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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은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jhy
탁계(濯溪) 전 치원(全致遠)
《이력(履歷) : 1527년(중종 22)∼1596년(선조 29)》
본관(本貫) : 완산 전씨(完山全氏)
자(字) : 사의(士毅)
호(號) : 탁계(濯溪)
문집(文集) :『탁계집(濯溪集)』 5권 2책
완산 전씨(完山全氏) 중시조 완산군(完山君) 휘(諱) 전집(全潗)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중랑장(中郞將)으로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로(功勞)로 추충정호난성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이 되어 완산백(完山伯)에 봉(封)해졌다. 그 이후 삼중대광첨의문하시중평장사(三重大匡僉議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 되었다. 완산 전씨(完山全氏)는 정선 전씨(旌善全氏)에서 분관(分貫)하여 완산(完山)을 본관(本貫)으로 근거하여 후대를 계승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에는 행정구역상 지명을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下新里)「신촌 마을」)이라 하여 초계군(草溪郡) 때는 도방리, 중방리, 두방리와 함께 초계 고을의 3방 중에 하나 이다. 초계군(草溪郡)은 다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1893년(고종 30)까지 초계군 이책면 본신으로 개명하여 상위지역을 상신리(上新里) 이라하고 하위지역을 하신리(下新里)라 하였다. 그 이후 우리나라 연호(年號)가 광무(光武 : 1897~1907년)라고 명칭하면서 모든 행정이 다시 1914년, 개편됨에 따라 「신촌(新村)」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자연마을로서「연병정」과「새마」가 있다.
이곳 출신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선생은 5세조인 전하민(全夏民)이 경주(慶州)에서 초계(草溪)로 이주하여서 현재, 500여년 동안 전통을 이어가면 계승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이 완산 전씨(完山全氏) 집성촌임을 알려 주듯이, 동네 한 가운데는‘경앙재(景仰齋)’재실이 있고 1967년 건립한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탁계(濯溪) 전 치원(全致遠) 선생은 이곳에서 전 인(全絪)의 아들로 태어났어,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선생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으로부터 수학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탁계(濯溪)선생은 초계(草溪)에서 의병들을 창의하여 외군의병장(外軍義兵將)으로서 국가 변란 속에서 주ㆍ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쳐들어오는 왜군을 수차례 공격하여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방어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특히, 초계(草溪)는 낙동강을 따라 침공한 왜군(倭軍)이 경상우도(慶尙右道)를 통해 호남으로 진출을 하고자 하는 당시, 국가 존망이 달려 있는 중요 요새지였다.
임란(壬亂)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로 있을 때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 1592년(선조 25)《학봉속집(鶴峯續集) 제3권》를 살펴보면,“현풍(玄風)과 영산(靈山)에 있는 왜적들 역시, 무찌를 수가 있다고 생각되어, 신(臣)이 고령(高靈), 합천(陜川), 초계(草溪)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 현풍(玄風)의 왜적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창녕(昌寧)과 의령(宜寧)의 군사들에게는 영산(靈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도록 이미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왜선(倭船) 39척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 정박하고 있기에 인근의 의병들이 현재 모여서 포위하여 공격하려고 전술을 의논하고 있는 중임으로 아직까지 거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경우는 전(前), 좌랑(佐郞) 김 면(金沔)이 거창(居昌) 의병들을 거느리고 본 현(懸)에 경내를 지키면서 금산(金山)과 무주(茂朱)의 왜적들을 방비(防備)하도록 하였고 가장(假將)인 전, 주부(主簿)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守門將) 제 말(諸沫) 등에게는 고령(高靈)을 나누어 지키면서 성주(星州)에 있는 왜적들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을 가수(假守)로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합천군(陜川郡)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또한, 전, 군수(郡守) 예곡(禮谷) 곽 율(郭?) 등이 모집한의병을 거느리고 고성(固城)과 진해(鎭海)의 왜적을 막고 있으며, 함안 군수(咸安郡守) 류숭인(柳崇仁), 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이 각자 함락당한 성(城)으로 돌아가서 지키고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 윤 탁(尹鐸)이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일으킨 의병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의 정암진(鼎巖津)과 신번현(信蕃縣)을 지키고 있으며, 유학 곽재우(郭再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 권 란(權鸞) 등이 불러 모은 군사와 의병과 전, 목사(牧使) 오 운(吳澐) 등이 끌어 모은 군사/의병들은 영산(靈山) 아래위의 강여울을 지키고 있으면서 영산(靈山), 창녕(昌寧), 현풍(玄風)에 낙동강 가를 왕래하는 왜적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 등이 관군(官軍) 및 전, 군수(郡守) 김대명(金大鳴) 등이 모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고성(固城)과 진해(鎭海)의 왜적을 막고 있으며, 함안 군수(咸安郡守) 류숭인(柳崇仁), 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 득열(鄭得悅),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이 각자 함락당한 성으로 돌아가서 지키고 있는데, 싸워서 지킨 공이 큽니다.
함창(咸昌), 상주(尙州),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선산(善山), 김해(金海), 창원(昌原), 진해(鎭海), 고성(固城) 이외에는 왜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달 2일에 김 면(金沔)이 전, 부사(府使) 서예원(徐禮元) 등을 거느리고 지례현(知禮縣)을 불 지르면서 공격하여 창고에서 버티고 있던 왜적들을 불태워 죽였는데, 살아남은 왜적들은 금산(金山)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김 면(金沔)은 요즈음 한창, 화구(火具)를 다시 준비하면서 금산(金山)의 의병인 소모관 성균관박사(召募官成均館博士) 여대로(呂大老), 가장(假將) 권응성(權應星) 등과 더불어 그 고을에 있는 왜적들을 협공할 계획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군은 초기의병 조직의 모습을 보여준다. 참여 인사는 대부분 초계지역의 인사들이었으며, 초기부터 가수(假守) 곽 율(郭?)의 도움을 받았다. 초기 의병운동은 향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후기에는 경상우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 면(金沔)의 휘하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부대로 일부 편입되었기 때문에 의병운동 후기에는 독자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선생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8세 때 1534년(중종 29) 부친상을 당하였다.
15세 때 1541년(중종 36) 재령군수(載寧郡守)로 재임하고 있던 조부 전영수(全永綏)를 따라 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탕(豪宕)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16세 때 1542년(중종 37) 탁계(濯溪)는“무예를 배워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할아버지에게 말씀하기를“우리 고향에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선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성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 분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을 하고자 합니다.”라고 여쭈어,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학(小學)』 책을 들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선생을 찾았는데 황강(黃江) 선생은 『소학 책』 배울 나이가 넘었다고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부터 탁계(濯溪)는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을 청허했다. 그 자질을 시험해 본 황강(黃江) 선생은 “장차 크게 대성할 인재”라 생각하여 비로소 제자로 삼았다. 황강(黃江) 선생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열심히 글공부를 하였다.
19세 때 1545년(명종 즉위년) 성산 이씨(星山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20세 때 1546년(명종 1)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29세 때 1555년(명종 10)는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 뇌룡정(雷龍亭)으로 찾아가서 남명(南冥) 선생을 뵙고 가르침을 청했다.
30세 때 1556년(명종 11)에는 퇴촌동(退村洞)에서 남명(南冥)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33세 때 1559년(명종 14) 5월에는 스승인 황강(黃江)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키워준 은혜와 가르쳐 준 은혜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례(參禮)하였고 3년간 상례로서 근면한 생활을 하였다.
35세 때 1561년(명종 16)에 황강(黃江) 선생의 「묘갈명(墓碣名)」을 남명(南冥) 선생이 찬(撰)하고 탁계(濯溪)가 글씨를 썼다. 탁계(濯溪)는 정자(亭子)를 짓고 호(號)를 탁계(濯溪)라고 하였는데 이 호(號)는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詞)의 구절 중에서 ‘창랑(滄浪)에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어야 한다.’라는 구절에서‘씻을 탁(濯)자’를 따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가을 8월에 월와(月窩) 진 극원(陳克元)이 찾아 왔다. 이 때 백곡(柏谷) 진극경(陳克敬)이 따라와 탁계(濯溪) 선생과 함께 하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월와일고(月窩逸稿)』
37세 때 1563년(명종 18) 남명(南冥) 선생을 찾아 덕산(德山)의 산천재(山天齋)로 찾아가서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때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 구(鄭逑), 대암(大菴) 박 성(朴惺), 입재(立齋) 노 흠(盧欽), 송암(松庵) 김 면(金沔), 낙천(洛川) 배 신(裵紳),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38세 때 1564년(명종 19)에 황강(黃江) 선생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 : 경상남도 지방 문화재 136호)을 창건하였다. 현재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다. 탁계(濯溪) 선생은 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40세 때 1566년(명종 21) 봄에는 김 유(金紐)가 찾아왔다.
43세 때 1569년(선조 2)에는 김 유(金紐)가 찾아와서 시(詩)를 주었다.
44세 때 1570년(선조 3) 3월에는 장포(長浦) 이효원(李效元)이 구정(鷗亭)으로 찾아왔고, 정와(靜窩) 조수천(曺受天)이 와서 공부하였다.
47세 때 1573년(선조 6)에는 뇌석(磊石)안 극가(安克家)가 찾아와서 경의(敬義)를 공부하였다. 황강(黃江) 선생의 대곡(大谷) 성 운(成運)이 지은 「남명선생묘갈명」의 글씨를 썼다. 퇴계(退溪) 선생의 신주를 탁계(濯溪)가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48세 때 1574년(선조 7)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가 찾아와서 『중용』을 읽자,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은 성명(誠明)의 이치를 강론하였다.『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는 탁계(濯溪)의 스승인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외손자로 임란 때 같이 초계지방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52세 때 1578년(선조 11) 봄에는 춘강정(春江亭)을 완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벗 삼아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 정자(亭子)는 후일 와유헌(臥遊軒)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합천군 쌍책면(雙冊面) 건태리(巾台里)에 있다.
55세 때 1581년(선조 14) 추곡 강 몽린 상경(上卿 : 정일품과 종일품의 판서)이 계효당명(繼孝堂銘)을 지었다.
59세 때 1585년(선조 18) 가을에는 모헌(暮軒) 하 혼(河渾)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詩)를 지어 주었다.
60세 대 1586년(선조 19) 봄에는 고양(高陽)의 벽송정(碧松亭)에 있었다. 가을에 입재(立齋) 노 흠(盧欽) 등과 입재(立齋) 고향 근처에 있는 합천, 용주면 황계폭포(黃鷄瀑布)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같은 동리에 노파(蘆坡) 이 흘(李屹)이 따라와 시(詩)를 남겼다.
이곳 황계폭포(黃鷄瀑布)는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데 남명(南冥) 선생이 생전에 찾았던 자연정(紫煙亭)이 있는 곳으로 구장산(龜藏山)과 허굴산(虛屈山) 사이 깊은 막소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험준한 계곡을 감아 돌아 20미터의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천혜절경의 명소이다.
61세 때 1587년(선조 20)에는 진주(晋州) 도동(道洞)으로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였다.
62세 때 1588년(선조 21)에는 뇌석(磊石) 안극가(安克家)를 방문하였다.
63세 때 1589년(선조 22) 봄에는 금병팔첩(錦屛八疊)을 써서 장자(長子) 전 우(全雨)에게 주었다. 8월에 주부자(朱夫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초서(草書)로 쓰고 집에 보관하였다.
64세 때 1590년(선조 23)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자, 도내의 제현들과 더불어 수우당(守愚堂)의 신원상소(伸寃上疏)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 로(李魯), 박제인(朴薺仁), 이 정(李瀞), 오 장(吳長), 문 위(文緯), 하 혼(河渾) 등이 모여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
66세 때 1592년(선조 25) 여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구가 밀어 닥치자 열군(列郡)이 와해되었을 때 구국의 일념으로 고향 사람인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탁계(濯溪)는 맏아들 전 우(全雨) 조카 전 제(全霽)를 불러 이르기를“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다.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니 각자 고을 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하였다. 설학(雪壑)과 거병할 것을 약속하고 군내에 의병모집 통문을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초계의병(草溪義兵)은 탁계(濯溪) 등의 피나는 노력으로 수천 명이 모여 들었다. 모집된 의병은 외군(外軍)과 내군(內軍)으로 편성되어 내군(內軍)은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가 외군(外軍)은 탁계(濯溪)가 통솔하였다. 이때 탁계(濯溪)는 진영을 구축하고 몸소 훈련을 시키면서 많은 의병들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고 관곡은 취하지 않았다 한다.
이렇게 조직된 초계 의병은 황강(黃江) 변에서 6월 3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여 6월 11일 낙동강 사막진에서 왜선과 왜적을 대파하였고 6월 17일에는 낙동강을 도하하는 왜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수차례의 소규모 유격전과 대규모 전투에서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승전으로 말미암아 왜군의 낙동강 도하를 차단하여 초계지방과 우도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탁계(濯溪)의 전공은 실로 대단하였다.『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
67세 때 1593년(선조 26) 정월 아림(娥林 : 지금의 거창군)에 가서 김 면(金沔), 진지에서 모였다. 가을에는 박진사(朴進士),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이 찾아왔고,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탄(憤歎)하는 시를 지었다.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전치원(全致遠)은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토적(討賊)할 것을 약속하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합세하여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에 있는 왜적을 치게 하였다. 이때 세 고을의 왜적이 다 물러갔고 김 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 및 초계(草溪)의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등이 강가에 있는 여러 왜적을 쳐서 내쫓았으므로 무계진(茂溪津) 아래에서부터 정암진(鼎巖津 : 솥 바위 나루)에 이르기까지는 왜적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였고 우리 아군은 비로소 낙동강 좌우(左右)를 오고 갔다.「학봉집(鶴峯集) 부록 제1권 연보」「학봉집(鶴峯集) 부록 제2권」
임란 때 세운 공으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서예로써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69세 때 1595년(선조 28)『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지었다.
70세1596년(선조 29)12월13일에 70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에 의해 연곡사(淵谷祠 : 경남 합천군 쌍책면 건태리)에 봉안 하였다.
1702년(숙종 28) 청계서원(淸溪書院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시 유공(有功)으로 충절탁리증직사(忠節卓異贈職事)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가
되었다
□ 참고자료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이 노(李魯),『용사일기(龍蛇日記)』.『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초계읍지(草溪邑誌)』.『대동야승(大東野乘)』.『한국사대사전(韓國史大辭典)』.『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대한국사(大韓國史)』5권(卷).『민족문화대백과사전(民族文化大百科辭典)』 22. 김덕진(金德珍),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과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의 의병활동(義兵活動)」, 『남명연구소(南冥學硏究)』 2,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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