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에 첫 역사서 등장 인더스 문명 등 기록 감감 “역대 왕들의 순서도 몰라” 고대 역사 미스터리로
마하바라타 등 서사시 많지만 역사 기록에는 소홀 그리스인 침략자·중국 구법승들이 고대 인도사 기록
중국은 기원전 221년 이전에 첫 사서 인도가 중국에 1300년 늦어 “역사감각 약하다” 현대 인도인들 자기 비판
▲ 북인도 바이살리에 있는 아소카 왕 석주. photo 라집 쿠마르
영국 동인도회사의 캘커타 조폐국에서 일하던 제임스 프린셉(1799~1840)은 인도의 옛 동전 수집이 취미였다. 금은화 성분 분석 시험관(Assay Master)인 프린셉은 인도 북서지방에 있었던 인도·그리스계 왕국(박트리아)이 주조한 동전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주조된 가장 오래된 동전은 간다라 지방의 인도·그리스 왕국 메난드로스 1세(재위 기원전 165 혹은 155~130년) 동전이다. 치세에 맞춰 메난드로스의 얼굴을 집어넣어 제작된 이 동전은 그때까지 그리스인 통치자들이 만든 동전과는 달랐다. 메난드로스 왕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내용은 같으나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자로 표기했다. 동전의 앞면엔 그리스 문자로, 뒷면에는 고대 인도 문자의 하나인 카로슈티 문자로 표기했다. 프린셉은 메난드로스 1세 동전에 써있는 그리스 문자와 비교하며 고대 인도 문자 해석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에 앞서 19세기 많은 영국 출신 고대 인도 언어학자들이 완성하지 못한 카로슈티 문자 해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메난드로스 왕의 동전 말고도,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계 지배자들은 두 개의 문자를 사용한 동전을 다수 남겼고 이게 프린셉의 문자 해독을 도왔다. 그는 카로슈티 문자 9개와 합성어 한 개를 새롭게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카로슈티 문자 해독에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프린셉의 연구는, 이집트를 원정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마을 로제타에서 발견한 로제타석으로부터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해낸 방식과 같다. 로제타석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또 다른 두 개의 문자로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금석문의 주인공 피야다시 왕은?
1837년 프린셉은 인도 고대사 연구에 이정표가 되는 금석문을 해독해 냈다. 쓰러져 가는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의 한 폐허에 서있는 오래된 둥근 돌기둥의 글 내용을 읽어냈다. 델리와 알라하바드 등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도처에 서있는 19개의 돌기둥과, 금석문이 있는 암석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프린셉의 판독으로 이 석주들에 금석문을 새긴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석주를 세운 주인공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이었다. 금석문의 내용은 피야다시 왕이 제국의 신민을 향해 발표한 포고령이었다.
피야다시 왕의 석주는 부처가 태어난, 오늘날 네팔땅인 룸비니에서도 발견됐다. 룸비니의 석주에는 “즉위 20년이 지나 피야다시 왕은 이곳을 방문하고 경배드렸다. 여기는 사카족의 성인인 붓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피야다시 왕)는 석상과 석주를 하나 세워, 신이 여기에서 태어났기에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으며 수입의 단 8분의 1만 내면 된다”고 적고 있다.
룸비니에서 발견된 금석문은 피야다시 왕이 석가를 숭배하는 독실한 불교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야다시 왕이 누군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피야다시는 왕의 이름이 아니고 공식적 호칭이었다.
인도의 옛 불교 문헌에는 많은 전승과 신화가 나온다. 이들 문헌에서 먼 옛날에 마가다왕국을 통치했다는 아소카 왕(재위 268~232)이 특히 유명했다. 디비야바다나, 아소카바다나, 마하밤사(大史·스리랑카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아소카 왕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봐서는 비슷했으나 세부적으로는 많이 달랐다. 역사학자들은 불교 문헌에 나오는 어떤 내용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야다시 왕은 아소카 왕”
▲ 메난드로스 왕이 발행한 동전의 앞뒷면. 앞면은 그리스 문자로, 뒷면은 고대 인도 문자로 쓰였다.
프린셉에 의해 델리와 알라하바드의 석주가 해독되면서 석주 속 주인공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에 대한 보다 완전한 그림이 그려졌다. 학자들은 점차 피야다시 왕이 불교 문헌과 전승에서 그렇토록 칭송을 받고 있는 아소카 왕일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피야다시 왕이 아소카 왕이라고 완벽하게 확인된 건 프린셉이 델리의 석주문을 해독한 지 78년이 지나서였다. 1915년 광산 기사 C. 비던(Beadon)이 인도 남부 하이데라바드 공국의 작은 부락 마스키(Maski)에서 아소카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 이 돌에 새겨진 금석문 포고령에는 학자들이 그렇게 찾던 글씨 아소카란 이름이 ‘피야다시 왕’이란 글자와 나란히 나와 있었다.
프린셉의 아소카 석주 글 내용 해독은 고대 인도사 연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그간 영국학자들은 인도의 고대사가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 문헌과 서사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데 답답해 했다.
불교와 힌두교, 자인교의 문헌자료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람 이름이 나와 있으나 이들 자료는 신뢰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무엇이 사실인지 구분해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고대 인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그리스와 스리랑카, 중국 등 외국의 사료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예컨대 인도사에 최초로 연대기를 부여한 사가는 기원전 327년 오늘날 파키스탄 땅을 침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온 마케도니아 장군 네아르코스(Nearchos)이다. 네아르코스는 기원전 312년 죽기 전에 자신이 가본 인도와, 알렉산드로스군이 귀환하기 위해 인더스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 아라비아해를 건너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 항해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이 인도 측 기록에는 한 줄도 나와 있지 않다. 코끼리 군대를 몰고 나와 알렉산드로스와 맞선 서인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국의 포루스 왕의 무용담은 그리스 문헌에만 나올 뿐이다.
그리스 측 자료로 인도 역사 추측
아소카 왕의 할아버지이자 북인도의 첫 통일제국 건설자로 얘기되는 찬드라굽타 시대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당시 인도에 대해서도 그리스 측 자료로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제국의 동쪽을 차지한 셀레우쿠스 1세는 북인도의 패자인 찬드라굽타의 수도(파탈리푸트라·오늘날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에 대사를 보냈다. 메가스테네스 대사는 기원전 317년부터 312년까지 5년간 이 도시에 주재한 뒤 돌아가 ‘인디카’란 책을 썼는데 찬드라굽타 시대의 북인도 모습은 이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가 세운 아소카 석주 금석문의 해독으로 이제 연구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뒤덮고 있던 어둠을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력한 열쇠를 손에 쥐게 됐다. 불확실한 전승과 불교 문헌 자료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석가모니의 입멸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됐고, 오래된 몇몇 불교 경전의 명칭, 기원전 3세기 불교 교단과 불교의 전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소카가 새긴 금석문은 오늘날 남인도의 IT 중심도시 벵갈루루 인근에서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에서도 차례차례 발견되어 아소카 왕의 광대한 제국의 크기가 확인됐다. 인도 역사서는 금석문이란 역사적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아소카에게 고대 인도 사상 최대 강역을 확보했던 지배자란 명예를 부여했다.
아소카의 통일제국 이후 인도에는 또 다시 역사 자료의 암흑시대가 왔다. 어떤 통치자도 당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인도인들은 생산하지 않았다. 다만 구전되던 힌두교 경전과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문자로 기록됐다. 인도인은 위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지만 역사 기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10세기 이전의 인도에 대해서는 중국 여행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인도 기록 남긴 첫 중국인은 승려 법현
▲ 아소카 석주의 고대 인도 문자를 해석한 제임스 프린셉은 힌두 성지 바라나시를 그린 소묘화를 다수 남겼다. 프린셉은 현대 ‘바라나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인도를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최초의 중국인은 4세기 말 동진 때 승려 법현이다. 구법승 법현은 399~414년에 인도에서 15년간 머무른 뒤 귀국, ‘불국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또 다른 유명한 구법승 현장(602~664)은 7세기 초(629~645) 인도를 방문하고 귀국해 ‘대당서역기’란 책을 썼다.
인도인이 쓴 첫 역사서는 12세기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전역과 전 시대를 다루는 통사(通史)도 아니고, 최북단 카슈미르 지방사를 기록한 역사서였다. 카슈미르 왕국의 브라만 계급이었던 칼라나(Kalhana)가 1149~1150년에 카슈미르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썼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문자로 쓰여졌으며 카슈미르 지역의 왕조사를 고대부터 저자가 살아있던 당대까지 다뤘다.
12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책을 처음으로 낸 세계 4대 문명권 인도를,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 중국과 비교해 보자. 인도는 중국에 비해 역사 기록에 관한한 너무 늦다.
고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사마천이 ‘사기’ 집필을 끝낸 게 기원전 91년이다. 중국 최초의 사서로 불리는 ‘상서(尙書)’는 중국의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통일 전쟁을 마무리짓기 전 시대인 선진(先秦) 시대에 나온 걸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역사책은 중국보다 1300년 이상 늦은 것이다. 고대 인도는 서사시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 못지않게 탁월한 작품을 남겼으나 역사 기록에 관한 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인도에 역사책이 없다는 지적은 12세기 인도를 방문한 무슬림 학자 알비루니(973?~1048)의 책에서 나온다. 알비루니는 아프가니스탄 도시 가즈니의 술탄인 마흐무드의 북인도 약탈 전쟁에 따라왔다가, 인도를 연구한 저술 ‘인도의 역사(타아리흐 알 힌드·Ta’rikh al-Hind)’를 썼다. ‘인도학의 설립자’라고 불리는 알베루니는 ‘인도의 역사’에서 “불행하게도 힌두인들은 역사적인 일들의 순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왕들의 연대기를 말하는 데 매우 부주의하며, 정보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꼬집었다.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알비루니보다 몇백 년 뒤 인도에 온 영국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22년판 ‘캠브리지 인도 역사’는 “인도에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나 중국의 사마천과 같은 역사가가 없다”고 말했고, 인도인이 쓴 최초의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영어로 번역한 영국인 마크 오럴 스타인 경은 “인도의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흔히 얘기된다”고 번역서 서문에서 말했다.
이 같은 외국인의 지적에 대해 인도 학자들도 일부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인도의 저명한 민족 사학자였던 라메시 찬드라 마줌다르(1888~1980)는 1968년 저서 ‘고대 인도’에서 “인도 문화의 심각한 결점 중 하나는 역사를 쓰는 걸 인도인이 싫어했다는 점이다.
인도인은 상상할 수 있는 문학에 전념했으며 문학에서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1세기 최초의 역사서가 나온 뒤에는 중세 인도인의 역사 기술은 크게 달라졌는가?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바부르나마’라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탁월한 자서전을 남겼고, 그의 후계자이자 2대 황제인 후마윤도 자서전을 쓰면서 전 시대와는 다른 흐름을 보였다. 특히 바부르나마는 당대 유럽의 어떤 황제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적 문건이요,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후대의 사가로부터 평가받는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의 전기도 남아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와 무굴제국을 세운 무슬림들은 사마르칸트에서 제국을 일궜던 자신들의 조상 티무르가 자서전을 남겼듯이 그들도 새로운 땅 인도에 와서 산 기록을 붓을 들어 남겼다.
무굴제국 기록도 외국인 여행가가 남겨
▲ 아소카 석주 겉면의 고대 인도 문자.
무굴 황제들이 일부 회고록을 남겼지만 무굴제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철저했느냐는 또 다른 얘기다. 무굴제국 시대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알기 위해 증거를 찾으려면 여전히 외국인에 의지하고 있다고 얘기된다. 2007년 ‘무굴의 세계(The Mughal World)’란 책을 쓴 인도인 에이브러햄 이랠리(Abraham Eraly)는 “무굴 인도의 일상생활을 알기 위해 찾아본 자료들은 모두 외국인 여행가들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실토했다. 무굴제국에 대해서도 좋은 책들은 아직도 외국인의 손에 의해 나오고 있다. 영국 작가 윌리엄 다를림플(William Darlymple)의 ‘무굴의 마지막 황제’ ‘흰색 피부의 무굴인들’이 대표적이다.
영국령 인도 시대에 대한 연구를 인도인이 하기 싫어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당시 영국의 동양학자들이 인도에 대해 광범위하고 상세한 기록을 수없이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8월 15일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인도인의 회고록이 거의 없다는 건 인도인들에게 기록 습관이 없음을 비판받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인도 현대사 연구도 다르지 않다. 인도는 독립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없었던 매우 드문 신생독립국가였다. 영국에서 같은 날 떨어져 나온 인도의 다른 형제 파키스탄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여러 차례 권력을 잡았다. 인도 군부는 왜 파키스탄 군부와는 달랐나 하는 주제는 인도 현대사의 큰 관심거리다. 이 문제는 여전히 인도 역사학자들에게 무관심 지대에 들어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 시대 인도인의 역사 기록에 대해서도 인도인 스스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인도 크리켓의 역사’ ‘발리우드 역사’를 쓴 저명한 인도계 영국 언론인 미히르 보스(Mihir Bose)는 저명한 역사잡지 ‘히스토리 투데이’ 기고에서 “인도처럼 풍부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인도인 역사학자, 특히 큰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인도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지를 설명하려는 대학의 역사학자도 거의 없다. 저명한 인도인 중 자서전을 쓰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서사시를 만들고 구전문학을 중시했던 인도와, 역사서 쓰는 걸 중시했던 중국인의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인류의 위대한 문명권인 두 국가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왜 이토록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일까? 그런 차이가 인도인과 인도 역사에 어떤 구별되는 점을 만들어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역사 기록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후대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말을 하는 인도인은 있다.
11세기에 첫 역사서 등장 인더스 문명 등 기록 감감 “역대 왕들의 순서도 몰라” 고대 역사 미스터리로
마하바라타 등 서사시 많지만 역사 기록에는 소홀 그리스인 침략자·중국 구법승들이 고대 인도사 기록
중국은 기원전 221년 이전에 첫 사서 인도가 중국에 1300년 늦어 “역사감각 약하다” 현대 인도인들 자기 비판
▲ 북인도 바이살리에 있는 아소카 왕 석주. photo 라집 쿠마르
영국 동인도회사의 캘커타 조폐국에서 일하던 제임스 프린셉(1799~1840)은 인도의 옛 동전 수집이 취미였다. 금은화 성분 분석 시험관(Assay Master)인 프린셉은 인도 북서지방에 있었던 인도·그리스계 왕국(박트리아)이 주조한 동전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주조된 가장 오래된 동전은 간다라 지방의 인도·그리스 왕국 메난드로스 1세(재위 기원전 165 혹은 155~130년) 동전이다. 치세에 맞춰 메난드로스의 얼굴을 집어넣어 제작된 이 동전은 그때까지 그리스인 통치자들이 만든 동전과는 달랐다. 메난드로스 왕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내용은 같으나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자로 표기했다. 동전의 앞면엔 그리스 문자로, 뒷면에는 고대 인도 문자의 하나인 카로슈티 문자로 표기했다. 프린셉은 메난드로스 1세 동전에 써있는 그리스 문자와 비교하며 고대 인도 문자 해석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에 앞서 19세기 많은 영국 출신 고대 인도 언어학자들이 완성하지 못한 카로슈티 문자 해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메난드로스 왕의 동전 말고도,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계 지배자들은 두 개의 문자를 사용한 동전을 다수 남겼고 이게 프린셉의 문자 해독을 도왔다. 그는 카로슈티 문자 9개와 합성어 한 개를 새롭게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카로슈티 문자 해독에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프린셉의 연구는, 이집트를 원정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마을 로제타에서 발견한 로제타석으로부터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해낸 방식과 같다. 로제타석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또 다른 두 개의 문자로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금석문의 주인공 피야다시 왕은?
1837년 프린셉은 인도 고대사 연구에 이정표가 되는 금석문을 해독해 냈다. 쓰러져 가는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의 한 폐허에 서있는 오래된 둥근 돌기둥의 글 내용을 읽어냈다. 델리와 알라하바드 등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도처에 서있는 19개의 돌기둥과, 금석문이 있는 암석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프린셉의 판독으로 이 석주들에 금석문을 새긴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석주를 세운 주인공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이었다. 금석문의 내용은 피야다시 왕이 제국의 신민을 향해 발표한 포고령이었다.
피야다시 왕의 석주는 부처가 태어난, 오늘날 네팔땅인 룸비니에서도 발견됐다. 룸비니의 석주에는 “즉위 20년이 지나 피야다시 왕은 이곳을 방문하고 경배드렸다. 여기는 사카족의 성인인 붓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피야다시 왕)는 석상과 석주를 하나 세워, 신이 여기에서 태어났기에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으며 수입의 단 8분의 1만 내면 된다”고 적고 있다.
룸비니에서 발견된 금석문은 피야다시 왕이 석가를 숭배하는 독실한 불교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야다시 왕이 누군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피야다시는 왕의 이름이 아니고 공식적 호칭이었다.
인도의 옛 불교 문헌에는 많은 전승과 신화가 나온다. 이들 문헌에서 먼 옛날에 마가다왕국을 통치했다는 아소카 왕(재위 268~232)이 특히 유명했다. 디비야바다나, 아소카바다나, 마하밤사(大史·스리랑카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아소카 왕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봐서는 비슷했으나 세부적으로는 많이 달랐다. 역사학자들은 불교 문헌에 나오는 어떤 내용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야다시 왕은 아소카 왕”
▲ 메난드로스 왕이 발행한 동전의 앞뒷면. 앞면은 그리스 문자로, 뒷면은 고대 인도 문자로 쓰였다.
프린셉에 의해 델리와 알라하바드의 석주가 해독되면서 석주 속 주인공 ‘신들의 사랑을 받는 피야다시 왕’에 대한 보다 완전한 그림이 그려졌다. 학자들은 점차 피야다시 왕이 불교 문헌과 전승에서 그렇토록 칭송을 받고 있는 아소카 왕일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피야다시 왕이 아소카 왕이라고 완벽하게 확인된 건 프린셉이 델리의 석주문을 해독한 지 78년이 지나서였다. 1915년 광산 기사 C. 비던(Beadon)이 인도 남부 하이데라바드 공국의 작은 부락 마스키(Maski)에서 아소카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 이 돌에 새겨진 금석문 포고령에는 학자들이 그렇게 찾던 글씨 아소카란 이름이 ‘피야다시 왕’이란 글자와 나란히 나와 있었다.
프린셉의 아소카 석주 글 내용 해독은 고대 인도사 연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그간 영국학자들은 인도의 고대사가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 문헌과 서사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데 답답해 했다.
불교와 힌두교, 자인교의 문헌자료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람 이름이 나와 있으나 이들 자료는 신뢰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가 신화인지, 무엇이 사실인지 구분해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고대 인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그리스와 스리랑카, 중국 등 외국의 사료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예컨대 인도사에 최초로 연대기를 부여한 사가는 기원전 327년 오늘날 파키스탄 땅을 침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온 마케도니아 장군 네아르코스(Nearchos)이다. 네아르코스는 기원전 312년 죽기 전에 자신이 가본 인도와, 알렉산드로스군이 귀환하기 위해 인더스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 아라비아해를 건너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한 항해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이 인도 측 기록에는 한 줄도 나와 있지 않다. 코끼리 군대를 몰고 나와 알렉산드로스와 맞선 서인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국의 포루스 왕의 무용담은 그리스 문헌에만 나올 뿐이다.
그리스 측 자료로 인도 역사 추측
아소카 왕의 할아버지이자 북인도의 첫 통일제국 건설자로 얘기되는 찬드라굽타 시대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당시 인도에 대해서도 그리스 측 자료로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제국의 동쪽을 차지한 셀레우쿠스 1세는 북인도의 패자인 찬드라굽타의 수도(파탈리푸트라·오늘날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에 대사를 보냈다. 메가스테네스 대사는 기원전 317년부터 312년까지 5년간 이 도시에 주재한 뒤 돌아가 ‘인디카’란 책을 썼는데 찬드라굽타 시대의 북인도 모습은 이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가 세운 아소카 석주 금석문의 해독으로 이제 연구자들은 인도 고대사를 뒤덮고 있던 어둠을 뚫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력한 열쇠를 손에 쥐게 됐다. 불확실한 전승과 불교 문헌 자료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석가모니의 입멸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됐고, 오래된 몇몇 불교 경전의 명칭, 기원전 3세기 불교 교단과 불교의 전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소카가 새긴 금석문은 오늘날 남인도의 IT 중심도시 벵갈루루 인근에서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에서도 차례차례 발견되어 아소카 왕의 광대한 제국의 크기가 확인됐다. 인도 역사서는 금석문이란 역사적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아소카에게 고대 인도 사상 최대 강역을 확보했던 지배자란 명예를 부여했다.
아소카의 통일제국 이후 인도에는 또 다시 역사 자료의 암흑시대가 왔다. 어떤 통치자도 당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인도인들은 생산하지 않았다. 다만 구전되던 힌두교 경전과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문자로 기록됐다. 인도인은 위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냈지만 역사 기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10세기 이전의 인도에 대해서는 중국 여행자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인도 기록 남긴 첫 중국인은 승려 법현
▲ 아소카 석주의 고대 인도 문자를 해석한 제임스 프린셉은 힌두 성지 바라나시를 그린 소묘화를 다수 남겼다. 프린셉은 현대 ‘바라나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인도를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최초의 중국인은 4세기 말 동진 때 승려 법현이다. 구법승 법현은 399~414년에 인도에서 15년간 머무른 뒤 귀국, ‘불국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또 다른 유명한 구법승 현장(602~664)은 7세기 초(629~645) 인도를 방문하고 귀국해 ‘대당서역기’란 책을 썼다.
인도인이 쓴 첫 역사서는 12세기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전역과 전 시대를 다루는 통사(通史)도 아니고, 최북단 카슈미르 지방사를 기록한 역사서였다. 카슈미르 왕국의 브라만 계급이었던 칼라나(Kalhana)가 1149~1150년에 카슈미르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썼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문자로 쓰여졌으며 카슈미르 지역의 왕조사를 고대부터 저자가 살아있던 당대까지 다뤘다.
12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책을 처음으로 낸 세계 4대 문명권 인도를,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 중국과 비교해 보자. 인도는 중국에 비해 역사 기록에 관한한 너무 늦다.
고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사마천이 ‘사기’ 집필을 끝낸 게 기원전 91년이다. 중국 최초의 사서로 불리는 ‘상서(尙書)’는 중국의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통일 전쟁을 마무리짓기 전 시대인 선진(先秦) 시대에 나온 걸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역사책은 중국보다 1300년 이상 늦은 것이다. 고대 인도는 서사시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 못지않게 탁월한 작품을 남겼으나 역사 기록에 관한 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인도에 역사책이 없다는 지적은 12세기 인도를 방문한 무슬림 학자 알비루니(973?~1048)의 책에서 나온다. 알비루니는 아프가니스탄 도시 가즈니의 술탄인 마흐무드의 북인도 약탈 전쟁에 따라왔다가, 인도를 연구한 저술 ‘인도의 역사(타아리흐 알 힌드·Ta’rikh al-Hind)’를 썼다. ‘인도학의 설립자’라고 불리는 알베루니는 ‘인도의 역사’에서 “불행하게도 힌두인들은 역사적인 일들의 순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왕들의 연대기를 말하는 데 매우 부주의하며, 정보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꼬집었다.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알비루니보다 몇백 년 뒤 인도에 온 영국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22년판 ‘캠브리지 인도 역사’는 “인도에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나 중국의 사마천과 같은 역사가가 없다”고 말했고, 인도인이 쓴 최초의 역사서 ‘라자타랑기니’를 영어로 번역한 영국인 마크 오럴 스타인 경은 “인도의 힌두인들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흔히 얘기된다”고 번역서 서문에서 말했다.
이 같은 외국인의 지적에 대해 인도 학자들도 일부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인도의 저명한 민족 사학자였던 라메시 찬드라 마줌다르(1888~1980)는 1968년 저서 ‘고대 인도’에서 “인도 문화의 심각한 결점 중 하나는 역사를 쓰는 걸 인도인이 싫어했다는 점이다.
인도인은 상상할 수 있는 문학에 전념했으며 문학에서 탁월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1세기 최초의 역사서가 나온 뒤에는 중세 인도인의 역사 기술은 크게 달라졌는가?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바부르나마’라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탁월한 자서전을 남겼고, 그의 후계자이자 2대 황제인 후마윤도 자서전을 쓰면서 전 시대와는 다른 흐름을 보였다. 특히 바부르나마는 당대 유럽의 어떤 황제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적 문건이요,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후대의 사가로부터 평가받는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의 전기도 남아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와 무굴제국을 세운 무슬림들은 사마르칸트에서 제국을 일궜던 자신들의 조상 티무르가 자서전을 남겼듯이 그들도 새로운 땅 인도에 와서 산 기록을 붓을 들어 남겼다.
무굴제국 기록도 외국인 여행가가 남겨
▲ 아소카 석주 겉면의 고대 인도 문자.
무굴 황제들이 일부 회고록을 남겼지만 무굴제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철저했느냐는 또 다른 얘기다. 무굴제국 시대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알기 위해 증거를 찾으려면 여전히 외국인에 의지하고 있다고 얘기된다. 2007년 ‘무굴의 세계(The Mughal World)’란 책을 쓴 인도인 에이브러햄 이랠리(Abraham Eraly)는 “무굴 인도의 일상생활을 알기 위해 찾아본 자료들은 모두 외국인 여행가들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실토했다. 무굴제국에 대해서도 좋은 책들은 아직도 외국인의 손에 의해 나오고 있다. 영국 작가 윌리엄 다를림플(William Darlymple)의 ‘무굴의 마지막 황제’ ‘흰색 피부의 무굴인들’이 대표적이다.
영국령 인도 시대에 대한 연구를 인도인이 하기 싫어하는 건 이해할 만하다. 당시 영국의 동양학자들이 인도에 대해 광범위하고 상세한 기록을 수없이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8월 15일 인도·파키스탄의 독립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한 인도인의 회고록이 거의 없다는 건 인도인들에게 기록 습관이 없음을 비판받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인도 현대사 연구도 다르지 않다. 인도는 독립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없었던 매우 드문 신생독립국가였다. 영국에서 같은 날 떨어져 나온 인도의 다른 형제 파키스탄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여러 차례 권력을 잡았다. 인도 군부는 왜 파키스탄 군부와는 달랐나 하는 주제는 인도 현대사의 큰 관심거리다. 이 문제는 여전히 인도 역사학자들에게 무관심 지대에 들어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 시대 인도인의 역사 기록에 대해서도 인도인 스스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인도 크리켓의 역사’ ‘발리우드 역사’를 쓴 저명한 인도계 영국 언론인 미히르 보스(Mihir Bose)는 저명한 역사잡지 ‘히스토리 투데이’ 기고에서 “인도처럼 풍부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인도인 역사학자, 특히 큰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인도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지를 설명하려는 대학의 역사학자도 거의 없다. 저명한 인도인 중 자서전을 쓰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서사시를 만들고 구전문학을 중시했던 인도와, 역사서 쓰는 걸 중시했던 중국인의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인류의 위대한 문명권인 두 국가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왜 이토록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일까? 그런 차이가 인도인과 인도 역사에 어떤 구별되는 점을 만들어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역사 기록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후대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말을 하는 인도인은 있다.