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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
가체(加髢)와 족두리(簇頭里)
번역문
누추하도다, 체(髢 다리)가 고례(古禮)가 아님이여.……변발(辮髮)은 중화(中華)의 제도가 아니건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천여 년이나 준용(遵用)하고 능히 제거한 이가 없었으니, 이는 인습(因襲)을 편안히 여겨서 그러한 것이다. 지난번 선왕조(先王朝) 정축년(1757, 영조33)에 나라 안에서 체(髢)를 사용하지 말도록 금지하여 창기(娼妓)와 사비(私婢)를 제외하고 모두 족두리를 사용하게 하였지만 시행한 지 팔 년 만에 다시 체(髢)를 사용하게 되고야 말았다.……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의 「동환봉사(東還封事)」에, “우리 국조(國朝)의 부인이 하는 머리 모양의 제도는 달자(㺚子)의 부인이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동환봉사」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언제나 개연히 부끄러워하였다. 우리 국조의 남자는 머리에 쓰는 것을 중화의 제도를 사용하는데 부인만 유독 오랑캐의 제도를 사용하니, 이는 또 어째서란 말인가. 진실로 화(華)와 이(夷)를 엄격하게 구분하면 어찌 인습을 편안히 여기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제도의 누추함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근세에는 사치가 더욱 심하여 체(髢)의 모양이 더욱 높아져서 백성의 재산이 고갈되고 풍속을 해치니, 이는 더욱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이 체(髢)를 대신하여 다른 것을 사용함을 어렵게 여기지만 계(髻)와 화관(花冠) 모두 체(髢)를 대신하는 데에 불가함이 없으니, 어찌 체(髢)를 아까워하여서 제거하지 않는단 말인가.……혹자가 묻기를, “계(髻)와 화관 중에 무엇이 더 나은가?”라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 “옛적에 부인은 관(冠)이 없었고, 화관은 또한 후세(後世)의 제도이니, 고례에 부합하는 계(髻)가 더 낫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온 세상이 이것을 행하면 괜찮지만, 세상이 모두 행하지 않는데 나만 홀로 행하면 대동(大同)의 예법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정자(程子)께서 말씀하기를, ‘일 중에서 의(義)에 해로움이 없는 것은 시속을 따르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시속을 따르고자 하여서 사치하는 풍조를 숭상하고 오랑캐의 제도를 사용한다면 과연 의(義)를 해침이 아니겠는가. 명물도수(名物度數)는 진실로 옛날과 지금에 그 마땅함이 다르다. 입자(笠子)가 출현하면서 관(冠)이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지금 만약 옛것을 좋아하여서 관(冠)을 착용한 채 도로에 다니면 진실로 깜짝 놀라서 쳐다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계(髻)로 말하자면 근세에 예(禮)를 좋아하는 집안에서 왕왕 사용하고 있으니, 서로 함께 강명하여 행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원문
陋哉! 髢之非古也.……辮髮非中華之制, 而東國人用之千餘年, 莫能去之者, 安於因襲也. 嚮在先王朝丁丑, 禁國中勿用髢, 除娼妓私婢外, 皆用簇頭里, 行之八年, 復用髢.……重峰趙先生, 「東還封事」曰: “我國婦人首制, 與㺚子婦同.” 愚讀至此, 未嘗不慨然恥之. 我國男子, 頭戴用華制, 而婦人獨用胡制, 抑又何謂也? 苟嚴於華夷之辨, 則其肯安於因襲乎? 然此以制度之陋而言之耳. 至于近世, 奢侈轉甚, 髢樣益高, 耗竭民產, 傷敗風俗, 則是其尤不可不去者也. 然議者難於代用而髻花冠, 皆無不可, 何惜乎髢而不去也?……或曰: “髻與花冠, 孰勝?” 余曰: “古者婦人無冠, 花冠亦後世之制, 不如髻之爲古也.” 或曰: “擧世行之則可, 而世皆不行, 我獨行之, 得非違於大同乎?” 余曰: “不然, 程子云, 事之無害於義者, 從俗可也. 今欲從俗而崇侈風, 用胡制, 果非害義乎? 名物度數, 固有古今異宜者矣. 笠子出而冠廢, 今若好古而着冠, 行於道路, 則誠駭視, 而至於髻, 近世好禮家往往用之, 相與講行, 有何不可乎?……”
- 박윤원(朴胤源, 1734~1799), 『근재집(近齋集)』22권 「체설(髢說)」
해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예컨대 궁궐의 비빈(妃嬪)이나 궁녀, 대갓집의 마나님이나 규수, 여염집의 부녀(婦女), 주모(酒母) 등등- 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머리 모양과 장식이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다채로웠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가체(加髢)’는 조선 시대 여성의 머리 모양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우리말로는 ‘외’, ‘’, ‘ᄃᆞᆯᄂᆡ’, ‘달내’나 ‘달이’, ‘다리’ 등으로 불렀는데, 이를 차자(借字)하여 ‘月乃’ 또는 ‘月子’로 표기하였으며, 한자로는 ‘체(髢)’, ‘가계(加髻)’, ‘체계(髢髻)’, ‘체발(髢髮)’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하였다. 이는 여자들이 머리를 꾸미면서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려고 머리에다 얹거나 겹쳐서 넣는 ‘딴머리’를 가리킨다. 어찌 보면 일종의 ‘가발(假髮)’인 셈이다.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에서 이 ‘가체’가 여성의 머리 모양에서는 이미 필수 불가결의 요소로 고착된 지 오래였다.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더욱더 크고 높은 가체를 추구하는 것이 유행하는 바람에 심지어는 가산(家産)을 기울일 정도로 고가에 거래되는 사치품으로 전락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가체는 국가적 사안으로까지 부각되었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영조(英祖)는 연석(筵席)에서 신하들과 함께 누차 토의한 다음 1756년(영조32) 1월 16일, 사족(士族) 부녀(婦女)의 가체를 금지하고 이를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행태는 여전하였기에 이듬해 12월 16일, 재차 명을 내려서 사족 부녀의 가체를 엄금하며 특히 명부(命婦)는 체계를 후계(後髻) -뒤에 찌는 쪽. 즉, 쪽머리- 와 궁양(宮樣) -족두리- 으로 대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1758년(영조34) 1월 13일에는 궁양 외에 모두 엄금하도록 다시 한번 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영조의 이러한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분란과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영조는 1763년(영조39) 11월 9일, 체계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라고 명하게 된다. 상기 인용문에서 “시행한 지 팔 년 만에 다시 체(髢)를 사용하게 되고야 말았다.”라고 한 것은 바로 가체를 금지하여 지나친 사치 풍조를 근절하고자 하였던 영조의 정책 추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단, 상기 인용문에서 근재는 1757년부터 기산하였지만, 실제로 가체 금지 명령은 1756년부터 내려졌다.-
조선조 예문가들의 눈에 비친 이러한 머리 모양은 전혀 예(禮)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퍽 야만스러워 보였다. 일찍이 중봉(重峰) 조헌(趙憲, 1544~1592)은 1574년(선조7) 5월에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동년 11월에 회환하여 「팔조소(八條疏)」를 올려서 명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아뢰었다. 그중 제3조인 ‘귀천의관지제(貴賤衣冠之制)’에서 조선의 동남(童男)과 여인의 머리 모양이 달자(㺚子)가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함을 지적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달자’란 우리나라 서북쪽 변방의 호로(胡虜)를 뜻하는데, 명나라에서는 주로 몽골족을 지칭하였다. 근재가 중봉의 상소 내용을 언급한 것은 바로 이 ‘가체’를 달자 여성의 머리 모양이라고 간주하여서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변발(辮髮)’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변발은 ‘편발(編髮)’이라고도 하는데, ‘뒤로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 모양’의 범칭이다. 우리 표현으로 쉽게 말하면 ‘땋은 머리’, 즉 이른바 ‘댕기 머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례(冠禮)와 계례(笄禮)를 치르기 전의 남녀가 바로 이 머리 모양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따지면 ‘중화의 제도’가 아니었다. 중화의 제도는 머리를 잡아 묶는 ‘속발(束髮)’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땋느냐와 잡아 묶느냐는 화(華)와 이(夷)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척도였다. 근재를 비롯한 예문가들의 생각은, 설사 몽골족이나 만주족처럼 개체(開剃)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러한 ‘땋은 머리’가 오랑캐의 풍습인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가체’라는 것도 ‘다리를 땋아서 머리에다 얹는 것[編髢加首]’이기 때문에 결국 ‘땋은 머리’에 해당한다. 하물며 두 눈으로 직접 본 중봉이 ‘달자 여성의 것과 가깝다’고 말하였음에랴. 예법에도 전혀 맞지 않은 데에다가 사치스럽기까지 하였던 가체가 예문가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만무함은 당연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영조가 가체를 엄금하며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하였을 적에 어째서 식자층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이 ‘족두리’라는 것이 출처가 불분명한 문제적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족두리’는 ‘簇頭’, ‘簇兜’, ‘足兜里’, ‘足道里’, ‘馬蹄兜’ 등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하는데 이것이 앞서 언급한 ‘궁양’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등은 고려 때 전해진 호원(胡元)의 양식 -몽골의 후비(后妃)나 고관의 정실이 착용하는 관(冠)인 고고(姑姑)를 가리킨다. 이는 몽골어로 ‘봉(鳳)’을 뜻한다고 하는데, ‘罟罟’, ‘顧姑’, ‘固姑’ 등으로도 표기한다.- 이 궁중에 그대로 남아 유전된 것이라고 하여 이를 혐의쩍게 생각하였다.
이렇게 ‘가체’도 ‘족두리’도 마뜩잖던 예문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대안을 모색하였을까. 과연 유가적 예법에 부합하는 머리 모양과 장식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저 문헌에만 의지한 채 문물과 제도를 고증하기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여성의 머리 모양과 장식에 관한 제도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변천을 거듭하기 때문에 고찰해 확정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선조 때 명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직접 봤던 중봉이 다시 살아오지 않는 이상 문헌을 통해 중화 여성들의 머리 모양과 장식을 고증하는 것은 난제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상기 인용문에 언급된 ‘계(髻)’와 ‘화관(花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설이 분분하지만, ‘계(髻)’란 본래 일종의 속발 양식이다. 병계의 설(說)에 의하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효종(孝宗)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숭정제(崇禎帝)의 궁녀 굴씨(屈氏)가 전한 계(髻)의 제도를 얻어서 그 집안에서 행하였으며, 병계 역시 우암의 종손(從孫) 집안을 통해서 그 제도를 익혀 행하였다. 이를 굴씨가 전하였다고 하여 ‘굴계(屈髻)’, 명나라 황궁의 계(髻)라고 하여 ‘당계(唐髻)’라고 칭하였다.
‘화관’이란 ‘화관(華冠)’으로도 표기하며, 18세기 조선의 기록에서는 ‘화계(華髻)’, ‘가계(假髻)’ 등으로도 지칭하였다. 한(漢)나라 때나 진(晉)나라 때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으로, 옛 제도는 아니었지만 명나라에서도 사용하였기 때문에 특히 명나라 멸망 이후 명나라의 유제(遺制)이자 중화의 제도로 간주되었다. -‘화관’은 중봉의 〈팔조소〉 제3조에도 언급되어 있다.-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관찬 사료 및 개인 문집에 보이는 화관과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 ‘화관’을 구매해 왔는데, 우암의 집안 역시 이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집안에도 있었다. 이후 1746년(영조22) 8월에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임명된 윤급(尹汲)과 1755년(영조31) 7월에 동지사은서장관(冬至謝恩書狀官)으로 임명된 이기경(李基敬)이 각각 청나라에 가서 또 구매해 왔는데,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은 이를 얻어 보고서 ‘대수계(大手髻)’와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명나라 멸망 이후 사행을 통해 들어온 이 ‘화관’은 당시 예문가들 사이에 퍼져서 그 제도를 모방해 만들어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을 통해 예(禮)를 상고하여 근재는 “옛적에 부인은 계(笄)만 있고 관(冠)은 없었다.[古者婦人有笄而無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근재는, ‘계(髻)’와 ‘화관’을 가체 대용으로 쓸 수 있되 그 우열을 논하자면 비교적 후대에 출현한 화관보다는 고례에 부합하는 계(髻)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근재는 이 화관을 쓰지 않았을까. 근재가 제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답한 편지의 내용이라든지 아들 박종여(朴宗輿)와 손자 박운수(朴雲壽)의 기록을 살펴보면, 근재의 집안도 중화의 제도에 부합한다고 간주된 이 ‘가계’를 준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재는 아마도 영조가 체계의 옛 제도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여 사실상 가체 금지 정책을 철회하게 된 뒤에 ‘가체’를 배척할 목적으로 상기 인용문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는 가체 금지 정책을 다시 한번 시행하였다. 정조는 1788년(정조12) 10월 3일, 전교(傳敎)에서 ‘사치한 데로부터 검소한 데로 들어감[由奢入儉]’과 ‘화하(華夏)를 써서 만이(蠻夷)를 바꿈[用夏變夷]’을 주창하며 이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사치하는 사회적 풍조를 일신해 개혁하고 유가 본연의 예제로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월 7일에는 비변사가 총 9개 조항으로 구성된 「가체신금절목(加髢申禁節目)」을 올렸고, 정조는 전교, 거조(擧條), 절목(節目)의 원문 및 언해(諺解)까지 부록하여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만들어 활자로 인간해 반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근재는 집안에서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던 기존 가계를 없애버리고 족두리를 사용하였다. 근재는 매산에게 답한 편지에서 “지금은 이미 ‘시왕의 제도[時王之制]’가 있으므로 홀로 다른 제도를 써서 대동(大同)의 풍속과 달리해서는 안 된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족두리’는 여전히 석연찮은 물건이었다. 앞서 거론한 학자들과 달리 정조는 ‘족두리 역시 중화의 제도 중 한 가지[簇頭里亦一中華制度]’라고 보았다. 1797년(정조21)에는 무신년의 가체 금지 정책을 두고 기존의 사치하는 폐단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게 되었다.[差可捄得一分]”라고 자평하기도 하였다.
근재의 적전(嫡傳)인 매산은 가체 대용의 족두리를 두고 ‘근거할 바가 없는 것’이라고 혹평하였지만, 변발하지 않고서 시왕의 제도인 족두리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화관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다. 그러나 근재의 스승 미호는 물론 매산의 제자인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 등은 족두리를 호원의 제도로 간주하였다. 특히 전재는, “시왕의 제도라고 해서 무조건 이를 따라 착용해서는 안 된다.[不可以時王之制而着之]”라고 주장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근재는, 위로는 미호와 아래로 매산, 전재, 중암 등과 족두리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근재의 태도를 단순히 ‘시왕의 제도를 준수하는 입장’으로 단정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아무래도 1787년(정조11) 봄에 조카 –가순궁(嘉順宮) 수빈 박씨(綏嬪朴氏) - 가 간택되어 입궁하였던 점이 역시 근재의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예(禮)를 강명함에 있어서 고(古)ㆍ금(今)과 화(華)ㆍ이(夷)를 엄격하게 분별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엇이 유가 본연의 예법인지 무엇이 중화의 제도인지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잣대였다. 이는 당시 근재뿐만 아니라 학자라면 으레 누구나 표방하던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제도를 실증할 수 없게 된 후대에 ‘유가 본연의 예법’과 ‘중화의 제도’를 두고서 개념을 정의하고 범주를 설정하는 데에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간극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하다.
글쓴이 이영준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