과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이끌며,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보증을 준다는 이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 Arminianism. 네델란드 개혁파 신학자 Harmensen의 주장라고 알려진 가르침이 있습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상계에 있어 대조적인 두 학파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칼뱅주의라기 보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상적 학파는 어떻게 다릅니까?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한 준비를 하셨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느 누구도 구원하지 않으셨고 단지 구원을 위한 길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칼뱅주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만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뱅주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론은 이른바 예정론豫定predestination인데, 곧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들만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칼뱅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특정한 사람들만 구속하기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상 뒤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속하기로 계획을 마련하셨고, 이들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한 준비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을 볼 때 칼뱅주의자들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의 구절들입니다. 굵은 강조체는 추가된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한복음 12장 32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장 9절).
칼뱅주의자들은 이러한 성경들로 인해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이 구절들은 '보편구제설' 성구 universalist texts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무엇이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예'의 특정 부류만 구원받는다는 사상과 상치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그 선택받은 부류에 속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칼뱅주의는 환멸스러운 철학입니다. 여러분, 선택받은 무리에 들지 못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한쪽의 시각입니다.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매우 분명한 이유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취한 적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더 나은 관점?
다른 편은 더욱 강력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쪽 진영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위한 준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류를 실제로 구속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구원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구속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과 관련하여 '더 나은' 관점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고린도후서 5장 21절)가 되도록 하셨다는 숭고한 사실 보다는 회개하고 고백하는 인간의 능력에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실제로 구속하셨다는 것은 처음에는 놀라운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께서 값을 치르셨다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구원관마저 구원은 전적으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깨닫게 되었나요? 이 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우리가 여기서 실제 살펴본 말은 개신교의 옷으로 변장하고 나타난 가톨릭의 목소리입니다. 그들의 신학을 교묘하게 재포장한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다면, 혹은 저것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게 될텐데. 하지만 이 정도 밖에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나의 회개일 뿐입니다. 나의 고백 나의 선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재림운동은 여기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보다시피 재림교회가 구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쪽에 더 가까웠던 이유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에 대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더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재림교회는 그 사상에 추가한 부분, 곧 사람이 여기에서 핵심 요소가 된다는 사상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여전히 사람은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백하지 않는 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죄를 자백하거나 아니면 남김 없이 모든 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 용서를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 오류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합니다.
사실 회개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여러분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종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회개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참으로 매료됩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사도행전 5장 31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로마서 2장 4절).
회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자백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 속에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즐겁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건강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그 사람과의 사이에 비밀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자백이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흔합니다. 일례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 따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속에 임했는지 아닌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미쉬나Mishnan'라는 600여 개의 규율들을 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내가 나라를 너희로부터 빼앗아 내 백성이 아니었던 이들에게 주리라"(로마서 9장25, 26절 참조)라고 말씀하시고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그 특권을 빼앗으신 이유는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600여 가지 방법을 준수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확실히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그 제도를 영속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0~33절에서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와 호의를 값없는 선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를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은혜와 호의는 우리가 받아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얻을 만큼 우리가 스스로를 선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은혜와 호의는 값없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내용 복습
1. 마르틴 루터는 성 안에 숨어 지내는 동안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그의 업적은 평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2. 종교개혁의 가장 큰 쟁점은 무엇이었습니까?
3. 칼뱅주의와 관련된 예정설에 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4. 이 장에 소개된 칼뱅주의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성경절들을 복습해 보십시오.
5.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어떤 점이 미흡했습니까?
6. 회개와 자백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여러분은 칼뱅주의자들에게 문제가 될 만한 다른 구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성구사전을 활용하여 회개나 자백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찾아 연구해 보십시오. 그 유사한 단어나 품사도 찾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연구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성경에 간단히 수록된 부록보다는 스트롱 성구사전과 같은 자료를 활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